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축하를 감당할 수 없는 기념식
(82회 생조(生朝), 1954년 11월 15일)
기원 4287년 11월 15일은 나의 82기념 생조(生朝)이다. 작년 이맘 때 병으로 청운동 자식의 집에서 자부 급 이손(離孫)들이 모여 탕*회(湯*會)를 열고 기념을 맞추었다. 그때 나는 자손들에게 말하기를 이번 기념이 마지막이 될 것 같다. 노병(老病)이 점점 위중하여 가고 다행이 난중(亂中)에 진해 혹 부산에서 죽지 않고 작년 9월에 상경하여 자식의 집에 와서 있으며 떠나게 된 것도 하나님이 나로 객사를 면하게 함이니 다행한 일이오 객리(客裡)에서는 의약의 치료가 부족하였지만 상경 후로 너희들이 의약을 쓸 수 있고 너희들이 유감없이 이 날을 맞이한 것이 다행으로 생각하고 다시는 이런 회를 열지 말라고 부탁하였더니 며칠 전에 본 교회 목사 변종호(邊宗浩) 씨는 나의 이력서를 청구한다. 나는 답하기를 나는 이력이 볼 것 없으니 드릴 수 없다 하여도 기어이 참고가 있으니 하고 요청한다. 부득이 기록하여 주었더니 어느 주일아침에 나는 병으로 예배에 결석을 고하였다.
장용하(張龍河) 장로는 교회에 광고하기를 래 15일 하오 본 교회 원로목사 김진호 목사님의 전도 40주년 축하식을 행하겠다고 광고하였다고 가인(家人)은 와서 고한다. 그리고 본월 5일 조 김득황(金得榥) 장로는 청첩을 가지고 왔는데 김진호 목사 성역 40주년 기념 축하식을 우기(右記)와 같이 거행하오니 소만광림(掃萬光臨)을 앙망(仰望)이란 청장(請狀)이다. 시일은 기원 4287년 11월 15일 3시 장소는 배재강당이라 하고 주최는 궁정교회 목사 변종호, 배재중고등학교 교장 신영묵이라 기록하였다.
나는 이것을 보고 깜짝 놀래었다. 며칠 전에 나는 이 소문을 듣고 장용하 장로와 변종호 목사를 보고 나의 무행(無行)을 용서치 않고 도리어 축하를 행하는 것은 나로 하여금 불안케 함이요 두렵게 함이니 이것을 정지하기를 재삼 강청하였다. 두 선생의 말은 선생과 같은 공로자에 대하여 교회에서 이렇다 하는 한 말도 없으면 도리어 조선교회의 무정(無情)을 표함이오니 그 일에 대하여 막지 말라고 굳이 청한다.
나는 다시 요구하기를 그러면 우리 궁정교회가 피난 중 돌아온 후 아직 건축도 하지 못하고 국가도 통일을 성공하지 못하였으니 조금 기다렸다가 교회도 건축되고 국가도 완성된 후에 그때는 나 자신이 이런 자리에 영광으로 참석할 수 있으니 좀 기다려 달라는 것을 재삼 요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강행하게 되었으니 부끄럽기 한이 없다.
며칠 전에 덕영(悳永 장남)이가 타이민이라는 약을 사 보내었다. 타이민은 조선 산이 아니오 미국산인데 기혈쌍보(氣血雙補)하는 신약이다. 전에도 이 약을 복용하여 건강이 증진된 것을 덕영은 잘 아는 고로 아버지의 건강 위하여 사 보내었으니 한편 감사하지만 이 쓸데없는 노물(老物)이 살아 있을수록 자식들에게 괴롬을 끼칠 뿐 이오 조금도 유익이 없는 존재이다. 하나님이 어서 불러 가시면 하나 억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오직 처분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택영(擇永 차남)은 올라와서 아버님 금년 생신은 저의 집에 오셔서 진지를 잡수시면 하옵고 말씀드립니다. 택영은 금년에 자식 혼인으로 인하여 불소(不少)한 금전을 허비하였으니 아비의 밥 한 그릇도 예비키 어려운 처지이다. 아무리 어려워도 아비의 생일을 예비하겠다는 성의를 막을 수 없어 허락하였다. 그러나 15일에 축하가 있다는 데 그날 결석할 수 없는 고로 연기하여 14일에 내려가 하루 밤 자고 오려고 결정하였다. 택영의 집에서 밤을 지내고 아침 소사교회(素砂敎會) 목사와 장로와 직원 여러분이 오셔서 축하예배를 보았다. 찬*을 예비하여 놓고 교우들과 당침조자손(堂枕祖子孫)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찬송하여 애찬을 나누는 기쁨이야 주님의 천국을 상상하는 즐거움이다.
