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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호세아 5장 8-15절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구하리라
솔로몬 이후 남과 북이 갈라질 때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은 여로보암입니다. 유다와 베냐민을 제외한 열 지파가 이 여로보암을 따랐는데,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명령한 참된 예배 대신 자의적 예배로 백성의 마음을 붙들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금송아지 신상을 만들되 이것이 너희를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은 둘째 계명에 어긋나는 것이요 그것 자체가 미신이지만, 여러보암은 그런 방식으로 백성의 마음을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자의적 예배, 다시 말해 사람이 고안해 낸 방식의 전통은 점점 더 타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과 상관없는 제단들이 많이 세워졌고, 또한 그곳에서 제사를 드리지만 하나님의 이름조차 빠지게 되는, 오히려 거기에 이방신들이 자리하게 되는 그런 지경에까지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저들에게 하나님은 때를 따라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회개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욱 더 악해져갈 뿐이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할 때는 여로보암 2세가 북이스라엘을 다스릴 때였는데, 그때는 북이스라엘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그런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런 축복을 내려주셨던 겁니다. 그러나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그들의 영적 상태는 최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보내셔서 저들을 책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호세아만이 아니라 아모스 역시 여로보암 2세 때 북아스라엘을 위한 선지자로 활동했는데, 이 시대 두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여 남겨놓으셨다는 것은 그만큼 영적으로 매우 심각한 상황 가운데 있는 그런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보내셔서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과 음행하는 자라고 하셨고, 그들로부터 태어나는 자들이 다 음란한 자식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소망이 전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을 앗수르에 의해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계속해서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시는가? 그들 안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 안에 영적 이스라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 안에 남은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내용은 북이스라엘 전체를 향해 있지만 그 말씀의 효력은 모든 자를 위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칭해지는 자들, 남은 자, 바로 그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 할지라도,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할지라도 북이스라엘 안에서 심각한 죄 가운데 빠져 있을 수 있고, 또한 실제로 빠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서는 책망의 음성을 높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진노하겠다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고, 또한 실제로 진노하시기도 하실 것입니다. 이때 저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 마음을 강퍅케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책망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하고, 진노하시겠다고 하면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짓 없는 회개에 대하여 하나님은 언제든지 용서할 마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살피게 되는 내용도 책망과 진노의 말씀이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어느 정도 소망의 불씨가 있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4장부터 시작되는 하나님의 책망과 진노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오늘 본문 15절을 위한 것이요, 다음 주에 살피게 될 호세아 6장 1절을 위한 것입니다. 6장 1절만 미리 한번 본다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찢는 일이 있고 치시는 일이 있지만 그것은 다 무엇을 위한 것으로 있는가? 돌이키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돌이키기만 하면 낫게 하시고 싸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책망과 진노의 말씀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나님께로 돌이키도록 하기 위한 책망이요, 진노라는 것입니다. 선지서를 대하면서 책망과 진노가 있다면 이런 측면임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제 본문으로 와서 8절을 보시면 “너희가 기브아에서 뿔나팔을 불며 라마에서 나팔을 불며 벧아웬에서 외치기를 베냐민아 네 뒤를 쫓는다 할지어다” 지난 시간 하나님께서 그들을 삼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아를 낳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과 그들의 기업을 함께 삼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부분을 좀 더 강조하여 말하고 있는 게 8절 말씀입니다.
여기 보면 기브아, 라마, 벧아웬이라는 지역을 언급하고 있고 그곳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 사람들이 외치게 된다고 말합니다. 왜 나팔을 불고 사람들이 외치는가? 7절에서 북이스라엘을 삼킨다고 할 때 삼키려고 하는 대상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나팔을 불고 사람들이 외친다는 것은 앗수르로부터 침공을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특히 기브아와 라마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경계에 있는 인접 도시라고 합니다. 거기서 나팔을 불게 된다는 것은 이미 전쟁으로 인하여 심각한 상황에 놓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앗수르의 침공은 북쪽에서부터 시작되는데, 그 침공이 어디까지 오게 되었느냐 하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경계 지역에 위치한 도시들에까지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로 나팔 소리를 불게 됩니다.
더불어 벧아웬에서 외치기를 “...베냐민아 네 뒤를 쫓는다 할지어다”라고 말하는 것은 북이스라엘이 남유다를 향해 경고하는 내용인데, 베냐민은 남과 북이 갈릴 때 유다와 함께 한 지파로서 남유다를 의미합니다. 이미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침공을 받고 있는 상태인 것이고, 그 심각성이 이미 남유다 경계 지역에까지 내려와 있기 때문에 북이스라엘이 남유다를 향해 경고하라는 것입니다.
