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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의양의 <남해문견록>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
- 포민에 대한 편견, 타자에 대한 연민, 그리고 유교에 대한 편향 -
권대근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Ⅰ. 기행문과 기행수필은 어떻게 다른가
류의양의 <남해견문록>은 현대적 의미의 표현이고, 원본인 영인본은 <남해문견록>으로 되어 있다. 먼저 짚고 가야 할 것이 있다. 문제는 그가 남해로 귀양 와서 쓴 이 글을 현대적 관점에서 수필이라 할 수 있냐는 점이다. 기행수필과 기행문은 가치개념으로 봤을 때 엄연히 다르다. 기행문이 비문학적 에세이라면, 기행수필은 문학적 에세이다. 기행문이란 여행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배운 것을 쓴 글로서, 사실적 경험을 위주로 기록된 것이다. 물론 문학적 성취를 염두에 두고 쓴 이런 글도 있지만, 기행문 자체가 문학성이 있다고 해서 기행수필이 되지 않는다. 기행문과 기행수필은 공통성과 공유성이 분명히 있다. 기행문을 쓰는 데는 어떤 제한이나 필수요건이 없지만, 그것이 문학으로서 기행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추어야 될 조건이 있다.
기행문이 수평적이라면, 기행수필은 수직적이다. 한마디로 기행수필의 성격이나 특성을 기행문과 비교해서 말하면 ‘선택과 집중’으로 표현할 수 있다. 기행문은 다분히 견문을 나열식으로 전개하는 데 비해 기행수필은 글의 주제에 맞는 제재를 취사선택한다는 것이다. 기행문은 느슨하지만 기행수필은 주제 중심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느슨하지 않다. 기행수필은 단일 주제를 다루지만, 기행문은 단일주제를 다뤄야 한다는 룰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기행문의 주제가 분산적이라면 기행수필의 주제는 집중적이다. 기행문이 다초점의 글이라면, 기행수필은 단초점의 글이다. 글의 문학적 성취도 중요하지만, 수필의 기본 개념에서 ‘그것이 아니면 그것이라 할 수 없는 그것의 가장 중요한 핵심 원리’를 지녀야 수필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기행문과 기행수필의 공통성을 넘어서서 기행문이 문학이 되려면 수필의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데, 그것은 단초점의 수직적 글로서 주제가 의미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행문은 단초점도 수직적 전개도 의미화전략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다소 여유롭다.
기행문을 쓰는 데는 관찰력과 기록하는 습관. 견문에 대한 감상력 정도만으로 족하지만, 기행수필을 쓰려고 하는 수필가라면, 수필의 개념을 바로 알아야 하고, 기행문과 기행수필이 어떻게 다른가를 아는 것이 기본이다. 기행문을 쓰는 데 필요한 관찰력 기록력, 감상력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직관력, 상상력, 연상력, 분석력 등을 베이스로 해석력이나 의미화 능력 그리고 창의성이 기행수필을 쓰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하겠다. 구성에서도 차이가 있는데, 기행문은 시간순서행의 스토리식이라면, 기행수필은 스토리를 넘어서는 플롯화, 즉 구성의 변주가 필요하다. 기행문이 정서적, 지적 여과에 그친다면, 기행수필은 정서적, 지적 여과에 더하여 심미적 여과라는 전문가적 또는 개성적 안목을 필요로 한다고 하겠다. 무엇보다도 수필은 상위어로 문학과 예술을 가진다. 기행수필은 문학이고, 예술이어야 한다는 의미다. 류의양의 <남해문견록>의 성격은 이미 ‘록’이라는 말에 녹아 있다. 문학이 아니라 기록물이란 의미다.
칸트는 문학작품을 감상하고 비평하는 데 있어서의 딜레마인 평가자 또는 독자의 주관성 시비를 없애는 획기적인 이론을 내어놓았는데, 바로 심미적 취향’과 ‘심미적 의무’다. 어떤 분야에 전문가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이 전문가적 판단을 내렸으면, 거기에 대해 작가나 독자는 일단 수긍하는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하였다. 작가나 독자는 전문가의 전문적 판단을 수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작가나 독자가 그 의무를 다하면 시비는 일어나지 않는다. 기행문이면 어떻고 기행수필이면 어떠냐고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할 수 있는 사람도 있겠다. 기행문과 기행수필의 구분은 매우 중요하다. 기행문도 기행수필도 둘 다 감동을 줄 수 있지만, 그 감동의 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비문학적 에세이인 기행문이 주는 감동은 미적 사유에 의한 미적 감동이 아니라서 문학이 아닌 글에서 얻는 감동은 예술적 감동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평론가 이유식은 기행문에서 기행수필로 나아가는 과정을 소재별 접근법으로 잘 설명해놓고 있는데, 이 분의 설명을 그대로 옮겨 보겠다. “가령 소재가 자연환경인 경우라면 작가의 심적 정서적 감화나 반응, 아니면 인생론적 은유적 명상이나 관조가 있어야 할 것이고, 역사나 문화 등 인문학적 명상이나 관조가 아니면 비교 문화적 해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의식주 생활환경이나 생활상이라면 심적 정서적 감화나 반응, 아니면 비교 문화적 해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 유적이나 유물이나 기념물 등 문화재의 경우라면 인생론적 관조 아니면 문화적 해석도 있어야 할 것이다. 인생이나 인정의 경우라면 작가의 심적 정서적 감화나 반응은 물론 인생론적 명상이나 관조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와 사뭇 다른 소재나 대상이 있다면 새로운 해석이나 의미부여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매우 유익한 글이다. 마지막에 언급된 새로운 해석이나 의미부여는 결국 좋은 글의 출발점은 인식에 두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Ⅱ. 근대 기행문과 조선 견문록
한국의 현대 수필은 그 명칭 자체가 ‘기행문’으로 표시가 됐을 만큼 수필과 기행문은 등식과 같은 것이었다. 세계화 선언과 함께 우리나라 사람들의 발걸음이 종종 외국으로 뻗치게 된 근간에 와서는 삶의 질을 개선한다는 정부 방침에 맞물려 많은 사람들이 레저문화를 누리고 있다. 자연히 견문을 넓혀야 하는 작가들의 여행이 늘고, 그만큼 기행문도 많이 쓰이고 있다. 문제는 기행수필이 아니라 기행문이 수필이란 이름으로 발표된다는 것이다. 이는 작가들의 창작 동기가 충동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기행체 수필은 신선한 충동만 가지고 써서는 수필이 되지 않는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시공간을 적절히 옮기면서 흔적을 적어 나가는 글이 수필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독자에게도 신선한 충동이 되려면, 기행문은 여행의 추억, 견문과 해방감, 동경과 사색의 기록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단순한 기행견문록이 아니라 문예적 감흥이 담겨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문학적인 기행문에는 심미적 여과가 필수적이다.
