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나무(12)-느티나무(Sawleaf Zelkova Tree)
느티나무는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낙엽활엽교목으로
괴목(槐木), 규목(槻木)이라도 한다.
학명은 Zelkova serrata 이고,
키 높이는 약 30m까지 자란다.
한반도 거의 모든 지역에서 자라며
원산지는 한국, 일본, 몽골, 중국, 대만 이지만
시베리아, 유럽 등지에도 분포한다.
한국에 수령이 1,000년이 넘는 노거수가 60여 그루가 있는데,
그 중 25그루가 느티나무이다.
목재는 물에 잘 견디고 잘 썩지 않아
농기구, 가구 및 건축재로 쓰인다.
요즘에는 분재용 식물로도 널리 가꾸고 있다.
느티나무는 마을 어귀에서 시원한 그늘을 주는 정자나무로 잘 가꾼다.
가지가 사방으로 섬세하게 잘 뻗어 겨울나무 모양이 더 아름답다.
노목의 수피는 진한 회색으로 비늘처럼 떨어지며 피목이 옆으로 길게 만들어진다.
어린 가지에는 털이 나기도 한다.
잎은 어긋나고 잎끝은 뾰족하지만 잎밑은 둥글거나 심장처럼 약간 들어가 있으며
잎맥을 경계로 양쪽이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가을에 황금색 또는 윤기 있는 구리색으로 단풍잎이 들어 가을의 정취를 풍기게 한다.
꽃은 5월에 피고 세로나온 가지의 잎겨드랑이에서 암꽃과 수꽃이 따로따로 핀다.
수꽃은 새 가지의 아래쪽에 피며 암꽃은 위쪽에 핀다.
수꽃에는 4~6장의 꽃덮이조각과 4~6개의 수술이 있으며,
암꽃은 가지마다 1송이만 달리는데 암술대가 2개로 나누어진 1개의 암술로 이루어져 있다.
열매는 10월에 편평하고 둥글게 익으며 지름은 5mm 정도이다.
해가 잘 드는 곳이나 땅속에 물기가 다소 많은 곳에서 잘 자라며,
생장속도가 매우 빠르지만 뿌리가 깊게 자라지 않아 가뭄이나 바닷바람에는 약하다.
나무를 잘라도 새 가지가 곧 나온다.
공해에는 쉽게 피해를 입는다.
옮겨 심을 경우 흙이 마르지 않도록 물을 자주 주어야 한다.
공원이나 길가에 흔히 심고 있으며, 기념수로도 쓰이고 넓은 정원에도 심는다.
목재는 황갈색에 윤택이 나며 썩거나 벌레가 먹는 일이 적고
나뭇결이 곱고 무늬가 아름다워 쓰임새가 너무 많다.
또한 건조를 할 때 갈라지거나 비틀림이 적고 마찰이나 충격에 강하며 단단하다.
즉 나무가 갖추어야 할 모든 장점을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무의 황제’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이른봄에 어린잎을 채취하여 떡에 섞어 쪄서 먹기도 한다.
옛날부터 마을을 지켜주는 마을나무로 널리 심어온 나무 중 하나이다.
느티나무는 숲속에서도 다른 나무와 경쟁속에서도 잘 자란다.
키 높이는 20~30미터 가 되고 지름이 두세 아름까지 우람한 덩치로 자란다.
목재의 쓰임도 화려하다.
경주 신라 천마총을 비롯한 관재로서 임금의 시신을 감싸고 영생의 길을 함께한 영광의 나무였다.
건축재로는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 해인사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법보전,
조선시대 사찰건물인 강진 무위사, 부여 무량사, 구례 화엄사의 기둥의 전부 또는 일부가 느티나무다.
절의 행사 때 쓰는 큰 나무 밥통(구시), 절집 기둥, 나무 불상도 대부분 느티나무로 만든 것이다.
기타 사방탁자, 뒤주, 장롱, 궤짝 등도 느티나무 작품이 많다.
느티나무 목재의 결은 약간 거칠지만 재질이 강하고 질겨서 뒤틀리지 않고 무거우며
무늬와 광택이 아름다워 오래된 작품 일수록 높은 갑어치를 지닌다.
