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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어른
2019. 05. 백란주
심리학자 엘마 게이츠박사는 한 실험을 통해 화내며 욕을 하는 사람의 침과 웃으면서 말을 하는 사람의 침을 모아 쥐를 대상으로 실험했더니 화를 내고 욕설을 한 사람의 침을 주입받는 쥐가 훨씬 빨리 죽었다고 한다.
평온한 감정은 무색이고 화를 낼 때는 고동색이고 슬퍼할 때는 회색이고 괴로워할 때는 담홍색이며 한 시간 정도 인간이 계속 화를 낼 경우 무려 80명을 죽일 수 있는 독을 내뿜는다고 한다. 인간의 혈액은 화를 낼 때 흑갈색으로 떫은맛이 나고 슬퍼할 때 다갈색으로 쓴맛이 나고 두려워할 때 자주색으로 시큼한 맛이 나며 평소 잘 웃는 사람의 혈액은 정상이라고 했다.
불현 듯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 화를 참고 있는 사람의 침은 어땠을까, 하는 의문을 던져 보았다.
설망어검舌芒於劍 혀가 칼보다 날카롭다. 칼에 베인 상처는 치료를 통해 아물지만, 말로 인한 상처는 마음의 상처로 남을 수 있다. 아이들의 순수한 단어표현과 달리 어른들의 계산된 언어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기도 한다. 드러내지 않고 상대를 아프게 하는 ‘언어폭력’으로 인해 안개사회의 안개어른들은 스스로를 아프게 하는지 모르겠다. 폭력이란 얼굴과 마주했을 때 언어폭력은 가까운 관계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심리적 거리에서 더 아플 수밖에 없다.
오월이라지만 한여름처럼 느껴지는 금요일 오후 책마중 수업 길, 교문을 만나면 어느새 나도 교문과 인사를 나누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 “오늘 학교오기 싫어하는 아이들이 아무도 없었으면 좋겠다.” 교문이 말한다고 내게 가르쳐 준 필범이의 인사말을 나도 떠올린다. 교문과 인사를 나눈 후 형식적 오르막을 내보이는 길을 따라 몇 발자국을 걷다보면 아이들의 목소리가 바람결을 타고 온다. 저쪽 운동장 끝에서부터 위태롭게 달려오는 아이, 걸음보다도 목소리가 먼저 내게 닿기를 바라며 앞니 사이로 발음을 빼앗긴 “책마중 선생님”에 나는 두 팔 벌리고 기다린다. 와락 안길 아이를 위해 나의 품은 최대치로 벌리며 아이가 가까워질수록 아이의 키에 맞춰서 맞아주어야 한다. 그래야 아이의 가슴 속에서 피어나는 꽃을 제대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땀범벅이 된 얼굴로 달려온 영우는 이 날씨에 점퍼를 입고 있다. 옷을 벗자고 하니 조금 있다 달라며 옷을 맡긴 후 왔던 운동장을 다시 달려간다. 점퍼와 함께 앞니 없는 잇몸을 내게 던져놓고. 열심히 뛰어 논 영우는 오늘도 수업시간에 졸음예약자가 될 것이다.
영우가 왔다. 언제나 나를 처음 보는 것처럼 안긴다. 다른 아이들이 내게 먼저 안기면 속울음으로 토라져 앉다가 틈이 보이면 무조건 목부터 끌어안고 매달린다. 어떤 이가 나를 이리도 좋아할까, 나는 영우의 행동이 무조건이라서 좋다. 수업 시작 후 5분 즈음 지나면 영우는 손을 든다.
“선생님 질문할 게 있어요.”
처음에는 그 질문이 무엇일까 궁금해서 영우에게 정중하게 질문자의 예우를 했지만, 이제는 그 질문을 알기에 웃음이 먼저 마중 나간다. 아이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런데 선생님 수업 언제 마쳐요?” 책마중 선생님이 너무 좋다고 친구들 접근도 차단해 놓고서는 벌써 수업 언제 마치냐고 묻는 저 당당함에 나는 포로가 되고 만다.
애써 졸음을 참는 영우를 보며 5분이 얼마나 길었을까…. 울 듯 말 듯 한 표정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 영우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잘못인 냥 억울한 울먹임을 토한다. 아이들에게 이해를 구해본다. 아이들도 안다. 영우가 최대한 참고 있다는 것을. 영우를 안고 수업을 해도 아이들은 괜찮다고 한다.