국제신문 이경식 기자가 쓴 ‘남해 유배문학기행 <중> 류의양, 남해문화의 재발견 -섬에 갇혀 고독과 절망의 삶, 한글 기행문 백미를 빚다’를 보면, 류의양이 어떤 인물인지 잘 알 수 있다. 신문 기사에 의하면, <남해문견록>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문장가, 후송(後松) 류의양(柳義養·1718~미상)이 쓴 글로 유배문학의 본거지인 남해에서 탄생했다. “남해문견록은 5개월 남짓한 짧은 귀양살이를 담은 기록이지만 풍물과 언어, 민초의 애환과 정리 등 생동하는 남해의 속살을 곡진하게 풀어낸 한 편의 울림 큰 다큐멘터리다. 특히 국문학사상 최초의 한글 산문체 유배기행문이라 더 값지다. 보물섬 남해는 맑고 푸른 풍광으로 후송의 정신적 상처를 치유했고, 후송은 남해에 빛나는 인문을 수놓았다.”라고 썼다. 과연 그랬을까. 평자는 이 기자가 신문 연재에서 분명하게 ‘유배기행문’이라고 적고 있음에 유의한다. 장르론적 차원의 가치개념으로 접근해서 이 글을 분석해 보면, 현대적 관점에서는 분명 기행수필이 아니고 기행문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아쉬운 것은 류의양의 유배 사유를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유배 사유는 류의양의 기행문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될 터인데, 이 점이 평자에게는 가장 아쉬운 대목이었다. 국제신문 기사를 보자. “'승정원일기' 영조 47년(1771년) 2월 17일 기록에 임금이 승전색(사소한 왕명을 출납하는 환관)에게 "류의양을 서인으로 만들어 남해에 보내라"고 지시했다는 사실만 전할 뿐이다. 정5품 홍문관 수찬으로 재직하면서도 '서울과 시골에 집이 없어 동서남북으로 남의 집을 빌어 다닐' 정도로 청렴했던 것을 미루어 비리를 저지른 것 같지는 않다. "내가 바닷배 건너기 처음이로되 구태여 무섭지는 아니하나 북으로 바라보니 운산이 첩첩하고 가국(家國·집과 조정)이 천 리 밖에 있는지라 뭍의 길에 올 적보다 마음이 다르더라." 후송은 유배령이 떨어진 지 9일 후인 2월 26일 오전, 경상도 하동과 남해 사이 노량해협을 건넌다. 54세의 적잖은 나이였다. '평생에 충성과 신의를 가졌으니 오늘날 풍파를 당하노라'는 옛사람의 글을 외우며 배에 오르는 후송의 모습은 자못 처연하다.” 충성과 신의가 풍파로 연결되는 일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정치와 권력의 중심에 서보지 않고는 이해하기 힘든 불편한 진실이 아닌가. 충성과 신의를 다 바쳤는데, 그는 왜 한양에서도 먼 남해까지 귀양을 왔을까.
남해군청 자료에 의하면, “이 기행문은 처음에 글쓴이가 밝혀지지 않아 실명저술로 분류돼 있었다. 이것을 밝혀낸 사람이 문학사상지 기자 최강현 씨라고 한다. 그는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두루 뒤져 전주 류씨로 영조 47년 2월 중에 남해로 유배당한 사람은 후송 류의양 한 사람뿐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또 <남해문견록> 내용 가운데 "우리 계구 한공이 제주어사로 갈 때…"라는 대목이 있어 자기 외숙이 한씨로서 영조 때 제주어사를 지냈다고 밝혔는데, 이는 조선왕조실록 영조 22년(1746) 정월 13일 아침에 "제주도의 대기근을 구휼하기 위하여 임금께서 한억증을 어사로 보냈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최강현 씨가 청주 한씨 족보와 전주 류씨 족보를 조사해 보니 류의양의 아버지 류무(柳懋)는 한억증의 아버지 한중회의 둘째 딸에게 장가 들어 한억증이 류의양의 외숙임이 확인되었다.” 역시 기자는 대단하다. 진실을 밝혀 보려는 최씨의 노력과 의지에 경의를 표한다. 이 분의 노력에 기대어 평자는 남해 출신 문인으로서 남해 유배문학을 논하는 영광을 안게 된 것이다.
Ⅲ. <남해문견록>의 사적 의의와 후송의 생애
남해군청 자료에 의하면, 류의양은 “숙종 44(1718)년에 승지 태명의 손자로 태어났으며, 자는 계방(季方) 호는 후송(後松) 본관은 전주다. 영조 32년(1756) 생원이 되고 해서(海西)현감을 지냈으며, 영조39년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 부수찬 등을 역임하다가 영조47(1771)년에 삭탈관직을 당하고 서인이 되어 남해로 유배되었는데 1년 4개월간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직접 보고 느낀 바를 한글 기행문체의 풍물지인 <남해문견록>을 남겼다. <남해문견록>은 가로 19.9㎝, 세로 30.9㎝의 한장본(韓裝本)으로 한지에 세로로 쓴 붓글씨 서책이다. 32매 분량의 류의양 친필고본(稿本)이다. 그가 벼슬을 하다가 삭탈관직된 이유는 나오지 않는다. 남해문견록에서도 그 연유는 알 수 없다. 정쟁의 희생양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볼 뿐이다.
“영조48(1772)년 7월에 유배가 풀려 홍문관 부교리로 재등용되었으나 다시 아산으로 정배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풀려나 홍문관 부교리로 등용되었으나, 다시 금성으로 귀양을 가는 등 파란 많은 관직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영조 51(1775)년 재등용되어 영남어사, 성천부사, 예조참판, 도승지 등의 벼슬을 거치면서 ‘증보문헌비고’의 수찬에 참여했으며, 정조8(1784)년에는 공조참판으로 ‘춘방지’를, 정조 12(1788)년에는 ‘오례의통편’과 ‘춘관통고’를 저술했다. 류의양은 정조12(1788)년 호조참판을 끝으로 71세로 별세하였는데 고향인 경기도 양주땅 노원에 묻혀 있다. ‘남해문견록’은 류의양이 남해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보고 들은 섬의 지세, 경승, 산물, 풍속, 언어, 미신, 교우 등에 대하여 물 흐르듯 유려하고 상세하게 기록한 한글 기행문으로 18세기를 살았던 우리 선조들의 생활과 문화를 잘 알 수 있다.”
