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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를 학문적으로 요약하면 ‘
규칙적인 운율체계에 따르기보다는 언어의 리듬과 이미지 패턴에 따라 구성된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규칙이라는 말을 생각해 본다, 규칙은 모두가 지켜야 할 일종의 질서이며 약속이다. 정확한 음보와 자수, 첫음절과 마지막 음절 사이를 발음이 비슷한 단어를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는 식의 정형화된 규칙이 있을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사전적 의미의 자유시 외, 자유시 하면 일견 떠오르는 생각은 Free, 문자 그대로 자유다. 그러나 자칫 혼동하기 쉬운 자유다. 내 멋대로, 내 마음대로, 내가 붙이고 싶은 대로, 기기묘묘한 이미지와 심상을 일관성이나 개념 없이, 개연성의 인과 관계없이 차용하거나 상상하여 만들어내는 것도 자유라고 볼 수 있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자유는 질서 속에서 유지되고 발전하는 전혀 자유스럽지 않은 자유를 말하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시라는 문학 장르의 자유시는 어쩌면 포괄적 의미의 자유를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포괄적 의미란 내재율과 외재율, 내연과 외연, 상상과 주제, 이미지와 형상화, 이 모든 것을 포괄하되 부문별로 상관계수가 분명히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주제는 자유이되 표현은 시적 범주 내에서 문장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시가 '자유롭다'는 것은 상대적인 의미에서이다. 자유시에는 전통시가 지니고 있는 고정된 추상적인 운율이 없다. 즉 자유시의 운율은 각 행마다 있는 음보(foot)라는 전통적인 운율단위보다는 소리·단어·구(句)·문장·문단과 같은 여러 요소들에 바탕을 둔다. 따라서 자유시는 시적 표현의 인위성과 미학적 간격을 줄이면서 대신 현대적 표현에 어울리고 언어의 평범한 어조에 어울리는 유동적인 형식구조를 쓴다.
자유시라는 말은 월트 휘트먼과 그보다 전에 불규칙 운율을 실험한 시인들의 시에도 적용되지만, 본래 1880년대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시작된 운동의 이름인 베르 리브르(vers libre)를 문자 그대로 번역한 말이다. 자유시는 20세기초 영시에서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베르 리브르의 영향을 받은 초기의 영국 시인들은 T. E. 흄, F. S.플린트, 리처드 올딩턴, 에즈라 파운드, T. S. 엘리엇 등으로 프랑스 시를 연구한 사람들이었다.
1912년 영국에서 올딩턴, 파운드, 플린트, 힐다 둘리틀이 시작한 이미지스트 운동은 운율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지만, 그 운동의 원칙 중 하나는 '메트로놈의 순서에 따라 시를 짓는 것이 아니라 음악적 악구의 순서대로 시를 짓는 것'이었다. 자유시 운동은 두 부류로 나누어졌는데 한쪽은 에이미 로웰이, 다른 한쪽은 형식을 중요시한 파운드가 이끌었다. 자유시를 실험한 엘리엇의 초기 작품들은 영시의 형식적인 운율 구조를 느슨하게 하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
칼 샌드버그, 윌리엄 칼러스 윌리엄스, 메리앤 무어, 월리스 스티븐스 등은 몇 가지 다양한 형태의 자유시를 썼다. 그중에서도 윌리엄스와 무어의 운율은 프랑스 자유시 시인들의 운율과 가장 흡사하다.
『다음 백과사전, 자유시』일부 인용
위 인용문의 말처럼 전통적이거나 추상적이며 고정된 형태의 시가 아닌 것을 자유시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은 환원하면 전통적이거나 추상적이거나 등등의 것은 없지만 분명 자유시 속엔 자유시가 지향하거나 표방하는 자유시만의 규칙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유시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자유시에 대한 개념을 일부 살펴보면, 정형시에 대한 대응개념으로 규칙적 형식의 리듬에서 벗어나 연상률에 근간을 둔 시를 자유시라고 말한다. 자유시는 산문과는 좀 더 다른 율격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 자유시의 태동은 1910년대 중엽에 발표한 시들을 그 근간으로 보고 있다.
