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재고개 한 마을에서 벌어진 작은 소동(3-3)
내가 다니던 회사는 금융공기업인데 예전의 정년 55세를 순차적으로 60세로 늘리면서 우리나라 처음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 55세의 급여를 정점으로 하여 월급을 매년 20%정도씩 낮춰서 60세까지 근무를 보장하는 제도였다. 맡은 직무도 현업 업무는 손 떼고 후선업무 보조업무를 담당한다.
나도 9년간 맡아온 지점장 보직을 내려놓고 마포 공덕동에 있는 본점에 자리한 채권추심업무를 하는 부서로 배치되었다. 본점에는 상주직원이 600여명 있었으므로 직원들의 여가선용을 위한 동아리 활동이 활발하였다. 산악회 낚시회 서예반 꽃꽂이반 색소폰동호회 등이 있었다.
나는 서예반을 찾아 갔다. 선생님은 옛날의 국전에서 특선을 하고 증권거래소 전무이사 한국투자신탁 초대 사장을 지낸 원정 배종승 선생이었다. 전서 예서 행서를 4년간 배우고 매년 사내 동아리 전시회도 참여하였다.
정년퇴직한 후에는 한글서예를 배우고자 이곳저곳을 알아보다가 관악문화원에 한글반이 있어서 여기에 등록을 하였다. 운 좋게도 선생님은 갈물서회 소속으로 갈물체를 정통으로 이어받은 한벗 이언주 선생이시다. 그때가 2014년 10월인데 한자서예로 다져진 기초 위에 훌륭한 선생님의 지도로 다음해 봄부터 공모전에서 입선을 하기 시작하여 6년 후인 2020년 초대작가가 되었다.
탈구 사고가 난 당일에도 관악문화원 한글반에서 서예연습을 하고 귀가하였는데,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발문(한문)을 우리말로 다듬어서 궁체 정자로 쓰는 중이었다. 보통 서예는 세로 글씨로 쓰는데 나는 과감하게 가로글씨를 시도하고 있다.
내용자체가 진지하므로 정자로 정성을 다하여 완성해 보리라 작정하였는데 오른 팔을 다쳤으니 상심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사고 당시 초진한 의사의 말이 재수 없으면 오른 팔 감각이 회복되지 않을 수도 있다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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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주가 별로 없어서 젊었을 때 잡기雜技에 소질이 없었다. 운동신경도 둔하고 바둑 장기도 그렇고 고스톱도 민폐를 끼친다. 유일한 건강관리가 등산이었는데 임금피크제에 들어가서는 노후 생활에 도움이 될까하여 당구를 배우기로 하였다. 그런데 쉽게 말해 몸치인 나는 아무래도 습득이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임금피크제 동료 몇 명과 함께 사무실 근처 당구장에서 기초를 배웠다. 당구장 주인이 기본적인 동작을 가르쳐 주고 초보인 동료들끼리 연습을 했다. 당연히 학습 진도는 느렸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동창중에서 당구를 잘 하고 가르치는 기법도 탁월한 친구를 만나 당구 연습에 집중하게 되었다. 주 2~3회 시간을 내서 기초부터 실전 연습까지 2년여를 들러붙어 연습을 한 결과 당구 점수 200점 까지 올라 설 수 있었다.
몸치여서 그 정도지 운동신경이 좀 있는 사람이라면 더 고수도 될 수 있을 정도의 열정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당구모임도 결성되고 4년 동안 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요즈음도 일요일에는 당구모임에 참석하여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갖고 있다.
그런데 팔을 다친 이후에는 당구를 할 수 없고 회복이 안될 경우에는 앞으로도 쭉 당구를 칠 수 없을 수도 있다니 억장이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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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피크도 끝나고 정년퇴직을 한 후에는 서예 당구 등산으로 2년여를 지냈다. 서예는 한글서예를 시작하여 공모전에서 매년 입선을 하였고 초대작가가 되려면 단기간 내에는 안되고 점수제가 있어서 12점을 채워야 자격이 주어진단다. 입선은 1점 특선은 3점 우수상은 5점 등으로 점수를 매긴다니, 매년 입선을 하여도 12년이 지나야 초대작가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입선도 만만찮은데 특선 우수상을 꿈꾸랴. 다소 의욕이 꺾인다.
당구도 200점을 넘어서니 재미는 있는데 실력을 업그레이드 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여기서도 다소의 권태감이 느껴진다.