“조선시대 한글로 된 저작물 중에서 기행문의 성격을 띤 작품은 대개 가사형식이거나 일기체 형식이 대부분인데, <남해문견록>은 산문체 형식을 빌려 한글로 쓰여졌다는 점에서 매우 희귀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이 남해문견록은 조선 숙종 때 김창업(1658∼1721)이 지은 <노가재연행일기>라는 국문본 일기체 기행문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발견된 최초의 한글 기행문이라는 점에서 국문학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남해문견록>은 향토사가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가 1991년 남해군에서 류의양기념비를 건립하는 과정에서 전주 류씨 대종회를 통하여 그 원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이를 계기로 그 내용이 상세하게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남해문견록>은 류의양이 남해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보고 느낀 것을 기록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 유배자의 거소를 지방관장이 정해주었고 유배객이라 하더라도 일반 주민과의 접촉이나 교제가 아무런 규제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생활비는 유배객이 부담하였으나, 지위의 고하나 지명도에 따라 그곳 관장이나 인근 지역관장으로부터 경제적 도움이나 지원을 받거나, 죄를 지은 죄인이기는 했지만, 지방 관아에서 통인, 사령, 식모를 붙여주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당시 사대부가에는 투기를 한 여인에 대해서는 비록 자식을 낳고 살던 정처라 하더라도 유배로 다스렸고, 당시 남해의 장례식에는 풍악이 잡혀 있었다거나 혼례는 대례만으로 끝냈다는 것도 확인됐다. 지금은 없어진 볼모, 육궁, 솔방 등의 방언과 아직까지 쓰이고 있는 사투리인 정지, 늑의, 즉의, 작지 등을 통해 방언 연구에도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
류의양이 쓴 남해문견록의 가치나 의의가 위에 인용된 남해군청 자료에 의해 잘 나타나 있지만, 다시 한 번 더 그 가치나 의의를 살펴보자면, 이 기행문은 다른 유배문학과는 차원이 다르다. 시나 소설은 허구에 기반한 창작문학이고, 기행문은 문학적 에세이는 아니나 본인이 직접 사실적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기 때문에 당대 관습이나 풍습, 유배생활 형태를 소상히 알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가 크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유배에 관한 지식으로는 유배를 당하면, 유배지를 이탈하지 못한다고 알고 있는데, 류의양의 문견록을 보면, 자유롭게 남해를 왕래하고 사람을 만나고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큰 충격을 준다. 유배문학에 조예가 깊거나 조선의 형법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고 공부를 한 사람은 이런 유배자의 자유로운 행동거지가 그리 충격적이지 않을 수 있으나, 일반인들은 대부분의 유배자가 감시를 당해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평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소설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떻게 이렇게 유배자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지’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Ⅳ. 조선의 해금공도정책과 유배문화
류의양의 <남해문견록>을 읽으면서 문득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조선의 ‘해금공도’ 정책이다. 조선왕조가 고려왕조를 이어받게 되자 울릉도 독도 지역은 주민의 거주를 금하고 섬을 비우는 해금정책 하에 놓이게 되었다. 조선왕조가 해금정책을 취하게 된 이유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고려말부터 집요하게 이루어진 왜구의 침입이었다고 한다. 왜구는 해안가나 섬에 게릴라처럼 출몰하는데, 그때마다 정규군을 일일이 파견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며, 비효율적이었다. 군대가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왜구는 이미 노략질을 끝내고 사라진다. 군대가 현장에 도착하면 또 다른 곳에서 불길이 치솟는다. 이런 상황이 계속 되풀이되니 뾰족한 대처방법이 없다. 여기에 대해 가장 효과적인 대책 중 하나로 선택된 것이 자국민이 먼 바다로 나가는 것을 금하고, 육지로부터 비교적 멀리 떨어진 섬들을 아예 비워 버리는 것이다. 사람이 살지 않으면 노략질할 것도 없고, 그렇게 되면 왜구가 출몰할 이유 자체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조선은 왜구가 울릉도에 상륙하고, 이를 기반으로 강원도에까지 들어오는 것을 걱정하였다.
조선의 왕만 바닷가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바닷가 사는 사람들, 포민에 대한 이런 편견적 시각은 지금의 언어습관에도 남아 있다. ‘뱃놈’ ‘섬놈’ 등으로 바닷가에 사는 사람을 낮춰 부르는 형태에서 알 수 있다. 어떤 연구자는 조선이 일본의 침략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일본의 노략질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던 그 근거로 해금공도 정책을 든다. 조선은 바닷가 가는 것을 금하고,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게 비워두는 정책을 폈던 것이다. 그러니 무주공해가 된 바다를 왜적이 수시로 드나들 수 있었던 것이고, 그 결과 임진왜란이란 국난을 당했다. 옛날 어느 책에는 바닷가는 양반이 살 곳이 못 된다는 기록이 있었다고 하니 조선시대 사람들의 포민에 대한 편견은 매우 심했다고 하겠다. 왜 조선왕조뿐만 아니라 내륙 사람들, 양반들은 바닷가를 싫어했을까. 류의양의 <남해문견록>을 보면 그 일단을 알 수가 있다.