시를 쓰다 보면 가끔 자유시라는 허울을 쓰고 전혀 자유스럽지 않은 것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시는 언술 행위가 아니다. 시는 언어에 옷을 입히고 언어에 멋을 내거나 언어에 사상과 철학을 이입한 것이다. 하지만 그 멋과 사상과 철학에는 반드시 규정된 규칙이 있다. 문법, 문장, 단어 어느 한 부분도 그저 써지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그러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는 무한한 자유를 갖고 써야 한다. 시는 무한하지 않은 자유를 내포해야 한다. 형식에 치우치는 것도 중요하고 시를 쓰는 한 방법이지만 형식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영혼일 것이다. 속박이나 제한, 금기 등의 표현을 제어하는 모든 수단에 과감히 맞서 더욱 자유로운 자신만의 메시지를 표현하는 것이 바로 자유시 아닐까 싶다.
공자는 시를 사무사(思無邪)라고 강론했다. 나쁘거나 사특한 생각이 없는 것쯤으로 해석하면, 시 속엔 순수와 자연과 정의와 감흥과 사상이 여과 없이 표현되는 작품으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비록 형식에 따라 자유시, 정형시, 산문시 내용에 따라 서정시, 서사시, 극시, 생활시 등등의 구분을 하는 것이 일반적 구분이겠지만 엄격하게 다시 생각해보면 모든 시가 자유시라는 기반 위에서 각자의 생각을 담아내는 행위라는 생각이다. 형식과 내용이 어떻든 시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 골자라는 것이 필자의 아둔한 생각이다. 많은 시인이 시를 잘 쓰기 위한 비법이나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다. 한승원 시인 같은 경우는 “시를 쓰고 차를 마시면서 거울처럼 맑게 가라앉힌 마음에 비친 향기로운 생각(중략) 등등 산소 같은 생각만 남기고 다른 것은 모두 잘라버린다.”며 압축의 중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물론 모두 다 중요하지만 바른 마음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제 눈 밖의 세상이라는 말이 있다. 보이는 것, 내가 보는 것이 무엇이며, 그 대상에서 무엇을 공감하느냐 하는 것에 따라 세상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자유시의 내용은 그렇게 사고의 자유를 확보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그러나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유스럽지 않은 것에 해당하는 표현적 방법은 우리 스스로 정한 규칙에 근간을 두어야 공감의 영역이 좀 더 확대재생산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법적, 어법적, 문장적 규칙이전에 가장 기초적이며 중요한 것이 연과 행이라는 생각이다. 연과 행을 가른다는 것은 생각에 여백을 입히는 일이며, 풍경에 적절한 덧칠을 하는 것과 같다. 모두가 마라톤 선수처럼 쉬지 않고 달릴 수는 없다. 어느 지점에서는 쉬어가는 공간도 필요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단계도 필요할 것이다. 시의 연과 행은 그런 것이다. 좀 더 정확한 공감과 메시지의 전달, 개연성에 대한 추적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연과 행의 적절한 배치는 시를 좀 더 시답게 하는 양념과 같은 역할을 하게 도와줄 것이기에 매우 중요한 표현 방법일 것이다.
김영천 시인의 [시의 행과 연의 관계] [시의 행 만들기]에 대한 강의 몇 부분을 인용, 소개해 본다.
1.시의 행과 연의 관계
시에서 반드시 행이나 연의 구분을 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최근 더욱 부쩍 많은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옛날 정형시에서는 그 형태적으로 행과 연이 정해져 있었지만 현대시로 발전해 오면서 그 형태와 내용의 자유스러움으로 인해서 최근에는 행과 연을 구분하지 않는 시들이 많이 이용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시의 행이나 연을 어떻게 구분하십니까? 일단 행 에 대해선 앞 시간에 배우긴 했지만, 사실 그 동안은 본인의 기분에 따른 구분을 하였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면서도 요즘은 시의 행과 연이 없는 시가 더 멋있게 보이 고, 더 현대적으로 보이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행과 연의 구분이 없어도 아주 성공적인 시를 읽으면서 과연 행과 연의 구분이란 것이 꼭 필요한 것인가 하는 의아심 을 가질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행과 연의 구분은 철저히 작가의 의도에 따르는 것입니다. 공간적, 시간적, 의미적, 조화적, 이미지적, 통일적 구분의 필요성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하기도 안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시는 행과 연을 구분해야 그 이미지가 더 살아나고, 시 가 더 전달이 잘 된다면 그렇게 해야겠지요. 그러나 구분에 큰 의미가 없고 행과 연을 구분하지 않는 산문시이면서도 그 운율이나 의미 전달, 이미지의 활용 등에 문제가 없다면 구태여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조병무님의 설명을 참고하면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허영자님의 <연>
꽃아
정화수에 씻은 몸
새벽마다
참선하는,
미끈대는 검은 욕정
그 어둠을 찢는
처절한 미소로다
꽃아
연꽃아.
