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판중추부사 하담 김공 신도비명병서 〔判中樞府事荷潭金公神道碑銘 幷序〕
[DCI]ITKC_BT_0329A_0200_010_0020_2016_005_XML DCI복사 URL복사
지금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 김휘(金徽) 씨가 하직하고 부임하는 길에 내가 사는 용담(龍潭) 가에 들러 선대부(先大夫)의 행실과 치적, 관력(官歷), 사적을 적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내게 주며 말하기를,
“선인께서 돌아가신 지 오래되었는데도 아직까지 비석에 명문(銘文)을 새겨 신도비를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집사께서는 불초한 저의 죄를 조금 덜어주셔서 우리 선친을 사멸되게 하지 마시고 꾸밈없는 명문을 지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나는 예를 갖추어 사양하며 말하기를,
“나는 늙고 정신이 혼미하니 지금이 어찌 문필에 종사할 때이겠소. 다만 내가 공과 동시대에 살아 조정에서 벼슬하면서 보니 공(公)을 밝히고 사(私)를 막으며 나라를 위해 원망을 떠맡고도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은 이는 오직 돌아가신 상공(相公) 한 분뿐이었소. 어찌 부처의 머리에 불결한 것을 묻힌다는 비난을 염려하여 평소 대중들과 함께 칭송하던 것을 덮어놓고 관찰공이 어버이를 드러내려는 정성을 저버리겠소.”
하였다.
가장을 살펴보니 다음과 같다.
공의 휘는 시양(時讓), 자는 자중(子中)이며, 초명(初名)은 시언(時言)인데 중간에 피혐해야 할 이름이 있어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호는 하담(荷潭)이다. 그의 선조는 신라 임금의 후손이다. 휘 방경(方慶)은 고려에 벼슬하여 나가면 장수가 되고 들어오면 재상이 되어 훌륭한 공적과 고상한 절개가 천하에 진동하고 빛났으며 상락공(上洛公)에 봉해졌다. 그 자손들은 열에 여덟이나 아홉은 상락공을 시조로 삼는다고 한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좌사간 고(顧)가 있고, 사간이 감찰 맹렴(孟廉)을, 감찰이 전농(典農) 철균(哲鈞)을, 전농이 사의(司議) 수형(壽亨)을, 사의가 증 참판 언묵(彥默)을 낳았다. 증 참판공이 진사 석(錫)을 낳았는데 석은 기복재(奇服齋 기준(奇遵))의 외종(外從)으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세상을 피해 은둔하다가 생을 마쳤다. 이 분이 공의 부친 휘 인갑(仁甲)을 낳았는데 비안 현감(比安縣監)을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니, 임진왜란 때 원주(原州)에서 순절한 제갑(悌甲)의 아우이다. 모친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서윤(庶尹) 이곤(以坤)의 딸이다.
공은 만력(萬曆) 신사년(1581, 선조14)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크게 두각을 나타내고 기우(氣宇)가 바로 보이니, 찬성공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기를,
“우리 가문을 크게 일으키는 것은 너에게 달려 있다.”
하였다. 조금 자라서는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좋았다. 12세와 14세에 잇달아 아버지와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당시 전쟁과 기근이 겹쳤으나 공은 고아로서 어른처럼 상을 치르며 애통해하느라 수척해졌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상제(喪制)를 마치자 비로소 학문에 몸을 맡겨 끊임없이 글을 읽어 글재주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향상되어 과장(科場)에서 시험 볼 때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니 겨룰 사람이 없었다.
을사년(1605)에 정시(庭試)에 급제하여 선발되어 승문원에 들어갔다.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세 정승이 공을 한 번 보고 국기(國器 나라의 인재)로 인정하였다. 논자들은 “사필(史筆)은 공 말고는 적임자가 없다.”라고 하였으나, 정권을 쥔 자를 거슬러 천거되지 못했다.
정미년(1607)에 승정원 주서에 임명되었다.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에 선조가 승하하였다. 상례가 기사관(記事官)에게 맡겨졌는데 사람들은 모두 급급해하고 허둥지둥 거렸지만 공만은 여유가 있었다.
기유년(1609, 광해군1)에 예조 좌랑 지제교로 승진하였다.
경술년(1610)에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으로 연경에 갔는데, 법에 따라 일행을 단속하니 역관들이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하고 춥지 않은데도 벌벌 떨었다. 이듬해 돌아와 견문록(見聞錄)을 올려 “오랑캐의 세력이 점점 커지면 우리나라가 사행 갈 때 요동길은 믿을 수 없으니 바닷길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라고 논하였으니 이는 높은 안목을 가진 공이 10년 뒤의 일을 미리 내다본 것이다.
이듬해 전라 도사(全羅都事)가 되어 시험을 관장하였는데, 소인배들이 시제(試題)를 지적하여 “임금을 비난하였다.”라고 하고 의금부로 잡아다 국문(鞫問)하기를 청하였다. 판서 정세규(鄭世規)는 공의 돈독한 벗이었는데, 광릉(廣陵 광주(廣州)) 길에서 맞이하여 공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으나 공은 안색이 태연자약하니 정세규가 오랫동안 찬탄하였다. 심리할 때 의금부에서 극형에 처하도록 아뢰었지만 광해군은 오히려 사흘 동안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공이 평상시처럼 깊이 자고 있으니, 참시관(參試官)으로 함께 옥에 갇혔던 윤효선(尹孝先)이 공을 발로 차서 깨우며 말하기를,
“지금이 어느 때인데 편안히 잘 수 있는가?”
하니,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다.”
하였다. 백사 정승이 억울한 판결을 바로잡아 준 덕에 사형을 면하고 북쪽 지방으로 유배되었다. 종성(鍾城)으로 가는 도중에 지은 시에
마음과 행동이 본래 밝은 해를 속이지 않았으니 / 心跡本非欺白日
길흉은 원래 푸른 하늘에 물을 필요가 없다네 / 吉凶元不問蒼天
하였다.
무오년(1618)에 영해(寧海)로 이배(移配)되었다. 북쪽으로 갈 때 남북 수천 리를 대나무로 엮어 만든 가마를 탔고 10여 년 동안 진퇴양난의 고난을 겪었지만 조금도 실의에 빠지지 않고 어느 경우든 편안하게 여겼다. 서적에 몰두하여 학문이 끝없이 깊고 넓어 천고(千古)의 치란, 시비, 득실을 손바닥 위에 놓고 보는 것처럼 훤히 알았으니, 훗날 활용한 것은 모두 옛일을 고찰한 덕이었다.
육진(六鎭)은 오랫동안 과거 급제자가 나오지 않았는데, 공의 자상하고 정성스러운 가르침을 받아 인재가 된 자가 많았고 추천하는 문서에 이름이 오르는 자가 잇달았다. 공이 서거하자 사모해 마지않아 공을 현인 사이에 두고 제사 지냈으니, 이는 조주(潮州) 사람들이 한 문공(韓文公)을 제향한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이때 대농(大農 호조)이 토목 공사로 재정이 고갈되어 속금법(贖金法)을 만들었는데 법령이 시행되자 유배된 사람들이 남보다 뒤질세라 법령을 따랐다. 하지만 공과 무숙(茂叔 임숙영(任叔英))만은 구차하게 면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였으니, 식자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계해년(1623, 인조1)에 인조가 반정하여 종사를 안정시키자 유배 중에 기용되어 예조와 병조의 정랑으로 옮기고 유장(儒將)으로 천거되었다. 또 홍문관에 몸담아 수찬을 거쳐 단계를 뛰어넘어 의주 부윤(義州府尹)에 제수되었는데, 정승 최명길(崔鳴吉)의 반려로 부임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한명련(韓明璉)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을 공이 알았는데, 한명련이 당시 순변사(巡邊使)로 의주에 머물러 있으므로 정승 최명길이 실로 공이 호랑이 먹이가 될까 염려하여 이렇게 한 것이었다. 가을에 교리로 어사가 되어 북쪽을 안찰(按察)하고 아울러 순무(巡撫)하니 교활한 아전들이 순종하고 수졸(戍卒)들이 소생하였다.
