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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마음에는 젊음도 늙음도 없다>의 줄거리:
마음에는 젊음도 늙음도 없습니다. 마음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 '나'라는 의식이 살아있는 상태가 인격이기에, 나는 젊지도 않고 늙은 것도 아닙니다. 단지 내가 나를 몸에 묶어 제한시키기에 젊음과 늙음의 의식이 자기최면이 되어 작동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단지 어림에서 늙음으로 변하는 육체를 통해 세상을 접하고 있을 뿐이지 우리가 늙어가는 것이 아님을 알고, 청년의 때로부터 영원한 마음을 몸으로부터 해방시키며 살아야 합니다.
마음에는 젊음도 늙음도 없다
(전도서 12:1~14)
1.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2.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3.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다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4.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5. 또한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정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객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마음에는 젊음도 늙음도 없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마음에는 젊음도 늙음도 없다’
마음에 젊음도 늙음도 없는 이유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나’라는 의식이 살아있는 상태가 인격입니다. 마음이 영원하기 때문에 나의 인격 또한 영원합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마음이 영원함을 소유하게 되면 천국의 삶이 주어지고, 일시적인 것들만을 소유하다 죽으면 영원한 지옥의 삶이 주어지게 됩니다.
“끼리끼리 논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영원한 마음이 일시적인 것들과 놀다보면 그것이 죄와 허물이 됩니다. 결과적으로 마음이 허무한 상태의 영원한 지옥을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에서 제일 두려운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전쟁이 나서 나라가 망하고 핵폭탄이 터지고 혹은 육신이 죽는 것조차도 두려운 일은 아닙니다. 마음에 채움 거리가 없는 상태가 가장 두려운 일입니다.
거듭해서 말씀드리지만 인간이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육체를 통해서만 마음 채움 거리를 발견하고 만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만 채워진다면 육체는 백 번을 죽더라도 두려워 할 일이 아닙니다.
이런 전제를 가지고 오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전도서가 마무리 되는 시점에서 앞서 보았던 ‘전도자’라는 말을 다시 기억해봅니다.
‘전도자’라는 말은 히브리어 ‘카할’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코헬레트입니다. 카할은 ‘부르다 소집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전도자는 백성을 소집해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깨달음을 가르쳐 주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전도자는 청중을 불러 모아서 깨달음을 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청중의 필요에 맞춰서 가르침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도자가 느끼는 필요와 청중들이 느끼는 필요가 다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비교하면서 예로 든 것이 스타강사였습니다. 스타강사는 청중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자입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등이 가렵다는 사람의 배를 긁어주는 사람입니다.
복음이 전도를 통해 전해지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복음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느끼시는 필요이기 때문에 인간이 느끼는 필요와는 너무나 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인 성령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필요에 절대 공감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전도자의 가르침 즉 복음은 청중들에게 겉돌기 쉽습니다. 전도자라는 말에는 이러한 깊은 의미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특별히 청년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청년의 특징은 전도자가 인간에게 느끼는 필요와, 청년이 느끼는 필요의 거리가 가장 먼 시기이기 때문에 특별히 청년의 때를 주목합니다. 차라리 어린이나 노인이나 장년이라면 전도자의 가르침에 순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청년들은 부모로부터 독립해서 비로소 자신의 인생을 출발할 시기이기 때문에 복음과 멀어지기 십상입니다.
1절을 보면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라고 하였습니다.
간단히 말해 죽기 전에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라는 말이 죽기 전에를 의미합니다.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난다’라는 것은 괴로움이 끊임없이 찾아오리라는 것입니다. 나이를 먹음에 따라 무릎이 아프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손목이 아픕니다. 소화도 안 되고 소변도 참을 수 없게 되고 잠도 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늙어서 죽기 전까지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해야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3~5절까지는 사람의 몸이 늙어가는 상태를 구분해서 비유적으로 보여줍니다.