(사진) 아름다운 느티나무 단풍.
현재 우리나라의 노 거수 느티나무는 대부분 천연기념물이나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느티나무는 아래와 같다.
번호 | 위치 | 수령(년) | 높이(m) | 나무둘레(m) |
95 | 강원 삼척시 도계읍 도계리 278-2 | 1,000 | 16 | 7 |
108 | 전남 함평군 대동면 향교리 산948-2 | 350 | - | - |
161 | 제주 남제주군 표선면 성읍리 882-1 | 1028 | 26 | 3 |
192 | 경북 청송군 파천면 신기리 659 외 15필 | 350 | 10 | 8.35 |
273 | 경북 영주시 안정면 단촌리 185-2 외 4필 | 500 | 16.5 | 10 |
274 | 경북 영주시 순흥면 태장리 1095 외 4필 | 450 | 18 | 8.7 |
275 | 경북 안동시 녹전면 사신리 256 외 3필 | 600 | 28 | 9.5 |
276 | 경남 남해군 고현면 갈화리 732 외 5필 | 400 | 17.5 | 9.3 |
278 | 경기 양주군 남면 황방리 136 외 2필 | 850 | 21 | 7.3 |
279 | 강원 원주시 흥업면 대안리 2230 외 2필 | 350 | 22 | 7.6 |
280 | 전북 김제시 봉남면 행촌리 230-2 외 3필 | 600 | 15 | 8 |
281 | 전북 남원시 보절면 진기리 495 외 3필 | 600 | 19 | 8 |
283 | 전남 영암군 군서면 월곡리 747- 1 외 7필 | 500 | 21 | 7 |
284 | 전남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 787-1 | 600 | 25 | 7.9 |
382 | 충북 괴산군 장연면 오가리 321 외 1필 | - | 25 | 9.4 |
396 | 전북 장수군 천천면 봉덕리 336 | 500 | 31 | 6.4 |
407 | 경남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 27-1 | 500 | - | - |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느티나무(2000. 3)
(사진) 함평 향교리 느티나무군락지(천연기념물 제108호)
(사진) 담양 대치리 느티나무(천연기념물 제284호)
(사진) 원성 대안리 느티나무(천연기념물 제279호)
(사진) 영풍 단촌리 느티나무(천연기념물 제273호)
<느티나무 설화(說話)>
(1) 효자수(孝子樹).
서기1271년 ‘몽고의 병란’으로 경주 분황사9층탑과 더불어
금오산 숭산 <고려귀족촌(高麗貴族村)>도 불타고 폐허가 되었고
임진왜란때 금오산성에 진을친 사명대사 조선승군과 치열하게 싸운 그 이후
초토화되어 그 화려했을 귀족촌은 퍠허가 되고 논밭으로 변하여
최근까지 이곳에 농가20여 호가 다소곳이 모여 살고 있었다.
조선 순조 때,
이 마을에 하늘에서 내려준 효자(孝子) 유우석(劉遇錫)이란 사람이 살았다.
그는 어느 날 8순의 조모가 기력이 다하고 노쇠 위독한데 소원하기를,
“잉어(鯉魚)탕이 먹고 싶다.” 라고 하였다.
허나 첩첩산중 엄동설한(嚴冬雪寒)이라 잉어를 구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우석 씨는 20여리 산 넘고 눈 밭(雪田)을 걸어서 낙동강 빙판에 나왔다.
혹? 잉어를 구할 수 없을까 서성거렸다.
할머니의 소원을 애석(哀惜)해 하며 빈손으로 집에 돌아오곤 했다.
몇 번이나 그랬을까?
어느 날 하늘이 감동했던지 우석 씨 앞 저만치 얼음 숨구멍에서
갑자기 큰 잉어 한 마리가 튀어 올라 펄떡이고 있었다.
우석 씨는 “천지신명님 감사합니다.”고 수없이 되 내이며,
그 잉어를 안고 집으로 와서 참기름에 맛있게 뽁아 탕을 만들어
지극정성 공양하니 조모의 환우(患憂)가 사라지게 되었다.