등산은 산악회를 따라다니고 행사가 없을 때는 가까이 있는 산을 혼자서 오르곤 했는데 집근처 관악산은 수많은 샛길까지 훤하도록 다람쥐가 돼 가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이즈음에는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뭘 하지, 또 당구 치러 가나, 관악산 웬만한 등산로는 다 가봤는데 오늘은 어느 코스로 가지? 서예도 천편일률적인 글귀를 쓰는데 재미가 덜하다. 그리고 내 나이 60대 초반이고 사지 멀쩡한데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되나. 아직 충분히 활동할 수 있는 상황인데. 생각하면서 무엇을 해 볼까 고민을 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좋은 직장에서 근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적성은 따져보지도 않았고 정년퇴직할 때까지 한우물만 팠는데,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는가, 내 적성이 무엇이었나, 노후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를 고려한 끝에 목공일을 배워보자. 마침 그때는 고용노동부의 퇴직자 일자리 찾기 지원사업 대상자였으므로 국비지원 직업훈련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금천구 시흥사거리에 있는 목공학원에서 6주간 교육을 받았다. 목재를 공구류로 재단하고 자르고 다듬고 가구를 제작하는 과정인데 나의 적성에도 부합한다. 그런데 교육과정을 마쳤을 때 이정도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친김에 원목가구공장에 취업을 해서 더 배워보자는 욕심이 들었다.
결국 포천시 내촌면에 소재한 원목가구 공장을 찾아가서 취업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30개월을 보내게 된다. 겨울을 3번 여름을 2번 지냈으므로 원목가구 제작 기능은 웬만큼 배운 셈이다. 그런 중에서 국가기술자격증 가구제작기능사 자격도 취득하게 된다.
그래서 집에서 필요한 가구를 직접 제작하게 되는데, 목재는 고등학교 동창생이 경영하는 나무친구들에서 편백나무를 구입하여, 어린 손녀용 난간있는 침대 2개, 딸과 마누라용 침대 각1개, 마당에 설치한 의자그네 1개, 마당 뒷편 공터에 설치한 공방 구조물 등 필요한 목재 가구는 직접 만들었다.
그런데 오른팔을 다쳤으니, 앞으로는 이런 작업을 못할 수도 있단다. 마음이 심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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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목가구 공장에서 30개월을 넘게 근무하게 되는데, 나중에는 어느 시점에서 그만 둬야 하나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 의도했던 목공일 배우기는 이미 목표를 달성한 것 같고, 일을 하므로 월급을 받아 생계에도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나 제조업 공장에서 겨울을 3번 나다보니 열악한 작업환경도 힘들고 60대 중반에 접어든 나이도 고려해야하고, 광능내에 원룸을 구해서 퇴근 후 생활하는 것도 계속하기 어렵고 하여 궁리를 하고 있는데, 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산에 조그마한 호텔 경영을 맡게 되었는데 지배인을 구하는 중이니 자네가 와서 일하면 어떻겠냐는 것이다. 그래서 주말에 아산으로 찾아 갔는데 근무여건이 제조업 공장과 비견할 수가 없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호텔분야 경력이 없는 나에게 나를 초청한 친구가 당분간 함께 지내며 실무를 습득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까지 하니 흔쾌히 수용하였다. 이리하여 아산에서 2년을 근무하였고, 이어서 공주 한옥마을에서 2년을 더 근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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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시간이 날 때면 서예연습을 하였는데 전통적인 서예는 세로쓰기이지만 나는 가로쓰기를 해 보려고 시도를 하였다. 그런데 가로쓰기를 하게 되면 작품에 찍는 낙관 인장도 가로쓰기에 맞도록 별도로 새겨야 한다. 그때 떠오른 것이 전각을 배워서 스스로 낙관 인장을 새겨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어느날 인사동 갔을 때 눈에 띄는 어라연전각연구소에 들렀다. 거기서 하는 강습은 매주 토요일 오후에 열리는데 내가 시간을 맞출 수가 없어서 등록은 못하고 전각칼 전각용 돌 전각교습 책자 등을 구입하여 공주로 돌아 왔다.
다행히도 그 이후에 공주대학고 평생교육원에서 전각과정이 신설되었다. 즉시 수강 신청을 하여 2023년 봄학기부터 전각을 배우게 되었다. 선생님은 50대인 덕산 김윤식 선생인데 내게 꼭 필요한 교육내용이다. 2024년 봄학기까지 4개 학기를 수료하였고 내가 필요한 인장은 스스로 새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2024년 11월 23일 ‘보령인사전’에 참여하기로 하고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마무리 작업에 집중해야할 시기에 오른쪽 팔을 다쳤다.
