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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베드로전서 3장 1-7절
남편에게 순종하라 아내와 동거하라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라는 말씀 안에서 국가의 위정자들에 대한 자세, 그리고 지난주에는 당시 사회 속에서 주인과 종이라는 관계가 있다고 할 때 주인에 대한 종의 자세에 대하여 살폈습니다. 십계명 중 다섯 번째 계명으로 해석하자면 모든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 윗사람이 선하고 관용하는 자가 아닐지라도, 다시 말해 악하고 무자비한 자라 할지라도, 그래서 까다롭게 대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순종하되 존중함과 공경함으로 그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일에 대하여 무조건 그렇게 해야 하는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우선순위로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사람의 명령이 조화될 수 없고 오히려 충돌이 될 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그때는 하나님의 명령을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의 원리로 있습니다. 다만 그런 충돌되는 요구 속에서 우리가 사람의 명령을 따를 수 없을지라도 윗사람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심지어 악하고 무자비하고 까다로운 사람일지라도 그들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저들에 대한 존중과 공경의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악하고 무자비한 자들, 다시 말해 까다로운 사람들이 까다롭게 함으로 인해 고난을 받을 때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고난을 참으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고난을 받는 것이라면 거기에는 칭찬이 없겠지만, 부당하게 고난을 받으면서고 인내하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칭찬 받을만한 것이요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사도 베드로는 바로 이 일을 위해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다고까지 말합니다. 너희를 부르신 목적이 고난을 위해서란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은 고난이 아니라 부당하게 고난을 받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불렀다는 것이고, 그런 고난 가운데서도 참고 인내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면, 우리를 향한 궁극적인 목적,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신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이 영광을 위해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만드실 목적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목적을 위해 어떤 과정을 밟게 하시는가? 사도 베드로는 고난을 통한 인내라고 말합니다. 부당한 고난일지라도 그 일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그리고 섭리 가운데 일어나는 줄 알고 인내하는 것, 또한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일을 통해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인내하는 것, 그리고 그런 인내를 통해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자로 세워짐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는 것,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 이런 과정을 밟게 하시는 겁니다.
더불어 부당한 고난과 관련하여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비록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죄를 범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죄로 인한 형벌을 받지 않으셔야 했지만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잡아 욕하고 때렸습니다. 그리고 결국 십자가 처형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그리스도는 욕한다고 해서 욕하고 때린다고 해서 위협하는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힘과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친히 나무에 달리셨는데, 왜냐하면 그것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을 저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당한 고난에 대한 몸 된 교회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본 받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이전에는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길을 잃고 그릇 행하여 가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습니다. 때문에 그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그의 지도하심 가운데 걸어갈 수 있게 된 자들입니다. 물론 그의 인도하심이 있다고 해서, 그의 지도하심이 있다고 해서 고난이 없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십니다. 보호해 주시고, 가야 할 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
오늘 본문은 국가와 사회에 이어 가정 안에서의 아내와 남편의 자세를 다루는데, 이것 또한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라는 원리 안에 있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두움 가운데 있던 너희를 불러 빛으로 들어가게 하셨는데, 너희는 그런 은혜를 베푸신 분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자들로써 선을 행해야 한다고 할 때 아내는 남편에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또한 남편은 아내에게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를 설명합니다.
1절을 보시면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먼저 아내들에게 권하기를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라는 말은 본문 바로 앞에서 언급한 주인과 종의 관계 속에서 언급한 그런 원리와 방식으로 아내 역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 다시 말해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근거한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에 보면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딤전2:11-12)는 말씀을 하면서 두 가지 이유를 언급하는데 첫 번째가 이것입니다.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딤전2:13) 하나님께서 먼저 지으신 이가 남자라는 것이고, 여자는 남자로부터 나왔다는 측면에서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한다고 하십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은 두 번째 이유로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딤전2:14)는 부분도 언급하는데, 창조의 질서만이 아니라 타락과 관련해서도 여자가 먼저 죄에 빠졌다는 점에서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일종의 형벌과 같은 성격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창조질서부터 하나님께서 남자를 먼저 만드셨다는 것을 통해, 또한 여자를 남자로부터 나오게 하셨다는 것을 통해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질서에 따라 사도 베드로는 오늘 본문에서 아내들이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권합니다. 남편을 주관하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남편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성 인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소위 ‘조선 시대도 아니고’라고 하면서 성경을 남성 편향적인 것처럼 말하기도 하지만 지금 이런 가르침은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이 세우시는 질서란 무엇인가를 알리고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어쨌든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에 있어서 아내 된 자들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도록 하는 일이 아니라면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사람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질서도 파괴하여 성경의 이런 말씀을 우습게 여기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서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에 거슬리기도 하지만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은 단지 남편에 대한 아내의 의무만을 저버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와 명령을 저버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때문에 아내 된 자들은 앞선 본문에서 종에게 하신 말씀처럼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존중함과 공경함으로 순종하도록 해야 합니다. 마지못해서,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위선적으로 순종해서는 안 됩니다. 더불어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고 말씀한 것처럼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일지라도 그리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는 불신자를 의미합니다. 이때 우리가 주의해야 될 부분이 있는데, 지금 사도 베드로는 믿는 아내와 믿지 않는 남편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이런 언급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 부분에 있어서는 주의를 해야 합니다.
