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교육 위해 직접 세운 동창학교에 일제 탄압 쏟아져 특히 동창학교는 체육․국사․국어 등을 강조하여 교육하고 있었다. 그것은 체육교육을 통하여 독립군 전사다운 체력을 단련시키고, 국어와 국사 교육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국어는 김진이 담당하였는데, 그는 주시경 밑에서 한글을 공부하고 만주로 망명한 인물이었다. 국사는 박은식․신채호 등이 담당하였다. 이 시기 동창학교의 상황을 훗날 조선어학회 회장을 지낸 이극로는 <<고투40년>>이라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이 때 처음으로 나는 한학과 조선역사가로 이름이 높은 박은식 선생과 대종교 시교사요, 동창학교 교주인 윤세복 선생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 날부터 여기에서 한어를 공부하며 학생을 가르치는 한편, 등사 일을 하게 되었다. 또 여기 일을 잊지 못할 것은 내가 한글 연구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 함께 일보던 교원 중에는 김진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이 분은 주시경 선생 밑에서 한글을 공부하고 조선어 연구의 좋은 참고서를 많이 가지고 오신 분이다.” 이와 같이 서간도에서 동창학교가 독립운동가들의 근거지가 되고, 민족교육의 중심기관이 되어가자 일제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일본 영사관 측에서는 선생 형제들을 협박하여 동창학교의 폐교를 종용한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완강하게 거절하였다. 이에 일본 영사관 측에서는 중국 관헌들을 사주하여 동창학교를 폐교시키고, 그곳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을 모두 추방하고 말았다. 때문에 선생을 비롯한 대종교 독립운동가들은 1914년 무송현으로 옮겨 갔다. 백두산 기슭 무송현에서 독립군 양성하며 무장투쟁 준비 선생 일행이 이주한 무송현 백두산 기슭은 수목이 울창한 삼림 속이었는데, 이는 여기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하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곳에는 이미 백산학교(白山學校)를 설립하여 이주 한인들의 자제들을 상대로 민족교육을 실시하던 전성규 등이 있었다. 이들은 선생의 일행을 따뜻하게 맞이하여 주었다. 그리하여 선생의 일행은 전성규와 협력하여 백산학교를 중심으로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장래의 무장투쟁을 위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여 갔다.
그런데 여기에도 일제의 마수가 미쳐 선생의 일행은 고초를 겪게 되었다. 1915년 봄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관헌들에 의해 선생과 큰아들 윤필한, 그리고 전성규을 비롯한 30여 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인 살인 혐의로 체포된 것이다. 이 사건은 무송현 뿐만 아니라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리하여 조성환․신규식 등 북경과 상해 등지에서 활동하던 동지들이 선생 일행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고, 그 결과 18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끝에 출옥할 수 있었다. 국내에서 3․1운동이 발발하기 직전 선생은 대종교 2대 교주인 김교헌과 조소앙․신규식 등 30명의 만주․노령 지역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국내에서 3․1운동이 전개되자 이에 호응하여 무송현을 중심으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하지만 선생은 3․1운동을 통해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평화적인 만세 시위운동으로는 민족 독립을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1919년 7월 무송현에서 조직된 흥업단은 그 같은 선생의 인식을 구체적으로 실현한 독립군 단체였다. 흥업단은 재만 동포들의 경제력을 향상시키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산업 진흥에 노력하는 한편,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고자 조직한 것이었다. 대종교 교도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흥업단의 단장은 김호, 부단장은 김혁이었는데, 선생은 총무로 사무를 총괄하고 있었다. 특히 흥업단은 그해 12월 서일을 총재로, 김좌진을 사령관으로 하여 결성된 북간도 제일의 독립군 조직인 북로군정서와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두 단체 모두 대종교 교도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흥업단에 소속돼 항일무장투쟁과 재만 동포 산업 진흥을 전개 흥업단은 인근 지역의 대한독립군비단․광복단․태극단․대진단 등 독립군 단체들과도 서로 협력하며 항일 무장투쟁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그 산하에는 송림병원이라는 병원도 있었다. 여기에는 선생의 아들인 윤필한이 의사로 근무하면서 한․중 양 민족에 대한 의료사업뿐만 아니라 독립군 단체들 간의 연락 역할도 수행하였다.
