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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사표
- 이국종의 ‘골든아워’를 읽고 -
2019. 01. 백란주
봄이 온다는 소식이 왔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빨리 피는 매화로 알려져 있는 구조라 초등학교 ‘춘당매’가 벌써 피어 봄을 전했다. 보통 입춘 전후에 만개한다는데 추운 날이 그리 많지 않은 덕분인지 벌써 꽃망울을 터뜨렸다. 고목에 핀 꽃은 더 애잔하다. 고목이 보낸 세월의 흔적은 마치 자식을 먼저 보낸 노모의 슬픈 얼굴처럼 까칠했다. 온전하지 못했다. 남아있는 가지들이라도 지키려고 애쓰는 고목, 그래서 더 일찍 꽃을 피우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생이 종착역으로 향함을 알고 있는 듯하다.
여기저기 상처 입은 가지는 마치 깁스를 한 것처럼 버팀목으로 지탱하고 있었다. 상처가 깊은 곳은 싹둑 잘려 내동댕이쳐진 모습으로 서로에 대한 이별을 고하고 있는 듯 느껴짐은 무릇 나무라는 느낌이 아니라 한 세기를 살다가는 인간의 모습처럼 다가왔다.
춘당매를 뒤로하고 봄 바다의 부름에 와현 해수욕장으로 갔다. 공곶이와 내도가 건너편에서 손짓하는 느낌이었다. 와현 선착장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방파제 쪽으로 걸어갔다. 테트라포드(Tetrapod)는 밀려오는 물결을 적당히 제압했다. 아마도 여름 지나 가을 언저리 태풍이란 거대한 파도가 사력을 다할 때, 후퇴 없이 그 자리에서 고스란히 파도를 받아냈을 것이다.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순간 안다는 것의 두려움을 느꼈다. 방파제 끝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보며 싱크홀처럼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위험을 상상했기 때문이다. 테트라포드 사이로 추락하면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머리와 다리를 크게 다칠 수 있고 공간이 좁고 미끄럽기 때문에 자력탈출은 힘들다고 한다. 이국종의 『골든아워』를 읽고 난후의 변화는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고를 감지하는 선이 내게도 접지되는 느낌이다.
선착장을 돌아 나오자 사람들은 겨울바다를 각자의 추억 속으로 새기고 있었다. 현 시점의 가장 젊은 날을 기록하는 모습을 보며 조금 전 선착장에서 내게 잠시 머물렀던 잔상은 기우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세상은 언제나 예기치 않은 곳에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어느 봄날, 많은 아이들이 바다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안타까움에 함께 울어야했던 것처럼…….
조지오웰은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 생계 때문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글을 쓰는 동기는 크게 네 가지라고 했다.
첫째, 순진한 이기심. 사람들 절대다수는 그다지 이기적이지 않다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 서른 남짓이 되면 개인적인 야심을 버리고 주로 남을 위해 살거나 고역에 시달리며 겨우겨우 살 뿐이라 한다.
둘째, 미학적 열정. 자신이 체감한 바를 나누고자 하는 욕구는 소중하여 차마 놓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셋째, 역사적 충동.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존해 두려는 욕구라고 한다.
넷째, 정치적 목적. 여기서 ‘정치적’이라는 말은 가장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이 동기는 세상을 특정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를 말한다고 했다.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조지오웰의 글쓰기를 이국종의 『골든아워』는 보여주는 듯했다.
조지오웰은 1936년부터 자신이 쓴 심각한 작품은 어느 한 줄이든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맞서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들’이라 했다. 조지오웰의 출발점은 언제나 당파성을, 곧 불의를 감지하는 데서부터며, 글을 쓰는 동기가 오로지 공공의식의 발현이라는 인상을 심어준 듯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또한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고 했다. 자신을 돌아봤을 때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 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고 한다.
이국종의 『골든아워』를 읽으며 그의 글은 유리창처럼 그가 지향하는 방향이 무엇인지, 왜 의사인 그가 책을 써야 했는지를 투명하게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상처는 쉽게 아물 수도 때로는 덧날 수도 있다. 지금껏 나는 병원이란 곳은 진단과 처방만 있는 곳이라 여겼다. 그곳 또한 작은 정치가 존재하리라는 생각은 별개로 묶었던 것 같다. 그의 유리창 같은 소신은 골든아워1 〈탈락〉편에서 나에게 투영되었다.
2012년 정부차원의 권역별 중증외상센터 설립 사업 선정에서 아주대학교 병원은 탈락했다. 예견된 수순이었다.