통신 등이 발달하지 않은 조선시대에 섬은 왕의 통치가 직접 미치지 못 하는 곳이므로 왕은 명령이 전달되지 않는 곳인 섬에 사람이 사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질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를 찾자면, 그 당시는 우선 명나라의 정책을 조선이 사대적으로 본받았을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강대국의 흥망>의 저자 포 케네디는 “중국의 해금정책이 중국문명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이 쇄락한 가장 큰 이유라고 진단했다. 중국은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 사후부터 제해권을 상실하여 19세기 서구 열강에 유린당하고 말았다. 조선은 개국초부터 사대교린정책에 의해 국제무역을 상당히 통제했다. 또 외침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공도(빈 섬)정책, 해금정책을 펼쳐 바다를 향한 도전과 패기의 기상을 잃었고, 개방과 교류라는 해양문명의 핵심유전자마저 쇠퇴하게 된다. 결국 거듭된 해금과 쇄국정책, 대륙 일변도의 존명 사대정신으로 인해 조선은 근대화라는 세계사의 본류에서 밀려나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유배의 종류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대표적으로 본양안치, 위리안치, 절도안치가 있다. 류의양은 안치 이외의 유배형을 받아 대게 그곳의 주민과 어울려서 사는 것이 묵인되었고, 종을 데려가 함께 있기까지 했다. 유배문화가 섬사람들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컸던 것 같다. 이경식 국제신문 기자의 글에 나와 있듯이, “서울이나 송도 사람들이 장사나 다른 일로 이 섬에 와서 관비나 촌여자를 얻어 칠팔 년이나 십 년이라도 돌아가지 아니하고, 혹 어버이가 있어도 아니 간다 하니 들음에 절통하고, 이런 풍속은 과연 금함 직하더라.” 후송은 부모와 처자식을 버리고 남해에 눌러앉아 사는 외지 남자가 많은 것을 목격하고 통탄한다. 첩을 얻은 것을 질투했다는 이유로 사복서리 남편에 의해 한양에서 남해로 귀양 와 10년째 동냥으로 연명하며 사는 여인의 사연도 전한다. 후송은 이를 두고 적소 주인집 기둥에 부화부순(夫和婦順·부부 사이가 화목함)이란 입춘방을 써 붙인다.” 후송은 유배를 살면서도 남해 섬사람들에게 인간됨을 가르치고자 했다. 남해 사람들이 순박하고 인정이 많고 교육열이 높은 것 또한 오래 전 성정이 곧고 올곧은 유배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까닭이 아니겠는가.
Ⅴ. <남해문견록>에 나타난 세 가지 특성
기행문은 집을 벗어나야만 좋은 글감을 건질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신변잡기라는 틀에 빠지기 쉽다. 아내와 어미라는 자리, 남편과 아비라는 자리를 홀가분하게 박차고 한 마리 자유로운 새가 되어 낭만의 시간을 가져본 끝에 탄생한 글이 기행문이고, 유배 기행문은 억울하게 관직을 박탈당하고 고향으로부터 추방되는 아픔을 안고 타지에서 사직과 자식을 그리워하며 쓴 글이라 더욱 그 맛이 절절하다. 시궁이후공이라는 <한시미학>에 있는 말을 빌리자면, 궁의 상황에서 쓴 유배 기행문은 어떤 기행문보다 더한 절절한 심사가 드러난 글이라 비문학적 성격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읽는 이의 누선을 충분히 자극한다. 잊고 있던 기억 저편의 모습을,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서정어린 그림처럼 펼쳐 보일 수 있는 것이 기행문이 갖는 또 하나의 매력이다. 기행문의 근간은 깊은 자연관이다. 그리고 새로운 인간과의 만남이고 문화의 상호 교류에 있다. 이 글은 기행문이기 때문에 극히 주관적인 글일 수밖에 없다. 대체적으로 류의양은 기행을 통해서 자연 속에 제 나름의 자태를 뽐내며 존재를 밝히는 물상들과 섬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삶의 새로운 의미를 터득하게 된다. 세 갈래의 범주로 나누면, 포민에 대한 편견, 타자에 대한 연민, 그리고 유교에 대한 편향이라 하겠다.
류의양의 <남해문견록>은 제목 그대로 기행문이다. 이 작품은 육지 사람이 남해도라는 섬에 유배 와서 본 생경한 섬의 이질적인 문화, 섬사람들의 언어, 생활 등의 측면을 비교적 솔직하면서 담담하게 그리고 있어 재미를 준다. 류의양은 남해 유배에서 마주친 남해 사람들의 무식한 모습을 가장 인상적인 모습으로 기억한다. 인간의 가슴 속에는 누구나 문화에 대한 향수가 서려 있다. 안타까운 것은 자연과 사람의 만남으로 성립되는 소중한 관계가 편견으로 가득 차 있어 일단 이 작품은 남해 출신 독자에게는 안타까운 느낌을 준다. 이 작품은 판에 박은 듯한 정보전달, 소개 형태의 기행 형식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미담 등 남해를 고양하는 내용도 많다. 주제의식을 한 제재에 담아 집중적으로 조명했더라면 훨씬 더 주제가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 감촉, 개인적 체취가 강하게 풍겨났으리라 보지만, 기행문과 기행수필의 개념이 없었던 조선시대라 내용이나 형식에 토를 달 수는 없겠다.
(1) 포민에 대한 편견
작가가 받아들이는 남해 사람들에 대한 시선은 정말 지극히 주관적이다. 진정한 삶의 가치는 다양성의 인정에 있다. 삶의 진면목은 인간의 내면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향토적 순수에서 찾아야 한다. 류의양이 기행을 통해서 발견한 독특한 남해 문화를 다양성의 가치 차원에서 그대로 인정하고 기행문이 차이의 가치를 인정함으로써 인간 본연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것임을 말해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를 생각해 본다. 기행을 통해 가장 인상 깊었던 남해 사람들의 독특한 문화에 초점을 맞추고, 그 문화를 상처를 치료하듯 따뜻하게 껴안았으면 더 멋진 글이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드는 건 무슨 연유에서일까. 이런 글을 읽으면, 글은 문화에 대한 관심의 구체화란 생각이 든다. 미지의 세계에 발길을 옮겨 놓는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는 역사책을 읽지 않고도 조선 영정조시대 남해를 여행할 수 있는 것이다. 기행문은 작가가 독자에게 베푸는 일종의 서비스인 셈이다. 구경하고 적은 감상이 주류를 이룬다. 글이 경험한 것의 나열이라면 의미가 없다. 가치 있는 체험이 되기 위해서는 경험들이 주제 중심으로 재구성되어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글이 문학적 감동을 주려면, 남해 기행에서 배우고 여러 가지 느낀 점 가운데 어느 하나를 주제나 제재로 취택해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문학의 형식 원리나 창작의 원리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드는 이유다.
상장지절과 혼인지례가 이렇듯 망측하니 섬의 풍속은 준준(蠢蠢·무지해서 사리를 판별 못함) 하기가 심하여 인륜의 행실이 전혀 없고 어버이의 장례를 치를 때 수 일 전을 기하여 집에 차일을 치고 주육(酒肉)을 많이 장만하여 동네 사람들을 모아 각별히 많이 먹이고 무당과 경쟁이(남의 집 재앙을 물리치기 위하여 경을 읽어 주는 사람)를 모아 종일 굿을 하고 새벽에 발인하여 갈 적에 북과 장구를 치며 피리와 저를 불어 상여 앞에 인도하여 뫼까지 가니, 장수(葬需)는 부조 받는 일도 없고 장사 지낼 때 산신께 드리는 폐백(玄壎·현훈)하는 사람도 없고 선비라 이름하는 이라도 신주를 모시는 이 없고 돌아와 제사 한번 지내니 제 이름은 넋제라 하니. 대범 장사에 주육과 풍류를 착실히 한 후에야 이웃들이 장사를 잘 지내니 그 상인(喪人)이 착하다 하고 장수를 약간 잘 차려 지내어도 풍류와 주육이 착실치 못하면 장사를 잘 못 지냈다 하고 꾸지람이 많다 하니, 들으니 우습기도 우습고 해연(駭然·매우 이상스럽고 놀랍다)하더라.