ⓑ조병무님의 <송광사에서>
돌들이 마주 앉아 침묵한다
물들이 마주 앉아 침묵한다
바람이 사이를 누비며
한올씩 한올씩 캐어내는 재미
구름밑에
하늘밑에
한폭의 그림으로 자리하는데
스님은 어디론가
바쁘게 간다.
흔적도 없이
빠르게 간다.
ⓒ조영서님의 <과실은>
저 속엔 스스로 트이는 하늘이 있습니다. 해는 한 변두리와 알맞은 빛깔을 내던졌고, 나는 의미가 익어 가는 눈짓을 보내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당신에게로 향하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가을은 다시 차고 넘치는 바다가 되었습니다.
ⓓ신동춘님의 <거리 3>
꽃을 짓이기어 얻은 진한 진액에서 꽃의 아름다움을 찾아보지 못하듯 좋아하는 사람 곁에 혹처럼 들러붙어 있어도 그 사람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꽃과 꽃만큼 아름다운 사람은 옆에 있을 때 굳이 멀리 두고 보듯 보아야 하고
떨어져 있을 때 애써 눈앞에 놓고 보듯 보아야하느니.
우리는 서로 날 때와 죽을 때를 달리하기 때문에 꽃과 꽃처럼 사랑스러운
이에게 가는 데는 참으로 그 길밖에 딴길이 없다 한다.
지금까지 인용한 시들을 중심으로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는 행과 연의 구분이 있는 자유시 ⓑ는 행은 있되 연의 구분이 없는 자유시 ⓒ는 행과 연의 구분이 없는 산문시 ⓓ는 연 구분은 있되 행은 산문시로 되어 있는 특징이 각각 있습니다.
ⓐ의 경우, 행과 행 사이의 시간적 공간적인 쉼과 의미의 전달, 리듬적 요소, 회화적인 생동감 등 복합적 요소가 모두 나타나게 됩니다. 아무리 행과 연이 작가의 자유라하지만 우리는 분명 시의 연이나 행 구분이 아무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란 건 이미 배운 이야기입니다.
대부분의 자유시엔 하나 이상의 연 구분이 가능하고 그 연 구분 자체가 시적 생명감을 더욱 불어 넣어 주기도 합니다. 그 것은 의미의 전달이 연과 연의 구분, 행과 행의 구분 속 에도 포함되어 있는 때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첫 행이면서 첫 연인 '꽃아'와 둘째 연 '정화수 씻은 몸/ 새벽마다/참선하는' 은 도치되어 있습니다. 즉 정화수 씻은 몸 새벽마다 참선하는 꽃의 모습을 그 연을 변경시킴으로 생동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시를 읽을 때 도 '꽃아' 다음엔 잠시 쉼의 간격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에서는 연 구분이 없이 한 행, 한 행의 의미 전달과 음악적 요소만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연 구분이 없으면 다소 그 Tempo가 빨라지지만 우린 그 행간의 시간적 개념을 생각하면서 감상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는 산문시 형태입니다. 그러나 이 시에서도 우리는 분명히 운율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다만 자유시처럼 행과 연의 구분으로 시의 호흡을 하지 않기 때문에 전달 속도가 다소 빠르긴 하지만 오히려 생동감을 느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는 ⓒ와 비슷한 산문시 형태지만 연의 구분이 있습니다. 앞의 연과 뒤의 연 사이의 시간적 간격을 유지해보려고 하는 것 입니다.
조향님의 <영결>이란 시의 마지막 세 연을 읽어보겠습니다.
건너편 언덕 신작로 오르막길.
이승의 버스가 씨근거린다.
永
訣
終
天
이 시를 보면 <永訣終>을 한 자씩 띄움으로써 영결이란 행사의 시간적 느림과 힘듬, 그리고 아쉬움이 나타나게 하는 효과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天'을 한 연으로 잡은 것은 시각상 으로나 운율상 멀고먼 곳으로 망령이 가고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아마, '天'자를 앞 연에다 붙여서 썼다면 그 의미는 반감되고 느낌도 사라지고 없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연의 구분에 의해 독자에 대한 의미나 감정의 전달이 달라질 것입니다.
이경순님의 <비>를 읽어보겠습니다.
구름에서 내려온다.
비비비비비비비비비
비비비비비비비비비
빈가지에푸름이피고
비비비비비비비비비
비비비비비비비비비
애타는가슴을적시고
비비비비비비비비비
비비비비비비비비비
물 위에로 흘러간다.