갑자년(1624)에 역적 이괄(李适)이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체찰사(體察使)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이 공을 불러 종사관으로 삼아 부체찰사 이시발(李時發)과 함께 선봉으로 삼았는데, 당시 일이 급하여 군졸 한 명도 지원해 줄 겨를이 없었다. 평산(平山)에서 원수 장만(張晩)을 만나 함께 일을 계획하였으나 적은 이미 저탄(猪灘)에서 많은 사람을 죽이고 곧장 경성으로 육박했으므로 인조는 공주(公州)로 행차하였다. 방어사 정충신(鄭忠信)이 맨 먼저 안현(鞍峴)에서 적을 격파할 계책을 세웠으나, 장수들은 이것을 의심하였다. 공은 그 계책을 힘껏 도와 마침내 큰 공훈을 세웠다. 원수는 1등 공신이 되고 공은 2등으로 정해졌는데, 임금이 이서(李曙)의 말을 받아들여 문사(文士) 3인을 삭제하였으니 공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 후 헌납에 임명되었다가 교리로 복귀했는데 진강(進講) 때 임금의 마음에 든 말이 가장 많았으니 이는 그의 말에 음미할 만한 깊은 뜻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겨울에 천거되어 이조 좌랑과 정랑에 임명되고 세자시강원 사서를 겸하였다.
을축년(1625)에 응교 겸문학으로 승진하였다.
병인년(1626)에 인헌왕후(仁獻王后) 산릉도감에서 일한 공로로 당상관에 가자되었다. 얼마 뒤에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임명되었는데 예순 고을 백성의 진실과 거짓, 풍속의 순박함과 난잡함을 넓적다리와 손바닥 사이에서 굴리듯 쉽게 파악하여 처리하니 책상에 적체된 문서가 없었다. 선산(善山)의 간사한 백성이 작은 원한 때문에 많은 선비들을 해치려 하였는데, 공이 무고임을 밝혀내어 법에 따라 처벌하니, 남쪽 지방의 인사들이 칭송해 마지않았다.
정묘년(1627)에 조정에서 오랑캐와 강화하고 각 도의 군사를 해산하도록 명하였다. 얼마 뒤에 급보가 왔는데,
“적이 우리 여덟 장수를 사로잡았으니 각 도에서는 군사를 해산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으니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가 원수와 함께 아뢴 것이었다. 공이 마침 호소사(號召使) 정우복(鄭愚伏 정경세(鄭經世)) 선생과 함창(咸昌)에서 만났는데, 공이 말하기를,
“이 첩보는 믿을 것이 못되니, 놔두고 포고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우복은 미심쩍었으나 나중에 들으니 이서의 보고는 과연 사실이 아니었다.
기사년(1629) 1월에 승지를 거쳐 평안도관찰사 겸 체찰부사(平安道觀察使兼體察副使)에 임명되고 가선대부에 가자되었다. 평양에 도착한 지 겨우 며칠 만에 금(金)나라 군사 수천 명이 강을 건너왔다고 변방의 관리가 달려와 보고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이는 필시 금나라 사람이 한인(漢人)을 뒤쫓는 것이니 이것을 위에 보고하여 흉흉하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그 후에 금나라 사람이 선천(宣川), 철산(鐵山)을 침략하였으나 한 사람도 잡지 못하고 돌아갔다.
당시 평안도는 왼쪽으로 모문룡(毛文龍)과 접하고 오른쪽으로 금나라 사람과 대치하였는데 그 변환(變幻)과 출몰이 무상하였다. 공이 사전에 실정을 살펴 번번이 상황에 맞게 대처하니, 모문룡은 교활한 짓을 함부로 하지 못했고 금나라 사람도 머뭇거린 적이 여러 번이었다.
여름 4월에 모문룡이 군사를 거느리고 영원(寧遠)에서 군문(軍門) 원숭환(袁崇煥)과 만났다. 조정에서 공에게 섬으로 가서 전별하도록 명하였다. 공이 접반사(接伴使) 홍보(洪靌)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모문룡이 이번에 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오.”
하였다. 몇 달 뒤 선천에서 모일(某日)에 군문이 모문룡의 죄상을 열거하며 주살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공은 남쪽에서 정사를 시작해서 서쪽에서 마쳤는데, 충성과 지혜를 다하여 세운 원대한 계책이 마치 부신(符信)을 맞춘 것처럼 적중했으니, 영남을 맡았을 때보다 뛰어났다. 공이 오랑캐를 근심하기 시작한 것은 신해년(1611)에 명나라에 사신 갔던 때부터였다.
경오년(1630)에 가도(椵島)의 병졸 유흥치(劉興治)가 총병(摠兵) 진계성(陳繼盛)을 살해하였다. 공이 상소하기를,
“유흥치가 우리나라 강역에 끼어들어 멋대로 명나라 대장을 죽였으니 의리상 토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청컨대 토벌하소서.”
하니, 성상이 이서(李曙), 정충신을 장수로 삼아 수군과 보병을 통솔하여 토벌하도록 하였다. 정충신이 하직할 때 군사가 적은 것을 근심하니, 성상이 이르기를,
“감사 김시양은 지략이 풍부하고 계책이 많으니 나는 서쪽 지방에 대한 근심이 없다.”
하였다. 이때 조정의 신하들은 대부분 ‘유흥치의 반란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으니 채찍이 길더라도 말의 배에 어찌 닿겠는가.’라고 생각하였는데, 오직 정승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만은 공의 계책을 옳게 여겼다. 공이 또 말하기를,
“오랑캐가 중국을 어지럽힌 뒤로 우리나라에서 아직까지 명나라에 안부를 물을 한 명의 사신도 보내지 못한 것은 가도에서 막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유흥치의 반란을 명분으로 삼아 토벌한다면 우리의 종기를 도려낼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듣고 반드시 제 환공(齊桓公)과 진 문공(晉文公)의 일이라고 우리를 인정하여 충성스럽고 의롭다는 명성이 천하에 성대하게 울려 퍼질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성상이 듣고 매우 감동하여 반드시 공의 말을 따르려 하였으나, 늙어서 구차하게 일 만들지 않기를 바라는 원훈(元勳)이 많았고 유흥치도 듣고서 공에게 앙갚음을 하였다. 공이 서쪽 변방을 떠나자 반역을 토벌하려는 군사가 마침내 위축되었다.