영우가 가르쳐줬다. 힘든 것은 힘들다고 말해야 한다고. 잠이 와서 도저히 선생님이 읽어주는 책 내용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때 “수업 언제 마쳐요?” 라고 자신의 느낌을 확실하게 표현하는 것이 졸음을 이기는 방법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책 속으로 걸어 들어오는 아이들이 있는 반면 무조건 책 밖에 있고 싶은 아이들도 있다. 온유는 책 밖에서 아니 책과는 정확하게 거리를 두고자 했다.
“나는 책이 싫은데, 책은 재미없는데!”
다른 친구들이 책 내용에 관심을 가질 때마다 뾰로통한 표정으로 이해 안 된다는 느낌으로 나를 바라봤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키나 몸집이 많이 작아서 여섯 살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온유는 마음도 그러했다. 자신의 속내를 그대로 표현하는 입술에서 나오는 온유의 단어는 솔직했다. 스승의 날이 있어서 『고마워요 선생님』 책을 읽은 후 선생님께 어떤 말을 들었을 때 제일 기분이 좋은지를 아이들에게 물었다. 아이들은 한결같이 “공부 참 잘했어요, 숙제 잘했어요, 친절해요, 그림을 잘 그려요….” 등의 말을 들었을 때라고 한다. 온유가 손을 들었다. 눈빛이 무언가 생각났으며 결의에 찬 모습이었다.
“너는 힘이 정말 세구나!”
순간 느껴졌다. 온유가 그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분이 좋을지, 또래들 보다 왜소한 체격이 스스로 주눅 들었던가 보다. 나는 다른 아이들에게 칭찬할 때보다 더 큰 목소리로 온유를 칭찬했다.
“온유야, 너는 정말 힘이 세구나!”
온유는 그 말을 듣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무릎 위에 올린 두 손에는 불끈 힘을 주었다. 그리고 양쪽 어깨에 힘을 얼마나 쏟았는지 그만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간식을 먹고 힘이 더 강해진 온유, 진짜 대단하다며 우리는 박수를 보냈다. 온유가 내게 속삭인다.
“선생님 책이 참 좋아요. 다음 시간에 빨리 오세요.”
온유가 가르쳐줬다. 듣고 싶은 말, 진짜 마음은 솔직하게 표현하는 거라고. 힘이 세든 약하든 그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해 주는 것이 진짜 사랑이라는 것을 온유는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힘이 세다는 말과 책이 좋다는 말, 우리는 서로에게 듣고 싶은 말을 들었다.
윤경이가 왔다.
초등 5학년 처음 왔을 때 부끄러움이 너무 많아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대학교 3학년이 된 지금은 자신에게 일어난 작은 심리변화까지도 내게 전해준다.
작년 연말 엄마와 영원한 이별을 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중간 중간 엄마 생각이 날 때, 일주일 내내 울기만한 시간, 그래서 책이 위로가 된다는 이야기까지. 내게 『후회 없이 살고 있나요?』 책을 추천한다. 사람들이 호스피스에 대해 한번쯤은 생각하며 자신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한다. 나와 친구가 되어가고 있다. 엄마의 병으로 간호학과를 갔는데 엄마가 돌아가시자 조금은 학과에 대한 회의가 든다고 한다. 엄마 병간호로 1년 휴학을 해서 시간적 여유가 있는 윤경이는 알바 중간 중간 나를 만나러 온다. 또한 시간이 남을 때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즐거움을 알아간다고 한다. 멋진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다.
매실 장아찌를 좋아한다고 해서 무쳐 밥상에 올렸더니 왈칵 눈물을 쏟는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제일 마지막에 해 주었던 반찬이라고 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매실 장아찌를 입에 넣고 웃는다.
“맛있어요.”
윤경이가 말한다.
“울 줄 아는 법을 배웠어요. 참으면 병 생겨서 요즘에는 눈물 나면 울어요. 좋은 것은 좋다고 말해요.”
어느새 윤경이는 나와 ‘그냥’이라는 말이 통할 수 있을 만큼 자랐다. 진심이 느껴지는 그냥의 거리만큼에서는 불필요한 오해를 줄일 수 있다. 아니 서로를 이해하려고 한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그 거리가 ‘그냥’의 거리이다.
윤경이가 가르쳐줬다. 이 생의 인연은 다음 생의 인연으로 이어지는 윤회의 과정이라는 것을. ‘아마 다음 인생이 있어도 이 보다 더 좋은 인연이 없을 것 같다’는 내게 온 손편지를 읽으며 나도 그러한 인연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어머님의 거동이 불편해졌고, 그 책임을 아버님께서 지겠다고 하셨을 때 조금은 놀라웠다. 그동안 내게 보였던 두 분의 관계가 그리 살갑게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아직까지도 어머님 병간호는 아버님 몫으로 여기신다. 측은지심의 눈빛이 담겨있다.
