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가 온다. 엄청 온다.
오전 여덟시 삼십칠 분. 분명 해가 떠있어야 할 시간이건만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어둡기만 하다. 흔한 표현이지만 지금은 이 말 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 같다. 진심으로 구멍이 뚫린 게 아닌 이상 비가 이따위로 쏟아질 수가 없다.
찬열은 천둥번개가 번쩍이는 창밖을 보며 진지하게 아이한테 다음에 만나자고 해야 하나 고민했다. 지금 연락하면 아이도 딱히 번거로운 일이 생길 것 같지 않았다. 예를 들면 준비를 마치고 나오려다가 연락을 받고 도로 집에 들어가는 그런 상황 같은 거 말이다. 어떡할까. 어떻게 해야 좋을까. 연락을 할까. 약속을 미룰까. 고민하다 보니 왜 이런 걸로 시간 끌며 고민하고 있어야 되는 건지 이젠 제 자신이 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애새끼가 뭐라고.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경악했다. 아니 얘는 부천에서 오류까지 뭐 얼마나 걸린다고 벌써 일어났어? 찬열은 혹시 제가 시간을 잘못 본 건 아닐까 싶어 다시 핸드폰 상단을 쳐다봤다. 하지만 아무리 다시 봐도 앞에 달린 숫자는 9가 아니라 8이었다.
아저씨밖에비완전마니와용ㅠㅅㅠ
방금전에천둥번개치는거보셧어요ㅇ0ㅇ?
아저씨조심해서오셔야대용!
우산꼭챙기시구요!
애새끼가 저를 등신 취급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아무리 쓸 일이 없다 하더라도 이 날씨에 우산 안 들고 나가면 그건 머리에 문제 있는 거 아니냐.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인간이라면 이 날씨에 우산을 필수로 챙긴단 말이다. 정신머리 똑바로 박힌 인간이라면 이 날씨에 그냥 나가지 않는다고. 아니 그것보다 지금 창밖을 봐라. 파라솔을 들고 나가도 모자랄 판이구먼, 이 놈의 애새끼가. 비가 쏟아지는 창밖과 아이가 보낸 메시지를 번갈아보던 찬열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마저 벨트를 채웠다. 방금 전까지 머리 아프게 아이를 만나네 마네, 약속을 미루네 마네 하던 고민은 이렇게 쉽게 종결된다.
가벼운 차림은 오랜만이다. 그래봤자 흰 셔츠에 베이지색 면바지차림이었지만. 늘 반듯하게 차려입던 정장이 아니라 그런지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이 조금 낯설었다. 꺼내놓은 카디건까지 걸친 찬열이 거울 앞에 서서 이리저리 몸을 틀어봤다. 이렇게 가벼운 차림으로 집밖에 나서는 게 대체 얼마만인가 생각하며 시계를 찼다. 역시 아이보다 먼저 가 있는 게 낫겠지 싶어 키를 챙겨 집에서 나왔다.
시동을 걸며 지금 출발한다고 연락을 할까 하다가 관뒀다. 알아서 시간 되면 나오겠지. 이제 씻으러 들어간다는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오고간 대화가 없는, 정확히는 도착한 메시지가 없는 채팅 방을 쳐다봤다. 얘는 씻으러 간다느니 하는 말을 참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물론 정말 별 뜻 없이 하는 말이겠지만 보는 내가 별 뜻이 생긴단 말이다.
습한 차 안에 에어컨 바람이 적당히 눌러앉았을 때가 되어서야 핸들을 잡았다. 주차장을 빠져나오자마자 굵은 빗줄기가 차체를 두드렸다. 이러다 차가 박살나는 거 아닐까. 실현 가능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걱정이지만 빗줄기가 워낙 굵다 보니 별 생각이 다 든다. 빗물이 쏟아지는 차창 위로 와이퍼가 열심히 움직인다. 물론 소용은 없었다. 그래도 나름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 중인 와이퍼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찬열이 신호를 확인하고는 다시 핸들을 잡았다.