성경은 불신자와의 결혼을 금합니다. 대표적인 성경 구절이 고린도후서 6장 14절입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이 말씀이 직접적으로 불신자와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지만 본문에 대하여 칼빈이 주석하고 있는 것처럼 불경건의 멍에, 그리스도인들이 합법적으로 참여할 수 없는 행위들에 대한 참여를 불신자와 함께 해서는 안 된다고 할 때 여기에 불신자와의 결혼이 언급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고린도후서 6장 14절은 불신자와의 결혼을 금하는 구절로 인용됩니다.
실제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4장 결혼과 이혼에 대한 부분을 보면 3항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판단력을 가지고 동의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결혼하는 것이 합법적입니다(히13:4, 딤전4:3, 고전7:36-38, 창24:57-58).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의무는 오직 주 안에서 결혼하는 것입니다(고전7:39). 따라서 개혁된 참된 종교를 고백하는 자들은 불신자들이나 교황주의자들이나 다른 우상숭배자들과 결혼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경건한 자들은 그 삶이 악하다고 소문난 자들이나 저주받을 이단설을 주장하는 자들과 결혼해서 부당한 멍에를 메어서도 안 됩니다(창34:14, 출34:16, 신7:3-4, 왕상11:4, 느13:25-27, 말2:11-12, 고후6:14).” 이때 근거 구절로 고린도후서 6장 14절을 두기도 합니다.
이런 이해 속에서 볼 때 오늘 본문이 불신자와의 결혼을 지지한다고 할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오히려 당시 불신자들 가운데 복음을 통해 먼저 믿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런 경우를 두고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은 오늘날도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는 일이 있는 것처럼 베드로 당시도 그런 일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든 지금 사도 베드로는 믿는 아내의 경우 불신자인 남편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할 때 그때도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순종해야 한다고 말하는가? 궁극적으로는 베드로전서 2장 12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너희 선한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와 함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 다시 말해 불신자인 남편과 관련해서는 아내의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쉽게 말해 아내의 순종하는 그 행실로 말미암아 남편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고 평안하게 만들어 결국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란 것입니다.
특히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서란 표현은 말로만 믿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에 합당한 열매까지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남편에게 믿으라고만 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믿고 있는 바가 참되다는 사실을 자신의 선행으로, 자신이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을 보여줌으로 남편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데,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는 아니지만 야고보서 2장에 보면 믿음과 행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4-17) 그리고 26절에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있다면 말만 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우리말이 참되다는 것을 선행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특히 믿는 아내로 있다고 할 때 믿지 않는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선행을 나타내야 합니다.
2절은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한다고 할 때 구체적으로 어떤 행실인가에 대한 설명입니다.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즉 아내는 남편 앞에서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 속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단순히 공포심을 가지는 게 아니라, 존중과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란 것입니다. 나아가 정결한 행실을 가지라고도 말합니다. 점과 흠이 없는 깨끗한 삶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깨끗함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만은 믿는 아내는 믿지 않는 남편 앞에서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남편에게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동일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남편을 두려워하는 것, 다시 말해 남편에게 공경과 존경심을 가지는 것, 그리고 정결한 행실을 갖추는 것은 남편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신자 된 모든 자의 자세로 요청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에 대한 공경, 하나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도록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 결국 사람들 앞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3절과 4절은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한다고 할 때 2절에서 설명한 것보다 조금 더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오늘날 외모지상주의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외모에 집착하는 현상들이 있지만, 이런 현상은 오늘날만의 현상이라 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타락과 함께 사탄이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지게 된다고 말한 것처럼 범죄 이후 눈이 밝아지고 난 뒤의 모습이 외모에 집착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외모에만 집중하도록 하는 것은 죄의 결과입니다. 특히 오늘날에는 외모 자체를 위해 성형을 하는 일까지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하고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머리를 꾸미는 것, 금과 같은 장신구를 차는 것,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 등, 한 마디로 외모 위주로 너희를 단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외모 자체를 아예 꾸미지 말아야 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어느 정도 꾸밀 수 있고, 꾸미기 위해서 어느 정도 금액을 지불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분수를 넘어서는 모든 허영과 경박함과 무절제한 사치는 분명히 정죄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매튜 풀 주석 참조).