장례가 이러하거든 혼인하는 모양은 더욱 이를 것이 없더라. 혼인날 신랑이 오면 동네 어른과 아이들이 내달아 (신랑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등, 매우 피곤하게 보채고 (신랑을) 딴 방에 종일토록 앉혔다가 납채(納采)하는 일이 없고 신랑이 색시집에 가서 나무로 깎은 기러기를 상위 놀려놓고 절하는 일(전안·奠雁)도 없고 신랑, 신부가 낮에 보는 일 없고 동네 잔치하는 일도 없이 밤에 신랑 있는 방에 처녀를 들여보내고 다른 예절이 없다 하니, 섬 가운데 일러 양반이라 하는 사람들도 상장지절(喪葬之節)과 혼인지례(婚姻之禮)가 이렇듯 망측하니 이 땅이 비록 서울에서 천리가 넘는다고 하나 예의지방의 교화가 아니 미친 데 없건마는 이 땅이 어찌 이렇듯 무식한고, 측연(惻然·보기에 딱하고 가엾음)하기가 심하더라.
- <남해문견록> 중에서
류의양은 남해 사람들의 의식구조와 양반의 의식구조를 비교하면서, 남해사람들의 무지를 비판하고, 이런 남해인의 몽매한 의식을 질타한다. ‘상장지절과 혼인지례가 이렇듯 망측하니 섬 중의 풍속은 준준(蠢蠢·무지해서 사리를 판별 못함)하기가 심하여 인륜의 행실이 전혀 없고’라는 진술이 나오는 걸 보면, 남해의 풍습에서 받은 충격이 류의양의 내부에서 정제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리 그렇다고, ‘망측하다’ ‘무지하다’ ‘사리판별을 못 한다’ ‘인륜의 행실이 전혀 없고’ 등으로 관습에 대해 자신의 주관적 판단을 가감 없이 절제된 언어가 아닌 직설적으로 풀어낸 것은 점잖치 못한 처사다. 문화의 고유성에 대한 몰이해나 다름없다고 하겠다. 글은 감정의 절제를 요한다. 비판은 차분한 언술에서 효과를 발휘한다. 폭발적인 감정의 과잉은 자칫 설득의 목적을 상실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겠다. ‘인륜의 행실이 전혀 없고’ 운운은 각 지역 나름의 향토적 특성이나 문화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 자기 주관적 이해의 하나로 치더라도 그 표현이 너무 심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름이 아니라 이 고을 원은 이전부터 무변(武弁·무관)이 (부임해)오기에 정치를 혹 잘한다 하여도 예의지교와 효열지도(孝烈之道·어버이를 잘 섬기고 절개를 굳게 지키는 도리)를 일컫는 사람이 없기에 풍속이 준준하여 한 해 그러하고 두 해 그러하여 백성들이 오륜이 무엇인지 예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완악(頑惡·성질이 검질기고 모질다)하게만 길러오고 중간에 문신들을 사이사이 보내게 변동하였으되 문관 원이 한번 다녀간 후 무변 원이 매양 연하여 와서 권학(勸學)하는 일이 없고 예법붙이가 매우 소여(掃如·쓸어낸 것처럼 남아있는 것이 없음)하니 섬의 늙은이들이 혹 애달파 하는 이가 있더라.”하는 진술에서도 그는 사람들이 ‘예의지교와 효열지도를 일컫는 사람이 없기에 풍속이 준준하여’ ‘오륜이 무엇인지, 예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성질이 검질기고 모질다’는 표현을 서슴없이 나열해 놓고 있다. 이 정도면, 지금 같았으면, 설화사건이 나도 크게 날 것이다. 교화를 위한 비판의 입장이라도 언어는 다소 정련되어야 하는 것을 어찌 몰랐을까. 언어를 함부로 하니, 세 번이나 귀향에 처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언어적 측면에서 건강성이 약하다는 평가를 내리지 않을 수 없다.
남방 풍속이 괴이하여 여거사(女居士)들이 무리지어 다니며 노름하며 동냥하는 것이 무수한지라 읍내 집집마다 다니며 북치며 염불소리하고 노름하면 마을 사람들이 굿을 보며 돈과 쌀을 낱낱이 주어 염불을 더하라 하여 종일 계속하여 그치는 때 없고, 그 거사가 지나가면 또 다른 거사가 이어와 연하여 그리하여 춘하추 삼절에는 그칠 때 없다 하니 읍에서 이러하면 외촌은 더 가지더라(더 하더라). 내 이전에 해서(海西·여기서는 황해도 지방)원으로 갔을 때 도임초 각면에 분부하여, "거사들이나 중, 광대들이나 요지경이나 잔나비 같은 잡된 것들을 민간에 붙여두지 말라"하고 금하니 인접한 곳에서 오던 것들이 소문 듣고 경지(境地)에 들지 못하니, 사 년을 가니 조용하던 것이니 이일이 '예기(禮記)에 공교한 것 가지고 다닌 것 금하라'하는 것과 같은지라.
- <남해문견록> 중에서
도대체 인륜의 정도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잔인한 평가를 내릴 수 있단 말인가. 한 세상 머물다 이슬처럼 사라지는 게 인생일진데, 삶의 고유한 속성, 문화의 고유성이 상대성 속에서 이해되지 못해 남해 사람들을 몽매무지한 사람들로 그려놓은 데 대해 아쉬움을 갖는다. 평범한 인간도 아닌 높은 관직에서 쫓겨나 애를 태우며 유배지에서 고독하게 살았던 그가 남긴 남해문화에 대한 그의 흔적이 한 조각 아픔으로, 슬픔으로 남겨질 수 있기에 남해인이면 누구나 이런 정제되지 못한 글에 비통한 마음을 담는 것이다. 우리 역사가 후세 사람들에게 남기고 있는 것은 기쁨보다 슬픔이 더 많다. 이런 모진 평가도 기억해 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되풀이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이 글의 값어치는 크다고 하겠다. 이 땅의 문필가들이 치열한 문화의식을 가질 때, 그리고 역사의식을 드러낼 때, 명실상부한 문학의 본령에 값하기 때문이다. 편견은 간유리와 같다.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쉽다.