이 시는 세 연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한 눈에 매우 회화적이고 청각적인 이미지의 시 이구나 느낄 것입니다. 벌써 읽기 전부터 비가 주룩주룩 나리는 모습을 떠올릴 것입니다. 빗방울이 계속적으로 이어서 떨어지는 수직의 모양 속에 '빈가지에푸름이피고'나 '애타는가슴을적시고'는 추임새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늘에서 수직으로 쏟아지는 시는 땅바닥에 고여 수평으로 흐릅니다. 아래 '물 위에로 흘러간다'는 고인 물이 흘러가는 모양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렇게 보면 1연 '구름에서 내려온다' 는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의 형태를 나타냅니다.
마지막으로 박목월님의 <폐원>의 일부를 읽어보겠습니다.
눈이
오는데
옛날의 나직한 종이 우는데
아아
여기는
명동
성니코라이 사원 가까이
이 시에서는 2연인 '아아' 한 행이 하나의 연이 되어 있습니다. 시인 김춘수님의 해설을 옮깁니다.
"여기서 연의 구실을 하고 있는 감탄사의 앞뒤에 배치된 연들을 생각해보라. 앞의 연은 과거의 회상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뒤의 연은 완전히 현실의 어느 지점이 각성되고 있다. 즉 이 두 개의 연은 '아아'라는 감탄사를 사이에 하고 회상에서 현실로 완전히 각성하는 그 대목들이다. 그러니까 이 '아아'는 감개무량과 가벼운 감탄을 나타내는 '아아'인 것이다. 그것은 이 시의 주제로 보아 충분히 하나의 연을 차지할만한 중령을 지니고 있다."
한 연의 '아아'라는 감탄사를 가지고 과거의 회상에서 현실로 의 각성하는 것에 대한 감격이면서 과거와 현재를 구분시키는 장치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최근 시 중 시의 행은 존재하는데 연의 구분이 없는 시 하나를 예시로 올립니다.
고진하님의 <새가 된 꽃, 박주가리>입니다.
어떤 이가
새가 된 꽃이라며,
새가 아닌 박주가리 꽃씨를 가져다 주었다
귀한 선물이라 두 손으로 받아
계란 껍질보다 두꺼운 껍질을 조심히 열어젖혔다
놀라왔다
나도 몰래 눈이 휘둥그래졌다
새가 아닌 박주가리 꽃의
새가 되고 싶은 꿈이 고이 포개져 있었다
그건 문자 그대로, 꿈이었다
바람이 휙 불면 날아가버릴 꿈의 씨앗이
깃털 가벼움에 싸여 있었다
하지만 꿈이 아닌,
꿈의 씨앗도 아닌 박주가리의 生,
어떤 生이 저보다 가벼울 수 있을까
어느 별의
토기에 새겨진 환한 빛살무늬의 빛살이
저보다 환할 수 있을까
몇며칠 나는
그 날개 달린 씨앗을 품에 넣고 다니며
어루고 또 어루어 보지만
그 가볍고
환한 빛살에 눈이 부셔, 안으로
안으로 자꾸 무너지고 있었다
『시의 행과 연의 관계/ 김영천 시인』일부 인용
[행은 어떻게 만드는가]
행은 시의 구조에서 기본 골격을 이루고 있습니다. 여러 학자에 따라서 그 분류가 다르기는 하지만 김춘수 시인은 리듬의 단락으로 행 만들기, 의미의 단락으로 행 만들기, 이미지의 단락으로 행 만들기 이상, 셋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오규원씨의 현대시작법도 김춘수씨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 말은 리듬이나 의미나 이미지 그 어떤 것을 중요시하였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여기에 강희근 시인은 힘 줌의 작은 마디를 하나의 행으로 놓는 경우를 첨가하여 네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박용래님의 <액자 없는 그림>을 읽어보겠습니다.
능금의
떨어지는
당신의
地平(지평)
아리는
氣流(기류)
타고
수수 이랑
까마귀떼
날며
울어라
물매미
돌 듯
두 개의
태양
이 시는 리듬을 중시하여 행을 구분한 예입니다. 만약에 이 시를 의미를 중시해서 행을 재배치한다면
능금이 떨어지는 당신의 地平
아리는 氣流 타고
수수 이랑 까마귀떼 날며
울어라
물매미 울 듯 두 개의 태양
아마,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러나 이렇게 바꾸어 버리면 시인이 원래 강조하고자 했던 하나하나의 단어의 그 이미지와 시 전편에 걸친 경쾌한 리듬이 죽고 말게 됩니다. 따라서 시인이 처음부터 의미의 단락을 중시했다면 문체나 어휘 선택이 달라졌을 것이 확실합니다.