신미년(1631) 봄에 공이 특진관으로 등대(登對)하였을 때 성상이 유흥치의 일을 물었는데, 공은 궁지에 몰린 역적이 오랑캐에게 투항하지 않고는 달리 어떻게 할 방법이 없을 것이라고 극진히 아뢰었다. 대신(大臣)도 나와서 이해(利害)를 따졌으나 공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논변하였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유흥치가 배반하여 오랑캐에게 투항하였는데, 심세괴(沈世魁), 장도(張燾) 등이 함께 도모하여 주살하였다. 얼마 뒤에 병부(兵部)에서 자문(咨文)이 왔는데,
“유흥치가 반역하여 가도를 점거하였는데 전에 귀국에서 그 일을 맡은 신하가 충성과 용기로 세력이 뻗어나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면 제(齊)와 노(魯) 지역이 하마터면 편치 못할 뻔했습니다.”
하며 크게 칭찬하였다. 성상이 이 자문을 내려 재신(宰臣)들에게 두루 보이니, 사람들이 모두 부끄러워 땀을 흘렸다.
여름 4월에 병조 판서 이홍주(李弘胄)가 면직되자 성상이 특명으로 공을 발탁하여 대신하도록 하였는데,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에 오랑캐가 변경을 침입하여 선천(宣川), 곽산(郭山)에 이르자, 묘당에서 의논해서 공을 추천하여 원수로 삼고 정충신을 부원수로 삼았다. 출발하려 할 때 도성은 죽 끓듯이 혼란했으나 공은 태연하였다. 정충신이 안주(安州)에 도착하기 전에 오랑캐가 이미 떠나갔다. 겨울에 정승 김류(金瑬)가 도체찰사에서 체직되자, 성상이 이르기를,
“김시양은 충성스럽고 믿음직하며 지혜롭고 무(武)를 갖추었으니 이 직임에 합당하지 않겠는가.”
하니, 비변사에서 합사(合辭)하여 아뢰기를,
“주상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하였다. 성상이 즉시 명을 내려 단계를 뛰어넘어 숭정대부로 가자하고 사도 체찰사(四道體察使)에 제수하였다. 공이 인조대왕에게 지우(知遇)를 입은 것은 둘도 없다고 하겠지만, 신하들 중에 위성(魏成)을 천거한 이극(李克)이나 상국(相國) 조참(曹參)을 천거한 문종(文終) 같은 사람이 없어서 동량으로 쓸 큰 재목을 문지도리나 문지방으로 쓰고 말았으니, 애석하다!
임신년(1632)에 지경연판의금부사를 겸하였다. 가을에 오랑캐가 대장 만호(滿胡 만월개(滿月介))를 보내어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상에 조제(弔祭)하게 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소도리(所都里)를 보내 세폐(歲幣)를 요구하였는데 모두 조칙이라 칭하며 오만하고 음흉하였으므로 비밀로 하여 숨기고 발설하지 않았다. 조정의 관원들은 우환으로 여기지 않고 어떤 이는 ‘거짓 공갈’이라 하고, 어떤 이는 “오랑캐는 문자를 모르니 그 말이 믿을 만하더라도 두려워할 것이 못 된다.”라고 하였다. 공이 이에 의견을 올리기를,
“오랑캐가 맹약을 깬 정황이 이미 남김없이 드러났습니다. 비록 늦었지만 방비할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삼남 지방의 출신(出身)과 무학(武學)을 뽑아 평안도로 들여보내 그곳 군민(軍民)들과 함께 훈련시키면 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당시 조정의 의논은 모두 공이 겁을 낸다고 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겁내지 않으면 누가 겁내겠는가.”
하고 변함없이 이 주장을 견지하며 시종 입이 아프도록 주장하였으나, 권세가의 제지를 받아 어찌할 수 없었다. 공이 또 상소하기를,
“세폐는 한(漢)나라, 당(唐)나라도 면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오랑캐가 처음에 요청한 5천 필(匹)을 주겠다고 허락하지 않으면 나중에 어찌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조정에서 세폐를 줄여달라고 요청하러 신득연(申得淵)을 보냈으나 심양(瀋陽)에 이르러 쫓겨났다.
계유년(1633)에 또 김대건(金大乾)을 보내 화친을 단절할 뜻을 보이게 하였다. 마침 서쪽으로 나가 순시하고 있던 공이 부원수 정충신에게 말하기를,
“방비도 없으면서 오랑캐를 불러들이는 것이 옳겠는가. 김대건이 소지한 국서는 틀림없이 강한 오랑캐의 성질을 마구 돋울 것이다. 우리가 어찌 몸을 아껴서 나라의 계책이 크게 잘못되는 것을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김대건을 억류한 다음 상소하여 그 불가함을 극구 아뢰었다. 성상이 몹시 노하여 비변사에 내려 사신을 멋대로 억류한 죄를 논의하게 하였는데, 비변사에서 의금부로 잡아다 국문(鞫問)하기를 청하였다. 공은 체포되어 옥리에게 나아가 심리를 마치고 나서 영월(寧越)로 유배되었다. 김대건이 금나라에 갔다가 쫓겨나자 조정이 비로소 공을 처벌한 것을 뉘우치고 방귀전리(放歸田里)하였다. 그 뒤에 또 어떤 대신(大臣)이 말하기를,
“충성스럽고 지혜로운 선비를 버리는 것은 나라를 위한 계책이 아니다.”
하였다.
갑술년(1634)에 서용되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또 한성부 판윤으로 옮겼다가 또 호조판서 겸 동지춘추관사 세자좌부빈객으로 옮겼다. 9월에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니 이는 재차 무신의 인사권을 맡은 것이었다. 그러자 재능은 있으나 배경이 없어 곤란한 무관들이 모두 갓을 털고 서로 경하하며 말하기를 “공도(公道)가 다시 행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직무를 본 지 겨우 열흘 만에 병 때문에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을해년(1635)에 강화 유수(江華留守)에 임명되었으나 또 병 때문에 사직하였다.
병자년(1636)에 청백리(淸白吏)에 선발되고 숭록대부로 가자되었다. 여름에 물러나기로 결심하고 떠날 때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적인 내용에,
“신은 다른 신하들보다 훨씬 많은 사은(私恩)을 입었습니다. 이제 물러나 돌아가면서 한 마디 말씀도 올리지 않는다면 임금을 사랑하는 충심을 장차 어디에 담겠습니까. 이에 어리석은 말씀을 올립니다.”
하였다. 그 조목이 다섯 가지였는데, 관절(關節)을 엄금할 것, 탐오(貪汚)를 바로잡을 것, 방납(防納)을 막을 것, 사천(私賤)과 양처(良妻)를 혁파할 것, 사치하는 풍조를 고칠 것이었는데 모두 당시의 폐단을 정확히 지적한 것이었다. 말미에 기찰(機察)에 대해 말하였는데, 기찰이 반드시 나라를 망친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면서도 감히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주관하는 훈귀(勳貴)를 두려워해서였다. 공이 준엄하게 말하니 성상이 읽어 보고 약석(藥石)이 되는 말이라며 훌륭하게 여기고 격려하여 비변사에 그 차자를 내렸다. 비변사에서 두루뭉술하고 간략한 몇 마디 말로 회계(回啓)하니, 성상이 그 본지(本旨)를 잃었다고 꾸짖었으나, 끝내 저지되어 시행되지 않았다.
이때 서쪽의 일이 급박하였는데 식견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근심했지만 유독 조정의 신하들은 혼미하여 깨어나지 못했다. 공이 당시의 재상에게 서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올 겨울이 지나기 전에 반드시 오랑캐의 침입이 있을 것입니다. 대비가 있으면 우환이 없고, 군사를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급변 사태에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은 옛 현인의 말씀입니다. 어찌 공들은 이에 대한 계책을 내지 않습니까.”