비가 와서 그런 걸까. 도로는 유난히 한적했다. 그래도 빗길이라 조심조심 차를 몰았더니 예상했던 시간보다 조금 더 걸리기는 했다. 아홉시 사십오 분. 그래도 얼추 비슷하게 도착했다. 오류역 앞에 차를 댄 찬열이 잠시 등을 기댔다. 다행히 아이는 아직 나오지 않은 것 같았다. 몸을 낮춰 창밖을 쳐다보다 핸드폰을 들었다. 몇 번 출구 앞에 있다고 메시지를 보내면 바로 확인했다는 표시가 뜬다. 헐아저씨벌써도착하셧어요? 죄송해요얼른갈게요ㅠㅁㅠ 아이가 보낸 메시지를 눈에 담았다. 아직 만나기로 한 열시가 되려면 여유가 있었다. 어린 애한테는 상대보다 늦게 나오는 게 이렇게 죄송스러운 일인가? 그런 생각을 하다 아이의 나이를 떠올리면 또 저한테 제법 죄송스러울 일인 것도 같았다. 사실 늦지만 않으면 별로 상관없는데.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첫 날, 한 시간 가까이 늦게 나타났던 아이가 자연스럽게 머릿속을 뒤덮었다. 그럼 또 저도 모르게 실없이 웃고 마는 거다.
그나저나 이렇게 미안해 할 줄 알았더라면 5분 전 즈음에 연락을 할 걸 그랬지. 혀로 입술을 핥은 찬열이 화면을 죽였다. 아이가 나오면 바로 찾을 수 있도록 최대한 출구와 가까운 곳에 차를 댄 상태였다. 어차피 지금 이렇게 서있는 차는 제 차 뿐이다. 못 찾진 않겠지. 아까보다는 비교적 약해진 빗줄기가 차체를 두드렸다. 제법 리듬감 있는 소리에 맞춰 손가락을 까딱거리다 시간을 확인했다. 3분 전. 다시 몸을 낮춰 창밖을 확인했다. 하나둘씩 출구를 빠져나오는 사람들이 보인다. 아무리 주말이어도 비는 어쩔 수 없나 보다. 출구를 나오는 사람의 수가 제법 적었다. 물론 그 적은 사람들 속에서도 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또 다른 출구에 나가 있는 건 아니겠지. 애새끼가 멀쩡하게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걸 보면 글자를 못 읽진 않을 텐데.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감에 몸을 낮춰 창밖을 두리번거리던 찬열은 똑똑, 차체를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 흐릿한 차창 너머로 보이는 인영이 누가 봐도 애새끼라 서둘러 잠금을 풀었다.
후다닥 우산을 접은 아이가 차문을 열었다. 문 열고 접으면 되잖아. 차에 오른 아이의 머리가 그 짧은 새에 젖어있었다. 건넨 말에 우산을 발치에 내려놓던 아이가 고개를 돌렸다. 차 젖잖아요. 생글생글 웃으며 건네 오는 말에 더 이상 뭐라 하지 못했다. 저 차는 잘 모르거든요, 근데 아저씨 차는 몇 번 이름 들었었어요, 되게 비싼 차잖아요. 팔을 들어 뺨을 닦은 아이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그렇지. 한 마디를 덧붙이면 아이가 웃으며 젖은 머리를 만졌다.
“너 밥은.”
히터를 틀었다. 차 안에 내려앉아있던 찬 공기가 변하는 데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그래도 애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 따뜻한 바람이 나오는 걸 확인한 후에야 핸들을 잡았다. 아이가 자연스레 벨트를 맸다. 묻는 말에 고개를 돌린 아이가 해맑게 웃었다. 네, 먹었어요! 씩씩한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따로 밥 먹을 필요는 없겠네. 무뚝뚝하게 건넨 말에 이번엔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빗소리만 들으며 가기엔 적적한 감이 없잖아 있어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옛날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이한테는 낯선 노래겠지. 97년도 즈음 나온 노래로 기억한다. 애새끼가 땅바닥 기어 다닐 때 즈음 나온 노래라는 소리다. 아, 그 즈음이면 얘도 걸었을라나? 기저귀 차고 걸어 다녔겠다. 아이의 나이를 떠올린 찬열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신호를 일별했다. 차가 멈춰 섰다. 그나저나 요즘 라디오에서도 이런 노래 틀어주는구나. 하도 시끄러운 노래만 틀어줘서 잘 안 들었었는데. 요즘 노래는 다 의미 없는 가사만 지껄이다 끝난단 말이지. 하여간 그렇게 뚱땅거리기만 하는 노래 만들고 돈 받는 작곡가들이나 이상한 가사만 써대는 작사가들이나. 혀를 걷어찬 찬열이 노래에 집중했다.