이렇듯 시인이 어디에 그 의미를 두느냐에 따라 시 전체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을 감안하시고 강의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또 같은 시인의 <울타리 밖>이란 시를 보면요.
그 길에 아지랑이가 피듯 태양이 타듯
제비가 날 듯 길을 따라 물이 흐르듯 그렇게
그렇게
天然(천연)히
울타리 밖에도 花草(화초)를 심는 마을이 있다
오래오래 殘光(잔광)이 부신 마을이 있다
밤이면 더 많이 별이 뜨는 마을이 있다
앞의 시와 한 번 비교해 보십시오. 앞의 시는 한 단어가 한 행이 되었고 또 시 전체가 한 연으로 되어 있지요. 다음 시는 '천연히'라는 한 단어가 한 행인 동시에 한 연이 되어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렇듯 행과 연의 구분은 작가가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는 순전히 작가 중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기의 마음이라 해도 충분하거나 필요한 이유 없이 마음대로 하면 안 되겠지요.
여기에서 보면 '천연히'는 단 한 마디의 단어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이 말 하나로 작가가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작품 속의 '천연히'는 앞과 뒤에 있는 가 연과 맞먹는 이미지의 중량을 작가가 부여하고 있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실제로 이 이미지는 한 행의 기능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을 만큼 효과적입니다.
정형시(시조)는 규칙적으로 행과 연이 규정되어 있으므로 시인의 자유가 한정된다 하여도 자유시에서는 행과 연은 시인의 자유의사에 따릅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원칙이 있다고 앞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우리는 김춘수 시인의 구분에 따라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1)리듬의 단락으로 행만들기
리듬을 중시하여 리듬의 한 단락을 행으로 놓는 경우입니다.
에즈라 파운드는 시를 음악시, 회화시, 의미시로 나눈 일이 있습니다. 이는 물론 시가 언어의 음악적 성질 그것만으로, 회화적 이미지 그것만으로, 또는 의미 그것만으로 되어 있지 않고 시가 어떠한 것을 중요시하고 있느냐에 하는데 따른 구분이라는 주장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김춘수의 행과 연을 리듬, 이미지, 의미의 단락에 따라 구분한다는 주장도 같은 맥락으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여기에서 오규원님의 이야기를 참고로 들어보겠습니다.
"시의 리듬이란 언어를 음악적 효과가 나도록 소리를 유형화 한 것이다. 소리와 의미의 복합체인 언어를 '의미를 수식하고 변형시키고' 의미를 확충하도록 소리를 작품속에 조직하는 것이다. 그런 시의 리듬은 정형시의 그것과 자유시의 그것과는 다르다. 정형시의 리듬은 압운과 율격을 기본으로 한다. 압운은 영시 나 한시에서 볼수 있는 바처럼, 시행의 시작, 끝, 중간에 유사한 소리를 내는 음절을 반복시키는 것이다."
리듬은 우리의 전통시가인 고시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시조의 초. 중. 종의 3장은 지금 현대시에 나타나는 행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 각 행은 음수율과 음보율을 갖고 있는 규칙적인 리듬에 근거하여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윤선도님의 <오우가>의 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취니
밤중에 광명이 너만한 것이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 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아마 학교에서 배워서 잘 아시겠지만, 시조의 각 장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를 한 번 살펴보시지요. 글자 수는 3.4조의 음수율이 일반적이며 자연스럽게 끊어 읽는 단위를 한 보라 할 때 보통 4번, 즉 4음보로 되어 있습니다. 그 글자 수도 종장의 첫구에서 3음절, 5음절을 제외하고는 대개 2자에서 5자까지 변형이 가능했었습니다.
현대시조가 그 형태를 많이 다양화하고 자유스러워졌다 하여도 아직은 그 정형성이 고스란히 살아있습니다.
조병기님의 <접시꽃>을 읽어볼까요.
누구의 목숨일까
기다리는 동구밖
속사연 아직 남아
뜬눈으로 밤새우고
이슬밭 남 먼저 일어나
뻐꾸기를 손짓한다
어머니 가시던 해
그토록 서럽더니
울타리 기대 서서
먼 산을 바라는가
때절은 옷자락 벗고
촛불 하나 켜느니.
이 시조는 각 장의 구들을 한 행으로 놓음으로써 한 행이 2음보율을 살려내고 있습니다만 행을 중첩하여 읽어보면 고시조와 같은 4음보율이 살아납니다.
