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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3월 31일 주일 메시지 (예비묵상)
시리즈 주제: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
여섯 번째 설교
제목: 천국과 조국 사이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지난 설교를 요약함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통치를 말한다. 하나님의 통치는 정의와 자비, 그리고 신앙이 실천되는 세상을 의미한다. 이는 미가 선지자의 메시지 주제다(미가 6:8). 동시에 바울 사도는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성령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이라고 했다(롬 14:17). 정의를 물같이 흘러 넘치게 하는 세상에 대한 요구는 아모스의 메시지이기도 하다(암 5:24).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성경 전반을 통하여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계시하신 분으로서 그의 삶과 언행을 보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더욱 명확하게 계시된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왔다고 선언하신 예수님은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자신의 언행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 계속 보여주셨다. 그것은 정의와 자비, 그리고 신앙의 실천이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종교 및 정치 지도자들의 위선을 격하게 책망하신 까닭은 하나님의 나라가 정의에 기초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이 소외되고 천대받던 사마리아인에 대한 우대와 관심을 보이심은 하나님의 나라가 자비의 숨결 속에서 성장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심은 신앙의 순종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대략적으로 예수님의 삶을 보더라도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세워질 것이며 어떤 모습일 것인지 우리는 능히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명백하게 드러났으며,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서 구현되는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사실이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 구현에 동참하려는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이 사후에 영혼이 들어갈 세상으로 여기는 사상이다. 이를 ‘내세영혼천국’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상은 기독교인들의 전반에 깊이 새겨져 있다.
나는 지난 다섯 차례의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왜 성경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준다고 하시는지, 왜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고 하는지, 예수님의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성경은 왜 적그리스도라고 부르는지, 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있다고 하는지, 왜 2,000년 전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말세를 살고 있다고 확신했는지, 왜 예수님의 재림 때에 성도들을 데리고 오신다고 하는지 그 대답을 찾아 설명하고자 노력했다. 이 모든 질문과 대답은 우리 마음에 깊이 새겨진 ‘내세영혼’ 천국 사상을 몰아내기 위함이다. 그 대신에 성경 전체를 통하여 계속적으로 소개되고 예언되며 계시된 하나님의 나라 신앙을 새롭게 인식하기 위함이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관계를 생각함
하나님의 나라를 천국(天國)이라고 하고 우리 나라를 조국(祖國)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조국이 있다. 이 세상에는 많은 국가(國家)들이 있다. 그리고 국가들은 크기와 세력이 저마다 다르지만 서로 조화 가운데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은 조국보다 크고 이 세상 모든 나라보다 크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국 즉, 하나님 나라라는 큰 세계 속에서 저마다의 조국에 속해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창세 이후로 계속되며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 나라들은 흥망성쇠를 반복한다. 지금 이 세상에 있는 나라들도 인생처럼 개국과 번영, 그리고 쇠퇴와 패망의 길을 걷는다. 1970~80년대에 미국과 함께 세계를 양분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던 소련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소련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다. 그런데 1991년 12월 26일 소련은 더 이상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그 대신에 여러 개로 나뉘어진 새로운 나라들이 탄생했다. 그 중에 러시아가 가장 대표적인 나라다. 이 세상에 있는 나라들은 영원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다.
