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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뱀 잡으려 나를 죽여줄 땅꾼들>의 줄거리:
"한국 땅에 에덴이 창설 되었더라면 타락은 없었을 것이다"라는 농담, 뱀의 맛과 약효에 눈 뜬 사람들 앞에서 뱀의 유혹이란 속절없겠기에 가능하지요. 그런데 이 말이 농담만으로 그칠 일이 아닙니다. 사단인 뱀에 의해 야기된 타락과 멸망으로부터의 구원은 반드시 뱀을 잡음으로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구원 얻는 믿음과 관련해서 예수님 역시 직접 모세의 구리뱀을 언급하십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본문은 뱀 잡는 땅꾼들에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뱀 잡으려 나를 죽여줄 땅꾼들
(느헤미야 12:1~26)
1.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함께 돌아온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이러하니라 제사장들은 스라야와 예레미야와 에스라와
2. 아마랴와 말룩과 핫두스와
3. 스가냐와 르훔과 므레못과
4. 잇도와 긴느도이와 아비야와
5. 미야민과 마아댜와 빌가와
6. 스마야와 요야립과 여다야와
7. 살루와 아목과 힐기야와 여다야니 이상은 예수아 때에 제사장들과 그들의 형제의 지도자들이었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뱀 잡으려 나를 죽여줄 땅꾼들>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뱀 잡으려 나를 죽여줄 땅꾼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명단은 곧 나를 죽여줄 사람들입니다. 나를 죽여야 하는 이유는 바로 뱀을 잡기 위해서입니다.
‘한국 땅에 에덴이 창설되었더라면 타락은 없었을 것이다’라는 농담이 있습니다. 뱀의 맛과 약효를 아는 한국 사람들이라면 눈앞에서 뱀이 유혹하는 동안 내버려뒀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단숨에 뱀을 잡아서 삶아 먹거나 뱀술을 만들어서 먹었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뱀을 보호하기 위해서 땅꾼들이 뱀 잡는 것을 금지시켰는데 요새는 뱀이 너무 늘어나는 바람에 뱀에 물리는 사고가 잦아졌다고 합니다.
요즘 우리 기독교계를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땅꾼이 없어진 뱀 같습니다. 뱀들이 난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뱀 잡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뱀으로 인해서 타락했고, 그 타락의 결과가 지금 우리 삶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 타락은 감히 에덴 바깥에서 만족과 기쁨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에덴은 하나님과 함께 한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장소에서만 인간은 정당하게 기쁨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 사이즈는 하나님으로만 기쁠 수 있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마음 공백은 하나님이 들어오셔야만 완전히 채워질 수 있는 크기이기 때문에 에덴의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뱀의 유혹의 빠져서 에덴 밖으로 쫓겨난 사람은 이제 뱀의 가르침대로 행하게 되어서, 마음의 공백은 하나님이 아니어도 채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뱀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에덴 밖에서도 얼마든지 기쁨을 추구할 수 있다고 마음의 흡입구를 이 세상에 붙이게 되었습니다.
뱀은 배로 땅을 기어 다닙니다. 이러한 타락의 모습이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인간세상에서 기쁨과 만족을 찾으려고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세상에 살면서 하는 일이 잘 될 때 기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인데 이것은 마음의 배를 땅에 붙인 뱀의 모습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잘 지키며 여호와를 경외한다고 했지만 그들의 진짜 기쁨은 돈에 있었고, 또한 인간세상에서 인정받고 존경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뱀이 우리 안에도 그대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기독교의 복음을 한마디로 축약한 말씀이 나옵니다.
13절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16절의 구원을 이야기하시기 전에 먼저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셨던 이는 예수님 외에는 없었다는 것이고 이러한 말씀을 하신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하늘에 계셨기에 우리 마음을 하늘로 끌고 올라가실 수 있는 메시아가 되십니다.