이로 볼 때 지금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과 함께 남유다까지 위협하시는데, 하나님께서 남유다를 위협하시는 것은 남유다조차 북이스라엘의 음행에 동참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아 너는 음행하여도 유다는 죄를 범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호4:15)는 말씀을 하셨던 것이고, 죄를 범하지 못하게 해야 했지만 죄를 범하게 하였기 때문에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넘어지고 유다도 그들과 함께 넘어지리라”(호5:5)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이지는 9절에서는 이 일을 반드시 이룰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벌하는 날에 에브라임이 황폐할 것이라 내가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반드시 있을 일을 보였노라” 세계 역사로 보자면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공한 것이라고 볼 것입니다. 왜 침공했는가에 대해서는 정치적 입장으로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겠지만, 참된 진실은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도구로 앗수르를 사용하셨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앗수르가 침공하는 그 날이 벌하는 날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벌하시는 겁니다. 그때 북이스라엘은 황폐할 것인데, 이 일은 결코 변경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왜 변경할 수 없는 일로 정해졌는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면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한 교훈적인 측면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의 저자가 될 수 없으시기에 하나님의 심판은 바로 저들의 죄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저들의 죄로 말미암아 북이스라엘은 황폐하게 될 것이고, 선지자를 통해 회개할 것을 요청하셨지만 그들 스스로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심판에 있어 변경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즉 너희들이 심판 받는 것은 죄 때문이요, 그 심판이 변경되지 않는 것은 너희들이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회개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주셨지만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에 변경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회개의 기회가 주어질 때 회개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의 교훈을 따라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진노의 신호들은 매일 온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악인들이 잘못을 했을 때 항상 진노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노의 신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온화한 형벌’(칼빈)에 불과합니다. 온화한 형벌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를 보이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북이스라엘은 어떤 면에서 그 기회를 다 사용한 것과 같습니다. 온화한 형벌로 그들에게 기회를 제동하신 바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기회가 없는 것처럼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변경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앗수르에 의해 침공 당하고 함락 당하여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겠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회개의 기회를 주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5절의 말씀이 있는 것이고, 다음 주 보게 될 호세아 6장 1절 이하의 말씀이 있는 겁니다.
한편 우리는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회개하는 데 있어 늑장을 부리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면 돌아서야 하는데 돌아서지 않는 완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매, 인생 채찍을 들어 징계하시면 아파할 그때만 돌아서는 척 하다가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가는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를 부풀립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더욱 거대하게 만듭니다. 마치 죄에 죄를 더하는 만큼 하나님의 진노도 죄에 따라 더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 안에 있는 이런 본성을 그대로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징계하심으로 하나 하나를 고치십니다. 징계로 안 되면 진노와 심판으로 고치십니다. 특히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죄악을 고치실 때 한꺼번에 고치시기보다는 하나씩 하나씩 점진적으로 고치십니다. 분명 한꺼번에 고치실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요한복음 15장 5절의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런 과정을 통해 누누이 확인하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서만 설 수 있다는 것을 항상 배워나가야 합니다.
