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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솔로몬 잭팟에 숨겨진 반어법>의 줄거리:
내 인생 동안 줄곧 일관성 있게 유지 되는 마음 상태가 무엇일까요? 감질나는 마음입니다. 돈에 감질나고, 높은 자리에 감질나고, 인기와 형통과 부흥에 감질나기만 하면서 생의 시간들이 지나 버렸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솔로몬의 전대미문의 부귀영화가 마치 무슨 잭팟처럼 느껴집니다. 이유는 우리에게 올 몫까지 솔로몬에게 다 몰려 간 것 같아서이지요. 안 그래도 감질난 마음을 하나님께서 약 올리시는 느낌입니다. 솔로몬 잭팟의 숨은 의미를 살펴 봅니다.
솔로몬 잭팟에 숨겨진 반어법
(열왕기상 10:14~29)
23.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세상의 그 어느 왕보다 큰지라
24.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마음에 주신 지혜를 들으며 그의 얼굴을 보기 원하여
25. 그들이 각기 예물을 가지고 왔으니 곧 은 그릇과 금 그릇과 의복과 갑옷과 향품과 말과 노새라 해마다 그리하였더라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솔로몬 잭팟에 숨겨진 반어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솔로몬 잭팟에 숨겨진 반어법’
금년 1월에 미국 복권 역사상 최고금액이 당첨되었는데 잭팟이 터진 것입니다. 복권을 추첨하는데 당첨된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한 회분의 상금이 다음 주로 넘어갑니다. 그렇게 몇 번씩 누적된 상금이 한 사람에게 당첨이 되는데 이런 경우를 잭팟이 터졌다고 합니다. 금년 1월 13일 파워볼 복권에서 누적 된 당첨금이 무려 15억 8,600만 달러였습니다. 이 중에서 상당한 세금을 떼고 나서도 수령액이 엄청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평생 살아온 삶의 시간들을 심리학적으로 특성을 규정짓는다면 감질 나는 시간들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솔로몬의 이야기를 쭉 읽다보면 매년 육백육십육 달란트의 금이 세입금으로 주어졌는데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1달란트가 약 34kg정도 되는데 매년 들어오는 금의 양이 22,644kg(22~23톤)입니다.
타임지에서 역사상 세계 10대 부자를 발표했는데 아프리카 말리 왕국의 만사 무사가 1등이고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게이츠가 9등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역사상, 선민의 역사상 가장 부자는 솔로몬이었을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나에게도 주셔야 될 부귀영화의 몫을 솔로몬에게 전부 몰아주시는 것만 같습니다. 왜냐하면 솔로몬 이후로는 이스라엘이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로 나눠지는데 이후의 왕들 중에서도 솔로몬 같은 사람이 없었고, 신약 성경에 오면 예수님이나 제자들도 솔로몬 같은 부귀영화를 허락 받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선민이 누려야 될 모든 부귀영화까지도 솔로몬에게 잭팟이 터지면서 혼자 다 누린 것 아니냐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므로 내가 돈을 벌기 위해 노력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 주어지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데 감질나 죽겠습니다. 이러한 마음에 솔로몬 이야기는 마치 약을 올리시는 것 같은데 오늘 본문은 도대체 어떤 의도를 가지고 기록 되었으며, 솔로몬의 잭팟은 어떤 메시지를 주시냐는 것인데 바로 반어법적인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솔로몬이 이러한 부귀영화를 누린 것은 절대로 부귀영화를 가질 생각을 하지도 말고 구하지도 말라는 반어법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라고 하셨을 때 솔로몬은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라고 기도하였는데 하나님께서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앞부분의 말씀을 보면 솔로몬의 보좌가 여섯 층계로 되어 있고 이 여섯 층계의 보좌가 아프리카 코끼리의 상아로 만들어졌습니다. 굉장히 많은 상아를 수입해야 가능했을 것이고 또한 그 상아를 금으로 입혔는데 이것이 과연 하나님께 듣는 마음으로 구한 지혜로운 행동이었을까 질문할 수 있습니다.
