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이었습니다. 갑자기 배가 아파 화장실로 향했습니다. 우리 집 식구 중 누가 마지막에 사용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슬리퍼 한 짝은 뒤집어져 있고 한 짝은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우선 급한 마음에 한쪽 슬리퍼만 걸치고 급하게 변기에 앉았습니다. 아침부터 아랫배를 자극하던 그것은 요란한 소리와 특유의 냄새를 풍기며 시원하게 저 갈 곳으로 갔습니다. 변기에 앉아서 한참을 있다 보니 급하게 찾던 슬리퍼 한 짝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놈은 욕탕 한 쪽에서 반은 널브러진 체 나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조금 미안했습니다.
그리고 평소엔 눈에 두지 않았던 아니 눈에는 보였겠지만 보지 못했던 물건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세면기, 샤워기, 욕탕, 수건, 변기, 칫솔걸이, 치약, 비누, 면도기, 샴푸 등등. 이것들은 제가 거의 매일 사용하고 있는 것들이고 없으면 너무나 불편한 물건 들 이었을 텐데 왜 그동안은 보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일상의 소소한 물건들, 화장실 안에 있는 하나하나의 소품들이 참 달리 보였습니다. 마치 화장실 안이 거룩한 성전 같은 느낌이랄까요.
성전은 바로 우리 몸이며 내가 거룩한 성전임을 모르는 것이 아니지만 이 욕실 또한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곳이며 그분과 너무도 닮은 점이 많아 보입니다. 똥이 마려울 때 언제라도 받아주는 변기, 어떤 똥이라도 가리지 않고 받아주는 변기 같은 분, 세면기와 샤워기 그리고 욕탕에서 이전 것은 지나가고 보라 새것이 되었다 시며 매일처럼 나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어 주시는 분, 이말 저말 내뱉으며 시궁창 같은 내 입을 향기롭게 닦아주시는 치약과 칫솔 같은 분, 내가 저지른 모든 허물을 닦으시며 자신은 더렵혀지는 마른 수건 같은 분, 그리고 내가 필요할 땐 찾아 쓰면서 사용이 끝나면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놓고 뒤도 돌아보지 않는 욕실 슬리퍼 같은 분...
어쩌면 나는 이렇게 늘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함께 하는 줄도 모르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나는 이렇게 내가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가져다 쓰고 사용 후에는 그분을 벗어던졌는지 모릅니다. 이 시대의 교회가 그리고 나라는 인간이 우리 집 화장실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살이에 아픈 사람은 누구라도 와서 자신의 가장 진솔한 똥을 내려놓을 수 있는 교회와 목사, 만나면 새로워지고 다시 삶을 시작할 수 있을만한 힘을 주는 교회와 목사, 급할 땐 제일 먼저 찾게 되고 언제라도 그 자리에서 누구라도 만나주고 자신의 일을 마친 다음엔 무엇도 바라지 않고 그저 또 그 자리에 흔들림 없이 바라봐주는 교회와 목사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요. 하나님은 상천하지(上天下地) 그 어디에도 바람처럼, 물처럼, 빛처럼 계십니다. 우리 집 화장실에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우리 사는 세상이 꼭 화장실만 같았으면 좋겠고 나 라는 인간도 꼭 그러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