3절에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다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라는 말은 손과 발이 떨리게 된다는 의미이고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라고 하는 말은 몸을 지탱하는 척추가 굽게 됨을 의미합니다. 또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다’라는 말은 이가 다 빠지게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창들로 내다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라’는 말은 시력도 약화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또 4절에서도 이러한 말씀은 이어집니다.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라는 말은 청각이 흐려지는 것을 의미하고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라는 말은 이가 없어 잇몸으로 음식을 먹게 되니 씹는 소리가 나지 않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새의 소리로 말미암아 일어난다’라는 말은 새 소리로 일어날 만큼 얕은 잠을 자게 되고,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 질 것이며‘라는 말은 성대도 쇠락하게 되리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내용을 통해서 전도서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첫 째로 죽음이 가까워지는 노년이 이르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삶이 특정한 목적을 위한 기회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죽기 전까지는 어찌하든지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젊은 시절에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젊은 시절은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 크기의 마음공백을 채우는 일을 스스로 해나가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이때에 해 아래에 있는 것들을 향해 질주하는 삶을 살지 말고, 창조주 하나님으로 마음이 채워질 수 있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교리를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진정한 행복과 만족은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마음을 드림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은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한 기회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체적으로 독립된 시스템을 구축해 놓은 것처럼 보이고, 이 자체 내에서 충분히 의미 있는 성공과 형통이 가능하다고 여깁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 안에서 성공하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세상을 이렇게 독자적 시스템으로 보이게 한 것이 바로 마귀의 업적입니다. 사람들에게 착각을 심어준 것입니다. 본래 세상에는 성공이 없고, 세상에서는 인생을 살아야 될 목적이 없습니다. 인생은 오직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로 인해 기뻐하기 위한 기회일 뿐입니다.
어제 돌아온 탕자 비유의 의미를 말씀드렸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에 해 아래에서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삶은 마음 채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세상을 마음에 담았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탕자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에 담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버지를 떠난 탕자가 세상에서 굶주리다 돌아오는 모습이 우리의 삶과 같습니다. 굶주린 탕자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으려 했지만 그것조차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이 쥐엄 열매는 우리가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가치들을 상징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돈이 쥐엄 열매일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가족이 쥐엄 열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가 인간을 만족시킬 수 없듯이, 세상의 가치들이 결코 마음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돼지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절대 금기시되는 짐승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마음 채움 거리로는 절대 금지대상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타락한 세상에서 삶의 의미는 기회입니다. 내 마음의 만족을 위해서 해 위에 계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선택하는 기회입니다. 전도서가 마지막으로 가르치고자 하는 가르침 중의 첫 번째가 바로 이것입니다.
두 번째 가르침은 청년의 때에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것에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청년의 때에 본래 마음의 속성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우리의 마음도 영원합니다. 이러한 마음의 속성을 따라서 끼리끼리 놀라는 것입니다.
영원함을 왜 유한성과 시간성에 묶어 버리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을 통해 세상을 접하기에 마음도 나이를 먹는다고 생각하면서 젊은이로 장년으로 늙은이로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거울에 비치는 모습이 내가 아닙니다. 우리가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몸이 새롭게 되지 않고 헌 옷을 입었다고 해서 몸이 낡아지지 않습니다. 육신이 바로 옷과 같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 아버지가 입으시던 잠바를 큰 형이 물려받아 입었고, 그것을 또 제가 물려받아 입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처럼 늙는 것도 아니고 큰 형처럼 나이를 먹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은 몸을 통해서 세상을 접합니다. 그런데 몸과 마음의 결속이 너무나 단단한 나머지 몸의 나이를 마음에까지 일치시키려는 착각을 합니다. 몸이 늙으면 마음도 늙는 줄로 알고, 몸이 젊을 때에는 마음도 젊은 줄로만 압니다. 그러나 마음은 영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원하다’라는 것은 젊거나 늙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죽기 직전의 노인이든 갓 태어난 아기이든 마음의 속성이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90살이 된 노인은 세상에 대한 지식이 많지만, 갓 태어난 아기는 세상에 대한 지식이 없을 뿐입니다. 어린 것도 아니고 늙은 것도 아닙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 영원한 마음을 극히 일시적이고 변화무쌍하게 늙어가는 몸에 묶은 채로 마음도 늙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가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또 청년 시절의 특징은 육체를 통해서 접하게 되는 세상에 대한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할 때입니다. 이러한 풍부한 감수성이 몸과 마음에 대한 착각을 만들어 내기 쉽습니다. 몸이 젊고 활기차기 때문에 세상에서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성패는 젊음이나 늙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한 출애굽의 역사는 80세 때에 이루어졌습니다. 모세조차도 젊었을 때에는 사고만 쳤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젊음을 의지하여 세상에 대한 감수성을 부풀려나갑니다. 몸이 젊기 때문에 인생에서 해야 될 일이 많은 줄 압니다. 세상을 받아들이는 수용성을 극대화시키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세상에 대한 감수성이 커진다는 것은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만큼 무뎌짐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감수성이 무뎌지는 상태에서 세상에 대한 계획을 이루려한다면 반드시 헛되고 헛된 후회스러운 삶을 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전도서는 몸이 젊다고 해서 마음이 젊은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마음일 뿐이고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몸에 의존하여 마음을 묶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몸이 젊기 때문에 마치 이 세상에서 무엇이든지 다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인양 착각하는데 세상에 대한 수용성을 극대화시키고 있는 것뿐입니다.