이어서 14절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하십니다. 하늘에 계셨던 말씀을 하신 후에 뱀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는데, 구원을 얻는 믿음 안에는 뱀 잡기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장대의 구리 뱀을 바라본 자는 뱀의 독에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모세의 장대의 구리 뱀을 바라본 것과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인데 이 사건을 동일하게 여기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뱀처럼 마음의 배를 땅에 붙이고 땅에서 기쁨을 얻겠다고 살았던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고 고백할 때에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셨을 때의 믿음은 곧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뱀의 새끼였던 내가 죽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는 기쁨과 만족을 위해 배를 땅에 붙이고 살아왔던 내가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구원은 뱀을 잡지 않는 한 주어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누릴 수도 없습니다. 구원을 얻는 믿음이 곧 뱀 잡기입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뱀 잡기입니다. 이것과 연관 지어서 오늘 본문에서는 땅꾼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BC 444년 6월 25일에 완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완공된 후에 즉시 봉헌식을 하지 않고 오늘 본문인 12장에 이르러서야 봉헌식이 이루어집니다. 내일 보겠습니다.
봉헌식을 하기 전에 회개의 과정이 없었다면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으로 가득차서 이 세상 모든 것들이 겉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해진 마음에는 빈공간이 없어서 육체 연관성하에 있는 세상이 겉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겉돌게 하고 세상 것들을 마음에 받아들였기 때문에 천년의 조상들의 역사가 나라는 망하고 포로로 붙잡히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깨달음 이후에 예루살렘 성 안으로의 이주가 시작되었습니다. 성벽은 재건되었지만 지킬 사람이 부족했기 때문에 제비를 뽑아 바깥에 살던 주민들 십분의 일을 이주하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이제 봉헌식을 하려고 하는데 직전에 또 다시 제사장과 레위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구약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성전과의 연관성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만큼 성전의 존재의미는 결정적이고 핵심적입니다. 그리고 그 성전의 의미가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명단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1차 포로귀환 때의 제사장의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포로귀환의 역사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섭리 속의 핵심의도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2차 3차 귀환도 있었지만 1차 귀환이 대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포로귀환을 허락하신 이유는 성전재건 때문입니다.
성전이 재건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성전의 활성화 때문이고, 성전이 활성화 되어야만 백성들이 성전 생활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성전이 생활화 되려면 외부로부터의 세력들이 차단되어야만 했고 그래서 예루살렘의 성벽이 재건된 것입니다.
이렇게 성벽까지 다 재건된 후에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명단을 다시금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포로귀환을 시키신 이유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레위인은 평생을 성전에서 봉사하며 제사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돕는 자들이었습니다. 제사가 원활하다는 것은 곧 성전이 활성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전과 성벽의 근본적인 목적은 나라를 세운다거나 민족중흥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라를 세우기 위함이었다면 제사장이 아닌 장관들의 이름이 거명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은 나를 죽이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셨고,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나를 죽여줄 땅꾼의 역할을 맡은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나를 죽여야 하는 이유는 내가 뱀의 소굴이 되었기 때문이고, 땅꾼들이 뱀 굴을 찾는 것은 겨울잠을 자던 수십 마리의 뱀이 우글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격이 뱀의 소굴이 되어서 우리 안에 수십 마리의 뱀이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으면 기쁘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 마음의 배가 사업이라는 땅의 일과 딱 붙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되도록 뱀이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식을 잘 키워서 그로 인해 기쁨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뱀의 역사는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외모를 잘 가꾸어서 예뻐지려는 사람에게도 뱀은 역사하고 있습니다. 