하였다. 그해 겨울에 오랑캐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침략했는데, 회계(會稽)의 치욕을 강수(江水)나 한수(漢水)로도 씻기 어려웠다.
정축년(1637) 봄에 성상이 도성으로 돌아와 즉시 공을 불렀으나 공은 병 때문에 힘써 세 번 상소하여 사직했는데, 성상이 비답을 내리기를,
“얼마 전에 산성에 있을 때 경(卿)을 자주 생각하였다. 지금 경에게 비록 병이 있더라도 나와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해야 할 의리가 있으니 속히 올라오라.”
하였다. 공이 황공하여 병든 몸을 억지로 이끌고서 배를 타고 서울에 들어오니, 성상이 내의(內醫)를 보내어 진료하게 하였으며 약물을 가지고 가는 사람이 길에서 만날 정도였다. 공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패전하고 군율(軍律)을 어긴 자는 즉시 군영에서 주살하는 것이 고금의 상법(常法)인데, 장신(張紳)과 김경징(金慶徵) 등에게 무슨 국문(鞫問)할 만한 정상이 있습니까. 이숙번(李叔蕃)은 사직을 안정시킨 원훈(元勳)인데도 교만하고 방자하다는 이유로 태종이 훈적(勳籍 공신록)에서 삭제했는데, 장신이 종사를 함몰시킨 죄와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교만하고 방자합니까? 전하께서 국법을 정당하게 집행하지 않고 자결하게 하셨으니 어떻게 신(神)과 사람의 분노를 풀 수 있겠습니까.
장신이 자결할 때 곧장 자기 집으로 들어가서 죽었다고 합니다. ‘저자에서 사람을 처형하여 대중과 함께 버린다’는 국법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의금부 도사가 직분을 다하지 못한 죄는 용서할 수 없는데도 대간(臺諫)이 입을 다물고 말이 없으니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큰 난리가 있은 뒤에 조정에 있는 신하가 사심을 씻어 버리고 일심으로 봉공(奉公)해야 행여 하늘의 뜻을 돌리고 나라의 형세를 만회할 수 있을 것인데, 이제 나라의 공정한 시비를 염두에 두지 않고 오직 사욕을 채우는 일만 급선무로 삼고 있으니 마침내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상이 비답을 내리기를,
“차자의 말이 지당하다. 나에게도 잘못이 있다.”
하였다. 이에 김경징, 강진흔(姜晉昕) 등에 대해 대간이 다시 안율(按律)하기를 청하였다. 5월에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병 때문에 사직하고 서울 집에 몇 개월 머물다가 돌아갔다. 수찬 이조(李稠)가 건의하기를,
“김시양과 같은 역량, 재능과 식견을 가진 사람을 어디에서 얻겠습니까. 비록 눈병이 있더라도 총명은 쇠퇴하지 않았으니 서울로 불러서 국정을 자문해야 합니다.”
하니, 성상이 윤허하여 마침내 공을 불렀다. 공이 병 때문에 재차 사직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내가 경의 충성과 언론이 남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알기에 도성에 두어 나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고자 하노라.”
하였다. 공이 또 간곡한 차자를 올렸으나 성상이 끝내 윤허하지 않으므로 마지못해 서울로 들어갔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김시양은 눈병이 심하기는 하나 정신은 예전 그대로니, 당상으로 차임하여 집에서 일을 자문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공이 굳이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신사년(1641)에 조정에서 《선조실록(宣祖實錄)》을 개수(改修)할 때 대제학 이식(李植)과 총재관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김시양은 전고(典故)를 잘 알기로는 현재 제일가는 사람입니다. 역사 기록을 고증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니 그와 함께 일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성상이 윤허하여 공에게 판중추부사 겸 춘추관사를 제수하고 전지를 내려 공을 불렀다. 연달아 상소하여 사직했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고 부름에 응하여 가다가 여주(驪州)에 이르러 병이 심해져 상소를 올린 다음 비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돌아갔다.
계미년(1643) 5월 4일에 충주(忠州)에 있는 사가(私家)의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3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상이 몹시 슬퍼하며 조회를 정지했고, 정해진 등급보다 더 후하게 치제(致祭)하고 부의를 내렸다. 그해 8월 18일 기묘일로 날짜를 잡아 괴산(槐山) 침령(砧嶺)의 자좌오향(子坐午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으니 선산이 있는 곳이다. 장사는 관가에서 맡아 도왔다.
내가 예전에 《고려사》를 읽으니, 사관의 기록에 “김방경(金方慶)은 충직하고 믿음직하며 도량이 넓고 크며 전고를 많이 알고 일을 결단하면 어긋남이 없었다.”라고 하였는데, 공이 그 분의 후손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이리도 흡사한가. 공은 평소 집안에서의 행실이 훌륭하고 청렴결백한 절조를 지켜 사심이 조금도 없었으니,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자조차도 흠잡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라를 위해 계책을 세우고 적을 헤아려 직관적으로 판단한 일로 말하면 세상의 식견이 얕은 자라도 공의 말을 들으면 깜짝 놀랄 것이다.
을해년(1635) 여름에 오랑캐의 사신이 우리 말〔馬〕을 쓰지 않고 갑자기 자기 말을 타고 서울에 이르자 공이 말하기를,
“오랑캐가 반드시 우리 동쪽 교외에서 스스로 방목하면서 우리나라의 동쪽 형세를 살필 것이다.”
하였고, 임경업(林慶業)이 협박을 받을 때 공이 말하기를,
“내가 임경업의 사람됨을 아는데 죽을 줄 알면서도 피하지 않을 자가 아니니 마침내 반드시 도망갈 것이다.”
하였는데, 그 뒤에 마침내 모두 공의 말대로 되었다.
예로부터 충성스럽고 지혜로운 선비가 자신을 현인으로 우대하는 군주를 만나면 들어 주지 않는 말이 없고 시행되지 않는 계책이 없었으므로 어지러운 것은 다스릴 수 있고 위태로운 것은 안정시킬 수 있어서 신하와 임금이 함께 영화롭고 후세까지 이름을 전하였다. 공의 충성과 지혜가 어찌 옛 사람만 못하겠는가. 공이 인조를 만난 것도 천고(千古)에 충분하다고 하겠다. 대사가 있으면 상이 반드시 공에게 물었고 공이 말하면 성상이 반드시 그 충성과 재지(才智)를 칭찬하고 관직을 올려주어 격려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그칠 뿐이요, 영광스럽게 그 중에 하나만 채용하고 둘은 오히려 채용하지 못하였다. 조 영평(趙營平)의 금성 방략(金城方略)을 한(漢)나라 조정의 공경(公卿)들이 모두 허락하지 않았지만 위상(魏相)만이 반드시 쓸 만하다고 보장하여 마침내 강(羌)을 평정하는 공을 이루었다. 공이 살아 있을 당시 정승 중에 위상 같은 사람이 없었단 말인가.
공은 한 번 본 글은 죽을 때까지 잊지 않았으니 기억력은 타고난 것이었다. 사서(史書)를 꿰뚫고 전기(傳記)에 널리 통달하였다. 학사대부(學士大夫) 중에 간혹 한 방면에 정통하고 능한 사람은 있지만, 역대의 제작(制作), 헌장과 문물, 이사(吏事)에 관계된 재화(財貨), 주머니와 상자에 담긴 자질구레한 문서까지 분명히 기억하는 것으로 말하면 옛날에도 공과 같은 분이 있었는가.
