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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 인 ( 外 人 )
프 롤 로 그
"접근 암호 x208. 살인 목표물 여우 팔찌. 수신 여우 꼬리. 발신 여우 목걸
이.”
통화는 조용하고 간단했다.
'찰칵'
'찰칵'
1
"날씨가 많이 추워졌군.”
외투깃을 여미며 들어오는 서장의 굵은 목소리가 비좁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네, 서장님. 오늘은 유난히도 춥죠?”
형식적인 대화가 몇 차례 오고 갔을 뿐, 이내, 오후의 침묵은 싸늘한 날씨만큼이나 그들을 에워쌌다. 한참 후 서장은, 서랍에서 몇 장의 사진을 꺼내들고 그 중 한 장을 골라 이 형사에게 내밀었다.
"자네, 이 여자 아나?”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몽타쥬. 그래, 그것은 사진이라기보다는 몽타쥬에 가까웠다. 사진을 보는 이형사의 눈빛이 희미하게 찌푸려졌다. 서장은 그런 그의 눈빛을 지우기라도 하듯, 사진을 낚아채며 말을 이었다.
"그녀는 거물급 사기꾼인데, 아주 특이하고 영리해서 좀처럼 덜미를 잡기가 힘들다네. 그녀의 주요 목표물은 다른 사기꾼인데, 바로 그 여자의 그런 사기행각이 우리를 골치 아프게 만든다네. 그녀가 사기를 치는 사기꾼을 우리가 찾아내야만, 그녀의 덜미를 잡을 수 있는데 말이야.”
전화벨이 울렸다. 서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그래? 곧 보내겠네.”
통화는 간단했고, 서장은 곧 이 형사를 향해 말을 퍼부었다.
"드디어, 그여자도 걸려들 모양이군. 지금 곧 출동하게. 총력전이네.”
"여자 한 명에 총력전을 펼칩니까?”
"여자라고 우습게 보지 말게. 마약 밀매에 손을 댄 모양이야. 설명할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준비해!”
이형사는 지우려 지우려 아무리 애써도 자꾸만 떠오르는 여인의 모습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사진 속의 그 여인. 지금은 이미 몽타주라는 희미한 기억 속에 묻혀버린, 그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 그러면서도, 그의 마음 한 구석 깊은 곳에 자리잡고, 마치 그의 수호천사라도 되는 듯 떡 버티고 서서 좀처럼 나가려 하지 않는 한 여인의 기억.
"서장님, 한 가지 물어 봐도 됩니까?”
"뭔데 그러나?”
"그 여자에 대한 정보는 누가 입수합니까?”
"김 형사에게 물어보게나.”
2
여인의 모습이, 주택가 귀퉁이 골목길에서 줄지어 노는 아이들의 눈에 비쳤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는 허공을 휘저었고, 홱홱 젖혀대는 길다란 팔 안으로 엉덩이가 씰룩거렸다. 아이들은 그녀가 나타나자,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녀를 놀려댔다.
"오리 궁둥이. 헤헤.”
"아니야. 저건 분명 여우 꼬리야.”
"웃기지 말라구. 저 누나는 분명 오리야.”
"여우꼬리! 오리 궁둥이!”
끝없이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놀림소리가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여인은 몸에 꽉 끼는 옷차림으로 거리를 가로질렀다.
그녀가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아이들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쩍쩍 다시며, 하나 둘 저마다의 집으로 제각기 흩어졌다. 지평선 사이로 물드는 붉은 하늘만이 여인의 아름다움을 출렁이고 있었다.
여인이 이 동네에서 살게 된 건, 어느 추운 겨울날부터다. 그녀는 쬐그만 용달차에다 책상과 화장대, 그리고 보따리만 몇 개 실고 이 동네로 이사를 와서는 그 후 한 번도 얼굴을 내민 적이 없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그녀가 무얼 하는지, 어떻게 사는지, 그녀가 언제 이사 왔는지조차 몰랐다. 심지어, 그녀를 이웃동네에 사는 아가씨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봄기운이 그녀를 거리로 내몰았을 때, 그녀는 아이들의 환영을 받으며 화려한 등장을 했지만, 그녀는 동네의 어떤 사람에게도 인사 한 마디 건네지 않았다. 누가 말을 건넬라 치면, 그녀는 그 사람을 무시해버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러한 그녀의 행동은 동네 사람들에게 미움을 샀고, 곧 그녀가 버릇없다느니, 무례하다느니 하는 말만이 떠돌았다. 그 후, 동네 사람들은 그녀를 무시해 버리거나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곤 했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밤낮 여인을 배웅하는 재미에 골목길을 드나들었다. 여인은 그들의 배웅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가끔 귀찮다는 듯이 그들에게 돈을 몇 푼 쥐어주면서, 멀리 구멍가게로 쫓아내곤 했다. 그럴 때, 여인은 웃음을 짓곤 했는데, 아이들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신기하게 쳐다보면서도 막상, 공돈이 생겼다는 게 기쁜지,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서 사라져버리곤 했다. 그럴수록 더욱더 솟구치는 아이들의 호기심은 억제할 수가 없었다.