(2) 타자에 대한 연민
살아가면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소외된 타자를 도와준다는 것은 얼마나 기쁘고 설레는 일인가. 권력을 가진 자나 재물을 가진 자가 먼저 선을 베푼다는 것은 이 세상의 변화를 이끄는 시작이 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우리 사회의 새로운 환경이 직조됨을 의미한다. 선비정신 속에 가려진 유배객의 역할을 잘 인식하고 있기에 후송은 자신도 역시 기꺼이 소수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세상을, 삶을 관조할 수 있어야 진정한 선비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늘을 땅을 환경을 나를 타인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진정한 선비일 것이다. 식탁 위에 앉은 파리 한 마리를 논하고 선비인 척하는 사람은 남해 앞바다의 작은 몽돌 하나도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없지 않은가. 측은지심이 없이 어찌 선비라 할 수 있겠는가. 후송의 선비정신은 휴머니즘으로, 또 측은지심으로 나타난다. 대단한 의식이다. 그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보면, 모른 체하지 않는다. 문필가는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해야 한다. 그는 탐하지 않는다. 자족과 자기 분수를 아는 까닭이다. 후송은 비록 유배 왔지만 종까지 달고 있는 그래도 해녀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어 약자를 도울 수 있는 성품을 갖게 된 것 같다.
읍촌 여인들이 치마를 물들이지 아니하고 입으니 물은 즉, "서울 보내어 물들이는 것이 천리 길이 어려워 흰 대로 입는다." 하더라. 하루는 주인집에 보자기(해녀)가 생복을 이고 왔거늘, 내 종더러 사라고 이르되, "불쌍한 보자기이니 값을 달라는 대로 주라."하고 보자기더러 묻되, "네 어디서 살며 생복을 어디서 잡느냐" 물으니, "제가 살기는 읍내에서 수십 리 되는 한 갯가에서 살고 생복은 물길로 오륙십 리 혹 백여 리를 들어가 캐고 멀리 갈수록 더 굵다."하고 다른 사람들이 이르되, "생복 따는 거동을 본 즉, 보자기들이 겨울이라도 옷을 벗고 물속에 개구리처럼 뛰어들어 물속에 거침없이 빠져 있다가 수식 경이 지난 후 도로 나와 바닷물 위에 뒤웅박을 띄우고 엎디어 숨이 복받쳐 숨을 두르지를 못하고 겨우 쉬어 즉시 또 들어 따내어 오니 보자기의 거동이 극히 불쌍하고 생복 하나의 값이 여러 냥 싸오니이다. 서울 양반님네 그런 일을 모르는 이가 많으시되 나으리는 불쌍한 줄을 아시니 고마우시다" 하고 울더라.
- <남해문견록> 중에서
주변인과 타자를 향한, 그 시선, 중심이 아니라 주변에 포커스를 놓는 삶의 태도는 인문학적이다. 후송 기행문의 한 줄기는 중심이 아니라 주변을 향한다는 차원에서 그 출발점이 인문학에 있다고 하겠다. ‘하루는 주인집에 보자기(해녀)가 생복을 이고 왔거늘, 내 종더러 사라고 이르되, "불쌍한 보자기이니 값을 달라는 대로 주라."하고’에서 볼 수 있듯이 후송은 불쌍한 여인을 도와주려는 마음이 내면에 일렁이는 인간적인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서울 양반님네 그런 일을 모르는 이가 많으시되 나으리는 불쌍한 줄을 아시니 고마우시다" 하고 울더라.’는 대목에서 볼 수 있듯이 힘들게 살아가는 남해 해녀가 후송의 타자정신에 고마움을 울음으로 표현하는 장면은 후송이 인간적으로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시대의 추이를 통찰하고, 더불어 열린 가슴으로 현실에 부딪치는 일이 유배의 땅에서 성장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선비의 사명이 아니겠는가. 자기 자신과의 진실한 대면을 통해 작가가 인간적 향내를 풍기고자 하는 것은 후송의 인류애가 지닌 가치 평가에 적지 않은 시사를 던져준다고 하겠다. 후송은 선비정신으로 삶을 열어가는 것이다. 후송의 타자정신은 위민에서 나온다. 역사적으로 섬은 다른 지역에 비해 모든 것이 척박하였다. 칭기즈칸 군대의 어느 장군 묘비명에는 ‘성을 쌓는 자는 망하고 다리를 놓는 자는 흥한다’라고 쓰여있었다고 한다. 선비들이 지향으로 삼아야 할 경구다.