북이스라엘의 향한 하나님의 변경할 수 없는 진노의 확실함을 말하고 난 뒤 하나님께서는 임박한 심판의 이유를 말씀하시는데, 우선 남유다를 향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절을 보시면 “유다 지도자들은 경계표를 옮기는 자 같으니 내가 나의 진노를 그들에게 물 같이 부으리라” 여기서 경계표란 토지의 경계선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시고 난 뒤 땅을 분배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각 지파가 자신의 땅임을 확인할 수 있도록 경계표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시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 곧 네 소유가 된 기업의 땅에서 조상이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지니라”(신19:14)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말씀까지 더하셨는가?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27:17) 경계표를 옮기는 것은 죄라는 것이고, 죄이기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아멘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남유다에서 지도자라고 하는 자들이 경계표를 옮기는 자로 있었습니다. 지도자라고 하면 각 사람의 권리가 침해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그들 스스로가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는 자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다른 사람의 권리만 침해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법에 도전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법 대신 자신의 욕심이 법이 되어 자기 마음대로 경계표를 옮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가지 예만 제시한 것일 뿐 이것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시는 뜻은 지금 유다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질서를 잘 세우는 것이 아니라 무질서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방신을 섬기는 문제가 제외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북이스라엘을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북이스라엘도 맨 처음 지도자들이 앞서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했고, 백성들이 그것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내가 나의 진노를 그들에게 물 같이 부으리라고 하십니다. 마치 노아 때 홍수로 온 세상을 심판하신 것처럼 유다 지도자를 향하여 물을 부어 심판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다 백성보다 유다 지도자들의 죄가 더 심각하기 때문에 그들을 향하여 더욱 엄격하게 심판하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법 대신 세상의 법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돈의 원리가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신자들마저 돈의 원리를 따라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주의 날이라고 하는 주일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버릴 때, 자기 욕심에 따라 자신의 법을 세울 때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11절을 보시면 북이스라엘을 향해서도 임박한 심판의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에브라임은 사람의 명령 뒤따르기를 좋아하므로 학대를 받고 재판의 압제를 받는도다” 남유다를 향해서는 지도자를 언급하고 있다면 여기서는 북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북이스라엘 지도자의 죄는 가볍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가 있는 것처럼 그들의 죄가 더 무겁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5장 1절에서는 특별히 ‘제사장들아’, ‘왕족들아’라고 하면서 그들에 대하여 언급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백성들의 죄를 언급하시는데, 그들은 사람의 명령 뒤따르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명령 뒤따르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은 등한시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의 명령이 하나님의 명령과 일치하면 여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명령과 상관없는 명령을 했던 것이고,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명령에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인 양 그렇게 따랐던 것입니다.
사실 심판의 말씀이 들려질 때, 그것도 변경할 수 없는 심판의 말씀이 들려질 때 어떤 이들은 두려워하면서 변명꺼리를 늘어놓습니다. 그리고 그 변명은 우리는 백성일 뿐이고, 왕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왕의 폭정으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되었다고 한다면 충분히 자신의 죄를 경감시킬 수 있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속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게 너희는 사람의 명령 따르기를 좋아하는 자라는 겁니다. 역으로 말하면 너희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는 따르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명령 대신 사람의 명령을 더 좋아하는 자, 그래서 너희는 하나님의 명령을 버리고 사람의 명령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맨 처음 북이스라엘이 시작될 때 여로보암 1세가 참된 예배를 거절하고 거짓된 예배를 제정한 것에 대하여 백성이 따랐던 것을 말씀하시는 내용인데, 처음부터 백성들은 어쩔 수 없이 혹은 억지로 거짓된 예배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좋다고 여겼기 때문에 따랐던 것입니다.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더러운 짓에 동참했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그들이 그렇게 따라갔는가? 하나님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했기 때문이요, 참된 예배에 대해서도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무지했기 때문에 죄 없다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저들 역시 학대를 받고 재판의 압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앗수르에 의해 침공을 받을 것이고, 성과 마을이 함락 될 때 그들은 앗수르에 의해 학대와 압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시는 것이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좀 같으며 유다 족속에게는 썩이는 것 같도다” 에브라임에 대하여 좀 같게 하신다는 것은 에브라임을 망하게 하실 때는 좀 벌레 같이 조금씩 조끔씩 갉아먹는 방식으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 족속에 대하여 썩이는 것 같이 하겠다는 것은 조금씩 조금씩 부패하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저들을 망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10절에서 유다 지도자들을 향해 말씀하실 때는 하나님께서 홍수 심판과 같은 모습으로 진노하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여기서는 매우 천천히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대상이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홍수 심판과 같은 진노하심이 있을 수 있고, 어떤 이들에게는 좀 벌레가 갉아먹는 것처럼 혹은 부패하여 썩는 것처럼 조금씩 조끔씩 심판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것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어떤 심판의 형태든 하나님께서는 심판에 앞서 경고하시는 바가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예를 들어 노아 홍수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를 짓도록 명하셨습니다. 방주만 지으라고 명하셨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5절에 의하면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라고 말씀합니다. 방주만 지었던 것이 아니라 노아를 통해 의가 무엇인지를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방주를 지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와 더불어 방주를 짓는 동안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계시다는 것을 알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3장 20잘에 의하면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래 참으시면서 심판에 대한 경고를 하셨지만 그들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심판을 받게 되는 겁니다.