봄기운이 채 가시기 전, 아이들은 몇 명의 남자를 거느리고 다니는 그녀를 보았다. 그들은 어쩔 때는 한 명, 다른 때는 두 명, 가끔은 여러 명씩 거느리고 올 때도 있었는데, 얼굴은 거의 매번 바뀌었다. 처음에 아이들은 무서워서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한번은 여인과 남자가 아이들이 노는 골목을 지나다가 정면으로 마주친 적이 있었다. 남자는 아이들에게 동전 몇 개를 쥐어주면서 말했다.
"얘들아, 까까 사 먹고 가서 놀아라. 여기로 오지는 마. 안 그럼, 다음부턴 까까 안 사준다."
그 후로 아이들은 여인이 남자를 데리고 오는 날을 기다렸고, 그런 날은 어김없이 구멍가게로 가서는 맛있게 놀 수가 있었다. 아이들은 여인이 데리고 오는 남자를 모두 '보스'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들이 돈을 받으면, 그들은 어김없이,
"보스, 고맙습니다. 이번 일은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반드시 처치하고 오겠습니다."
하며,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는 쏜살같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면 남자들은, 한 결 같이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그들이 영화 흉내를 내는 것임을 깨닫고, 요즘 아이들의 머리는 참 일찍 돌아간다며 혀를 내두르면서 씨익 웃고 마는 것이었다.
어느 날부턴가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대한 의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혀엉, 그런데 그 사람들하고 그 누나랑 뭐야?”
"무슨 말 하는 거야?”
"그러니까, 그 아찌들하고 그 누나 뭐 그런거… 있잖아?”
"난 또. 그걸 '관계'라고 하는 거야.”
"맞아. 간개가 뭐야?”
"'간개'가 아니구, 관계!”
"어렵단 말야.”
"좋아, 대충하자. 저기 대답해줄 만한 사람이 오는데……”
"어, 미선이 누나다!”
"무슨 얘기를 하는데 나를 그렇게 빤히 쳐다만 보고 있는 거야?”
"누나, 아찌들하고 그 오리누나랑 무슨 간개야?”
"간개?”
"얘는 '관계'란 발음을 못 하잖아.”
"아, 관계가 뭐냐고?”
"너라면 알 것 같은데.”
"아마, 남편일 것 같애.”
"남편? 무슨 남편이 그렇게 많아?”
"혀엉. 남변이 뭐야?”
"네 엄마의 아빠가 남편이지 뭐야?”
"뭐? 그러믄, 우리 외할아버지가 남변이야?”
"아휴, 이 바보.”
"그게 아니라, 네 엄마한테는 네 아빠가 남편이라는 거야. 알았지?”
"아, 그러니까 아빠가 엄마한테 남변이라는 소리구나. 근데, 저 누나는 남변이 저렇게 많아? 그러믄, 우리 같은 애들이 몇 명이나 되는 거야?”
"야, 너하고는 말이 안 통한다.”
아이들의 궁금증은 날이 갈수록, 닭이 알을 까듯이 하나씩 더해졌다. 그들은 5월의 어느 날, 여인에게서 어린이날이라며 억지로 뜯어낸 돈으로 구멍가게에서 과자를 사서 먹으면서 놀다가, 문득 새 화젯거리를 떠올렸다.
"그런데, 그 여자 돈이 어디서 나지?”
"누구 말이야, 혀엉? 그 누나?”
"그래, 임마. 미선이, 너는 알 것 같은데. 너는 그쪽에선 끝내주잖아?”
"글쎄. 내 생각으로는 그 뭐라더라? 매춘부라 그러나? 그런 거 같애.”
"혀엉, 매춘부가 뭐야?”
