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선군 묘에서 불과 1~2km이동하면 연평부원군 이귀의 신도비가 나온다
공주시 이인면 만수리에 있는 조선후기에 건립된 연평부원군 이귀의 신도비는 우리 동복 오씨 오준 선조가 쓴 대표적인 신도비이어서 예전부터 찾고자 하다 이제야 직접 눈으로 본다.
1650년(효종 1)에 건립된 연평부원군 이귀(李貴, 1557∼1633)의 신도비는 화강암 석재로 되어 있으며, 귀부(龜趺)로 된 비좌(碑座) 위에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이수(螭首)와 비신(碑身)이 올려져 있는데, 이수(螭首)의 운용문(雲龍文)은 쌍룡이 다투는 듯한 형상을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으며, 귀부는 목 표현이 생략된 채, 귀두(龜頭)가 수평으로 내밀어 자라 머리를 하고 있다.
비신의 전후 양면에 글씨를 새겼는데, 세자사부(世子師傅) 조익(趙翼)이 비문을 찬(撰)하고,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 오준(吳竣)이 글씨를 썼으며, “贈議政府領議政延平府院君諡忠定李公神道碑銘(증의정부영의정연평부원군시충정이공신도비명)”이라 되어 있는 두전(頭篆)은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 여이징(呂爾徵)이 전서(篆書)를 썼다.
조익 찬, 오준 서, 여이징 전으로 아직도 비문이 잘 드러나 있다
묘는 신도비에서 꽤 떨어져 있어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마을의 처자에게 물어 찾았다
마을 안 쪽으로 오르면 동네길이 있는데 그 길을 따라 마을을 오르다가 마지막 집 바로 전 소나무 숲길로 접어들면 나타난다
묘소는 신도비의 북서쪽 계성산 산록에 있으며, 묘비는 1641년(인조 19)에 건립되었는데, 이식(李植)이 찬(撰)했다.
이귀의 본관은 연안. 자는 옥여, 호는 묵재. 아버지는 영의정에 추증된 정화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이다. 이이(李珥)와 성혼에게서 배웠다.
1582년(선조 15) 생원이 되었다. 이듬해 박근원·송응개(宋應漑) 등 동인이 당쟁을 조장한다며 스승 이이와 성혼을 공격하자 상소를 올려 부당성을 지적했다.
그뒤 강릉참봉으로 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키고, 평양으로 피난한 선조를 찾아가 방어대책을 올렸다.
특히 도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을 도와 모집한 군졸과 양곡을 개성으로 운반하여 한성을 탈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616년(광해군 8) 숙천부사로 있을 때, 이이첨(李爾瞻)의 일파를 처형한 이유로 옥에 갇힌 최기(崔沂)를 만나보고 공초를 수정했다는 탄핵을 받고 이천으로 유배되었다. 1619년 풀려나 1622년 평산부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정치에 불만을 품고, 1623년 김유(金瑬)·최명길(崔鳴吉)·김자점(金自點) 등과 함께 광해군을 몰아내고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인조)을 임금으로 추대했다
이 공으로 정사공신 1등에 연평부원군으로 봉해졌다. 이어 호위대장,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대사헌, 좌찬성 등을 지내면서, 반정에 참여한 서인계열인 공서파의 영수로 활동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어영사로 임명되었으나, 임진강에서 싸우지 않고 달아났다는 탄핵을 받아 백의호가의 처분을 받았다. 1626년(인조 4) 병조·이조의 판서에 올랐으나 같은 해 김장생(金長生)과 함께 인헌왕후(仁獻王后:元宗妃)의 상(喪)을 만 2년으로 할 것을 주장하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강화도로 호종했으나, 최명길과 함께 강화를 주장하다가 다시 대간에게 탄핵을 받았다.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묵재일기 默齊日記〉가 있다. 시호는 충정이다.
이 때까지만 해도 우리 동복오씨도 서인들과 친했기 때문에(오억령, 오백령 선조는 어머니 척족인 성혼에게 한때 사사받음) 한때 서인당에 속했었다 그래서 이귀의 형인 이갱(李赓)이 오억령 선조의 매부가 되고 그런 연고로 오준 선조가 비문을 썼다 추정된다
어쨌든 오늘도 날씨는 흐렸지만 여러 좋은 명당의 기운을 받고 천안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