뒷부분에 보아도 지나칠 정도로 병거와 마병을 많이 모으는데 이스라엘은 산악지형으로 세울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마음 놓고 활동할 수도 없었습니다. 신명기 17장에서 왕에 대한 얘기를 모세에게 하실 때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군사력을 의지하려는 왕의 성향을 미리 막으셨던 것인데, 이러한 것을 솔로몬에게 허락하신 이유는 왕의 강함의 기준이 마병과 병거의 숫자였기 때문이고 하나님께서 솔로몬 왕에게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는 말씀에 근거한 다른 맥락의 의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약 올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솔로몬처럼 하나님께 듣는 마음을 구하지 않았고 부귀영화를 구했습니다. 돈, 사업, 자녀의 좋은 대학입학, 교회부흥, 인기, 명예, 세상의 인정 등과 같은 부귀영화를 바랬지만 감질 날 뿐이었습니다. ‘감질 난다’는 것은 받을 수 있는 그릇으로 큰 소쿠리로 준비했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좁쌀만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평생을 따라다니는데 솔로몬에게는 왕들 중에서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부귀영화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왜 이렇게 약 올리시는 것일까요?
솔로몬은 부귀영화를 마음에서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듣는 마음을 구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언제나 지금 살아서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듣는 마음은 내가 언제 어느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함께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사람들은 부귀영화를 원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향하여 냉소적으로 한 번 보란 듯이 그렇게 원하는 부귀영화를, 원하지 않았던 솔로몬에게는 어떤 왕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퍼부어주셨던 것입니다. 솔로몬이 타락했기 때문이 아니라 병거와 마병도 왕이 하나님 말고 군사력을 의지하는 차원에서의 경고와는 다른 맥락에서 하나님의 반어법으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나중에는 타락하지만 그것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고 해석이 필요하고, 오늘 본문에서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즉 오늘 말씀은 절대로 부귀영화를 마음에 담지 말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듣는 마음의 기도는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서 내가 판단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타락하기 이전의 부귀영화의 본질은 우리가 현재 생각하는 것과 달랐습니다. 우리는 돈 벌어서 만족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반어법적으로 구하지 않은 자에게 전대미문의 부귀영화를 허락하신 이유는, 우리의 이러한 성향을 냉소적으로 약 올리시는 것이며 그렇게 하지 말라는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시는 것입니다. 돈을 벌어서 기쁨을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높은 지위를 얻어서 만족을 꾀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부귀영화의 본질은 하나님 때문에 기쁜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이 어떤 일을 그를 통해서 하시려고 할 때 필요하면 준비하시는 것이고 필요 없을 때에는 소멸되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요셉 경우에는 존귀한 총리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러한 부귀의 자리가 주어진 이유는 중동지방의 기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하는 기능을 위함이었습니다. 요셉의 마음은 하나님으로 행복한 상태였기 때문에 부귀가 주어지는 역사도 일어났던 것입니다. 모세도 이러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기에 마찬가지로 존귀하게 쓰임 받아서,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고 광야를 통과하면서 하나님과 백성들의 중재자로 율법을 전해주는 역할을 했는데 기능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에 비해 솔로몬의 부귀영화에는 아무런 하나님의 사명적 기능이 없었지만 그 자체를 부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왜 돈으로 인해 감질나하고 행복하고 만족할 것을 기대하느냐고 반어법적으로 묻고 계신 것입니다. 솔로몬이 감질나게 생각했던 것은 하나님의 판단이었습니다. 왕으로서 판단해야 될 수백만 건의 일들에 하나님의 판단이 감질나지 않게 폭포수처럼 내려오기를 구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왜 돈을 감질나하고 부귀를 감질나하고 영화를 감질나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신앙을 지적하시기 위해서 정작 부귀영화를 구하지 않았던 솔로몬에게 우리 보란 듯이 부귀영화를 퍼부으셨던 것입니다.
이런 냉소적인 반어법상의 의도에서 주셨던 부귀영화가 참된 복이라면 왜 예수님께는 나타나지 않았겠습니까?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 집사님이나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린 베드로, 사도 바울의 끝없는 고생들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사람들이 복을 받지 못하고 저주 받은 것일까요? 부귀영화는 복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솔로몬 비슷한 사람조차도 없고 전부 가난뱅이였습니다. 그런데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십니다. 반면에 솔로몬은 전대미문의 부귀영화를 누렸음에도 전1:2~3절에 보면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라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하고 솔로몬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합니다.