김소월님의 <가는 길>을 읽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저 山에도 가마귀, 들에 가마귀,
西山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이 시의 행을 살펴보면 행을 구분하는 기준이 리듬에 의한 것임을 그냥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만히 소리 내어 읽어보십시오. 아마 7.5조의 음수율을 느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 예는 우리가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전부터 시조와 정형시들을 많이 읽어왔기에 그냥 구분이 가리라고 봅니다.
시조와 같은 정형시는 아니라도 리듬의 단락으로 행이 구분된 현대시를 부분으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김수용님의 <쌀난리>를 읽어보겠습니다.
넙적다리 뒷살에
넙적다리 뒷살에
말이 빼라지
손에서는
손에서는
불이 나라지
수챗가에 얼어빠진
수세미모양
그대신 머리는
온통 비어
움직이지도 않는다지
그래도 좋아
그래도 좋아
이 승훈님의 <별안간>을 읽어보겠습니다.
별안간 따분해
찾아간 게 아니다
그런 게 아니다
별안간 천둥이 쳐
비가 내려
꽃잎이 떨어져
찾아간 게 아니다
그런 게 아니다
그런 게 아니다
별안간 너래도
만나고 싶어서
기막힌 치욕이
와락 나를 껴안고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시의 행과 연은 작가의 의도를 껴안은 채 리듬을 창조하는 방향에서 운용되는 것입니다.
『시의 행 만들기/ 김영천 시인』일부 인용
비교적 행과 연의 의미를 잘 살린 세 작품을 살펴보고 작품마다 지향하고 있는 여백과 메시지의 교감에 대해 감상해 보기로 한다.
첫 작품은 심수자 시인의 [구름의 서체]라는 작품이다. 사찰 기둥에 새겨진 불이문(不二門)이라는 글자에서 삶의 진리를 성찰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구름의 서체
심수자
고즈넉한 사찰 기둥에 누군가 새긴 저 글씨
불이문(不二門), 무슨 뜻일까
둘이 아니라 하나라니?
마음이 몸이 그렇다는 것인가
너와 내가 그렇다는 것인가
허공 낮게 지나다 기와지붕 위에 앉은 구름이
잠시 숨을 고르는 동안에도
불이문 새겨진 글자는 기둥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면 결국 기둥과 글자는 하나인가
저 글을 새겨 넣고 주섬주섬 끌을 바랑에 챙겨 넣은 한 사람은
어디론가 떠나고 없는데 글자 혼자 남았다는 것은
너는 떠나고 없어도 내 안에 너 있다는 것 아닐까
몸 안에 그림자를 도사려 넣었다 해도
너는 내 몸을 빠져나간 것이 아니고 서로의 배후가 되었다는 것
소리 없이 다가온 일몰이 나를 황급히 감추려 해서
당신은 나에게 꼭꼭 숨은 것
세상 모든 만물은 혼자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생물학적 견지에서도 그렇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 사물과 사물, 자연과 사람 사이. [사이] 속에는 원인과 결과라는 대상물과 종속물이 존재한다. 사찰 기둥에 불이문 글자를 새긴 누군가는 화자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 화자는 글자를 보고 있고 글자를 새긴 사람은 떠나고 없다. 본래 만날 인연이 아니었지만 어떤 형태로든 글자는 원인이 되었고 화자는 글자를 보고 있다. 둘이 아닌 하나라는 글자에서 화자는 삶의 이야기들을 회상하게 된다. 아니 살면서 눅진하게 배어있던 미처 생각하지 못했거나 스쳐 지나간 이야기들을 들춰본다.
허공 낮게 지나다 기와지붕 위에 앉은 구름이
잠시 숨을 고르는 동안에도
불이문 새겨진 글자는 기둥을 떠나지 않는다
허공과 구름, 기와지붕, 잠시 숨을 고르는 화자. 이 모든 것은 아무 관계도 없다가 관계가 만들어졌다. 허공이 구름이 기와가 상징하는 것은 자연이며, 확장해서 생각하면 삶의 윤곽들이다. 구름이 다른 모습으로 형상을 만들거나, 기와지붕을 지나쳐 가거나 내가 이 자리에서 떠나도 불이문 글자는 기둥을 떠나지 않는다. 내 의식이 그를 생각하지 않아도 결국은 우리의 삶은 보이지 않는 인과관계의 사슬로 서로 유기적인 공생 관계가 된다는 말이다. 시인의 의뭉스럽게 한 연으로 질문을 던진다. 뻔하지만 뻔하지 않은 질문,
그러면 결국 기둥과 글자는 하나인가
기둥과 글자가 하나이듯, 삶의 윤곽이나 풍경 역시 나와 하나라는 관계가 자연스럽게 성립된다. 질문에 대한 시인의 답이 합리화처럼 들리는 것은 나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불이라는 말에 대하여 느끼는 공감의 영역이 같다는 말이다.