기사년(1629)에 금나라 사람이 삼(蔘) 수천 근을 보내 청포(靑布)와 교환하자고 요구했는데, 우리는 미포(米布)를 매매하여 요구에 응하였다. 5년 뒤에 금나라 사람이 또 채우지 못한 수량을 요구했는데, 담당했던 내외의 신하들이 정신이 희미하여 멍하니 기억하지 못하였다. 성상이 공에게 묻게 하니, 공이 각 고을에 배정된 수량 및 비변사와 관찰사가 아뢴 날짜를 입으로 외며 막힘없이 죽 적었는데, 뒤에 그 장부를 찾아서 비교해 보니 털끝만한 차이도 없었다. 성상이 이에 감탄하여 말하기를 “세상에 보기 드문 총명이다.”라고 하였다. 그 밖에 어릴 때 우연히 인가의 벽에 적힌 전결(田結)을 스쳐 본 것도 평생 잊지 않았으니 공은 특이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조 말기에 정승을 둘 때 공에게 뜻을 두었으나 병든 공은 이미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공은 문장을 작은 재주로 여겨 다듬고 수식하여 정교하게 만들지 않았고 상소 같은 큰 논의도 종이를 잡으면 즉시 완성했는데도 기세가 굳세고 글이 조리가 있어 남들이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부인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선생의 후손이자 승지에 추증된 군수 대수(大遂)의 딸이다. 17세에 공에게 출가했는데 유순하고 아름다우며 정숙하고 현명하였다.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나 공보다 10년 뒤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73세였다. 공의 묘소에 부장(祔葬)했다. 모두 2남 3녀를 두었다. 장남은 군수 곡(縠)이고, 차남은 바로 관찰사 공이다. 장녀는 사간 이도장(李道長)에게, 둘째 딸은 군수 김홍석(金弘錫)에게, 셋째 딸은 승지 민점(閔點)에게 출가했다. 측실 소생의 아들은 변(變), 만(巒)이다.
군수는 직장 윤성득(尹誠得)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이 없어서 관찰사의 장남인 생원 추만(秋萬)을 후사로 삼았다. 관찰사는 정언 허실(許實)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은 군수의 후사가 된 자이고, 차남은 요절했으며, 딸은 서경조(徐敬祖)에게 출가했다. 이도장은 4남 4녀를 두었다. 원정(元禎)은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가 되었다. 원록(元祿)은 문과에 급제했다. 원례(元禮)는 단명했다. 막내아들은 원지(元祉)이다. 딸은 모(某)와 참봉 장벽(張銢)에게 출가했다. 김홍석은 4남 5녀를 두었다. 아들은 제(濟), 오(澳)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딸은 모(某)에게 출가했다. 민점은 4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안도(安道), 문과에 급제하여 대교가 된 종도(宗道), 홍도(弘道), 진사 주도(周道)이다. 딸은 어리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선철이 말씀하셨다네 / 先喆有言曰
눈이 밝은 것을 명이라 하고 / 目徹爲明
귀가 밝은 것을 총이라 하며 / 耳徹爲聰
마음이 명철한 것을 지라 하고 / 心徹爲智
지가 명철한 것을 덕이라 한다고 / 智徹爲德
이 네 가지를 가지고 고금에 인재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을 평가해 보면 / 執是四者繩古今稱人才者
참으로 겸전한 사람은 열에 하나도 얻기 어렵구나 / 信乎具全之十難一得
위대하다, 하담 김공이여! / 韙哉荷潭金公
그 성품에 사철을 갖추었네 / 四徹具於其性
통통한 큰 배에 책 만 권이 들었으니 / 便便巨腹貯萬卷兮
역대 치란의 사적을 훤히 꿰뚫었네 / 歷代理亂事跡孰逃乎䨥眼之炳
멀리 오랑캐의 진위에서 / 遠之夷翟情僞
가까이 조정에서 논쟁한 것까지 / 近之同朝所爭
사후의 성패가 손가락 꼽은 대로 적중하였으니 / 事後當成敗效於指屈兮
그 마음이 지혜와 합하여 온전한 덕이 되어 저울대처럼 평평하였네 / 其心與知合爲一德而爲衡欛柄
공이 올린 두세 편의 상소와 차자를 읽어보면 / 讀公二三疏箚兮
성대한 충성과 공정한 마음은 하늘에 물어봐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네 / 可見忠之盛心之公無媿質大昊
그대의 충성이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임금께서 아셨는데 / 皇覽爾之誠忠非不足兮
어찌하여 촉지무를 일찍 등용하지 않았는가 / 胡使燭之武用之不蚤
아, 먼 옛날에 상락공 김방경이 고려의 시초와 거북이 되었는데 / 嘻遠哉上洛爲麗朝蓍龜兮
공이 이제 그 유업을 받들어 그 행적을 따르고 그 미덕을 계승했네 / 公今以其緖追其躅而趾其美
작위와 장수를 누린 것은 그 조상보다 조금 못하지만 / 縱爵位大年之少遜迺祖兮
누가 이 조상과 이 후손이 아득한 천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같은 길을 걸었다고 하지 않겠는가 / 夫孰不曰此祖此孫邈千載而一軌