정부도 사업의 본질로부터 멀었다. 중증외상센터 설립 사업은 죽지 않아도 될 환자들을 살리는 것을 근간으로 해야 했으나, 정작 환자들은 정책의 주인일 수 없었다. 이 사업은 단지 대통령의 지시사항이었으므로 행정부 입장에서는 ‘설립’ 자체만을 원하는 듯 보였다. 보건복지부는 지역안배와 학교 배분에 따른 정치적 상징성을 생각했을 것이고, 관계된 자들은 그것으로부터 오는 실질적 이득을 계산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입장이었을 뿐 나의 것은 아니었고, 환자들의 것도 아니었다. 보건복지부의 입장은 이해했으나 나는 중증외상센터의 공공적 가치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하는 자들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또 욕을 먹었다. 학회 사람들은 합일하지 못하는 나를 문제 삼았고, 보건복지부의 관리들은 내 의견을 무수히 많은 것들 가운데 하나로 취급했다.
- 골든아워1 〈탈락〉 중에서 -
이국종이 쓴 ‘칼의 노래’라고 할 만큼 그는 이순신 장군의 삶에서 진정성을 느끼며 또한 따르고자 했음을 먼저 수긍했다. 그리고 나는 그의 기록지를 따라갔다.
꿈을 잃고 좌초하는 청춘들에게 주변 상황이 여의치 않을지라도 포기하지 말고 자신의 신념을 믿고 끝까지 밀어붙이라는 조언을 할 수 있을 만큼, 녹록하지 않았을 그의 시간에 대한 서술이었다. 처음부터 안 된다고 포기해버리면 절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다. 뚫고 나가야 한다는 그의 말은 길을 잃고 헤매는 청춘들에게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중증외상센터의 최종수비수가 되어버린 그의 진솔함을 느꼈다. 그냥 할 수 있는 데까지……. 나는 늘 내가 어디까지 해나가야 할지를 생각했다는 그의 말을 통해 나는 감히 그 말이 어떤 말인지 알 수 있다는 말조차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말이 주는 힘겨움과 가여움이 얼마나 깊은지 느껴졌다.
정경원이 서 있는 한 버텨갈 것이라 한다. 누구를 위해서? ‘정경원이 중증외상의료시스템을 이끌고 나가는 때가 오면’이라는 생각을 결국 버리지 못하는 참 어리석은 그였다. 그때를 위해서 하는 데까지 해보아야 한다는 그. 정경원이 나아갈 수 있는 길까지는 가야 하는, 거기가 그의 종착지가 될 것이라고 한다.
지금 그는 골 문지기 앞에 선 최종수비수 같은 느낌이다. 아마 한때는 그도 최전방에서 상대를 위협하는 공격수의 꿈도 있었을 것이다. 의사로서, 외과의로서, 진정한 칼잡이로서 자신의 의술을 추구하고 싶었던 때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중증외상센터장이 되어 우리에게 이름을 알리게 되었을 때, 그때 욕심을 부렸다면 그를 현혹할 수식어에 자신의 ‘인술’을 저당 잡혔다면 어쩌면 그 또한 겉멋이 든 공격수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멋진 미드필더가 되었다. 힘없는 약자들을 외면할 수 없었으며, 그 상황을 사실로 전하고자 애썼다. 처절한 사고 현장의 환자들 중 운전기사나 배달부, 건설 노동자… 등 가난한 이들이나 사회적 약자들이 많았다. 사회기득권자들은 위험에 노출될 환경이 이들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결코 그들을 외면할 수 없는 그의 진언은 책속에서 그의 ‘인술’이 되어 메아리쳤다.
이국종 교수팀의 응급헬기가 뜰 때 너무 시끄럽다며 민원을 넣었던 사람들 또한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 이 상황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이국종의 『골든아워』는 미드필더로서 충분한 역할을 수행한 것 같다.
그가 이렇게 기록지로 남기지 않았다면, 세상을 향해 인쇄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막연함 속에서 내 일이 아닐 거라는 섣부른 추측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이 기록지는 중증외상센터의 의미, 필요성을 알렸다.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지만 우리는 쉽게 그 누군가가 되지 못하는 오류를 낳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글은 결코 가볍게 읽어지지 않았다. 단순한 테이터로 분석되지도 않았다. 사회구성원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미안함을 느끼게 했다.
12척 배로 맞섰던 이순신의 삶과 맞닿아 있는 그의 삶. 그가 왜 그렇게 이순신을 좋아하는지도 어렴풋이나마 알 것도 같다. 지금도 사회와의 소통은 12척의 배로 맞서는 느낌이다. 병원이란 궁극적으로 환자가 완치되거나 다른 세상으로 안내된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바라봤던 것 같다.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사투하는지 나의 촉각은 책을 읽으며 소름끼치게 반응하기도 했다. 드러나는 공功에 대한 시기, 질투 속에서 그 또한 공허했을 시간에 함께 하고 싶었다.
나는 이미 한참 전에 내가 하는 일의 옳고 그름과 방향성을 완전히 상실한 것 같았다. 내 의도와 관계없이 급류에 휩쓸려 발버둥 치다 여기까지 떠밀려 왔을 뿐이다.