그런데 성경은 세상 나라들을 하나님의 원수로 소개할 때도 있고 하나님의 일군으로 소개하기도 한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원수로 마침내 심판을 받아 멸망한다.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은 바벨론의 궁정에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왕들에게 권세를 부여하신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 신앙 가운데서 국가의 고위 공직자로서 활동을 했다. 느헤미야도 에스더나 하만도 요셉도 모두 국가를 위해서 봉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 세상 나라를 위해서 일하면서도 그보다 더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충성하는 사람들이었다. 성경은 유다인들의 귀환을 명한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를 하나님의 일군으로 소개한다. 성경은 철저하게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선포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사는 개인들이 하나님의 뜻인 진리와 사랑, 그리고 신앙을 좇아 살아야 하는 것처럼, 국가들도 그 지도자들도 마땅히 그 길을 좇아야 형통하고 번영하는 나라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나라의 백성이기 전에 이 세상의 창조주시며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면 개인의 삶과 국가 공동체의 삶에 선한 열매가 맺힐 것이다. 그래서 개인과 가정, 그리고 국가 공동체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것이다.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
여기서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본래 교회는 소수였으며 로마제국의 왕들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나중에는 교회의 영향력을 국가 지도자들이 무시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공식적으로 인정하기도 했다. 그 후 서양에서 교회의 권세는 점차 세상 나라 지도자들보다 더 커지기도 했고 정치와 교회가 결탁을 하여 새로운 세상의 개막을 가로막는 적폐세력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그러나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라는 프랑스인에 의하면, 미국에서는 종교가 정치적 안정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서로를 돌아보는 유대감이 증진되기도 하고, 국민들의 시민의식이 고양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교회와 국가가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가? 한국의 기독교는 미국을 비롯한 서양의 선교사들을 통해서 주로 시작되었다. 선교사들은 교회를 통하여 교육과 의료 그리고 구제 등 사회봉사에 기여하였으므로 교회는 한국 사회와 우호적인 관계 속에 성장했다. 그러다가 한국 사회가 경제성장을 하는 동안에 교회의 규모도 성장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이후로 한국 교회는 점점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그 원인에 대한 분석과 평가는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다.
이제 돌아보니 하나님 나라의 대리인으로서 교회가 세상 나라와 어떤 관계를 맺어 왔는지를 비판적으로 생각해 볼 때 반성할 부분이 적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특히 해방 이후 이념의 갈등 속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경험한 이후로 교회는 역사와 신학에 대한 민족의 주체성을 지키기보다는 친미 또는 미국에 의존적인 경향이 두드러져 왔던 것이 사실이다. 가장 먼저 국가적으로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원조를 받았으며 교회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일, 그리고 교회에 대한 직접적인 후원 등을 받았으므로 한국의 기독교는 친미적 성향이 매우 강했다. 그것은 한국의 기독교가 애국주의와 반공주의, 그리고 미국식 자본주의와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에게 경제적으로 예속되면 개인의 인격적 독립성을 지키기가 어려워 사람답게 사는 길을 잃어버리기 쉽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을지라도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신념을 가지고 결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교회가 국가주의나 애국주의 또는 자본주의나 눈 먼 민주주의에 예속되어 있지 않는지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대한민국보다 크고 하나님 나라의 정신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나 자유시장의 원리를 강조하는 자본주의보다는 더 넓고 온전하고 더 근본적이다.
애국주의나 국가주의에 사람의 생각이 예속되면 국가의 유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사람의 인권을 무시하는 일을 쉽게 저지를 수 있다. 제주 4.3사건이나 여수순천 사건이 왜 그렇게 커지고 왜 그렇게 무고한 양민에 대한 학살이 벌어졌는가? 1980년 5.18광주 민주화운동에서는 왜 그렇게 희생자 규모가 커졌는가? 이 모든 것이 국민보다 이념이나 사상 또는 권력자의 욕심에서 비롯된 참상이 아닌가? 이제 70년이 지나 제주4.3사건의 진상조사와 희생자와 그 유족의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여순사건과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억울하게 죽은 이들에 대한 정의가 아직도 세워지지 않고 있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어떤 입장에 서 있었는가? 국가의 지도자들이 특정 이념이나 권력욕심에 눈이 어두워 비윤리적이고 반인권적인 행위를 할 때 교회는 조국보다 더 큰 천국 시민의 정신을 실천에 옮겼는가? 아니면 국가주의나 애국주의 또는 반공주의가 진리인 줄 알고 눈 어두운 권력자들을 비호했는가? 아니면 이런 일들은 하나님 나라와는 관련이 없는 일로 여기고 오로지 영혼의 일에만 관심을 가졌는가?