“Boys be ambitious!”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젊은이여 야망을 가져라!’고 말하지만 오늘 전도서는 ‘젊은이여 야망을 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삶의 목적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영원한 마음이 몸을 입고 사는 동안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채워져야만 함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만족해보기,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행복해보기, 몸으로 만나는 상황이 어떻든 간에 감사해보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고 기회입니다.
몸이 젊다고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몸이 늙었다고 아무 일도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의 뜻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죽음이 임박한 사람을 통해서라도 남북통일을 이루실 수도 있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야 하는 일과 내 몸의 나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끼리끼리 놀아야 합니다. 창조주를 기억하는 것은 곧 영원한 마음은 영원한 하나님과 어울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몸을 입고 있다고 해서 몸에 마음이 묶일 필요는 없습니다. 젊다고 까불고 늙었다고 포기하는 못난 삶을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몸에 묶여 끌려가는 마음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죽음을 인정할 때에 주님과 함께 부활할 수 있습니다. 부활한 존재는 마음이 몸에 묶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가 바로 창조주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기 전에는 그 마음 채움의 방향이 세상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은 후에는 마음 채움의 방향이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하늘을 향하게 됩니다. 이처럼 십자가를 기억하지 않으면 나이에 관계없이 땅을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설령 아무리 성경지식이 많을지라도 마음은 계속해서 세상 것을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있을 때에만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함의 조건은 충족됩니다. 세상에 대해 죽고 주님과 함께 부활해야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말이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말은 구약에서는 번제단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번제단을 통해 세상을 빨아들이려는 마음을 죽은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럴 때에 마음의 방향을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릴 수 있습니다.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말이 우리 시대에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실제로 창조주 하나님을 가지려는 상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마음만은 젊다’라고 말하지만 마음에는 늙음도 젊음도 없습니다. 마음은 영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새롭다’라는 말은 젊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원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원한 마음이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가질 때에 날마다 새로워집니다. 영원한 것은 지루하지 않고 날마다 새로운 날의 영속입니다. 새로움은 영원히 새롭고 영원히 신선한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없는 몸이 죽으면 아무 의미도 없을 일시적인 세상 것들에 종속시켜 노예처럼 왜 이것들을 얻겠다고 아우성을 치느냐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금도 해 아래에 있는 것들을 필요로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인 우리는 그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돈이나 건강을 바라고 있지만 우리는 십자가를 전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전도서를 읽은 우리의 사명은 전도입니다.
전도자는 사람들이 느끼는 필요가 아닌 하나님이 사람에게 느끼시는 필요를 전하는 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해 아래에 있는 것들을 필요로 하지만, 정말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십자가이고 십자가 생활화라는 것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영원한 마음으로 일시적인 것에 몸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이들에게, 영원하신 하나님을 가질 수 있도록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십자가를 전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서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요청하는 가르침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함으로써 날마다 창조주를 기억하게 하셔서 영원한 마음이 일시적인 몸에 종속됨을 떠나게 하시고 해방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놀라운 복음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자들에게 전할 수 있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