"임마, 넌 아직 몰라도 돼.”
"피이-. 형도 모르니까 갠히……”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남자한테 돈 받는 여자래.”
"뭐? 그냥 돈 주는 남자도 있나? 하기야, 저 여자도 그냥 우리한테 돈 주니까. 그럴 만도 하네.”
"글쎄, 그런가 봐. 매춘부하면 그렇대. 그런데, 우리 엄마는 절대로 나는 그런 거 하면 안 된대. 정말 어른들은 알 수가 없다니까.”
"그러믄 난, 매춘부 해야지.”
"야, 남자는 안 돼.”
"그래, 남자는 매춘부하면 돈 주는 거래.”
"에이……”
아이들은 여자를 매춘부로 놀려댔고, 그 놀림은 소문으로, 그 소문은 동네 사람들에게는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동네 사람들은 이제 그녀를 보면, 슬금슬금 피해 다녔고, 아이들에게도 그녀는 나쁜 사람이라고 가까이 가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부모의 눈을 피해 여전히 여인을 쫓아다녔다. 마치, 개가 닭을 쫓는 모양으로.
마지막. 아이들이 그토록 잘 따르던 여인의 마지막 모습을 본 것은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한여름의 가장 더운 어느 날이었다.
3
"그래, 잘 됐나?”
"마약밀매업자들은 소탕했지만, 그 여자만은 사로잡지 못 했습니다.”
"그럼, 죽였단 말인가?”
"아닙니다. 마찬가지겠지만, 여자는 동맥을 끊고 자살해 버렸습니다.”
이형사의 목소리에 약간의 흔들림이 느껴졌다.
"그런가? 어쨌든 수고했네.”
이 형사는 조각난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무슨 이유였을까. 그에게 이 목걸이를 붙잡고 놓아 주려 하지 않는 이 알 수 없는 힘은. 그 신비한 힘은 그가 처음 이 목걸이를 보았을 때 그를 강력하게 사로잡았다. 그는 그의 모든 것을 바치고서라도 그것을 가져야 한다는 강한 욕망을 가졌었다. 도대체 왜일까.
4
"그래, 웬일이야? 나한테 데이트 신청을 다하고?”
"응, 좀 물어볼 게 있어서.”
"뭘로 드시겠어요?”
여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속을 후볐다.
"뭐 마실래?”
이 형사가 물었다.
“너, 커피 마실 거지?”
"아니야, 난 레몬차.”
"그래? 웬일이야, 커피를 다 마다하고?”
“그냥, 나에게도 뭔가 변화가 필요한 거 같아서.”
“그래? 그럼, 레몬차 두 잔 주세요.”
"예, 감사합니다.”
여자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져 갔다.
"뭘 물어 보시려고? 여자 때문에 고민하시나?”
"여자? 난 널 보면서 여자는 사귈 만 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흥, 너 재미없을 줄 알어.”
차가 나올 때까지 그들은 이런 저런 농담을 주고받았다.
"이제, 본론을 얘기하시지.”
그들은 서로 담배를 입에 물고, 성냥으로 불을 나누어 붙였다. 담배연기가 그들이 앉아 있는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 여자에 대한 정보 말인데…… 그 정보 어떻게 입수했지?”
김 형사는 잠시 주저했다. 이 형사는 그녀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었다.
"사실, 정보 입수하기는 어렵지 않았어. 그 여자가 우리 집에다가 전화를 해서 알려주었거든.”
"직접 너네 집에? 그 여자가?”
"응. 아마 그 여자였을 거야. 그게 전부야. 여자에 대한 정보는 컴퓨터에 입력되어 있었거든. 그 여자는 거래 장소를 알려 주었을 뿐이야. 물론 암호 같은 말로 했는데, 암호는 바로 접촉 직전에 해석을 할 수 있었어.”
더 들을 건 없었다. 그녀에게선. 그들은 헤어졌다. 아무 말 없이. 찻값은 각자 부담. 그것이 그들의 인사였다. 전류의 짜릿함이, 그들을 감전시킬까 봐 그들은 서로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5
잡으려 잡으려 아무리 애를 써도 잡히질 않던 여인의 얼굴. 그녀의 얼굴이 차디찬 시체로 그의 앞에 나타났을 때, 여인의 온몸에서 풍겨 나오던 온화함.
여인, 새삼스레 여인이라는 낱말이 그녀에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째서일까. 이 형사는 검퓨터의 스위치를 올리고, 정보부를 연결했다.