한참 핸들을 툭툭 치며 노래를 감상하는데 돌연 옆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거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애가 이 노래를 알 리가 없잖아. 그런 생각을 하는데 점점 또렷해지는 목소리에 결국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아이가 창밖을 보며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라디오와 아이를 번갈아보던 찬열이 슬쩍 볼륨을 낮췄다. 노래를 따라 부르던 아이가 뒷부분은 가사를 모르는지 웅얼거리다 입을 다물었다. 이 노래를 안다고? 열일곱 살이? 애새끼가? 내가 애새끼 나이를 착각했나? 아닌데, 열일곱 살 맞는데. 찬열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아이를 빤히 쳐다봤다.
“이 노래 알아?”
바뀐 신호를 확인하고 다시 핸들을 잡으며 건넨 목소리에 아이가 고개를 돌렸다. 네, 엄마가 좋아하시는 노래예요. 힐끔 옆을 돌아본 찬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기특하다? 대단하다? 사실 그 중간 즈음인 표현을 하고 싶은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거다― 싶은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적당한 표현을 고르기 포기한 사이 DJ가 또 다른 곡을 소개했다.
“어, 저 이 노래도 알아요.”
뒤이어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던 아이가 고개를 돌렸다. 이것도 엄마가 좋아하시는 노래예요. 웃음기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린 아이가 고개를 돌렸다. 창밖을 쳐다보는 동그란 뒤통수를 보다 낮췄던 볼륨을 도로 키웠다. 참, 여러모로 신기한 애다.
건물 지하에 차를 세우고 나니 아이가 벨트를 풀었다. 우산 안 들고 가도 돼요? 묻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자 쫄래쫄래 차에서 내린다. 문을 잠그고 돌아서면 엘리베이터 앞에서 저를 기다리는 아이가 보였다. 아까는 혹시라도 애가 감기에 걸리면 어쩌나, 걱정하느라 몰랐는데 이제 보니 반바지에 반팔 차림이다.
“안 춥냐.”
아무리 그래도 비 오는 날은 좀 쌀쌀하단 말이지.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걸 보며 물으면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 되게 시원하지 않아요?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물어오는데 딱히 할 말이 없어 입을 연 엘리베이터를 가리켰다. 아이가 제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에 비친 애새끼와 제 꼴을 본다. 한 놈은 한여름이 따로 없는데 한 놈은 초가을 패션이다. 머리를 정리하는 애새끼를 힐끔 쳐다보며 카디건 단추를 풀었다.
너도 내 나이 되면 알 거다……. 환절기 조심해야 되는 나이야. 감기 걸리면 무조건 쉬어야 돼. 그리고 내가 네 나이 때는 한겨울에 반팔 입고 다녔어, 새끼야. 하고 싶은 말이 가득했지만 꾹 눌러 삼켰다. 일 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곧 올라타는 커플 한 쌍. 눌린 버튼을 보더니 얌전히 있는 게 쟤들도 우리와 목적지가 같구나 싶었다.
“근데 아저씨 우리 뭐 봐요?”
애새끼가 웬일로 조용하다 했지.
“저 DVD방 처음이라 완전 떨려요.”
저를 올려다보며 건네 오는 해맑은 목소리에 손을 들었다. 좀, 조용히 좀……. 애새끼 머리를 꾹꾹 눌렀다. 옆에 서 있는 커플이 이 쪽을 힐끔거리는 게 보인다. 아저씨, 아파요. 칭얼거리는 목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머리에 얹은 손에 더욱 더 힘을 줬다. 아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저씨. 칭얼거리는 목소리에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이젠 아예 노골적으로 이 쪽을 힐끔거리는 커플을 본다.