나아가 흥업단은 효과적인 대일투쟁을 위하여 인근의 독립군 단체들과 연합전선을 추진하여 갔다. 1921년 10월 흥업단을 비롯하여 대한독립군비단․태극단․대진단․광복단 등 5개 독립군 단체가 연합하여 결성한 대한국민단의 탄생은 그러한 노력의 성과물이었다. 선생은 이러한 대한국민단을 결성하는데 앞장섰고, 또 의사부장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이런 와중에서도 선생은 대종교 포교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무송현․안도현․화전현․반석현 등지에 대종교 교당이 설치되고, 또 7,000여 명의 교우를 새로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은 1922년 6월 대종교 전리로 임명되었다. 이와 같이 독립군 단체에서 활약하면서 교세 확장에 힘쓰던 선생에게 1923년 말 대종교 2대 교주인 김교헌의 사망 비보가 전해졌다. 더욱이 놀란 것은 선생을 3대 교주로 지명하였다는 사실이었는데 선생은 김교헌을 만난 적은 있어도 대화를 나누어본 적조차 없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지명 받고, 대종교 3대 교주로 취임 김교헌의 유명을 받은 선생은 급히 대종교 총본사가 있는 영안현 남관으로 향하였고, 1924년 1월 22일 제3대 교주로 취임하였다. 교주로 취임한 선생은 곧 바로 대종교 교정 쇄신 작업을 추진하는 한편, 그를 토대로 항일투쟁 역량의 강화를 모색하여 갔다. 하지만 이때 일제는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단체와 그 지도자를 탄압하기 위한 조치를 강구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1925년 6월 중국 봉천성 경무처장 우진(于珍)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삼시궁송(三矢宮松) 사이에 체결된 이른바 ‘삼시협정(三矢協定)’이었다.
① 재만 한인의 호구를 조사․편성하여 서로 보증케 하고 연대 책임을 부담시킬 것 ② 중국 관헌은 재만 한인이 무기를 휴대하거나 한국에 침입하는 것을 엄금할 것 ③ 불령선인 단체를 해산하고, 그 무장을 해제할 것 ④ 재만 한인이 소유한 총기․화약은 수시로 엄중 수색하여 몰수할 것 ⑤ 불령선인 단체의 수령을 체포하여 일본 관헌에게 인도할 것 ⑥ 중․일 양국 관헌은 불령선인 취체(取締)의 실황을 상호 통보할 것 ⑦ 중․일 양국 관헌은 마음대로 월경(越境)하지 말 것 ⑧ 종전의 현안은 쌍방이 성의를 가지고 해결할 것 이같은 내용의 삼시협정은 만주지역 독립군 단체의 활동은 물론 그 존립마저도 위협하는 것이었다. 특히 삼시협정 부대조항에 “대종교의 주요 간부인 서일이 대한독립군단의 수령으로 일본에 항전하였으니, 대종교는 곧 반동군단의 모체로서 종교를 가장한 항일단체이니 중국에서 영토 책임상 이것을 해산시켜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것은 만주에서 대종교 교도들의 항일 독립운동이 얼마나 강력하였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부대조항에 따라 1926년 12월 길림독군 겸 성장인 장작상은 대종교 포교금지령을 발포하였다. 이는 교주로 취임한 이래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의 기반을 확충하여 가던 선생과 대종교 지도자들에게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선생을 비롯한 대종교 지도부는 포교 금지령 해제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러나 포교금지령이 쉽게 해제될 것 같지 않았다. 때문에 선생은 대종교의 최고의결기관인 교의회(敎議會)를 소집하여 대책을 숙의하였다. 그 결과 일시 일제와 중국 관리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총본사를 옮기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리하여 선생은 1928년 1월 소․만 국경지역이자 대종교 지도자인 서일이 활동하기도 하였던 밀산현 당벽진으로 총본사를 옮긴 뒤, 교리 연구와 수도에 전념하여 갔다. |
첫댓글 돈과 명예에 미쳐 날뛰는 한국의 종교 성직자들, 본받아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