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이와같이 여러 證據者들과 아울러 누구든지 그의 말을 믿을 수 있었던 偉大한 人格者 洗禮요한을 세워 그의 뒤에 오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證據하게 한(행 19/4) 目的은 어디 있는 것인가. 이는 實로 이스라엘로하여금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게하기 위한 하나님의 攝理에서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예수님 自身도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된다고 하셨다(요 6/29). 그리고 이스라엘 民族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擇함받은 選民이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할 것이요 저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目的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저를 믿도록하는데 있음으로 이스라엘 民族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아야할 것이었다.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 만일 이스라엘 民族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믿었다하면 그를 十字架에 달리게하였을 것인가. 로마 帝國의 壓政과 形式的인 律法主義에 얽매어 政治와 宗敎의 受難期에 處해있던 이스라엘 民族들이 오직 하나의 希望은 언제나 메시아가 降臨하여 그들을 그 塗炭中에서 구해주시려나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目的을 達成키 위하여 이스라엘 民族에게 오시리라고 苦待하던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믿었다면 누가 저를 殺害하였을 것인가.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님을 殺害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背反하여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않은데 그 原因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民族들이 예수님을 十字架에 달리게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저를 믿으라고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拒逆한데 있는 것이다.
보내실 救主를 믿게할 目的으로 오랫동안 準備해오신 選民가운데 예수님을 보내신 攝理로 보아도 그의 죽음의 길은 豫定하신 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은 祭物이 될 것이 아니라 산 祭物로서 贖罪의 使命을 完遂해야할 것이었다.
바울은 이 事實을 알았음으로 「이 智慧는 이 世代의 官員들이 하나도 알지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榮光의 主를 十字架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고 記錄하여 當時 유대 人의 智慧의 缺乏으로 인하여 榮光의 主를 苦難의 主로 만들었으며 달리지 않아야할 十字架에 달리셨다는 것을 明示하였다.
실로 그리스도의 十字架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도록 攝理하시는 하나님의 經綸을 깨닫지 못한 이스라엘 民族의 歷史的 過誤에서 招來된 것임은 再論 할 餘地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十字架의 죽음으로 인한 救援은 이스라엘의 不信으로 말미암아 招來된 하나님의 2 次的인 救援攝理인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으로 인한 하나님의 第 1次的 救援攝理 는 무엇이었던가 하면 그것은 完全 救援이니 墮落한 人間들을 創造 本性 本然의 人間 으로 完全 復歸시켜 하나님의 創造目的을 達成케함으로써 하늘아버지의 完全함같이 우리들도 完全케하시려는 것이었다(마 5/48). 그러면 完全救援이란 무엇을 말함인가. 人間 墮落은 靈만도 아니요 肉만도 아니요 靈的 肉的 兩面이 아울러서 墮落된 것이다.( 墮落論 參考)
그러므로 救援도 靈肉 兩面의 救援이 아울러 成立되어야 할 것이니 이것이 즉 예수께서 죽지않고 살아서 이루어야할 第 1 次的인 完全 救援攝理인 것이다.
하나님을 닮지않고는 하나님을 對할 수 있는 基臺를 造成치 못한다.(創造原理 參照) 그러므로 人間은 마음과 몸이 主體와 對象으로서 相對基準을 造成하여 一體理想을 이루어 하나님을 닮아야 하나님의 主體的 사랑을 받을 수 있는 美의 對象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人間은 墮落으로 인하여 몸과 마음이 아울러 사탄이 運行할 수 있는 터를 造成하여 사탄 主管圈 內에 머물게 되었으므로 다시 몸과 마음을 아울러 原理的 主管圈內에로 復歸코자하심이 仲保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第 1 次的 救援攝理인 것이다. 여기의 마음은 靈人體의 表現이 肉身面 으로 나타나는 部分을 말함이다.
人間의 靈肉을 아울러 救援하기 위하여 靈肉 아우른 人間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룬다는 意味임은 이미 聖書가 明示한 바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葡萄나무요, 信徒는 그 가지라 하였으며(요 15/5) 우리는 그리스도의 肢體라 하였다(고전 6/15).
예수께서 靈肉 아울러 살아서 뜻 맞는 祭物로 하나님 앞에 섰다면 믿음으로써 그와 한몸된 우리도 靈肉 아울러 完全 復歸된 祭物이 되어 創造理想을 實現하였을 것이었는데 이스라엘이 그를 믿지 못하여 예수님의 몸을 사탄에게 내어 주었으므로 그와 한몸된 聖徒의 몸도 다시 사탄에게 내어주지 않을 수 없게 되어 肉的 救援은 未完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肉的 救援의 未完成으로 인하여 아담부터 내려오는 血統的 原罪는 아직도 엄연히 子子孫孫에로 遺傳되고 있음으로 아무리 잘 믿는다는 信者의 子息이라할지라도 저는 저대로 또 예수님을 믿어야할 條件이 남아있는 것이다.
信仰生活은 사탄을 分離키 위한 싸움의 生活이다. 사탄을 分離하려면 肉 을 쳐야하나니 이는 사탄도 人間의 肉과 相對基準을 造成하여 그와 救援의 關係를 맺지않으면 그 힘을 發揮하지 못함으로 사탄은 항상 人間의 肉 을 相對로 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罪라는 것은 사탄의 相對基準을 造成할 수 있는 條件을 成立시켜 그의 對象이 됨으로 惡의 힘을 發揮하는 것을 말한다. 禁食을 하고 猜忌와 嫉妬와 慾心과 情慾과 貪心을 버리려하는 것은 사탄의 相對基準을 造成할 수 있는 이러한 條件들을 버림으로써 惡의 힘을 發揮할 수 있는 사탄 侵犯의 길을 막기 위함이니 이 生活이 곧 祈禱로 인한 信仰生活이다.