[주-D001] 판중추부사 …… 신도비명 : 이 글은 김시양(金時讓, 1581~1643)의 신도비명이다. 김시양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중(子中), 호는 하담(荷潭), 초명은 시언(時言)이다.[주-D002] 돌아가신 지 오래되었는데도 : 사람이 세상을 떠난 지 이미 오래된 것을 개탄하는 말이다. 《춘추좌씨전》에 “진 목공(秦穆公)이 사람을 보내어 건숙(蹇叔)에게 이르기를 ‘네가 중수(中壽)만 살고 죽었더라도 네 무덤 위에 심은 나무가 이미 한 아름은 되었을 것이다.〔爾墓之木拱矣〕’라고 하였다.” 하였다. 《春秋左氏傳 僖公32年》[주-D003] 부처의 …… 묻힌다 : 아름답고 좋은 사물이 더럽혀지는 것을 비유하는데, 형편없는 글로 훌륭한 분을 더럽히는 짓을 하는 것이라고 겸손하게 표현한 말이다. 《景德傳燈錄 如會禪師》[주-D004] 임진왜란 …… 제갑(悌甲) : 1592년(선조25)에 왜적이 원주로 침입하자, 원주 목사 김제갑이 고을의 선비와 서인(庶人) 그리고 온 가족을 데리고 영원산성(鴒原山城)으로 들어갔다. 김제갑은 적의 습격에 굴하지 않고 전사하였는데 처자들도 모두 따라 죽었으므로 사람들이 한 가문에서 충효열(忠孝烈)이 나왔다고 하였다. 《宣祖修正實錄 25年 8月 1日》[주-D005] 조주(潮州) …… 방식이었다 : 소식(蘇軾)의 〈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廟碑)〉에 “남해의 백성에게 신망을 받아 사당에서 백대 동안 제향을 받았다.〔能信於南海之民, 廟食百世.〕”라고 하였다. 문공(文公)은 한유(韓愈)의 시호이다.[주-D006] 속금법(贖金法) : 금전으로 죄를 속죄하는 법을 가리킨다.[주-D007] 채찍이 …… 닿겠는가 : 《춘추좌씨전》에 “채찍이 아무리 길어도 말의 배에 미치지 못한다.〔雖鞭之長, 不及馬腹.〕”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宣公15年》[주-D008] 제 환공(齊桓公)과 …… 일 : 제나라 환공과 진나라 문공은 춘추 시대의 패자(覇者)로,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워 천자국인 주(周)나라 왕실을 존중했다. 종주국인 주나라가 미약하여 제후들을 통제할 힘을 잃자 천하가 제후들의 침략과 쟁탈로 혼란했는데, 환공과 문공이 제후들을 규합하여 주나라 왕실을 높였다.[주-D009] 위성(魏成)을 천거한 이극(李克) : 위 문후(魏文侯)가 이극에게 위성과 책황(翟璜) 중에 정승으로 세울 사람을 물었다. 책황이 이극에게 누가 정승으로 정해졌는지 묻자, 이극은 위성이라고 하였다. 책황이 분해하며 이극에게 따지자, 이극이 “위성이 천거한 사람은 군주가 모두 스승으로 섬기고, 그대가 천거한 사람은 군주가 모두 신하로 삼으셨으니, 그대가 어떻게 위성과 견줄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 《史記 卷44 魏世家》[주-D010] 상국(相國) …… 문종(文終) : 문종후(文終侯)는 한(漢)나라 소하(蕭何)의 시호이다. 소하가 병이 들었을 때 혜제(惠帝)가 직접 왕림하여 문병하고 후임자를 묻자, 소하는 조참을 추천하였다. 《史記 卷53 蕭相國世家, 卷54 曹相國世家》[주-D011] 갓을 …… 경하하며 : 원래는 벗이나 사이가 좋은 사람 사이에 벼슬하도록 서로 끌어주는 것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기회가 왔으므로 벼슬할 준비를 하며 서로 축하하였다는 뜻이다. 《한서(漢書)》에 “왕길(王吉)은 공우(貢禹)와 좋은 벗이었다. 세상에서 ‘왕양(王陽)이 관직에 있으면 공공(貢公)이 갓을 턴다.’라고 하였으니, 그 취사가 같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왕길과 공우는 사이가 좋아 왕길이 벼슬하면 공우도 출사할 준비를 하였다. 《漢書 卷72 王吉傳》[주-D012] 차자 : 《인조실록》 14년 4월 20일에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주-D013] 관절(關節) : 남몰래 뇌물 등을 써서 요직에 있는 관리나 유력자와 관계를 맺는 일로 인사 청탁을 가리킨다.[주-D014] 대비가 …… 말씀입니다 : 《서경》에 “일에 종사하는 것이 바로 대비가 있는 것이니, 대비가 있어야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惟事事, 乃其有備, 有備無患.〕” 하였다. 《書經 說命中》 이 말은 부열(傅說)이 고종(高宗)에게 진언한 것이다. 또 《사기(史記)》에 “자공(子貢)이 진(晉)나라 임금에게 말하기를 ‘신(臣)이 듣건대 미리 생각해 두지 않으면 급작스러운 사태에 대처할 수 없고, 군대를 미리 준비해 두지 않으면 적에게 승리할 수 없다.〔慮不先定, 不可以應卒, 兵不先辨, 不可以勝敵.〕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하였다. 《史記 卷67 仲尼弟子列傳》[주-D015] 회계(會稽)의 치욕 : 춘추 시대에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왕(吳王) 부차(夫差)와 싸우다가 대패하여 회계산(會稽山)에서 버텼는데, 오왕이 추격하여 포위하였다. 구천은 궁지에 몰리자 치욕적인 강화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史記 卷41 越王句踐世家》 여기서는 청나라 군대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인조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굴욕적인 강화를 맺은 일을 비유한다.[주-D016] 이숙번(李叔蕃)은 …… 원훈(元勳) : 원문에는 ‘정사원훈(定社元勳)’으로 되어 있는데, 이숙번은 좌명 일등공신(佐命一等功臣)에 책록되었다.[주-D017] 저자에서 …… 버린다 : 《예기》 〈왕제(王制)〉에 보인다.[주-D018] 식견이 얕은 자 :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말이다. “대장부를 알아본 것이 참으로 천박했다.