목회조차도 땅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그로인해 기쁨을 얻으려고 한다면 뱀의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0장 20절에서 칠십 인의 제자들을 파송하시고 이들이 돌아와서 보고할 때에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고 하시는데 분명히 기쁨의 근원이 하늘에 있음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내는데도 그로 인해서 기뻐한다면 그것도 귀신에 들리고 뱀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뱀이 마지막으로 사용하는 고육지책이 바로 자기를 쫓아냄으로 기쁨을 삼으라는 유혹입니다. 뱀은 어떻게 하든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사탄은 마지막 고육지책으로 자기를 이 세상에서 쫓아내는 것을 기쁨으로 삼으라고 유혹하면서까지 우리의 마음을 땅에 묶어 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목회현장에서 귀신을 쫓아내도 그것으로 기뻐해서는 안 되고 오직 하늘로만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꾼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 대해 작용하는 마음의 흡입력은 정말 고래힘줄처럼 질깁니다. 자꾸만 마음을 이 땅에 붙여서 뱀처럼 기려는 습성이 있는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의 이야기를 성벽 봉헌식 직전에 하는 이유는 세상에 배를 붙이고 마음이 배부르기를 바라는 나를 세상으로부터 차단하고 뱀을 잡아 죽여줄 땅꾼들의 이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뱀의 소굴이 된 나를 번제단에서 통째로 죽여줄 땅꾼들을 위해 십일조를 드리게 합니다. 나를 죽여줄 자들의 생계를 보장하라는 것인데 굉장한 말입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업을 잘해서 흑자를 남기고자 마음을 먹습니다. 그럴 때의 내 생각과 행동과 판단과 말은 모두 부패해버리는데 전적타락입니다. 이 전적타락은 바로 우리 마음이 뱀처럼 인간 세상에 마음의 배를 붙이고 기쁨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돈 인기 권력 승진 자녀의 형통 등과 같은 것들도 있을 수 있고, 명품 백이나 명품 아파트나 명품 차 등의 것으로 기쁨을 얻으려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믿을 때에 그로인해 생겨나는 생각과 판단과 말이 올바를 수가 없습니다. 돈을 추구하며 돈과 상관없이 아이를 키워도 자연히 타락한 내 습성으로 아이를 어루만지게 되고 그 결과 같이 더러워지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 외에는 하늘에 계셨던 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하늘에 계셨던 예수님만이 우리를 끌고 하늘로 올라가실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속에 있는 뱀을 잡아야 합니다. 뱀을 잡지 않는 한 내 마음은 하늘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예루살렘 성벽의 봉헌식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성벽은 차단입니다. 내가 의식적으로 이 세상으로부터 차단되어야 된다고 여기는 것이 성벽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차단된 뒤에 이 세상을 그리워하는 내 인격을 통째로 번제단에서 죽여야만 합니다. 그 때에 내 속에 있는 뱀을 죽여줄 자들이 땅꾼으로서의 제사장과 레위인들이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스스로가 제사장과 레위인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스스로 나를 죽이는 땅꾼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서 끊임없이 뱀들이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을 들여다보면 뱀들이 꿈틀거리는 뱀의 소굴입니다.
끊임없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고, 그것으로 인해 기쁨을 삼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쁨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이므로 십자가를 생활화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에 대해서 땅꾼이 될 수 있는 것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나의 죽음이 십자가에서 일어났습니다.
주님께서 피 흘리시고 못 박혀 죽으신 이유는 내 인격이 뱀의 소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뱀을 잡기 위해서 내가 죽어야만 하는데 주님께서 그 사건을 대신 이루신 것입니다. 배를 땅에 붙이고 기쁨을 얻으려고 할 때마다 이것을 끊임없이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가 내 속의 뱀들을 죽이려고 십자가에 매다는 땅꾼임을 자처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만인제사장설입니다.
이러한 나 자신을 십자가에서 끊임없이 죽은 자로서 고백하지 않으면 믿음은 가짜이고 구원도 없습니다. 구원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부활과 승천을 따라 지금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지금 기뻐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 지금 하늘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늘을 추구하는 과정 자체가 구원의 상태입니다. 죽을 때까지 하나님으로 기쁘기 위하여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기쁘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 재료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뿐이십니다.
우리 모두 뱀의 소굴인 나를 통째로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인정하는 땅꾼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선민으로 사는 것은 십자가 생활화의 주역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주역이 된다는 것은 뱀의 소굴인 나 자신을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확인하는 땅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를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