“어머님, 복 많으신 것 아시죠? 친정아버지 같으면 친정엄마 병간호 이렇게 못 하 실 건데 아버님 정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
어머님의 대답을 듣고자 한 말이 아니었다. 그냥 아버님께 죄송하고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자한 나의 방백처럼 한 말이었다. 그런데 뜻밖으로 어머님께서 “나도 알고 있다!” 응? 우리 어머님이 아버님께 마음 곁을 그리 호락호락 허락할 분이 아닌데, 순간 아버님과 나는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아버님께서 “부잣집 딸이 나한테 시집와서 고생이 더 많았제…. 너거 어머이 친정 부잣집이었다.”
아…그렇구나…. 부부의 정이란 것은 사랑이라는 테두리를 포괄하고 있는 깊은 ‘연민, 측은지심’의 결정체구나…. 60여년 가까운 시간을 함께 한 부부는 서로에 대한 연민을 가슴에 담고 하루를 지내는 것 같았다. 처음 시집갔을 때 두 분에게 느껴졌던 무뚝뚝한 부부의 정, 서로에 대한 원망의 숨소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되었다.
한동안 어머님의 반어법을 이해 못 해 안개 속을 걷는 듯한 기분일 때가 있었다. 80이 넘은 당신은 이제 청자의 몫으로 넘겼던 심증의 반어법을 스스로 찾아갔다. 직접 드러내는 물증으로 더 이상 나를 곤란하지 않게 한다. 좋다고, 아버님에 대한 고마움을 안다고 아이들처럼 말과 눈짓이 함께 한다.
당신들이 가르쳐줬다. 안개어른의 심증으로 타자를 의지하는 것보다 때로는 아이처럼 물증으로 나를 요구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요즘 내가 살고 있는 사회는 안개가 잔뜩 낀 사회인 것 같다.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일어날 때 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고 내가 나를 지킬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밀려온다. 아이들이 들려주는 마음은 표정으로 드러난다. 맑음인지, 흐림인지 속마음의 온도까지도 얼굴에 드러난다. 기상캐스터의 설명이 없어도 순간순간 바뀌는 바람의 방향도 읽어진다. 어떤 친구와 사이가 좋고 어떤 친구와 다투었는지 말 하지 않아도 눈빛이 먼저 말해주기 때문이다.
관계맺음은 언제나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아이들처럼 자신의 감정에 대해 솔직하거나 순수하지 못해서 일 것이다. 조건이 없는 아이들은 조금 전 친구가 속상하게 했던 찬 공기를 아무렇지 않게 뚫고 지나간다. 함께 온도를 나누거나 맞추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얼굴을 보고도 속마음을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상대방의 말을 그대로 믿으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듯이 어떤 경우에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마음으로 속앓이를 해야 할 때도 있다.
희뿌옇게 흐려져 있는 가시거리 ‘매우 짧음’의 안개어른을 만났을 때, 대처능력이 부족한 어른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가끔 안개어른을 만날 때 나는 당혹스러워진다. 표리부동한 어른의 모습은 가까이 가서 실루엣을 느끼고도 어떤 마음인지 짐작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며칠 후에 선생님은 처음으로 우리에게 노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이는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책을 펴지도 않고 몹시 슬퍼 뵈는 얼굴로 말했던 거였다.
“어른들이 제일 나쁜 점은 자기잘못을 애써 감추려 하는 그것입니다. 천박한 속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겉으로만 번지르르하게 내세우는 건, 스스로 자신이 없기 때문이에요. 나는 여러분들이 이 혼란한 시기에 이런 창고에서 책상도 없이 공부할망정 마음씨와 배우려는 자세가 소박하고 고울 줄로만 여겨 왔습니다. 여러분은 못된 어른들의 본을 받아서는 절대 안 됩니다. 선생님은 선생님다워야 하며 어른은 어른다워야 하고, 어린이는 어린이다워야 합니다.”
-황석영, 『아우를 위하여』 중에서-
안개 어른일 수밖에 없는 나이인 것일까. 알면서도 모른 척,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어른의 모습은 어쩌면 순수한 아이에서 안개 어른으로 잠시 머물렀다 다시 순수한 어른이 되어가는 합성의 과정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그러나 짙은 안개이고 싶지는 않다. 가시거리 매우 짧음의 안개 어른의 속내를 타자가 알아낸 다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비상등을 켜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뚫고 지나가다 불의의 사고로 몇 중 추돌 사고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잠시 드리웠다 걷히는 마음자락 경고등으로만 머물다 가는 안개어른의 모습이고 싶다.
선한 영향력.
그럼에도 나는, 그래서 나는, 물증으로 드러나는 주변으로부터 선한 영향력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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