"암호는?”
암호? PASSWORD? 그는 아득한 먼 추억을 회상하듯, 기억을 더듬었다.
"2049년. 100000”
아무런 뜻도 없는 암호. 그는 간신히 기억해낸 그 번호의 자판을 눌러댔다.
"O.K. PASS”
그는 여인의 이름을 기억해내려 애썼다. 불여우? 그런 사람은 등록되어있지 않습니다. 컴퓨터의 음성 신호가 '삐-' 소리를 냈다. 지문 검색. 그는 손바닥을 컴퓨터의 모니터에 갖다 대었다.
"YES. RIGHT. PASS.”
이 형사는 다시 여인의 이름을 생각해 보았다. 여우 목걸이?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자료를 찾아보겠습니다. 곧, 화면에는 그녀에 관한 정보가 나열되었다. 프린터를 하시겠습니까? (Y/N)
그는 Y자의 자판을 눌렀다. 프린터기에서 자료가 복사되었다.
여우 목걸이에 관한 정보 자료. 죄수번호 1111. 2025년, 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음.
5년 후, 탈옥. 또 다시 살인을 했으나, 잡지 못함. 살인 동기는 두 번 모두 강간범에 대한 증오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명됨.
지금은 거대한 X 조직의 일원으로 마약과 사기에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짐.
여우 목걸이에 대한 사적인 정보를 원하면, P를 누르시오.
그는 P자를 쳤다. 곧이어 또 다른 정보가 프린트 되었다.
여우 목걸이의 사생활. 2015년 낙태 수술을 해 벌금을 문 적이 있음.
2019년 딸을 출산. 두 번 모두 사생아였음. 2023년 딸을 고아원에 버림.
그 이듬해 아이는 입양된 것으로 알려짐.
혈액형 인자는 BB. 최신정보를 원하십니까? (Y/N)
그는 N을 치고, 전원을 내렸다. 그리고 마냥 전해져 오는 아득한 기억 속에 그의 몸을 내맡겼다.
6
아이는 조용히 서 있었다. 여인은 멀뚱히 아이를 쳐다보다가 금빛의 목걸이를 아이의 목에 걸어주고 말없이 멀어져 갔다. 하늘은 맑았다. 아이는 여인이 멀어지는 거리를 멀뚱히 쳐다보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이는 목에 걸린 목걸이가 걸리적거리는지 그것을 빼내었다. 아이는 한참동안 그 목걸이를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더니 하수구 구멍으로 그것을 집어던졌다. '퐁당'하는 탁한 소리가 아이의 귀를 때렸다. 길을 가던 어떤 사람이 아이에게 물었다.
"집이 어디니?”
아이는 말이 없었다.
"엄마가 누구니?”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이는 마치 자기를 버린 엄마를 원망하듯 마음씨 좋게 생긴 아줌마를 쳐다보았다.
"엄마가 없나 보구나? 아유, 불쌍해라.”
아이가 간 곳은 고아원이었고, 그 다음해 아이는 바로 입양되었다.
여인은 비틀거렸다. 해는 뉘엿뉘엿 기울어져 가고, 사람들은 퇴근길을 서둘렀다. 여인이 골목길을 들어섰을 때, 비로소 그녀는 헛소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이 새끼들, 어디 두고 보자.”
"야, 저 여자 왜 저러냐?”
아이들의 소곤거림. 이어 동네 관리인의 등장.
"야, 고자질쟁이다. 어서 도망가자.”
그들은 잽싸게 달렸다. 남자의 얼굴이 지는 햇살 속으로 가려져 갔다.
아이는 밤길 나다니길 좋아했다. 그날 밤, 아이는 골목길 어귀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여보, 오랜만이야.”
"왜 왔죠?”
불분명한 여인의 말소리.
"여기가 어디죠? 나를 집에 데려다 줘요.”
"취했군. 너무 취했어.”
"그래요, 취했어요. 당신은 누구죠? 관리인?”
"여보, 나야. 정신 차려.”
"저는 그년을 죽일 거예요.”
여인의 욕지거리가 아이의 귓가를 타고 흘렀다. 곧이어 알 수 없는 신음소리. 여인은 행복해 보였다. 아이는 말없이 사라졌다.
다음 날, 아이들이 골목길에 들어섰을 때, 그들은 잠들어 있는 여인의 모습을 발견 했다. 여인의 치마 자락이 피로 얼룩져 있었다.