준비하던 작품은 3점이었는데 1점은 일찍이 새겨두었고 2점은 한참 새기고 다듬어야 하는데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많은 기대를 하였는데 참담하다. 별 수 없이 이미 완성한 한 점만 출품하기로 하고 마음을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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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속한 사단법인 한국서가협회는 매년 캘리그라피 강습회를 열고 있다. 전통서예를 하면서 근래에 활성화 되고 있는 현대서예분야를 체계적으로 알아가기 위한 과정이다. 그간에 나는 가구공장 다니고 숙박업소에 종사하느라 참여를 못했는데, 금년에는 집에서 쉬고 있으므로 이 기회에 강습을 받기로 하였다.
그 무덥던 여름날, 7월 마지막 토요일부터 8월말까지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강습이 있었다. 모두 6회인데 매주마다 전문가 선생님 한분이 오셔서 종일토록 강의 및 실습 지도를 한다.
캘리그라피 이론(청하 김희정), 수묵 캘리그라피(담묵 최남길), 캘리와 문인화 융합(인강 신은숙), 대자서大字書 이론 및 실기(담헌 전명옥), 캘리그라피 천(헝겁)아트(소선 허영조), 다양한 재료를 이용한 베이스 작업(여명 신근화) 등 여섯 분의 전문가가 열정을 다하여 강습을 한다.
나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강습에 참석하였다. 수강생은 총 25명 이었는데 대부분 서가협회 초대작가들로서 40~50대 활동하고 있는 현역 작가들이 많다. 나는 초대작가 된지 4년차로서 아직 애송이지만 나이는 70이 넘어서 참석자들 중에 고령에 속한다.
흥미롭고 유익한 강습이었고 완성한 작품 한두점씩을 배접하여 12월 18일에 전시회를 열기로 하였다. 나에게는 처음 접하는 분야라서 복습도 하고 전시회에 출품할 작품을 마무리도 하고 해야 하는데, 오른 팔을 다쳤으니 이것도 제동이 걸린다.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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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는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사소한 일들이 오른팔을 다치고 나서 왼손으로 해결해야 하는 데 마음 먹은 대로 잘 되지 않아 안쓰럽다.
왼팔과 두 다리는 멀쩡하므로 나돌아 다니는 데는 크게 지장 없지만 오늘팔을 조심스럽게 하고 움직이는 동작이 줄어들다 보니 전체적으로 몸의 움직임이 경직되고 멀쩡한 근육도 굳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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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산책을 하거나 등산을 하여 발의 움직임이 많을 때에는 오른팔에도 긍정적인 신호가 온다. 차츰 손바닥의 감각이 되살아나며 감각 없는 부위가 줄어드는 것이 느껴진다.
초기에는 손바닥 감각이 전체적으로 전혀 없었는데 가끔 한줄기 신경에 짜르르 전류가 흐르는 느낌도 있었다. 손바닥 피부 안에 모래가 한 겹 깔린 듯한 느낌이 있었는데 한두주 지나면서 가장자리부터 회복되는 느낌이 생기더니 2달이 지난 요즈음은 대부분 감각을 찾았고 아직 남아 있는 부분은 10% 정도인데, 이대로 물리치료를 계속하면 완전히 회복될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긴다.
오른 손의 동작 범위가 조금씩 늘어나고 얼마 전 부터는 붓글씨 쓰기도 가능해졌다. 중단한 세한도 발문 쓰기를 다시 시작해야겠다.
사고 직후 있었던 당구대회에는 참석할 수 없었는데 11월 첫 주 및 12월 첫 주 당구대회에는 참석할 수 있었다. 스트록이 예전만 못하지만 당구 자체가 팔 운동 재활에도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전각 전시회는 이미 지났지만 연말을 맞아 연하장 제작에는 큰 지장이 없을 것 같다. 참신한 작품을 구상해 봐야겠다.
캘리그라피는 졸업 전시회를 앞두고 있는데 중단했던 복습을 다시 시작해야겠다.
추위가 풀리고 야외작업이 가능해지면 뒤뜰 목공 공방에서 목공작업도 할 수 있겠다.
사고당시 염려했던 오른팔 기능에 대한 우려의 먹구름이 걷히고 있는 것이다. 새롭게 시작해야지.
첫댓글 내가 제대로 마무리 못한 주옥같은 작품을 우리 송권이가 잘 정리하여 함께 두고두고 읽을수 있게 하여 주어서 너무 고맙네 ~
끊임없이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성취하는 친구를 보면서 친구라는것이 너무 자랑 스럽네 ~
박송권 ~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