저 글을 새겨 넣고 주섬주섬 끌을 바랑에 챙겨 넣은 한 사람은
어디론가 떠나고 없는데 글자 혼자 남았다는 것은
너는 떠나고 없어도 내 안에 너 있다는 것 아닐까
비록 떠나고 없어도 내 안에 너 있다는 것을 시인은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 이별이 이별의 경계를 넘어 [불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듯하다.
너는 내 몸을 빠져나간 것이 아니고 서로의 배후가 되었다는 것
모든 관계가 그렇다. 사람과 사람이 아니더라도 모든 원인과 결과의 개연성에는 결과물이 존재한다. 떠난 것이 있고 남은 것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서로의 배후라는 것 속에서 부활한다. 시인이 감추다 드러낸 결구에 답이 있다.
당신은 나에게 꼭꼭 숨은 것
당신은 구체적 대상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또 다른 무엇이든 자신을 위안하기 위하여 가장 좋은 말은 나에게 꼭꼭 숨은 것이라는 말이다. 시제가 [구름의 서체]다. 구름이 쓰는 글자, 구름을 보며 쓰는 글자, ~의가 붙었다고 해서 반드시 구름이 주체는 아닐 것이다. 시는 그렇게 나와 내 시선을 동일시해서 표현할 때 가장 아름답지 않을까 싶다. 이 시를 산문시로 썼다면 맛이 다를 것이다. 적당한 연과 행을 배치를 통해 호흡과 여백을 문장에 불어놓은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 작품은 박종인 시인의 [생각하는 로뎅]이다. 화장실의 변기, 변기와 나의 입장, 변기의 입장은 불가분의 관계이며 변기에 앉아 삶의 매무새를 다듬는 시인의 모습에서 평범한 소시민의 자유와 변기와 같은 마음과 자세로 살아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게 만드는 작품이다. 작품의 전반에 흐르는 희화는 흥미로우면서도 절제된 진지함이라는 복선을 깔고 있다. 첫 번째 작품의 행과 연의 배치와는 좀 더 다른 느낌의 산문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백의의 천사 그는 봉사 정신이 투철하다. 사람들 수준을 높이고 필요를 충족시킨다. 알게 된 개인 사정은 침묵하고 성심으로 안녕을 위해 희생하며 의롭게 산다. 그는 차갑고 냉랭하지만 깔끔하고 우아하여 고고한 자세로 정해진 곳에서 온몸 받쳐 헌신한다.
첫 연에서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끝내 감춘 채 시를 끌고 간다. 화장실과 변기라는 이미지의 자리에 누구나 아는 로댕의 조각상을 떠올리면, 첫 연의 진술들이 모두 평이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조각상의 모습을 연상하게끔 시인의 백의의 천사라는 이미지를 차용해서 끌고 간다. 갈수록 흔히 하는 로뎅의 이미지와 다르게 전해된다는 것을 느낄 때쯤 2연에서 시인의 본색이 드러난다.
오늘도 나는 다급하게 그를 찾아 아랫도리를 내린다. 그의 무릎에 걸터앉아 한바탕 진하게 나를 배설했더니 속이 후련하다.
독자는 이 지점에서 변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시가 2연에서 멈춘다면 어쩌면 시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산문시라면 더 그렇게 느껴진다. 시인은 감추어둔 메시지를 꺼낸다. 결구의 메시지를 위해 로뎅을 빌려오고 백의의 천사를 빌려온 것의 당위성을 이야기한다,
한날 나는 벗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그에게 허벅지를 가리게 값나가는 옷을 입혀 주었다 그 뒤부터 냉랭하고 차갑던 그가 따뜻하고 편안함을 선사한다. 체온을 앗아가던 변기가 지금은 로뎅 인 양 앉아 생각하는 사람을 만들고 있다.
산문시의 매력은 결구까지 긴장감을 어떻게 유지하느냐에 성패가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긴 호흡이라는 전제는 자칫 지루함을 만들 수 있다. 지루함은 시를 밋밋하게 만든다. 삶에서 변기만큼 필요한 것도 없을 듯하다. 배설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 하지만 그 변기만도 못한 사람들이 많다. 다 받아주고 생각하는 시간까지 만들어주는 변기. 과연 우리는 변기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시다. 생각하는 로뎅, [생각하는]이라는 수식어가 그저 지나칠 수 있는 말이지만 생각하게 만든다. 시인이 그 부분을 의도했든 아니했든 자연스럽게 의도된 시제가 산문시의 옷을 입고 더 눈부신 듯하다.