〔淺之爲丈夫〕”는 말인데, 식견이 얕아 대장부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春秋左氏傳 襄公19年》[주-D019] 조 영평(趙營平)의 …… 이루었다 : 위상은 한(漢)나라 선제(宣帝) 때의 승상이고, 조 영평은 영평후(營平侯)에 봉해진 조충국(趙充國)이다. 조충국은 금성(金城)에 둔전(屯田)을 시행하여 강족(羌族)의 침입을 막을 방책을 올렸다. 《漢書 卷69 趙充國傳》[주-D020] 사철(四徹) : 네 가지 명철한 것으로, 명(明), 총(聰), 지(智), 덕(德)을 가리킨다.[주-D021] 통통한 …… 들었으니 : 박람강기하여 지식이 해박한 것을 가리킨다. 후한(後漢)의 변소(邊韶)가 낮에 졸고 있는데, 제자가 조롱하기를 “변효선(邊孝先)은 배가 통통하구나. 독서를 게을리 하고 잠만 자려 하는구나.” 하니, 변소가 몰래 듣고 있다가 즉시 대답하기를 “배가 통통한 것은 오경(五經)이 든 상자요, 잠만 자려 하는 것은 경전의 이치를 생각하기 위함이네.” 하였다. 효선(孝先)은 변소의 자이다. 《後漢書 卷80上 文苑列傳 邊韶》[주-D022] 어찌하여 …… 않았는가 : 진(晉)나라와 진(秦)나라가 정(鄭)나라를 포위했을 때, 정나라 임금이 촉지무(燭之武)를 사신으로 보내려 하였다. 촉지무가 늙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사양하자, 정백(鄭伯)이 말하기를 “내 일찍 그대를 등용하지 않았다가 이제 나라가 위급하게 되어 그대에게 요구하니 이는 과인의 잘못이다. 그러나 정나라가 망한다면 그대 또한 이롭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촉지무가 마침내 진(秦)나라 임금을 만나 설득하여 포위를 풀고 철수하게 하자 진(晉)나라 군대도 돌아갔다. 《春秋左氏傳 僖公30年》[주-D023] 시초(蓍草)와 거북 : 길흉을 점치는 시초와 귀갑(龜甲)으로, 덕이 높고 중망(重望)이 있는 사람을 비유한다. 《周易 繫辭傳上》
判中樞府事荷潭金公神道碑銘 幷序 a090_359a 편목색인
[DCI]ITKC_MO_0329A_0200_010_0020_2003_A090_XML DCI복사 URL복사
今咸鏡道觀察使金徽氏以旂節辭朝。路過不佞絅龍潭上。手先大夫行治歷官事跡狀授不佞曰。先人之墓木拱矣。尙闕麗牲石顯刻。願執事少寬不肖之罪。而毋死吾先君子。以惠不華者銘。不佞禮而辭曰。不佞神精銷亡。髮已黃矣。此豈治筆硏時節歟。顧
吾竝世而立於朝。得見昭公圉私。爲國任怨。至死不衰者。唯先相公一人已。寧恤佛頭不潔之誚。而閉平生與輿人誦者。以孤觀察公顯親之誠。按狀。公諱時讓。字子中。初名時言。中年有宜避嫌名。更以今名。號荷潭。其先新羅王者之后也。有諱方慶。仕于麗。出入將相。韙功峻節。震曜夷夏。封上洛公。其后子孫。十望八九皆本於上洛云。入我朝。曰左司諫顧。司諫生監察孟廉。監察生典農哲匀。典農生司儀秀亨。司儀生贈參判彥黙。贈公生進士錫。以奇復齋外從。佹離己卯禍。遯世而終。是生公皇考諱仁甲。比安縣監。
贈左贊成。壬辰死節原城悌甲之弟也。配南陽洪氏。庶尹以坤之女。公生於萬曆辛巳。幼而頭角嶄然。氣宇卽見。贊成公拊頂曰。大吾門其在汝乎。稍長。博聞強志。十二四歲。荐遭內外艱。時兵荒之交。公以孤童執欒欒如成人。聞者稱之。制除。始委己於學。伊吾不輟。文辭一朝驟長。掉鞅場屋。人莫與京。乙巳。登廷試科。選入槐院。梧里,一松,白沙三相一見公。許以國器。論者謂史筆舍公無適。忤當路。薦不及焉。丁未。拜堂后。戊申。宣廟升遐。凡喪殷事。皆屬記事。人皆劫劫。公獨有餘。己酉。陞儀郞,知製敎。庚戌。以賀至書狀如京。用惠文繩一行。象胥斂手。不寒而栗。明年還。晉聞見錄。論虜勢若寢張。我國脩聘。遼路不可恃。海行不可忘。此公嵬眼之見先十年後也。明年。爲全羅都事掌試。群宵摘試題謂譏刺君上。請拿鞫。鄭尙書世規。公石交也。輅廣陵路。握公手涕泣。公色自如。鄭嗟歎久之。及對吏。禁府奏極律。光海猶冘與者三日。公牢睡如常。尹孝先以參試官俱繫。蹴公起曰。此何時而可安寢。公笑曰。死生命也。賴白沙相平反。減死竄北。鍾城途中有詩曰。心跡本非欺白日。吉凶元不問蒼天。戊午。移配寧海。北聳也。乘箯輿南北數千里。躍
前疐後十有餘年。少無隕穫。隨遇而安。窮耽典籍。爲深博無涯涘。千古理亂是非得失。如視諸掌。異日受用處。皆稽古力也。六鎭爲天荒蓋久。承公口謴指畫。成材者多。至有名登薦剡相銜。公薨。慕用公不已。俎豆公賢人間。此與潮人廟食韓文公同一道也。是時。大農枵於土木。作贖金法。令下。諸遷人從令恐後。獨公與任叔英茂叔。惡苟免甚於死者。識者多之。癸亥。仁祖靖宗祊。起徒中遷禮兵正郞。儒將薦。又盛玉堂。由脩撰超授義尹。崔相鳴吉繳不赴。先是。公知明璉有異志。而明璉方爲巡邊使駐龍灣。崔相實慮公
爲虎餌也。秋。以校理衣繡衣按北兼巡撫。猾吏茅靡。戍卒穌醒。甲子。逆适擧兵反。體府完平相辟公從事。與副察李時發爲前茅行。時事急不暇一卒畀之。會元帥張晩于平山與計事。賊已蹀血猪灘。徑迫京城。仁廟幸公山。防禦使鄭忠信首畫鞍峴破賊策。諸將疑之。公力贊其策。卒樹大勳。元帥上功。第公二等。上內李曙言。削文士三人。公其一也。其後拜獻納。還校理。進講最多槪於上心者。有味乎其言之也。冬。薦拜銓佐正郞。兼春坊司書。乙丑。陞應敎兼文學。丙寅。用仁獻王后山陵都監勞加緋。俄拜慶尙道
觀察使。六十州民之情僞。俗之淳厖。運於股掌間。案無留牘。善山有姦民。因睚眥欲害多士。公發其誣置之法。南中人士頌說不置。丁卯。朝廷與奴成。令罷諸道兵。俄有飛報。云賊禽我八將。諸道不可罷兵。總戎李曙同元帥啓也。公方與號召使鄭愚伏先生會咸昌。公曰。此報躗言也。置而不布。愚伏惑焉。後聞之。李報果虛也。己巳正月。由龍喉拜平安觀察使兼體察副使。資嘉善。到平才數日。邊吏奔告金兵數千來渡江。公曰。此必金人迹漢人者。不可以此上聞致咋洶。其後金人略宣鐵。不得一人而還。當是時。關西左接
毛文龍。右待金人。其變幻出沒無常。公先事候情。動中其窾。毛將不得逞其巧。金人亦有遷延者數矣。夏四月。毛將將兵會袁軍門崇煥于寧遠。朝廷命公往餞島中。公密言于接伴使洪寶曰。毛帥此行必不返。居數月。宣川報某日軍門數誅毛將云。公始政於南。終政於西。其所竭忠盡智。劈畫遠計。若執左契者。優於嶺南。公之憂虜。蓋自辛亥朝天日也。庚午。椵島卒興治賊殺摠兵陳繼盛。公拜疏曰。興治介於我國疆域。擅斫天朝大將。義不可不討。請討之。上命李曙,鄭忠信爲將。督艦步以討之。忠信陛辭。以兵少憂。