하나님 나라 시민의식의 회복을 위하여
몇 해 전에 원로목회자들의 회초리회개기도회가 있었다. 거기에서 무엇 때문에 회개를 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회개를 하는 까닭은 정도에서 벗어났다고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정도(正道)’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회개의 내용이 결정된다. 여기서 ‘정도’는 하나님의 뜻이며 진리다. 기독교인이 정도와 진리를 무엇이라고 여기는가 하는 것이 결국 삶의 추구를 결정하고 현실을 인식하는 눈과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바른 기준을 결정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개인의 윤리적 차원에만 국한시킨다면 결국 회개나 노력은 개인적인 차원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자기의 공동체와 사회, 국가 그리고 전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와 비전으로 인식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소신과 확신이 있다면, 그들은 더 넓고 본질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바칠 것이다.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은 그것을 본 사람들이었고, 예수 그리스도도 단지 도덕선생으로 사신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삶은 물론 공동체와 세상을 치료하기 위하여 행동하셨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어떤 그룹의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귀한 뜻을 추구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더 나은 세상을 꿈꿀 수 있다면 그 모임은 한국 사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할 소중한 모임이다. 어떤 사람들은 인터넷의 유튜브 등으로 자신의 생각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 위한 통로로 사용한다. 그런데 정기적으로 직접 만나 진리를 추구함으로 자신의 안목과 세계관을 확장시켜 나가고 세상에 대한 책임과 비전을 공고히 세워나가는 공동체가 있다면 그 공동체는 정말 소중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공동체가 바로 교회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교회가 한국 사회의 축소판에 지나지 않아서 의식의 개혁과 자기의 각성을 위한 몸부림보다는 서로에게 이미 자리잡은 이념으로 상호비방과 정죄에 빠져 있다면 소망이 없다. 그리고 만약 교회가 역사와 민족과 사회에 대한 책임감마저 느낄 수 없다면 우리 사회에 있는 시민운동단체나 정당보다도 뒤쳐진 천덕꾸러기로 전락할 수도 있다. 세상을 향한 진리의 등불을 높이 든 선구자들이 아니라 세상의 긍정적인 변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현재 교회에 대한 세상의 비방이나 조롱은 단지 교회의 수가 줄어들어서 다가온 핍박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교회는 본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가치를 재연할 대리인들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가르쳐 지키게 할 임무를 받았다. 교회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경륜과 비전을 배우고 자기의 것으로 삼아 그 뜻에 자신을 바침으로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일할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정기적으로 모여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그 진리가 곧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임을 깨닫고 확신하면서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하고 협력하기 시작한다면, 교회는 빵 전체를 부풀게 한 누룩처럼 이 사회를 새롭게 할 촉매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진리가 무엇인지 철저히 탐구하고 상호 열린 마음으로 토론을 하면서 알아가고자 노력해야 한다. 이미 천 년이 넘은 교리를 금과옥조(金科玉條)로 붙들고 일점일획이라도 벗어나기 않으려 답습하기보다 그 교리의 본래 정신이 무엇이었는지, 왜 그 시대에 그런 교리가 나왔는지, 그리고 오늘날 그 교리가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유연한 토론과 질문의 용광로를 거쳐 새롭게 정제된 대답만이 오늘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대사로 자격을 갖추게 할 것이다.
교회가 구원의 확신을 강조하면서도 구원파가 가르치는 ‘죄 사함의 비밀’이나 구원의 기쁨을 이단으로 정죄하기만 한다면 자기모순적인 일을 하는 셈이다. 신천지 교인의 출입을 경계하면서 신천지와 교회가 무엇이 다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예배당 대문에 경고표시를 해둔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미 인터넷 세상에서는 신천지가 자기들의 주장으로 도배를 하고 있는데. 구원파도 신천지도 여호와의 증인들도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에 세상에 긍정적인 기여를 하거나 선도하기보다는 가정을 파탄하는 집단으로 간주되고 국가 공동체가 나아가는 길에 걸림돌이 되는 신세가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기독교회는 이들보다 무엇이 나은가? 우리는 무엇이 다르다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교회가 국가에 어떤 점에서 유익이 되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세상 나라를 위한 등불이 될 수 있겠는가?
우리 모두 조국과 천국 사이에서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보자.
<끝>.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 06 - 천국과 조국 사이에서(예비묵상).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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