마지막 작품은 최한나 시인의 [해장]이라는 작품이다. 북엇국 속의 북어를 보며 북어의 바다와 그 거친 바다를 헤엄쳐 살다 뚝배기 속 해장국의 주재료가 되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다만, 묘사한 시라면 많다. 최한나 시인은 북어를 소재로 한 넘쳐나는 시와는 좀 더 다른 시각에서 시를 지었다.
해장
최한나
북엇국을 먹는다
한겨울 베링해를 건너온 바람이 펄펄 끓는다
들끓는 속쯤은 북엇국 한 그릇이면 봄날이다
수천 마리 물살이 걸려 있는 풍경
어느 바다도 저렇게 아가미 포 묶어 놓으면 잠잠하게 말라간다
깊고 차가운 바닷속 무리 지어 다니던 부드러운 몸들이
지금도 무리 지어 매달려 있다
물도 오래 마르면 굳는다
물결 따라 휘어지던 척추며 하늘거리던 지느러미 꼬리도
꼿꼿하게 다 말려낸 폭음의 뒤끝
끓는 소리마저 쏴아쏴아 휩쓸려 다닌다
월매네 주막으로 비어 잔으로 골뱅이 집으로 쏠려 다니느라
굳은 몸뚱이를 딱딱한 살들을 발라낸 국물로 달랜다
추운 곳에서 지낸 세월이 있어 더운 땀 한 벌 장만했을까
물에서 살던 것들이라 땀이 뚝뚝 떨어진다
땀은 가장 따뜻한 옷이다
말라붙었던 지느러미들 촉촉한 부드러움을 다시 입고
햇살이 직선으로 쏟아지는 아침을 곡선으로 가르며 나선다
물살을 휘젓고 다닌 것은 작고 여린 지느러미들이었다
바다를 누빈 것은 북어였지만 그가 헤엄칠 수 있게 만든 것은 작고 여린 지느러미라는 것을 발견했다. 해장, 폭음한 다음 날, 북어, 거친 바다, 작고 여린 지느러미가 상징하는 것은 시인 자신이며 독자인 우리다. 작은 것에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삶의 성찰이다. 놓치기 쉬운 것에서, 그저 스쳐 지나치는 것에서 삶의 모든 것이 놓여있다. 그 놓친 장면을 Replay 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시]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무리 지어 매달려 있다
물도 오래 마르면 굳는다
물결 따라 휘어지던 척추며 하늘거리던 지느러미 꼬리도
꼿꼿하게 다 말려낸 폭음의 뒤끝
끓는 소리마저 쏴아쏴아 휩쓸려 다닌다
2연에서 진술되는 자연스러운 진술들이 시를 맛깔나게 한다. 진술의 폭이 자유로우면서도 엄격한 비유의 모습을 잘 갖췄다. 자유 속에 사고의 내재율을 입힌 시는 여러 차례 시를 읽게 만드는 힘이 있다. 연상법이라는 것이 이런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독자는 쉽게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시는 복잡한 연산을 위한 공식 암기가 아니며 복호화된 고차 방정식의 문제풀이가 아니다. 시의 본질은 삶에 그 바탕을 두고 삶化라는 의복을 걸치는 것이다. 연상은 자유롭되 무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2연의 전개다.
말라붙었던 지느러미들 촉촉한 부드러움을 다시 입고
햇살이 직선으로 쏟아지는 아침을 곡선으로 가르며 나선다
물살을 휘젓고 다닌 것은 작고 여린 지느러미들이었다
작고 여린 지느러미들과 삶, 거창하거나 막중하거나 심대하거나 프로젝트성 얼개가 아닌 작고 여린 지느러미들,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어쩌면 위대한 목적이나 크고 힘찬 설계가 아닌 삶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힘의 동력은 잘 발달한 근육이나 몸이 아닌, 가슴! 심장 속을 뛰는 보이지 않는, 의학적인 용어의 가슴이 아닌, 가슴 그 속에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좋은 작품이다.
소개한 세 작품 모두 자유스럽게 빚어낸 작품이다. 아니 전혀 자유스럽지 않다. 자유 속에 시적 규칙을 자연스럽게 입혔다. 그래서 더욱 자유스럽게 빚어낸 작품이다.
글/ 김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