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석훈이가 렌즈삽입술을 강남에서 한다하여 수술 후 요양시키려 데릴러 갈겸 하루 일찍 서울로 올라가며 여행할 겸 여주 방면으로 떠났다
먼저 죽산? 일죽 근처 영창대군 묘를 찾았다
대군 묘라 규모 좀 있으려니 했는데 길 가 한모퉁이 스쳐가는 자리에 홀로 남아있어 고생해 찾았다
원래 남한산성 아래 성남시에 있었는데 1970년대 개발로 이곳으로 이장되며 관리가 소홀해서 인듯 하다
후손 없이 어린 나이에 죽었고 인조에게는 반정의 명분만 주었으면 그 뿐 쓸모가치가 없어져서 현재 이 상태가 된 건지 모르겠다
영창대군은 조선 제14대왕 선조의 14번째 아들이지만 선조와 계비 인목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적자이자 광해군의 이복동생이다. 이름은 이의(李㼁). 어머니는 연흥부원군 김제남(金悌男)의 딸 인목왕후(仁穆王后)이다.
선조가 임진왜란 중에 세자로 책봉한 광해군은 적자도 장자도 아니었고, 명나라의 책봉도 받지 못했다는 명분상의 약점이 있었다.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유영경 등의 외척과 소북세력이 영창대군을 세자로 다시 책봉하려 했으나, 선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무산되었다. 선조는 임종 전에 유영경·한흥인(韓興寅)·신흠(申欽)·박동량(朴東亮) 등 7대신에게 영창대군을 돌봐줄 것을 부탁했다.
광해군은 즉위하자 조정의 기풍을 새롭게 하려고 했다. 당파를 따지지 않고 인재를 고루 쓰고 임진왜란으로 파탄이 난 국가재정을 튼튼히 하며, 난중에 불타 버린 경복궁 등 궁궐을 새로 짓거나 손보아서 왕실의 위엄을 살리고, 조세를 고르게 하여 민생을 구제하려고 했다(대동법 실시).
그러나 임진왜란 때 한때 원병을 보내겠다고까지 한 누르하치가 무서운 기세로 세력을 뻗고, 명나라는 늙은 호랑이로 쇠약해 가는 국제질서의 어려운 판국인데도 그의 형 임해군은 광해군의 정사를 비방하고 다녔고,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세력 또한 틈만 나면 광해군을 깎아내리려고 했다. 이들은 당인들과 결탁하여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언제나 광해군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광해군은 일단의 조치를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임해군에게 제재를 가한 것이다. 이때에 제기된 것이 할은론(割恩論)이다. 형제 사이에도 왕법에 어긋나는 짓을 하면 형벌을 가해도 윤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이것은 정인홍 등 대북파가 제기한 왕권확립의 이론이다. 역시 영창대군파에게도 가만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이런 속에 1613년 서양갑을 중심으로 한 서자들의 옥사가 있었다. 이들은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하면서 반역을 도모했는데 “참 용은 일어나지 않았는데(眞龍未起, 진룡은 영창대군을 뜻함) 거짓 여우가 먼저 울어댄다(假狐先鳴, 가호는 광해군을 뜻함)”라는 주장을 내걸었다.
이에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이 사는 집에 가시 울타리를 치고 그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조치)되었고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 김제남 등이 그 주모자로 지목되어 처형되었다
이듬해에는 강화부사 정항의 자의로 영창대군이 증살(蒸殺, 방 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펴 열기에 질식해 죽게 한 것)되었다. 이때에도 할은론이 제기되었는데, 정인홍이 일곱 살의 어린 영창대군에게는 할은론을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처음에는 처형의 조치를 내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일을 겪게 되자 인목대비는 젊은 나이이지만 궁중의 어른으로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 그에 대응했다.
이때에 제기된 것이 전은론(全恩論)이다. 부모에게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형벌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 정인홍의 주장이었다. 이이첨 등 일부를 제외하고 인목대비에 대한 서인 강등 후 서궁 유폐 조처에 반대 여론이 드셌지만, 마지막까지도 죽음의 형벌은 내리지 않았다.
비록 생모는 아니었지만 폐모의 조치를 내린 것은 광해군의 큰 실수였다.
결국 광해군은 영창대군이 아닌 조카뻘인 인조에게 쫓겨났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기어코 죽이려고 새 임금과 대신들을 졸랐지만 이원익 등이 간곡히 만류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