이처럼 부귀영화는 기쁨과 행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과 섭리와 사명에 관계되는 것일 뿐입니다. 내 사명에 돈이 필요하다면 주실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주시지 않을 뿐입니다. 돈이 없다고 해서 복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사명이 돈과 연결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구약 성경이 신약 성경과 다르게 부귀영화를 복과 연관시키는 이유는 아직 주님이 오셔서 십자가 복음을 말씀해주시기 전이기 때문입니다. 전 인류가 그랬듯이 선악과를 따먹은 타락의 상태 안에서 타락의 증상으로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에 따라, 부귀영화를 좋아하는 것을 죄악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통해서 역사하셨던 것일 뿐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깨달을 수조차 없었습니다.
부귀영화는 실제로 복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를 좋은 것들의 상징으로 이용하셨던 것입니다. 부귀영화는 오직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나타날 때에 기능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부귀영화를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어떻게 다루셨는지 살펴봅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시자 그것을 본 제자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로마로부터 독립도 얻고 다윗이 메시아를 예표 하는 존재이고 다윗의 자손이 솔로몬이므로 예수님을 섬기면 솔로몬 때와 같은 부귀영화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귀영화에 대한 꿈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부귀영화를 쫓던 열두 제자의 마음, 백이십 문도의 마음, 오백여 형제의 마음을 붙잡고 이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부귀영화 때문에 예수님을 쫓던 자들이었지만 마음이 하늘로 올라갔으므로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얻을 것이라고 기대한 모든 것들은 하늘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인간을 타락하게 하면서 마음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앞에 머물러 있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을 부귀영화를 통해서 그 기쁨과 그 만족과 그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유혹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2016년 오늘날까지 70억 모든 인간이 부귀영화를 쫓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부귀영화는 구하지 않은 자에게 퍼부어 주셨던 것입니다. 여기에 숨겨져 있는 반어법은 절대로 부귀영화를 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유전적인 죄적기질로 인해 부귀영화를 구할 수밖에 없지만, 부귀영화를 위해 예수님을 쫓던 자들이 십자가에서 무너지고 그들의 마음을 끌고 하늘로 올라가시자, 드디어 그들의 마음이 부귀영화와는 상관도 없는 비천한 자리에서도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던 로마 황제도 갖지 못했던 만족과 행복과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마음이 십자가를 붙잡고 부귀영화를 쫓아가는 마음이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 따라 하늘로 올라감으로 부귀영화를 통해 기대했던 모든 것을 하늘에서 얻게 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늘에 머물 수 있습니까? 갈3:1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하십니다. 우리 마음의 눈이 끊임없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이 세상의 부귀영화에 대해서 죽었음을 지속적으로 고백할 수만 있다면 우리 마음은 계속 하늘에 머물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70억이 부귀영화를 통해 얻으려고 했던 모든 것이 하늘로부터 주어질 것입니다. 그럴 때에 부귀도 없고 영화가 없을지라도 항상 기뻐하라고 하셨던 사도 바울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고, 내가 하늘에서 만족하는 중에 이 땅에서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돈과 관계된 일을 해야 한다면 돈을 주실 것이고, 존귀와 관계된 일이라면 존귀를 주실 것이며, 영화가 필요하다면 영화를 주실 것이지만 그것들과 관계가 없어도 부족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본래 부귀영화는 내 만족과 기쁨과 행복과는 전혀 무관하며, 사명의 성격에 따라서 주어지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하는 것들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구하지도 않았던 부귀영화를 부어주신 것은 그것을 절대로 마음으로 가지려고 하지 말라는 반어법적인 의도로 성경에 쓰인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솔로몬 잭팟에 반어법으로 담긴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을 바로 읽게 하여 주시므로 주님의 십자가 생활화를 할 수 있게 하여 주시고 오늘도 하늘의 잭팟을 마음껏 누리기를 바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하나님의 마음 알게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