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읍내 5일장 때문인지 시끄러운 새벽 소음으로 잠을 설쳐 몸이 무거웠다
원래 마이산을 돌아볼까 하다가 처가 발목이 좋지 않아 산행은 어려울 것 같아 김개인 생가가 있는 오수 지사면으로 여정을 정했다
역시 선진국의 면모가 풍기는 잘 뻗은 도로와 한적한 자연이 내뿜는 기운이 차안 에어컨으로 드라이브하는 행락객의 원기를 북돋는다
그러나 어제와 달리 폭염기운이 돌아 밖에 나가서 나들이하기엔 왠지 께림직한 날씨이다
가다가 이정표가 보여 소충사를 들렀다
소충사는 구한말 정재 이석용장군과 그의 휘하에서 활동하던 28의사를 배향하는 사우(祠宇)이다.
정재 이석용의병장은 성수면 삼봉리에서 태어나 17세에 사서삼경을 통달한 출중한 인물이였다. 을사조약으로 일제가 침략의 야욕을 노골화하자 성수산 골짜기의 상이암에 동지를 규합하여 1907년 8월 28일 마이산에서 「호남의병장의 동맹단」을 결성하여 의병장으로 추대 되었는데 당시 의병의 수가 5백여명에 이르렀다. 그 후 2년에 걸쳐 진안에 주둔한 왜군을 격파하고 영광, 고창, 용담 등에서 왜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신식 무기로 무장한 왜군에 당하지 못하고 1908년 4월 임실에서 크게 패하자 의병들을 해산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정동석의 배반으로 1913년 일경에 체포되어 1914년 전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언도 받고 37세를 일기로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였다.
아무도 찾지 않는 호국보훈시설에서 문화해설사는 그 지역 마실꾼들과 잡담을 하는 듯 관리사무소 안에선 이야기 소리만이 이 거대 시설의 존재를 보여준다
조금 더 이동하니 오산사가 있는 마을이 나와 들렀다
오산사는 서산 김흥락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호남지역 유학자이며 애국지사인 청련재 권중원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개천의 물이 자잘했지만 맑은 곳이다
이어 조금 더 가니 김개인 생가지가 나왔다
이 마을은 실제 실존 인물이었던 고려시대 김개인 애견설화의 근원지이며 열두 봉우리가 아름답게 이어져 있어 십이연주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오수의 개 설화로 널리 알려진 장소인데 생각보다 생가지는 협소하고 볼품 없이 단촐하였다
다만 이 마을은 영천서원(지방문화재), 덕암서원, 주암서원(지방문화재), 관곡서원 등 4개의 서원과 남방식이 혼합된 고인돌 유적지 등 연계된 역사·문화 콘텐츠가 다양해 학생들의 체험학습 장으로도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날씨는 덥고 처는 걷는 걸 두려워 해 더 이상 마을 탐방을 못하고 옥정호로 이동했다
옥정호는 섬진강 상류수계에 있는 인공호수이다. 운암호라 불리기도 한다.
운암정에 사람도 한산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 옆 까페에서 컵라면을 사고 오수에서 사온 김밥과 약식으로 점심 한 끼를 때우니 이 더운 여름날 가성비 좋고 낭만적인 한 때의 점심소풍날이 되었다
섬진강댐의 근처에 옥정리(玉井里)가 있다. 조선중기에 한 스님이 이곳을 지나다가 ‘머지않아 맑은 호수, 즉 옥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여 옥정리라 하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옛날 운암호 또는 섬진호로 부르던 것을 옥정호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옥정호 둘레로 물안개길도 조성하여 시원한 봄, 가을에는 많은 사람이 찾는 둘레길이 되는 듯 하다
봄가을에는 일교차 때문에 옥정호에서 피어나는 물안개와 붕어마을로 불리는 호수안의 섬이 명소가 되어 구사봉은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고 있다.,
역시 붕어섬을 굽어 보는 국사봉까지는 못 올라가고 국사봉 오르는 길 아래 있는 국사봉전망대에만 올랐다
국사봉은 해발 475m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주변에 높은산이 없어 산을 오르다보면 하늘과 가까운 느낌을 받을 수 있고,옥정호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어 전라북도 최고의 일출 명소다.
천안으로 이르게 올라왔다
올라오다 어제 폭우로 미죽리농장 한쪽 언덕이 산사태 비슷 쓸린 상태를 보고 왔다
또 한동안 머리를 괴롭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