애찬을 마치고 교우들이 다 산회(散會)한 후에 특히 새로 들어온 손부 서정숙(徐廷淑)을 불러 감사의 말을 주었다. 네가 새로 우리 가정에 들어온 후에 하래비는 손부의 손으로 만든 귀한 음식을 먹었으니 내 맘이 보통 때보다 기쁘다. 이와 같이 우리 가정에 효부로 모본이 되었으니 앞으로 네게 난 자손들은 이 뜻을 잘 가르쳐 복의 자손 복의 가정을 이루도록 너는 믿고 기도하여라.
오늘 하오 2시의 자리를 생각하고 곧 떠나 버스를 타고 상경하여 큰 자부 이영섭(李永燮)의 예비로 좋은 자동차를 나고 집에 오니(누하동 목욕탕집-궁정동예배당) 손피득(孫彼得) 목사가 오고 또 이천(利川)에 애광원장(愛光園長) 김남수(金南洙) 선생이 왔다. 또 김남수 선생의 예비한 자동차를 타고 가인(家人) 서숙자(徐淑子)와 같이 배재학교를 오니 보건부 장관 최재용(崔在鎔)씨와 체신부장관 이광(李光)씨는 벌써 먼저 오셨다. 김동혁(金東赫)씨를 위시(爲始)한 배재졸업생들도 다수히 왔다.
배재학교장 신영묵(辛永黙)씨의 안내로 강당에 들어가니 다수학생과 다수내객이 오셨다. 입장 시에 주악이 우렁차고 감사의 기분을 돋구어 주었다. 축하석 위에 올라가니 우리와 말할 수 없는 감사와 기쁨이 넘치었다. 도리어 눈물이 쏟아진다. 이렇게 기쁜 자리에 눈물을 흘릴 수는 없고 맘을 진정한 후에 여러 지구들의 축사 찬사는 진정으로 감사하였다. 오히려 나의 본분을 돌이켜 외람하고 부끄러웠다. 이것은 나의 무슨 공적이나 실행이 있어서 아니요 다만 겨자씨만도 못한 나의 믿음을 보시는 하나님이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사회 변종호 목사는 나의 답사를 요함으로 무슨 말로 답사할 것 없고 세상에서 이런 칭찬을 받으면 천국에 가서 상이 없을까 두렵습니다. 나는 전도를 시작한 후에 세인에게 별로 대우를 받지 못하였고 심지어 일인관리(日人官吏)들의 학대야 말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앉을 때 특히 마음이 아픈 것은 석오(石吾) 와 우당(友黨)이 먼저 참혹(慘酷)하게 떠난 것이올시다. 오늘같이 잊지 못함은 참 맘이 아픕니다. 그 일은 대강 아시는 이광 선생이 참석하신 것은 저윽이 위로가 됩니다.
간략한 답사를 마친 후에 각 곳의 예물증정이 있었다. 우리 부처는 이 예물을 황송하게 받어 장용하 장로에게 위임하였다. 배재음악대의 연주가 있었고 궁정동 찬양대의 찬양이 있었고 장석영(張錫英) 목사의 축도로 폐회하였다. 우리 부처는 강당에서 내려오니 각 교회 대표들이 모두 나와서 환영한다.
신 교장은 나를 교원실로 인도하니 거기서 우당(友堂) 선생의 아들 이규창군(李圭昌君)을 보았다. 저의 아버지 본 듯이 반갑기는 하지만 눈물이 쏟아진다. 바로 집으로 오면 하였으나 신영묵 교장, 장용하 선생은 자동차를 예비하고 금로원(金路園)이란 중국요리 집으로 인도하였다. 축하를 주고 또 예물을 주고 또 이런 만찬을 주시니 감사하다. 전영택(田榮澤) 목사가 자리 주장하고 누구든지 축하의 뜻을 말씀하면 하였더니 김득황 장로와 김광추 목사와 김남수 원장이 각각 찬사를 주었다. 아무 칭찬할 것 없는 이 노물(老物)을 이처럼 사랑하여 주시니 전 일인(日人) 관리들의 학대를 생각하면 그 학대를 받은 것만큼 오늘 하나님이 쓸데없는 종을 위로하신 줄 알고 감사의 눈물을 금할 수 없다.
집에 돌아오니 장용하 선생과 김득황 장로와 변종호 목사는 집까지 인도하여 주시고 기도하시고 자리를 떠나셨다. 우리 부처는 다시 욥 7장 17절과 동 15장 14절과 시편 8장 4절과 동 144장 3절을 봉독하고 업디어 다시 감사기도를 올리고 어찌하면 여생을 죄 없이 보낼까 하고 다시 세원(誓願)하였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