그럼 믿음을 가진 여성들, 특별히 믿지 않는 남편을 둔 아내들은 무엇으로 단장해야 하는가? 외모가 아니라 내면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 속사람으로도 설명하기도 하는데, 그것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고 권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외모를 아름답게 만드는 데 힘쓰지 말고 속사람을 아름답게 하는데 힘쓰라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온유하도록, 속사람이 안정적이 되도록, 속사람이 썩어질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것으로 채워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라져 없어질 것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으로 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곧 하나님 앞에서 값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값지게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가? 온유함, 안정함, 썩어지지 아니할 것들로 속사람을 채우는 것,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외모를 빛나게 하는 데 있어서는 안 되고, 속사람을 빛나도록 만드는 데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여성들, 아내 된 자들만의 관심으로 있어서는 안 되고 사실은 모든 신자들의 관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특별히 남편을 둔 아내가 자신의 속사람을 아름답게 만들어야 한다고 권합니다. 왜냐하면 죄악으로 물든 세상은 온통 외적인 것으로 아름다움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7계명과 관련해서 음란하다고 말할 수 있을 법한 옷차림에 대해서도 아름답다는 표현을 하기도 하지만, 그런 외적인 아름다움은 어떤 형태든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을 반드시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값진 것은 결국 우리의 속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거기에 있습니다.
영국의 개혁자 중 토마스 카트라이트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의 기독교 교리 강론이라는 책에 보면 7계명과 관련해서 이런 해석의 내용이 있습니다. 옷을 입는 문제와 관련된 내용인데,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여성들이 자신들의 옷으로 그들의 남편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아내들이 그렇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여기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자들은 합법적인 수단으로서, 즉 맑은 정신을 가지고 흉하지 않은 옷을 입음으로서, 남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노력해야만 한다. 여자들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어떤 정직하지 않은 수단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정숙한 옷을 가지고도 능히 남편들이 아내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지켜주실 수 있는 하나님께 자신들의 신뢰를 두어야 한다(벧전3:5).”
이어지는 5절과 6절을 보시면 4절에 대한 구체적이 예를 제시합니다.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우선 속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 마음을 둔 여성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이라고 말합니다.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자만이 외적인 것으로 아름다움을 삼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으로 아름다움을 삼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다고 말합니다. 속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 속사람을 단장하는 것과 무엇을 연결시키고 있는가 하면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너희 속사람을 아름답게 만들면 그 결과로 남편에게 순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했다는 것은 저들 역시 외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기보다는 내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실제적인 예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언급하는데,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남편인 아브라함이 주인이고 아내인 자신은 종과 같다는 의미에서 ‘주’라 부른 것이 아니라, ‘여자의 머리는 남자’(고전11:3)라고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남편을 아내의 머리로 세우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와 권위에 대하여 순종했다는 의미입니다.
남편을 둔 모든 아내들은 바로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남편이 무능하더라도 남편이 모자라더라도 또한 남편이 둔하더라도 여자의 머리로 남자를 세우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질서와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 결코 남편에게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로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사도 베드로는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행한 것처럼 너희 역시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라가 행한 것처럼 너희도 선을 행하라. 다시 말해 아브라함을 주라 부른 것이 지금 하나님 앞에서는 선을 행하고 있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그와 같이 너희도 선을 행하라. 사라처럼 남편에게 순종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않는다는 것은 혹 남편에게 순종하여도 순종의 결과로 어떤 두려워 할 만 한 일이 일어날지라도 결코 놀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매튜 풀 주석에서는 ‘두려운 일’을 두려움의 대상 혹은 원인을 가리킨다고 하면서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사라의 딸이 된다는 것에 대해 ‘너희가 단호한 마음으로 너희의 의무를 행하면서 너희의 믿음에 반대되는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한’ 혹은 ‘너희가 노예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자발적인 존경심으로 기쁘게 너희의 남편에게 스스로를 순복하는 한’ 그의 딸, 즉 사라의 딸이 된다고 설명합니다.