어쩌면 인생 자체가 신기루 같은 것인데 내가 너무 오래 그것을 좇아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멈춰 서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이 내 인생을 휩쓸고 지나가버렸다. 석비에 새겨진 아버지의 함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손끝으로 석비 모퉁이를 가만히 쓸어내렸다. 정모에 깎여 닿은 볕이 뜨겁지 않았다. 나는 어디까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아버지는 답이 없었다. 그가 누운 자리는 평안해 보였다. 영면한 아버지의 자리가 부러웠다. 그러나 나의 끝도 멀지는 않을 것이다. 서글프도록 허망하기는 했으나 산 날들이 대게 온전하지 않았으므로 그 사실도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 골든아워2 〈풍화〉 중에서 -
그는 말했다. 죽음이란 누구에게든 동일하지만 모두에게 같은 모습으로 오지는 않는다고. 버려진 죽음, 가족이 없고 돈이 없어서 쓸쓸하게 허물어져 가는 목숨들, 그러므로 생의 마지막 순간에 가족들이 모든 것을 다 쏟아 붇는 상황은 아무나 받는 축복이 아니라고 했다.
새벽에 태어난 그는 새벽의 별빛이 떨어지기 이전의 어둠이 눈에 찾아와 시력을 잃고 있다고 한다. 어차피 태어날 때도 새벽 어둠속에서 앞을 보지 못했고, 이젠 시력을 잃으며 다시 앞을 보지 못할 것이라 한다. 그에게 최명희 작가의 말을 전하고 싶다. “어둠은 결코 빛보다 어둡지 않다”고.
나는 어려서 집안 아저씨한테 이런 말씀을 들었다.
“저 나무는 땅 위에 둥치와 가지 모양 기린 그대로 반대편 땅 속에 똑같은 모양 길이로 소 리를 내린단다.”
바꿔 말한다면 땅속에 뿌리가 한 치 자랄 때 땅위에 가지도 한 치 뻗어 오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뿌리는 제 힘을 다하여 자랄수록 눈부시고 아름다운 지상의 햇볕 속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깊고 어두운 밑바닥으로 내려간다.
이 말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나의 삶에 큰 힘을 주고 있다. 이 사람의 생애도 그러하리라. 절망이 어떻게 삶의 위로가 되고 상처가 어찌하여 생의 텃밭이 되는지를 깨닫게 하는 삶의 역설. 내가 어둠속에서 눈물로 눈물을 닦으며 캄캄하게 울고 있을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영혼에 가지는 그 깊이만큼 더 높은 곳으로 자라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나의 눈물의 뿌리가 어둠의 핵에 가 닿으면 내 정신이 가지는 저 찬연한 빛이 핵에 이를 것인가. 지상의 아름드리 거목 둥치와 용틀임하는 지하의 거대한 뿌리가 서로 위와 아래 안과 밖으로 나뉘지 않고 대칭으로 한 덩어리를 이룬 입체적인 그림은 나에게 항상 풍요로운 상장을 안겨준다. 어둠이 빛이고 빛이 어둠인 세계
-1996년 작가의 시카고 강연〈소설 혼불을 통하여 본 한국인의 문학적 상상력 그리고 작업과정〉 중에서-
세상에서 빛을 잃어버리고 어둠으로 향한다는 그의 시력은 오히려 지금부터 빛으로 향할 것이다. 어둠속에서 그처럼 고요하거나 집중할 수 있을까. 그처럼 그럼에도 내가 아닌 우리를 위해서 걸어갈 수 있을까. 아마도 그의 소신은 더 깊은 뿌리로 내려갈 것이다. 자신이 내린 뿌리만큼 지상의 가지도 뻗어갈 것이다. 이미 우리는 책속에서 무수한 가지와 열매들을 보았다. 책속에 등장하는 얼굴 모르는 사람들, 그들의 노고와 헌신, 살아온 궤적들을 기술해서 우리에게 함께 ‘중증외상센터’라는 나무를 가꾸자는 의미로 전하는 그의 마음이 다시 봄 앞에서 손짓하는 기분이다.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해 중증외상센터 설립에 생의 일부분을 뜯어내 바친 수많은 사람들, 그들 모두를 실어낼 수 없어 가슴 아프다는 그의 고백에 우리는 나무를 보고 잎을 보고 꽃을 보고 열매를 본다고 말하고 싶다. 잎이 언제 나오는지, 꽃이 얼마나 예쁜지, 열매가 얼마만큼 많이 열리는지 보다 그 나무가 계절에 순응하며 내년에도 무탈하게 만개하기를 바랄뿐이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뿌리가 건강해야 한다.
구조라 춘당매의 큰 가지가 꺾여 있었다. 내년에 과연 저 가지에서 꽃이 필지, 저 가지가 내년까지 견디어 줄지 안타까운 마음을 품고 돌아왔다.
그는 최종수비수가 되어 지금껏 숱한 공격을 막아냈듯이 여전히 그 자리를 지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물려준 공격수, 미드필더들을 믿고 Full-Time 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한테 목숨을 바친다고 했다. 이국종. 당신을 알아주며 응원하는 우리들을 믿어보길 바란다.
『골든아워』 당신의 출사표를 우리는 가슴으로 읽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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