본문 12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의 심판이 실행된다는 것은 조금씩 실행되는 동안 아직도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돌이키기만 하면 어떤 형태로든 소망을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판이 실행되고 있지만 그런 심판의 실행 속에서도 소망의 빛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볼 때 재빨리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인 줄 알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위해 에브라임에게는 좀 같이, 유다 족속에게는 썩이는 것 같이 하시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저들이 돌이켰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13절에 보시면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그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다는 것은 12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좀 벌레가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썩어서 부패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 하나님의 심판으로 깨닫지는 못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지만 돌이키는데, 그런 깨달음이 아니라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직시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앗수르와 같은 강대국을 의지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북이스라엘이나 남유다가 겪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것으로 말미암아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외에는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가 있는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것이 너희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그가 능희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 문제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일은 반드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심판하시는 바가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현실적인 어려움만 해결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현실적인 어려움을 해결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전혀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세상 방식을 동원해서 지금의 어려운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게 먼저가 아니라, 죄로 인하여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께서 심판의 형태를 내리신다면 재빨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자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계속해서 심판을 내리실 것이며, 심지어 그들이 도움을 요청한 앗수르에 의해 망하게 하시시도 하십니다. 즉 내가 의지한 자가 나로 하여금 가장 해롭게 하는 자로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절을 보시면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바로 내가 움켜갈지라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13절에서 앗수르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고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고 하셨는데, 여기서는 하나님 자신을 사자로 비유하십니다. 즉 앗수르가 아무리 강대국에 속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보다 훨씬 강하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사자라면 앗수르는 아무리 강대국이라 할지라도 양과 다를 바 없습니다. 사자 앞에서 양은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겠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움켜간다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도 건져낼 자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처럼 완고한 저들에게 한 가지 소망의 말씀을 주시는데, 15절입니다.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 즉 너희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앗수르를 찾아가서 도움을 구할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완악함을 아십니다. 얼마나 완고한지를 아십니다. 그래서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한 동안 하나님께서 너희를 버리신 것처럼 할 것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의 죄로 말미암아 그들을 앗수르의 손에 넘기십니다. 망하게 하십니다. 마치 하나님의 돌보심이 없는 것처럼 하십니다. 그들에 대하여 완전히 떠나신 것처럼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이 고난을 받을 때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북이스라엘 자체가 망하고 더 이상 아무런 소망이 없는 듯 보이는 가운데 있게 하시지만, 바로 그때 하나님은 고난 속에서 나를 간절히 구하도록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자신의 죄를 뉘우치게 하시고 회개함으로 돌이키도록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4장부터 시작되는 하나님의 책망과 진노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는 말씀을 위한 것입니다. 고난을 받아야지만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때문에, 하나님의 책망과 진노를 받아야지만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때문에,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아야지만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책망과 진노를, 엄중한 심판을 내리시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고난을 주실 때, 책망과 진노를 행하실 때, 엄중한 심판을 내리실 때 마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신 것처럼 자신을 숨기시기도 하십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린 것처럼 그렇게 자신을 숨기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죄 때문임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리가 먼저 깨뜨려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깨뜨린 관계를 깨뜨리지 않으십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자신과 우리 사이에 언약을 맺으실 때 일방적이셨습니다. 쌍방의 언약이긴 하지만 하나님 홀로 일하신 결과 언약을 맺기 때문에 쌍방으로 보이지만 일방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언약을 하나님께서 깨뜨리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박국 선지자의 간구처럼 “...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3:2)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수밖에 없지만, 진노하실 만큼 오래 참고 참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에 진노하실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노하시는 이유가 자기 백성으로 돌이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씀에 근거하여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말아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6장 1절의 말씀처럼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는가? 왜 하나님께서 책망과 진노를 주시는가? 왜 하나님께서 엄중한 심판을 내리시는가? 북이스라엘의 멸망이라는, 나라가 없어지게 되는 일까지 하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 안에 있는 죄 때문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섬겨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른 이방신을 섬기는 것, 그것을 음행이라고 하고 있는 겁니다. 신랑 되신 신부로서 순결해야 하는데, 순결하지 못하고 온갖 음행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책망과 진노를, 엄중한 심판을 내리시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무엇을 우리 마음에 품고 있다는 그것은 음행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골로새서는 탐심은 곧 우상 숭배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골3:5). 우리 안에 있는 모든 탐심이 우상 숭배와 같기 때문에 우리는 그 죄를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죄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이길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하는 것이고, 나아가 연약함으로 넘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그래서 진노하시는 일이 있더라도,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말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