"누나! 누나! 정신 차려요!”
아이들이 부르짖는 소리에 여자는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다. 아이들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으응, 내가 왜 여기 있지?”
"어제부터 있었어요.”
"뭐, 어제부터?”
그녀는 일어났다.
"앗! 내 옷이 어떻게 된 거야? 어제, 나 말고 또 누구 본 사람 있니?”
"예, 관리인 아저씨요.”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고맙다는 말을 남긴 채, 그녀는 사라져갔다. 그 후, 그녀를 더 이상 그 동네에선 볼 수 없다.
동네는 술렁거렸다. 아이들은 여인의 집에 어느 날 갑자기, 경찰이 들이 닥친 것에 흥미를 느꼈다.
"저 아찌들, 저기는 왜 저렇게 지키고 서 있는 거야?”
죽음. 관리인은 여인의 집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여인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아이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다만, 그들은 여인을 배웅하던 골목길에서 그녀의 향수를 아쉬워하며 놀이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혀엉, 이게 뭐야?”
"목걸이 같은데.”
조각난 금 빛깔의 물체가 아침 햇살에 반짝거렸다.
"그 여자 건가보다. 줘, 내가 가져갈 테니까.”
"싫어, 내가 줏었으니까, 내꺼야.”
"내가 까까 사줄께.”
"정말?”
"그래, 임마.”
"그럼, 먼저 사 줘. 까까랑 바꾸게.”
"알았어, 임마.”
하늘의 구름이 뽀얗게 흐려지고 있었다.
7
이 형사는 담배를 꺼냈다. 그는 빈속에 담배를 피우는 때가 별로 없었지만, 가끔, 아침에 일어나면 담배 생각이 날 때가 있었다. 대개는, 사건을 처리하고 난 뒤에 그러는 버릇이 잦았고, 그러고 나면 아침을 거르기 일쑤였다. 그는 신문을 펴들었다. 사회면을 읽으면서 그의 얼굴이 흥분되기 시작했다.
"2049년 x월 x일. 사기로 악명 높은 사기꾼인 '여우 목걸이'는 대규모 마약 밀매에 성공했다. 이날 그녀는 경찰에 헛 정보를 흘림으로서, 그의 명성답게 여러 곳에서 거래를 성공시킨 것으로 알려졌는데, 경찰의 총력전이 펼친 가고파 빌딩에서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여자는 그녀의 동생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살을 위장한 타살인 것으로 검사의는 진단을 내렸다. 경찰은……”
그는 컴퓨터의 전원을 올리고, 정보부를 연결했다. 여우목걸이에 대한 최신 정보. 잠시 후, 화면이 모니터에 인쇄되었다.
여우목걸이에 관한 최신 정보. 최근 그녀에게 동생이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녀의 정보를 원하십니까?(Y/N)
그는 Y를 쳤다. 다시 화면이 모니터에 인쇄되었다.
여우 목걸이 동생에 관한 정보. 성별은 여. 2019년 아들 출산.
여우 목걸이 밑에서 일하는 마약 밀매 전문업자.
2023년 아들 행방불명.
전해지는 말로는 그녀가 직접 거리에 내버린 것으로 알려짐.
혈액형 인자는 AA.
특기 사항.
두 자매 모두 같은 해 같은 날에 아이를 버린 것으로 추정됨.
복역 사항 없음. 그외 다른 사항의 질문이 있으십니까?
그는 HUSBAND라는 자판을 눌러댔다.
이것은 극비 사항입니다. 지문 검색. 혈액형 검사. 신분 확인.
그는 양쪽 손바닥을 모두 모니터에 갖다 대었다.
지문 통과. 혈액형 인자는 AO. 신분 확실함.
곧 기밀 정보가 흘러나왔다.
극비 사항에 관한 자료. 이것은 사생활 침해가 될 수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이 자료를 발설시는 처벌.
극비 사항.
여우 목걸이의 동생은 여우 팔찌라 불림.
남편은 두 자매가 같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함.
즉, 그들 자매 아이들의 아버지는 한 명이라는 의미.
2030년 여우 팔찌가 살던 집에서 관리인이 시체로 발견됨.
관리인의 혈액형 인자가 OO형인 것으로 보아 두 아이의 아버지인 것으로 추정됨.
더 이상의 자료는 없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조각난 목걸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자세히. 거기엔, 희미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여우 목걸이. 2030년.'