남의 시선에 그리 신경 쓰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저렇게 노골적으로 시선을 보내오면 아무래도 좀, 신경이 쓰인단 말이지. 거기다 애새끼의 입에서 아저씨라느니, DVD방이 처음이라 떨린다느니 하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으니 더욱이. 이 놈의 호칭을 밖에서 만큼이라도 어떻게 좀 해야겠다. 그냥 지 꼴리는 대로 부르게 뒀더니 이 놈의 애새끼가 시도 때도 없이 아저씨를 찾는다. 하. 한숨이 절로 나온다.
5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입을 열었다. 커플이 먼저 내렸다. 그 뒤를 따라 아이와 찬열도 함께 내렸다. 우와. 아이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생소한 모양새에 아이가 눈을 빛냈다. 저 이런 데 진짜 처음이에요. 벽에 붙은 영화 포스터나 책장에 잔뜩 진열된 DVD를 둘러보던 아이가 중얼거렸다. 네가 와봤어도 좀 이상한 장소기는 한데.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아이는 DVD가 잔뜩 진열된 책장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면서 DVD 몇 장을 들춰보고는 갑자기 고개를 젓는 거라. 쟤 지금 뭐하니. 찬열은 아이가 하는 짓을 가만히 지켜봤다.
“이번에는 아저씨가 보고 싶은 거 보세요.”
지가 생각해도 저번에 영화관에서 ‘코난’을 봤던 게 조금은 미안했던 모양이다. 네가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나는 그럴 생각이었거든. 물론 영화를 볼지 안 볼지는 들어가 봐야 알겠지만. 이미 생각해놓은 지루하고 긴 영화 몇 편을 줄줄이 떠올리는 동안 아이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걸음을 옮겼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가득 진열된 DVD를 향해 종종거리는 걸 구경했다. 함께 올라왔던 커플은 이미 영화 세 편을 골라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빈 틈 하나 없이 딱 붙어있는 꼴을 보아하니 아서라, 네들도 영화 보러 온 건 아니구나. 찬열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바로 하니 어느새 저만치 멀어진 아이가 보였다.
“야.”
부르는 목소리에 취향 한 번 지독하게 초딩스러운 고딩은 애니메이션이 가득 진열된 책장을 구경하다 말고 달려왔다. 네. 어느새 아이의 손에는 DVD 두 장이 들려있었다. 겉표지에는 굉장히 익숙한 애새끼들이 그려져 있었다. 짱구 새끼랑 코난 새끼. 코난 완결 안 난 것도 놀랄 일인데 짱구 너도 아직 안 끝났냐. 그나저나 이건 또 언제 뺐지. 찬열은 아이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봤다. 아이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저를 쳐다봤다. 어이가 없었다.
“부르셨어요?”
내가 보고 싶은 거 보라고 하셨잖아요.
“아…….”
무심한 시선 속에 담긴 뜻을 알아챈 건지 아이가 몸을 돌렸다. 다시 책장으로 걸어간 아이가 DVD를 얌전히 내려놨다. 그러더니 아쉬운 손길로 책장을 쓰다듬는 거다. 얼씨구. 카디건을 벗던 찬열이 코웃음을 쳤다.
“아저씨 보고 싶은 거 보셔도 돼요.”
애새끼가 무려 선심 쓰는 말투로 저런 말을 한다. 벗은 카디건을 팔에 걸던 찬열은 가만히 아이를 쳐다봤다. 그런 표정으로 서있으면 마음이 약해지잖아. 거기다 목소리는 왜 또 그렇게 처진 건데. 내가 보고 싶은 거 보래서 DVD방 왔고, 내가 보고 싶은 거 고르기도 전에 네가 먼저 영화를 골라왔고, 그래서 그냥 쳐다본 것뿐인데. 왜 그러는데. 내가 뭘 잘못했는데? 왜 그런 표정이랑 목소리로 사람 마음 약해지게 만드는 건데? 곧 있으면 저기 벽에 가 무릎이라도 꿇을 것 같은 아이를 본다. 그리고 DVD방은 처음이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눈을 빛내던 아이를 떠올린다. 짱구 같은 새끼. 한숨을 푹 내쉰 찬열이 결국 또 아이에게 져주기로 마음먹었다.