쉬지말고 祈禱하라(살전 5/17) 하심은 항상 사탄의 侵犯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요 사탄이 항상 侵犯할 수 있음은 侵犯 할 수 있는 條件이 있기 때문이요, 이 條件은 예수님의 肉을 사탄에게 내어줌으로써 그의 信者된 우리의 肉도 必然的으로 사탄에게 내어주지 않을 수 없게 된 條件이다.
이렇듯이 예수님은 그의 몸을 사탄에 내어줌으로써 肉的 救援의 目的은 達成치 못했으나 十字架의 피의 代贖으로 인한 復活의 勝利의 基臺를 造成함으로써 靈的 救援의 第 2 次的인 救援攝理만을 完遂하셨다. 그러므로 十字架의 救援의 範圍는 靈的 救援뿐임을 알아야 한다.
이와같이 예수님의 肉的復歸의 救援攝理는 이루어지지 못한 채 땅에 남아있게 되었음으로 그의 再臨은 必然的인 要求條件이 되었다. 예수께서 地上에 오신 目的이 다 이루어졌으면 다시 오실 必要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再臨하셔서 우리의 原罪까지 完全히 代贖할 때에야 우리는 完全히 復歸되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다.
가령 여기 물 속에 빠져 숨을 쉬지 못하고 물만 먹고 있는 可憐한 사람이 있다하자. 이것이 바로 墮落한 아담의 後孫이다. 이를 完全히 救援하려면 물에서 건져 빠지기 前 狀態인 陸地에로 復歸해야될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아담의 後孫을 건지기 위하여 完全 救援者로 오신 분이다.
그러나 現在 後아담을 믿는 첫 아담의 後孫은 물 위에 코를 내어놓고 呼吸함으로 겨우 죽음은 免하였으나 아직도 그 몸은 물 속에 잠겨 呻吟하고 있지 않는가. 이렇게 苦痛 하면서도 이제는 完全히 救援받았다고 스스로 自己를 속여가며 스스로 慰勞하며 스스로 滿足하고 있는 것이 오늘까지의 우리의 信仰生活이 아니었던가. 이제 이 아담의 後孫의 몸마저 물에서 건져 陸地로 다시 끌어올려야할 救援者가 다시 오셔야할 것이니 이 분이 바로 再臨 예수님이시다.
이렇듯이 十字架에 달리러 오셨던 예수님이 아니었다는 天倫의 秘密을 念頭 에 두고 새로운 角度로 福音書를 읽어보기로 하자.
만일 예수님의 十字架의 苦難의 길이 旣定的 經綸이었다면 「할만하면 이 잔을 免케 하옵소서」(마 26/39)하고 세 번씩이나 올리신 예수님의 最後의 祈禱 는 微弱한 人間性의 發露라고 밖에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스데반도 그 悽慘한 最後의 運命을 웃으면서 끝마쳤고 바울 베드로 그 以後 의 많은 聖徒들도 꼭같은 殉敎의 길을 걸었거든 하물며 人類의 救主로 오신 예수께서 아무래도 걸어야할 十字架를 앞두고 이것을 피하기를 원하는 그러한 祈禱를 올렸을 것인가 실로 그리스도의 죽음의 길은 天倫을 背逆하는 이스라엘의 不信의 行動에서 惹起된 抑鬱한 길이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後 2 千年 間이나 準備하여온 民族的인 믿음의 祭壇위에 예수님을 산 祭物로 合當한 獻祭를 하였더라면 4 千年 歷史의 目的은 實現되어 全人類는 살아서 靈肉을 합하여 救援을 받아 原罪를 벗고 創造本然의 世界를 復歸하여 사랑과 眞理만이 에덴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인데 이제 저들의 不信 으로 인하여 本意아닌 十字架에 달리게되니 사랑하는 弟子들은 虐殺을 당할 것이요 또 再臨期까지 十字架를 믿는 많은 信徒들이 殉敎 당할 것을 悲痛히 여기시어 예수께서는 그러한 祈禱를 올리신 것이었다.
十字架가 旣定事實이라면 예수를 내어주는 사람은 어차피 있어야할 것이며 따라서 가룟 유다도 應當 있어야할 存在인데 왜 그는 차라리 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 하였다(막 14/21)고 말씀하셨을 것인가.
실로 가룟 유다 즉 예수님을 내어줄 사람은 없어야할 것이었다. 내어주는 사람이 없었더라면 예수님은 죽지 않았을 것이요 죽지 않았더라면 그는 靈肉 아울러 萬王의 王이 되었을 것이다. 이사야 書에 「대개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남이여,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도다 그 어깨에 정사를 메임이여 그 이름을 기묘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신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하리로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여 다윗의 위와 그 나라를 굳게 세워 자금 이후 영영토록 공평과 의로움으로 치리하시리니 만군의 영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로다」(사 9/6~7)라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은 다윗 의 位를 가지고 그 나라를 굳게 세워 이 나라를 公平과 義로써 永遠토록 治理하시려는 平康의 王으로 오셨던 분이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