8
"뭔가?”
서장은 귀찮다는 듯 무뚝뚝한 얼굴로 이형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김 형사의 혈액형을 알 수 있습니까?”
"그건 왜?”
"아무래도 미심쩍어서요.”
"김 형사가 여우 목걸이라도 된다는 건가? 꿈꾸지 말게. 그녀는 너무 어려."
"혹시나 하고요.”
"잠시 기다려보게.”
서장은 별 큰 뜻 없이 혈액형에 관계된 서류를 뒤져보았다.
"으흠. 혈액형은 B고, 인자는 BO구만. 짚이는 게 있나?”
"아닙니다. 별로.”
9
"솔직히 말해! 그 정보 어떻게 입수 헀지?”
방안. 이형사의 집은 침묵에 휩싸였고, 벌거벗은 그들의 몸이 한밤중의 싸늘한 기온을 느끼게 했다. 느닷없이 총구를 들이민 이형사의 손짓에 놀란 김 형사의 얼굴에선 땀이 베어나기 시작했다.
"무슨 짓이야?”
"네 엉덩이에 새겨진 여우꼬리는 무엇을 의미하지? 네 어머니는 여우목걸이야, 맞지? 어서 대답해!”
이 형사의 손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아니라고 말을 해줘, 제발! 아니라고. 너는 내 오랜 친구였잖아. 나는 너를 사랑한단 말이야. 제발, 아니라고! 그는 그녀와 그렇게 오랜 세월 함께 했으면서도, 그녀가 그녀의 어머니를 숨기려 했음에 막막한 허탈감을 느꼈다. 너는 뭐가 될 거야? 나? 나는 엄마를 돕기 위해 경찰 정보국에서 일할 거야. 엄마가 뭐 하시는데? 우리 엄마? 글쎄, 하여간 그래. 그녀의 어물거림이 이형사의 눈앞에 머무르는 듯 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정작 다른 말이 흘러 나왔다.
"바른 대로 말해! 입 잘못 놀렸다간 …… !”
그녀의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침착하려 애쓰며, 흘려 내리는 땀을 솜으로 부풀어져 있는 이불의 안쪽 면으로 닦아내기 시작했다.
"난 너를 사랑해. 그게 그렇게 중요해? 그러면, 차라리 나를 죽여. 그것이 너나 나를 위해서 차라리 낫겠어.”
"이 바보야! 넌 내 어머니를 죽였어, 그렇지?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기나 해?”
충격이 김 형사의 얼굴에 번졌다. 이 형사는 총구를 그녀의 가슴에 겨누었다.
"이러지 마! 법적으론 아무런 문제도 없단 말이야”
"그래, 그건 법일 뿐이지. 하지만, 밉든 곱든 너는 내 어머니를 죽였어”
"네가 말한 대로야.”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그녀의 비명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웠다. 그는 옷을 입고, 뛰었다. 이 도시를 벗어나고 싶었다. 더 이상의 비극이 그를 묶어둘 순 없었다. 아주 어렸을 적 그의 어머니가 항상 타이르던 말이 그의 귓가에 들려오는 듯 했다.
'절대로 사람을 믿지 마라. 이 팔찌 외에는.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
그는 주머니를 뒤져 보았다. 조그만 팔찌가 손에 짚혔다. 어릴 때부터 차고 다니다, 손에 맞지가 않아서 주머니에 넣고 다닌 이후로 그것은 계속 그의 주머니의 주인이 되어 있었다. 서서히 새벽의 햇살이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어디로 뛰는지도 모른 채, 마냥 그 빛을 쫓아가고 있었다. 그 빛이 마치, 자신의 구원자라도 되는 듯이.
10
서장은 신문을 펼쳐들었다.
"김 미선 형사를 살해한 혐의로 수배중인 이 형사의 행방은 서산 기슭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시체의 옆에는 여우 목걸이라 새겨진 금빛의 목걸이가 선명하게 반짝거리며 놓여 있었다. 이것은 여우 목걸이가 떨어뜨린 것으로 추정되며……”
서장은 아무 표정 없이 담배에다 불을 붙였다. 그리고 나서 어느 여형사에게 명령을 했다.
"고 형사, COFFEE, PLEASE.”
서 안은 평온했다.
11
"내 아들은 왜 죽였지?”
"당신에 대한 복수. 그는 너무 많은 걸 알아 버렸어요. 내 딸까지 죽였고.”