上曰。監司金某足智多算。我無西顧之憂。時朝臣多以興治之反非與於我。鞭雖長。於馬腹何。唯昇平相是公策。公人言曰。自奴猾夏。我國尙不發一行人奔問官守。由椵島梗也。今若名興治之爲賊而討之。不但抉我癰。中朝聞之。必以桓,文之擧許我。而忠義之聲。隱隱天下耳矣。於是上大動聽。必欲用公言。元勳之髦而苟冀無事者多。興治亦聞而甘心公。公去西門而伐叛之師遂縮。辛未春。公以特進登對。上問興治事。公極陳窮賊非投奴則無地矣。有大臣亦出而較利害。公卞不少詘。無何。興治果反投奴。沈世
魁,張燾等合謀誅之。俄有兵部咨至曰。興治叛據椵島。向非貴國當事之臣忠勇圖蔓。齊魯之境。幾不乾淨。大加褒揚。上下此咨。徧示諸宰。人皆媿汗。夏四月。兵書李弘胄免。上特命擢公代之。辭不報。六月。虜穿塞綴宣,郭。廟議推公爲元帥。忠信爲副。將啓行。都城糜沸。公晏然。忠信未至安。虜已去矣。冬。金相瑬遞都體察使。上曰。金某忠信智武。不當是任否。備局合辭啓曰。如上敎。上卽命超崇政。授四道體察使。公受知於仁廟可謂無兩。顧諸臣未有如李克之擧魏成。文終之薦曺相國者。使棟樑大材止
於椳闑之用。惜哉。壬申。兼知經筵,判義禁府事。秋。奴遣大將滿胡。祭仁穆王后喪。無何。又遣所都里要歲幣。皆稱詔勑。誇謾凶巧。祕而不洩。輦上君子不以爲憂。或曰虛喝。或曰奴不解文字。其語雖信。不足畏也。公乃獻言曰。奴之敗盟。已露無餘。備禦之策。雖晩不可不講。今計在選三南出身武學入關西。與其土兵民調鍊。庶乎得力。當時朝議皆以公爲怯。公笑曰。非我怯。誰當怯者。持是議不變。終始苦口爭之。被當事者鈐制。無柰何。公又拜疏曰。歲幣。漢唐所不免。今不許奴之始請五千純。後不寧悔是哉。朝廷遣申
得淵要減幣。至瀋見斥。癸酉。又遣金大乾以示絶和意。會公出巡于西。謂副帥鄭忠信曰。無備召戎可乎。大乾所持國書。橫挑強胡必矣。吾惡可愛身。不恤國計之大謬。遂留大乾。上疏劇陳其不可。上盛怒。下備局議擅留使臣罪。備局請拿鞫。公就吏爰書訖。配寧越。及大乾至金被驅。朝廷始悔罪公放歸田。其後又有大臣言棄忠智士非國計。甲戌。敍復知樞。又遷京尹。又遷戶書。兼同知春秋,世子左副賓客。九月。拜大戎。蓋再秉西銓也。武弁之才而困於無資地者。無不彈冠相慶曰。公道復行矣。公視事才一旬。以眚
疾辭遞。乙亥。拜江都留守。又以病辭。丙子。被淸白選。階崇祿。夏決退。臨發上箚略曰。臣蒙被恩私。夐出諸臣。今當退歸。若無一言。愛君忠赤。將寓何地。茲獻瞽說。其目五。曰禁關節。曰正貪汚。曰杜防納。曰罷私賤良妻。曰革奢侈。皆中時弊。末言譏察。譏察之必亡人國。夫人知之不敢言者。畏主之者勳貴也。公切刻言之。上覽之。嘉奬以藥石之言。下其箚備局。備局回啓以緁獵數語。上責其失本指。然竟格不行。時西事急。有識皆憂。獨朝廷醉而不醒。公抵書時宰曰。不出今冬。必有奴警。有備無患。兵不先辦。不可以應猝。
昔賢言也。豈諸公計不出此哉。其冬。奴大擧入寇。會稽之恥。江漢難洒也。丁丑春。上還都。卽宣召。公病。力三上章辭。上批曰。頃在山城。思卿數數。今卿雖病。與予義休戚是同。其速上來。公惶恐。強疾乘舟入京。上遣內醫看病。藥物交道。公上箚略曰。敗軍失律者。卽軍中誅之。古今常法。張紳,金慶徵等有何可鞫之情耶。李叔蕃定社元勳。獻廟以驕恣削其勳籍。紳陷沒宗社之罪。孰與驕恣。殿下不正邦刑。使之自盡。是何足解神人之憤。聞紳之自盡也。直入其家而死。國法刑人於市。與衆棄之者安在。金吾
郞失職之罪不可赦。臺諫尙噤無言是何意。大亂之後。在朝之臣。當洗濯私意。一心奉公。庶幾回天意挽國勢。今不有一國公是非。唯以濟私爲急務。終置國家何地。上答曰。箚辭甚當。予亦有失。於是金慶徵,姜晉昕等。臺諫更請按律。五月。拜判中樞。辭以病。留邸數月乃歸。脩撰李禂建白。金某力量才識何處得。雖有眼病。聰明不衰。宜召致京中。諮諏國政。上允之。遂召公。公再辭以病。批曰。予知卿忠誠。言論過人遠甚。欲置卿都下。冀補不逮。公又箚堅懇。上終不許。不得已入京。備局奏曰。金某眼病雖重。精神猶
夫昔。請差堂上。在家待事。公固辭還鄕。辛巳。朝廷改脩宣廟實錄。大提學李植與摠裁洪相瑞鳳奏曰。金某熟諳典故。當今一人。史筆證定。必待此人。請與同事。上允之。授公判中樞兼春秋館事。降旨召公。連上書辭不獲。赴召至驪州病甚。封疏不待批而還。癸未五月四日。卒于忠州私第之正寢。得年六十三。訃聞。上震悼輟朝。賜祭賵賻加等。卜得其年八月十八日己卯。葬于槐山砧嶺坐子向午原。從先兆也。葬事官庀焉。不佞嘗讀麗史。史稱金方慶忠直信厚。器宇弘大。多識故典。斷事無差。公非苗裔耶。
何酷似也。公之內行之脩。潔廉之操。無分寸之私。雖平日不相能者。亦無間言。至其爲國畫冊。料敵懸斷處。則宜世之淺之爲丈夫者聞公言。適適然驚也。乙亥夏。奴差不用我。遽用其馬抵京。公曰。奴必自牧我東郊。察我國東形勢。林慶業之見脅也。公曰。吾知慶業爲人非知死不避者。終必亡矣。其後卒皆如公言。自古忠智之士。遇所賢之主。言無不聽。計無不行。故亂可治危可安。臣主俱榮。垂名後世。公之忠智。奚減古人。公之際遇仁祖亦足千古矣。有大事。上必問公。公有言。上必稱其忠誠才智而增秩以奬之。
然終於此而已。榮用其一二猶未也。趙營平金城方略。漢庭公卿皆不許。獨魏相任必用。遂成平羌功。當公之時。無乃相無相耶。公於書。過眼終身不忘。記性天得也。淹貫諸史。旁通傳記。學士大夫人或耑精而能之者有之。至於歷代制作。憲章文物。吏事財貨囊篋細瑣。了了阿堵中。古有如公者否。在己巳。金人送參數千斤。要換靑布。我以米布廢居以應之。間五年。金人又責其未準數者。外內有司之臣。蓬目糊心。茫然莫記。上使之問公。公口誦列邑分受多寡及道臣與備局啓日月。列書無疑。後得其薄讎校。無毫髮
差。上乃歎曰。希世聰明。其它童子時。偶於人家壁記田結瞥眼者。亦終身不忘。公可謂異人哉。仁廟末當置相也。注意在公。而公病已無可爲者。公以文章視小技。不事雕琢爲工。其所疏章大論。操紙立就。氣健詞暢。人自不及云。內子慶州李氏。益齋先生齊賢之後。贈承旨郡守大遂之女。十七歸公。柔嘉淑明。與公同年生。後公十年而終。壽七十三。祔于公墓。凡擧二男三女。長郡守縠。次卽觀察公。女長。司諫李道長。次郡守金弘錫。次承旨閔點。側室子曰變。曰巒。郡守娶直長尹誠得女。無子。以觀察第一子秋萬爲
後。生員。觀察娶正言許實女。生二男一女。長后郡守者。次夭。女徐敬祖。李道長有四男四女。元禎。文科府使。元祿文科。元禮早死。元祉。女某,參奉張𨥭。金弘錫有四男五女。濟,澳。餘幼。女某。閔點有四男三女。安道,宗道。文科待敎。弘道,周道進士。女幼。銘曰。
先喆有言曰。目徹爲明。耳徹爲聰。心徹爲智。智徹爲德。執是四者。繩古今稱人才者。信乎具全之十難一得。韙哉荷潭金公。四徹具於其性。便便巨腹貯萬卷兮。歷代理亂事跡孰逃乎䨥眼之炳。遠之夷翟情僞。近之同朝所爭。事後當成敗效於指屈兮。其心與知
合爲一德而爲衡欛柄。讀公二三疏箚兮。可見忠之盛心之公無媿質大昊。皇覽爾之誠忠非不足兮。胡使燭之武用之不蚤。嘻遠哉上洛爲麗朝蓍龜兮。公今以其緖追其躅而趾其美。縱爵位大年之少遜迺祖兮。夫孰不曰此祖此孫邈千載而一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