(3) 유교 사상의 편향
류의양의 기행문견록에서 보이는 세 번째 특성은 그가 유교사상의 신봉자라는 데 있다고 하겠다. 문학은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는 역사의 한 부분에 대한 진솔한 기록이다. 이러한 이유와 당위성 때문에 작가는 작가로서의 의식이 분명해야 한다. 좋은 글은 시대의식과 역사의식을 담아내는 그릇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자기감정을 표현하는 데만 급급한 글은 일시적 카타르시스의 도구와 수단은 될지언정 그 이상의 가치는 지닐 수 없다. 우리는 이제까지 글을 자기감정의 분출 수단이나 그를 위한 도구처럼 인식해왔다. 그러나 보다 견고한 가치를 지닌 글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소명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관점이 류의양의 입장이다. 리얼리즘 글로서 기행문의 의식은 개인의식의 형이상학적 지향에서 사회의식의 형이상학으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기행문은 단순한 삶의 기록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수단이고, 노력의 흔적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글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섬의 풍속이 그리 무식하고 예의 없는데 효자 하나 있으니 성명이 이성삼이라. 제 아비 종실후예로 세계책이 있고 전주에서 옮아와 사는지라, 성삼이 천성지효(天性之孝)하더니 아버지의 상을 만나(당하여) 초상습염부터 모든 것을 다 상례비요(喪禮備要·조선조 광해군 때 선비 신의경(申義慶)이 지은 책, 초상에서 제사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의식을 기록한 것으로 1620년에 지음)대로 하고 장사에 굿과 풍류를 아니하고 장사 지낸 후 산중에 초막을 짓고 시묘하니 사람들이 호환(虎患)이 있는 데라 말리되 성삼이 손수 죽을 쑤어 먹고 삼 년을 지내고 내려올 제 그 집에 사람을 얻어 들이고 논을 사주어 (농사를) 지어 먹고 묘를 조석으로 보살펴 달라 하고 내려와 기제(忌祭)와 절사(節祀)를 극진히 하고 하루길이라도 갈 적과 올 적에 사당에 분향고사하여 온갖 일을 다 예대로 하고, 그 노모 갑술생으로 금년이 칠십팔세라. 근력이 강건하되 성삼이 주야로 곁에서 저녁에는 잠자리를 펴드리고 새벽에 문안드리는 일과 목마르지 않게 항상 보살펴 드리는 효양을 지극히 하고 그 형 하나가 있으니 우애 지극하고 성삼이 벌어 혹 전답을 사나 반드시 형의 이름으로 사는 문서를 하니 이웃 사람들이 말려 가로되 "시방은 자네 형제 우애 극진하거니와 자네 자식들은 종형제니 저희들 장래 서로 다투어 어지러워짐이 나기 쉬우니라“
- <남해문견록> 중에서
역사 발전사에서 한 가지 인식해야 할 점은 세계 여러 나라들의 역사나 세대 전승이 항상 연결되어 일관되게 발전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세계적 규모로 봤을 때 여러 문명사회와 국가들의 발전은 각기 단절적이며, 때로는 이웃 나라 이웃 문명은 발전하는데, 다른 문명은 고립되어 퇴행하고 쇠락하고 멸망하는 경우들이 나타난다. 일테면, 고대 이집트 문명이나 로마제국의 경우, 더 이상 존재하는 않는 문명들이며, 그들 문명의 역사는 기승전결의 과정으로 자기완결적으로 완성되어 결국은 쇠망하고 사라져갔다. 조선말기에서 20세기, 21세기로 넘어가는 과정의 한국 경우에는 유교적 예법과 삼강오륜 등의 보수적 양반 문화가 그 가치나 정당성이 어떠하건 쇠퇴해 갔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유교적인 사상에 따라 움직여져 보수적이고 억압적인 사회상이 무조건 올바르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지만 자식이 부모에게 무조건적 효를 베풀면서 부모 사후에도 자기 삶을 버리는 희생이 과연 옳은가는 지금이 아니라 그 당시에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아닌가싶다.
오랜 옛날인 조선시대 초중기의 경우에는 덜 가부장적이며 남녀평등적 관습, 조선 양반 기준으로 봤을 때 퇴폐적 귀족문화가 발달했던 고려시대에 비해서 보수적 유교적 문화가 사회적으로 깊숙이 자리 잡아 가는 과정에서 점차 사회 풍속이 유교 가르침의 교화로 교정되어 이전 세대보다 다음 세대가 윤리적이었다. 류의양의 섬에 대한 인식은 전반적으로 안 좋다. ‘섬의 풍속이 그리 무식하고 예의 없는데’라는 어구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그것을 상쇄시키는 사건이 바로 효자 이성삼의 이야기다. 부모의 장례 후 자식이 묘지 근처에 초막을 짓고 시묘살이하는 걸 정당화하는 데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맹목적인 유교 추종자인가를 알 수 있다. 유교적 기준에서 과거 고려시대보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더 도리를 알고 도덕적이라는 당시 사림 유교 선비들의 주장과 자부심을 이 견문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형 하나가 있으니 우애 지극하고 성삼이 벌어 혹 전답을 사나 반드시 형의 이름으로 사는 문서를 하니 이웃 사람들이 말려 가로되’ 하는 진술은 형제간의 우애를 떠나 지나친 우애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한 류의양의 판단은 없다. 이로써 우리는 류의양이 이성삼의 이런 행동에 찬동한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얽힌 이야기를 화소로 해서 부자간 형제간 혈연의 정을 바탕으로 희생을 최고의 가치로 설정하고 있는 데서 거부감이 찾아오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하겠다. 공자추종주의자 류의양은 선비로서의 위치는 항상 유교의 예에 따라 격식이나 의식을 행하는 데 있다. 그의 글을 읽고 나면, 당대 선비 지배층의 일원으로서 충과 효를 앞세우는 유교적 질서로 살아가는 그의 의식이 너무나 보수적일 뿐만 아니라 주체 중심적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어 씁쓸해진다. 그래서일까? 그의 글은 한편으로 당대가 조선시대임을 감안해도 읽기가 거북하다. 수직적이고,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삶을 찬양하는 그의 공자를 추종하는 태도에는 무거움과 차가움이 병존해 있어서 묘한 느낌을 더해주고 있다. 유교질서를 강조하는 것이 작품의 주조적 테마로 자리 잡고 있는 그의 글 구석구석에는 공자의 웃음이 물결치고 있다.
읍촌 여인들이 음풍(淫風)이 성하여 정절 지키는 이가 적은데 열녀 일 인이 있으니 이름이 연대(蓮臺)라. 상사람 김지평의 딸이오 사노(私奴) 임분선의 처가 되었더니, 연대 나이 겨우 십칠 세에 홀로 되어 삼년상의 슬픔을 마치니 그 아비 젊은 과부의 신세를 불쌍히 여겨 개가시키려 하니 연대 산골 나무에 목매어 죽으니... 남해현감이 계를 올려 왕께 여쭈어 지금 임금의 기유년(영조 5년, 1729) 정문을 마을에 세우도록 하는 은전을 내리시니 성제포상의 은혜가 이런 바닷가 마을까지 미쳤으니 뉘 아니 감동하리오.
관장(官長·고을 원을 시골사람들이 높여 부르던 이름)된 이가 효열지행을 각별히 숭상하면 풍속이 거의 나을 듯싶고 효열지행을 가르친 후에야 나라에 충성하고 웃사람을 섬길 줄 알리로다. 마을들이 산밑에도 있고 물가에도 있으니 울타리와 사립을 다 대나무로 하고 동산에 대숲이 푸르러 있고 뜰가에 석류꽃이 붉었으니 보기에 경가(景佳)롭고 전답이 옥토요 길쌈들이 착실하고 해물이 갖추어 있으니 살기는 좋은 곳이로되, 내 주인의 마루에 앉았더니 지붕에서 홀연히 앞에 떨어지는 것이 있거늘 보니 큰 뱀이 앞에 떨어져 방석에 서리는지라 매우 놀랍고 지네도 방과 마루에 기다(幾多)하니 물리는 것은 면하나 이 두 가지 일이 복거(卜居·좋은 땅을 찾아 살 곳을 정함) 하여 있지는 못할 곳이더라.