"아직도 원한이 남아 있었나? 나는 당신을 살려줬는데?”
"그래요. 이제, 복수는 끝났어요. 당신과 함께 남은 시간을 즐기고 싶어요. 사랑해요.”
"조직은?”
"해체 시켰어요. 당신을 위해. 우리의 새 아기를 만들어요.”
"당신의 문신은?”
"엉덩이에 새긴 문신이요? 그건 이미 오래전에 지워버렸어요. 내 동생을 탈옥시킬 때.”
"그녀를 왜 빼냈지?”
"조직에서 필요로 했어요. 그리고 걔를 이용해 먹기 위해서.”
"돈은 많이 벌었나?”
"이번이 마지막 거래였어요. 그거면 평생 동안 살 수 있어요. 호화롭게.”
서장의 눈빛에 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당신은 천재야. 이젠 다 끝났어. 우리 둘이 멀리 떠나서 살자. 당신의 여권은 내가 만들어주지.”
서장과 여우 목걸이는 웃으며, 서로의 몸을 부벼 댔다.
에 필 로 그
"내 아인 어디 있지?”
"알 거 없어!”
"빨리 말해! 그 앤 내 아이야! 왜 언니가 마음대로 버려 놓는 거지? 언니가 뭔데?”
"정 알겠다면 가르쳐 주지. 하지만, 넌 아이를 몰라볼 걸. 널 마지막으로 본 지 이미 7년째야. 그동안 아이는 몰라보게 컸을 거고. 우리도 그 아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 7년 전에 길바닥에 내버린 이후로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든.”
"뭐야? 그럼, 진짜로 내버렸단 말이야? 이 빌어먹을 년!”
"그것이 내 애인을 빼앗은 죄보다 덜할 걸. 앙큼한 계집애 같으니라고!”
여우 팔찌는 아이가 있는 동네에서 살게 되었다. 2030년 1월.
"관리인은 왜 죽였지?”
"그는 잠복 경찰이야. 아니면, 사립탐정이든가.”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그는 너무 많은 걸 알아.”
"언니가 직접 죽였군?”
"그렇지. 하지만 붙잡혀도 감옥 가는 건 너지, 내가 아니야.”
"언니는 그 점을 노린 거고. 하지만 나는 도망쳤어.”
"널 잡을 수도 있었어.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안 됐어. 너는 아직 이용할 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툇, 제기랄!”
"명심해 둬. 네가 아무리 날뛰어봤자 내 손아귀에 있다는 걸.”
여우 팔찌는 침묵했다. 2030년 여름.
여우 목걸이는 이 형사 앞을 가로막았다. 헉헉거리는 그의 앞에 선 그녀는 총구를 그의 머리에 겨눴다. 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번득였다.
"당신은 누구죠?”
"대답하기 어렵군. 이 목걸이를 보여주면 대답이 될까?”
그녀는 목에서 목걸이를 빼내었다.
"여우 목걸이?”
"그래. 내 딸을 죽인 녀석에게 복수하기 위해 여기까지 쫓아왔지.”
"드디어 만났군. 내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아버지?”
"20여 년 전, 당신은 우리 아버지를 살해했고, 내 친어머니에게 누명을 씌웠지. 그토록 찾아 헤맸는데, 이렇게 만나니 반갑군.”
"하하, 그랬었군. 그가 네 입양 아버지였군. 그는 경찰이었나?”
"정보원이었지. 하지만, 결국은 당했어. 내 친아버지는 누구지?”
"미안하지만, 그건 말해 줄 수 없어.”
이 형사의 입은 중얼거렸으나, 거대한 굉음의 메아리 속에 그의 음성은 묻혀버렸다. 이형사의 입에서는 계속되는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나를 자유롭게 해 줘서 고마워, 여우 목걸이…. 당신은 영원히 행복할거야. 그 행복 뒤에 오는 고통만 없다면 말이야……
여자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신선한 피비린내가 그녀의 신경을 자극시켰다.
그녀는 이 형사가 쓰러지면서 떨어뜨린 두 개의 금속품이, 떠오르는 아침햇살에 반짝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그 중 조각난 금빛 물체 한 개를 골라 그녀의 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식어가는 이 형사의 시체에서 멀어져갔다.
약간 녹이 쓴 물체가 부분부분 번쩍였고, 또 하나의 금빛 물체가 아침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였다.
'여우 목걸이. 204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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