보통 영적 이스라엘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칭합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부르도록 하셨는데, 그 뜻은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입니다(창17:5). 그러나 창세기에 보면 본래 사래였지만 사래를 사라라고 부르셨습니다. 사라의 뜻은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입니다(창17:16). 그러니까 사라의 딸이 된다는 것은 영적으로 우리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여성들의 경우, 아내들의 경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신을 단장할 때 그들은 영적으로 사라의 자손, 다시 말해 하나님의 참된 백성으로 증명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1절 이하 6절 말씀에 대해 여성들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부담스러운 말씀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특히 믿지 않는 남편을 두고 있을 때 하나님께는 순종하지만 저 사람에게는 결코 순종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고 할 때 창조의 질서를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누가 먼저 사탄의 계략에 속아 죄에 빠졌는지도 생각해야 합니다. 나와 관계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죄에 빠진 순서는 놔두고라도 창조질서를 통해 여자가 남자에게 속했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은 남자를 여자의 머리로 삼았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앞선 본문에서 까다로운 주인이 있다고 할 때 남편도 그런 사람일 수 있습니다. 까다롭기 때문에 종종 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셔야 합니다. 부당한 것 같아도 참고 인내하셔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불신자인 남편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도 하십니다.
1절 이하 6절이 아내에게 권면한 내용이라면, 오늘 본문 7절은 남편에게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도 ‘이와 같이’라는 표현이 나오지만 주인과 종의 관계 속에서 언급한 그런 원리와 방식으로 남편 역시 아내를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사도 베드로는 남편들에게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라고 권합니다. 여기서 지식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 지식에 따라 아내와 동거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 그분의 말씀을 바탕으로 아내와 살라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말씀에 근거해서 남편은 아내를 대하면서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내에 대한 남편의 의무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에베소서 5장 25절입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8절에서는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골로새서 3장 19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종합적으로 보자면 결국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과 같이 하라, 또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아내 또한 동일하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방식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으신 사랑입니다.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3절에 의하면 이런 희생적인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랑을 누가 누구에게 해야 하는가? 남편이 아내에게 해야 합니다. 특히 에베소서 5장 26절과 27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죽으시고 희생하신 목적이 무엇인가 할 때 교회로 하여금 거룩해지고 영광스럽게 되도록 하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당연히 이것을 통한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지만, 그리스도의 죽음과 희생을 통해 교회를 어떻게 만들고자 하시는가?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만들고자 하십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을 통해 남편과 아내, 나아가 그 가정이 이루어가야 할 목적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남편은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지식이 분명하게 있어야 합니다. 가정을 말씀으로 이끌어야지 세상의 원리처럼 돈의 원리로 이끌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지식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참고로 우리말 사전에 의하면 ‘동거’를 한집이나 한방에서 같이 사는 것만이 아니라, 부부가 아닌 남녀가 부부 관계를 가지며 한집에서 사는 것으로도 그 의미를 가지는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동거는 결코 후자의 의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는 제7계명 간음하지 말라 하신 말씀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남편과 아내로서 동거하는 것,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쨌든 지식에 따라 아내와 동거하라고 할 때 오늘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아내와 관련된 두 가지 지식을 언급하면서 아내를 귀하게 여기라고 말하는데, 첫 번째는 그가 더 연약한 그릇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아내와 관련해 외모적인 면을 언급했지만 여자와 관련해 따라올 수 있는 단어는 아름다움입니다. 반면 남자와 관련해 따라올 수 있는 단어는 힘입니다. 힘에 있어서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연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연약한 자는 강한 자의 도움을 받습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힘은 섬김보다는 착취와 군림의 상징처럼 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 보다 더 강하게 만드셨다는 것은 연약한 자를 지키고 보호할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으로 알라는 것은 아내를 사랑하되 그를 지키고 보호하고 자신 안에서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라는 것입니다. 비교하자면 첫 번째 내용의 경우 남편이 강한 반면 아내는 연약합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더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두 번째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남자가 강하다고 해서 생명의 은혜를 더 많이 받는 것도 아니고, 여자가 약하다고 해서 생명의 은혜를 덜 받는 것도 아닙니다. 생명의 은혜에 있어서는 함께 이어받을 자로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아내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사랑하지 않음으로 인해 부부 사이에 어떤 갈등이 있게 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 기도가 막히게 됩니다. 기도가 막히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방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남편들이 지식에 따라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으로, 또한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하게 여기라고 말하면서,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할 때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답합니다. 즉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를 귀하게 여김으로 아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될 때 그것이 곧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에 있어서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만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룬다고 할 때 세상의 기준을 따라 남편은 이렇게 해야 하고 아내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논리를 하나님 앞에서, 성경 앞에서 함부로 가지고 오시면 안 됩니다. 물론 신자라 할지라도 부패성을 가지고 있는 이상 많은 우여곡절을 겪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를 믿고 섬기고 있는 신자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에게 말씀하신 의무들을 성실하게 이루어 가도록 자신을 돌아보셔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아내들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고, 남편은 아내를 하나님 지식에 따라 동거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선행이요, 이런 선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