고을사람들은
“우석 씨의 효심과 정성에 감응하며 잉어 스스로가 얼음구멍에서 뛰어 올라 나왔다.” 고
그 효행을 자자하게 칭송하였다.
그 뒤 어느 날 조모께서 갑자기 또 “비둘기 고기가 먹고 싶다.” 고 말하기에
몇날며칠을 비둘기 구할 길을 찾아 해매였다.
그러던 어느 날 비둘기 한 쌍이 처마에 부딪치고 마당에 떨어지니
옳커니 잡아다 8순의 할머니에게 공양했다.
효손집안의 지극한 공양덕분에 조모는 9순이 넘도록 건강하게 사셨다고 한다.
이 사실을 각처 유림들이 나라님께 상소하니,
나라님께서는 팥과 찹쌀 수십섬을 내려 노조모 공양을 독려하였고
효자문, 효자비 건립을 허락했으나 우석 씨께서는 겸양하여
조모 사후로 효자문, 효자비 건립을 뒤로 미루고
마을 입구에 느티나무를 심고 효자문으로 대신했으니
그 느티나무가 이름하여 효자수(孝子樹)이다.
또한 그 때부터 우석 씨가 살던 뒷산봉우리를 효자봉(孝子峰)이라 부르게 되었다.
(사진) <孝子樹> 칠곡 북삼읍 숭산 <고려귀족촌> 느티나무.
(2) 현고수(懸鼓樹)
경남 의령의 세간리에는 ‘현고수(懸鼓樹)’란 이름을 가진 느티나무가 있다.
이름 그대로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 곽재우 장군이 북을 매달아 놓고 군사훈련을 시켰던 나무다.
서기 612년 신라 진평왕 34년,
찬덕이란 신라 장수가 지금의 충북 괴산 근처에 있던 가잠성의 성주였다.
어느날 백제군이 쳐들어와 성을 잃게 되자 그대로 달려 나가 느티나무에 부딪쳐 죽었다.
이후 가잠성을 ‘괴(槐)’ 자를 써 괴산이라 부르게 했다고 전해진다.
괴산군 일대에는 지금도 느티나무가 많이 자란다.
오늘날 괴산군의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만 90여 주에 이른다고 한다.
(사진) <현고수> 의령 세간리 느티나무(천연기념물 제493호)
(3) 전북 임실 오수읍의 의견(義犬)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오수에서 멀지 않은 영천리에 살던 김개인이란 선비는
어느 날 키우던 개를 데리고 나들이를 나갔다가 낮술에 취하여 잔디밭에서 깊은 잠에 빠졌다.
그때 들불이 번져 주인이 위험에 처하자
개는 가까운 연못에 들락거리면서 몸에 물을 적셔 불이 번지는 것을 막아
주인을 구하고 지쳐서 죽어버렸다.
그는 개를 정성껏 묻어주고 지팡이를 꽂아두었더니
그 자리에서 느티나무 싹이 트고 자라나
지금의 큰 느티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개의 화신이라고 생각하여
이 느티나무를 개나무란 뜻으로 ‘오수(獒樹)’라고 부르고
마을 이름도 "오수"로 되었다.
이 내용은 고려 말의 문신 최자의《보한집》에 실린 내용이다.
(사진) <獒樹> 임실 오수읍 느티나무와 의견사당.
(4)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세우기 전,
나라에서 유명하고 신령한 명산을 찾아다니며,
산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수명이 가장 긴 느티나무를 심어
고려가 영원히 이어지기를 빌었다고 한다.
그 당시 여러 곳에 이성계가 직접 심었다는 느티나무가 전하고 있다.
여러 명산을 찾아 소원을 빌고 느티나무 한 그루를 심었는데
수 많은 명산들은 이성계의 뜻을 그대로 감응해 주었지만,
광주의 무등산 산신만은 소원을 거절하였다는 이야기다.
이성계가 은근히 화가나서 무등산 산신을 멀리 지리산으로 쫓아 보내고
이 산의 이름을 무정산(無情山)이라 바꿔 불렀고
느티나무를 심지 않아 무등산에는 느티나무가 없다고 한다.
(사진) <이성계 나무> 예천 금당실 느티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