- <남해문견록> 중에서
인용된 부분도 앞부분에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향토 사람들의 정서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써내려가고 있다. ‘읍촌 여인들이 음풍(淫風)이 성하여 정절 지키는 이가 적은데 열녀 일 인이 있으니’ 대목을 면밀히 살펴보면, ‘읍촌 여인들이’ 하면 섬에 사는 거의 대다수 여인들을 지칭하게 되며, ‘음풍(淫風)이 성하여 정절 지키는 이가 적은데’라는 어구는 섬여인들을 아주 불순하고 음탕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문구라 하겠다. 류의양은 주어진 시간을 남해에 체류하면서 남해 여러 곳을 자유롭게 여행하게 되고 그런 결과로 얻은 결론이 섬여자들이 전부 음탕하다는 것이니 기가 찰 노릇이 아닌가.
그 여행 경험의 내면에는 간곡한 사연이 있는가 하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발견이 있고, 이러한 것이 섬사람들의 실상이라는 점도 알게 해준다. 위의 기행문이 과연 품격 있는 글로 값할 만한 가치를 지녔는가 안 지녔는가에 상관하지 않겠지만, 그는 자신이 만나고 보고 들은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깨닫고 느낀 바를 영원히 기억해두기 위해, 또한 다른 독자들에게 정보를 주기 위해, 또한 기행문의 본래 목적인 정서적 감화를 주기 위해, 어쨌든 기행 경험을 기행문 형식으로 적었다. 기행문이 성공적으로 쓰이려면, 글은 품격을 유지해야 한다. 자고로 동양의 시법에도 글자가 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자속불청’을 주창했고, 품격을 유지해야 오래 간다는 ‘격약불로’를 문장도로 내세웠다. 언어를 세련되게 다듬고 정련하는 과정을 거쳐야 함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어떤 단어가 지역민이나 그 대상을 불편하게 하는가 하는 시각과 관점에서, 불편한 진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어떤 단어를 손볼 것인가 하는 것을 미리 구상하고 써야 할 것이다.
Ⅵ. 비판적 읽어내기를 마치며
이경식 기자가 국제신문에 발표한 <남해문견록>에 대한 글을 보면, “후송이 유배에서 풀려난 1771년 7월 13일, 효자 이성삼이 후송을 찾아온다. ‘이 땅에 노인성이 비치기에 노인이 많아 백 세 넘는 이도 자주 있고… 한성부 호적을 살펴보니 남해 노인이 팔도 중 제일이라 하니 노인성 효험이라….’ 이성삼은 후송에게 추분까지 기다렸다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한다는 노인성을 보고 가서 천수를 누릴 것을 권한다. ‘노인성이 비치는 곳을 의논하면 (신선이 살고 있다는) 봉래 궁전에 먼저 비치고 장안 팔만 가가호호에 다 비치어 있는 것이어든 어찌 남해 한 섬뿐이리오?’ 후송은 이같이 반문하면서 당우(唐虞·요순) 때 농부가 땅을 두드리며 태평성세를 구가했던 노래인 격양가(擊壤歌)를 부를 만큼 정치를 잘하면 자신뿐 아니라 나라 안 모든 노인이 장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의 말로 답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노인들이 격양가를 부를 수 있도록 한양과 남해에서 각자 노력하자고 다짐한다. 후송의 유배 시련은 이렇게 가슴 따뜻한 남해 사람들을 만나 만백성이 잘사는 지상낙원의 꿈으로 승화했다.”는 대목이 있다.
후송은 이성삼이 찾아와 몇 가지 근거를 가지고 남해가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장수마을이라고 말하자, 후송은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이성삼의 의견을 반박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자신의 생각이겠지만, 후송의 남해 또는 남해 섬사람들에 대한 인식은 이 대목에서도 부정적인 면이 더 컸다고 평가함이 마땅하지 싶다. 후송의 유배 시련이 가슴 따뜻한 남해 사람들의 가슴을 멍들게 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다시 한 번 더 가져본다. 남해까지 와서 남해의 풍광을 알리고 남해의 방언과 풍속 등을 소상하게 기록해서 후대 역사학자나 국문학자들의 연구에 작은 도움을 주었다는 데 대해서는 긍정적이지만, 언어표현에 있어서 좀더 신중하게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누구보다도 내 고향 남해를 사랑하는 애향인으로서 솔직한 심사다.
류의양은 정조12(1788)년 호조참판을 끝으로 71세로 별세하였는데 고향인 경기도 양주땅 노원에 묻혀 있다고 한다. <남해문견록>은 류의양이 남해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보고 들은 “섬의 지세, 경승, 산물, 풍속, 언어, 미신, 교우 등에 대하여 물 흐르듯 유려하고 상세하게 기록한 한글 기행문으로 18세기를 살았던 우리 선조들의 생활과 문화를 잘 알 수 있다.”고 한 평가도 있었음을 확인한다. 역사적으로 국문학사적으로 의미 있는 글임은 틀림없다. 그리고 시문이나 소설이 아니라 기행문이라는 데 대해 높은 가치를 매긴다. 대부분의 유배문학이 시에 집중되어 있는 만큼,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기행문은 ‘문학은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다’는 측면에서 그 의의가 높게 평가된다고 하겠다. 이번 기회에 독자들이 기행문과 기행수필의 차이를 분명하게 인식했으면 싶다. 요즘 유행하는 테마기행이라는 프로그램도 좋은 기행문을 쓰게 하는 데 한몫을 한다고 하겠다. 작가 자신의 느낌과 사물에 대한 해석, 인생의 총체적 경험의 산물로써 얻어지는 정감, 그리고 발견의 세계로 독자들의 관심을 끌어당겨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조심해야 할 것이 글의 품격이다. 비판의 멘트는 충분히 순화 정화 승화되어 품격 있는 언어로 기술되어야 할 것이다.
수필가, 문학평론가
문학박사(동아대). 명예철학박사(대신대학원대)
88년 월간 <동양문학> 등단 후
<경북신문>,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및 수필 당선
2000년 중국연변대 초청 수필특강(중국 연변)
2016년 국제pen한국본부 토론토지부 초청 문학특강(캐나다 토론토)
2016년 미국 중앙일보 주최 문학특강(미국 달라스)
2018년 한국문협 해외한국문학학술강연(영국 런던)
2018년 미주 중앙일보 주최 문학특강(미국 달라스)
2019년 한국문협 인니지부 초청 문학특강(인도네시아 자카르타)
2021년 미주 LA한국문인협회 초청 문학특강
사)국제PEN한국본부 부산지역위원회 회장
한국문학세계화위원회 위원장
현)대신대학원대학교 문학언어치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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