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잡는 특무대장 김창룡 제10회》
10. 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장군을 해임시킨 이야기
송호성 장군이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생소하게 들리는 이름일 것이다.
그는 1889년 함경도 함흥에서 출생하여 서울 보성전문학교를 중퇴하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국에 건너간 송호성은 성시백이와 함께 하북성에 있는 보정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서 기병대대장, 연대장, 사단장을 역임하였으며, 나중에는 광복군에 들어가 제5지대장을 지냈다.
그는 1946년 귀국하여 경비사관학교 2기로 들어가 아들이나 손자뻘 같은 어린 사람들과 사격과 구보 등 고된 훈련을 하였다.
그때 벌써 나이가 57세였으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훈련을 20일쯤 받고 있을 때 통위부(국방부 전신)의 부름을 받고 통위부로 올라가니, 통위부장 유동렬이 중국군 경력과 광복군 경력을 인정한다며 소령 계급장을 달아 주었다.
이것이 졸업과 임관이었다.(다른 동기생들은 3개월 더 교육후 임관)
소령이 된 송호성은 3연대에서 연대장 경력을 2개월 쯤 쌓은 후 유동열 통위부장의 명령으로 46년 12월 13일 제2대 경비대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송호성은 군사적인 능력면에서는 일본군 출신들에 비해 훨씬 못미쳤다. 중국군에서 사단장을 했다고는 하나, 하는 말이나 행동으로 볼 때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광복군에 있었던 것만은 분명했기 때문에 광복군 사령관을 지냈던 유동렬 씨가 추천을 한 것이니, 따지는 사람은 없었다. 어떤 사람은 역량이 뛰어난 일본군 대령 출신 이응준 씨와 김석원 씨를 추천했지만 그들은 스스로 "우리는 일본군에 있었던 사람들이라 국민 보기에 민망하여 포기할테니, 광복군 출신 중에서 추천하는 것이 좋겠다."며 양보를 하여 송호성이 낙점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송호성 장군의 사상이 문제였다.
47년도에 좌익활동을 하는 군감사령관 이병주 소령을 검거할 때도 반대 하더니, 최남근 중령이나 오일균 소령 등을 검거할 때도 반대하며 검거한 김창룡 대위만 혼을 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수에서 반란군 토벌작전을 지휘하면서도 강력한 지휘력을 발동하지않고 온건한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반란을 조기에 진압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미군이나 부하들로부터도 사상적 의심을 받았다.
이런저런 상황을 이상하게 여긴 김창룡 대위는 정보팀을 가동시켜 송호성 사령관을 내사 해보니, 거물간첩 성시백으로 부터 공작금을 받아썼고 남로당 군사담당 이중업과 내통하고 있었으며 군내 좌익 장교들과도 연계를 맺고 있었다.
이것은 남로당 군사담당 이중업과 이재복을 체포하여 조사하던 중에 알게된 사실이다.
특히 송호성이 이중업에게 공작금 2백만원을 더 달라고 부탁하는 편지가 이중업의 소지품에서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결정적인 증거였다.
김창룡은 송호성 사령관에 대한 동향보고서를 작성하여 백선엽 정보국장에게 보고하니, 걱정하지말고 철저히 수사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그 때 김창룡 정보팀은 백선엽 정보국장의 직계였음)
그래서 김창룡은 송호성 사령관을 방문하여 조사를 벌였다.
방문 목적을 말하자 송호성은 화부터 냈다.
그러나 김창룡이 호락호락 물러설 인물이 아니었다.
명색이 <하이라루>에서 중국 공산당 간첩을 잡은 베테랑인데--
김창룡이 사령관의 비행사실을 조목조목 들이대자 처음에는 어느놈이 그따위 소리를 하더냐며 펄쩍뛰다가 이중업에게 보낸 "공작금 2백만원 추가요청"이라는 편지를 보여주자 고개를 떨구었다. 그 때 김창룡은 대위였고 송호성은 장군이며 김창룡의 직속상관이었다.
조사를 마친뒤 송호성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으나, 경비대 총사령관이라는 직위에 대한 체면 때문에 형사처벌은 면해주고 총사령관 보직을 해임하는 선에서 사건을 종결하였다.
#송호성 사령관은 6.25 전쟁 때 피난하지않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인민군에 협조하여 인민군 후방 사단장 직함을 받고 얼마전까지 자기가 지휘했던 부하들을 향해 총뿌리를 돌리는 역적이 되었으며 인천상륙작전으로 퇴각하는 북괴군을 따라 북으로 넘어가 1959년에 사망하였으며 그 부인은 부산에 남았다가 1961년에 사망하고 아들은 대만 사람에게 양자로 입양되어 정보기관에 근무했다고 주 대만 대사를 지냈던 김홍일 장군이 전한 바가 있다. 전쟁과 사상은 한가족에게도 비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