“갖고 와.”
건넨 말에 발치를 쳐다보고 있던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네? 되묻는 걸 보다 이번엔 손을 들었다. 다시 갖고 와. 카운터 직원의 어이없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돌린 찬열이 멋쩍게 웃어보였다. 다시 아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뭐해. 다시 갖고 오라니까.”
다시 한 번 또박또박 말을 건네면 멍청히 서 있던 아이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네! 씩씩하게 대답하고는 귀찮지도 않은지 다시 책장으로 달려간다. 돌아온 아이의 손에는 DVD 두 장이 들려있었다. 제게 내미는 DVD를 받아들었다. 어른제국의 역습, 은빛날개의 마술사. 제목 한 번 기가 막히다.
한숨을 내쉬며 결제를 마치고 나면 직원이 방을 안내해줬다. 방을 안내받고 가는 내내 아이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어두컴컴한 복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는 원래 이래요? 원래 이렇게 어두워요? 묻는 목소리에 말없이 조그만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새삼 느낀 사실이지만 애가 머리가 참 작다. 제 손 안에 다 잡히는 게 마음에 든다.
“들어가.”
열린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려주면 아이가 오,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아이의 머리 위에 얹고 있던 손을 내렸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푹신한 매트리스를 보더니 신나서 그 위로 달려간다. 바닥에 형편없이 떨어진 운동화를 보다 허리를 숙였다. 대충 운동화를 바로 세우고 몸을 바로 하면 가지런히 놓인 목 베개와 담요를 신기한 눈으로 보고 있는 아이가 눈에 들어온다. 몇 번 와본 적 있는 지라 딱히 설명은 필요 없었다. 네, 네. 대충 대답한 찬열이 아이를 쳐다봤다. 저 짱구 먼저 봐도 돼요? 담요를 활짝 편 애새끼가 해맑게 외쳤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 틈에 DVD를 플레이한 직원이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직원이 멀어지는 걸 확인한 찬열이 문을 잠그고, 신발을 벗었다.
그나저나 얘는 참 다 작다. 머리도 작고 손도 작고 발도 작고. 제 운동화 옆에 놓인 아이의 운동화는 척 보기에도 작아서 찬열은 매트리스 위로 올라오다 말고 웃음을 삼켰다. 오오. 그러나 그 웃음도 아이가 내뱉는 탄성에 얼마 가지 못했다. 카디건을 한 쪽에 내려놓은 찬열이 헤드에 등을 기댔다. 영화에 집중한 아이를 쳐다봤다. 검은 티에 검은 반바지. 올 블랙으로 맞춰 입은 탓일까. 하얀 아이가 더욱 돋보인다. 물론 아이의 마른 몸이 돋보이는 건 말해봤자 입 아픈 사실이었다.
그나저나 DVD방 와서 짱구를 볼 줄이야. 살다 살다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다.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아이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커다란 화면에서 시선을 못 뗀다. 저 이거 못 봤거든요, 진짜 보고 싶었는데. 슬쩍 고개를 돌려 저와 눈을 맞춘 아이가 입을 열었다. 묻지도 않았는데 잘도 떠든다. 쟤 취미다.
“이거 진짜 엄―청 슬프대요.”
“그래.”
“아저씨도 보세요. 이거 진짜 유명한 극장판이에요.”
“오냐.”
성의 없이 대답하며 화면을 쳐다봤다. 아이는 빠르게 영화에 집중했다. 열일곱 살이 애니메이션을 좋아할 나인가? 싶다가도 피규어 모으는 셰프를 생각하면 뭐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지 싶었다. 찬열이 화면에서 시선을 뗐다. 아이의 하얀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확실히 짱구 새끼보다는 이 새끼가 조금, 아니 훨씬 더 재밌어. 느긋하게 팔짱을 낀 찬열이 아이의 뒷모습을 구경했다. 목덜미를 시작으로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아이의 허벅지 밑에 깔린 작은 발이 연신 꼼질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