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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엽 목사님 말씀책의 내용과 100% 동일하게 옮겨 적었습니다. 마음을 다해 정독하신다면
말씀의 주인이신 성영님께서 반드시 영의 귀와 눈을 열어 듣고 보게 하실 것입니다.
제 13 장 믿음만이 받는 십의 일의 큰 복(성경의 계시를 따라 서야 하는 물질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6:24)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물질관에 대한 말씀입니다. 은혜로 받으시고 영도 혼도 복을 받는 믿음이
되길 바랍니다. 마28:19,20에 예수님께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영의 이름
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셨습니
다. 마11: 29에는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하셨습니다.
또한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것은 죽은 믿음이라 하셨고, 행하지 않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아 바람 불고 비 오고 홍수가 나면 무너지는 것처럼 행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고전4:19,20에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 보겠노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했습니다. 능력을 알아보겠다는 것은 병 고치고 귀신 쫓고 방언하고 예언한다고 하는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많이 안다고 떠들고 은사를 받았다고 자랑하고 떠드는 너희
에게, 말씀 많이 안다고 하는 만큼, 자기가 더 나은 은사 받았다고 떠들고 자랑하는 만큼, 그 능력
이 있는지 알아보겠다는 말입니다. 무슨 능력입니까? 말씀대로 행하는가를 보겠다는 말입니다.
"저요? 그럼요! 십계명 다 알지요! 십계명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말대로 십계명을 줄줄이 외워
댑니다. 그런데 다 알고 있다고 그렇게 줄줄이 외우는 사람이 자기 집구석은 귀신들이 좋아할 잡동
사니들을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자기 몸에 걸치고 들고 다니는 것도 귀신들이 좋아할 것들을 들고
걸치고 다닙니다. 입는 것 먹는 것 쓰는 것 등은 세상 유행을 따라가는 데 초점을 두고 자기의 기
분, 자기의 정욕, 자기의 만족을 위해서 입고 먹고 쓰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이 십계명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까? 잘 외우고 있기 때문에 능력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말씀대로 지키고 행하는 것이
능력입니다.
"아! 예수님이 산에 올라앉아서 말씀하신 팔복이요? 그 유명한 팔복 저도 알지요, 잘 알지요, 심영
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
을 것이며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며.....,"하며 잘도 외웁니다.
말씀을 알아야 하는 것이지만 외워서 알고 있으라는 것이 아니에요. 그 말씀의 특성들이 행함으로
나타나야 그것이 말씀을 아는 것이요 능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안다고 들레고 말만 있다면 그것
이 교만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럼요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탕감받은 그 비유 다 알고 있지요"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안다고
하는 자에게서 자신이 빚진 자였음을 알고 탕감을 받아 탕감해주었으므로 자유가 되어 있느냐는 것
입니다. 그것이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안다고 말만 있는 자에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하여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그것이 구원받은 자의 증거요 능력이라
고 하는 것입니다. 행하는 것만이 아는 것이요 능력이요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
라가 자기에게 임하여 있다는 증거는 예수님의 가르쳐주신 그 말씀이 행함으로 나타나느냐 하는 것
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만 앞세우는 자이냐 행하는 자이냐? 그것을 보러 가겠다고 했던 겁니다. 그
러므로 자기가 예수님으로 용서받은 은혜를 아는 복음의 사람이면 용서의 행함이 있는 것이요 화
목의 행함이 있는 것이요 원수도 긍휼히 여길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믿음이 뭐냐?
행함이 없으면 죽은 것이라고 하는 말, 귀가 따갑도록 듣는 것이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행함의
믿음이 되자 예수님을 사랑하여 믿는 믿음이 되자는 겁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 우리도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도 물질을 말하면서 행함을 강조하게 되었으니 또 오해는 마십시오. 혹이라도 오해하고 들을까
싶어 말하는데 제가 어떤 목적을 위해서 돈이 필요해서 돈 좀 걷으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두겠습니다. 왜 이 당부 말씀을 하는가 하면 오늘날 교회들 중에서 성경이 의도하고 있지
않은, 온갖 헌금의 명목들을 세워놓고 얼마나 헌금의 가지 수가 많은지 정말 황당하다 못해 아연실
색할 정도입니다. 사람들에게 헌금이란 말을 붙여, 내야 한다는 부담을 안겨줌으로써 그것으로 시
험에 들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누구인가? 죄를 해결 받아야 하고 구원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에 대한 중차대한
뜻을 알기도 전에 물질로 걸려 넘어지게 하는 예가 많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도하다 보면 가장 많
이 듣는 말이 교회에 나가면 돈 이야기밖에 없더라는 말입니다. 물질로 인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여 마음이 닫히고 교회를 아주 외면해버리는 안타까운 경우들이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성경에 의도한 바 없는 헌금에 대한 얘기로 여러분 마음에 부담을 주려는 마음 추호도 없으니
여러분이 혹이라도 이 말씀을 듣겠느냐 듣지 않겠느냐 하는 정도에서 그쳐야 하는 것이지 그 이상
을 넘어서 교회들이 헌금 타령이나 한다고 하는 불경의 말을 반드시 삼가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
해 여기 예수님의 교회도 다른 데와 별다를 바 없이 헌금이나 내라 한다는 이런 말로 함부로 죄짓
지 말라는 얘깁니다. 헌금 내라고 하기 위해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예수님을 믿기
원하면 그 믿음에는 반드시 물질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니, 믿는 자가 가져야 할 물질에 대한 믿음
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물질에 대한 믿음을 말씀드리겠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재물을 목숨 다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적인 물질관을 갖지 않으면 물
질이 주인의 위치에 있게 되는 것이어서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깨닫고 바른 물질관을 가져
야 하나님과 흠 없는 관계로 나갈 수가 있습니다. 헌금은 말씀에 계시를 따른 믿음에 의해서인 것
이지 절대로 다른 이유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강제로 내라 하시지 않습니다. 저 역시도 헌금 내라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내라 마라 하는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요, 말씀의 뜻대로 믿음이 되면 그
믿음이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되면 믿음대로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 나와서 성경이 말씀하는 헌금
의 뜻을 알기도 전에 온갖 명목을 앞세워 헌금 내는 것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분명히
전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마5:21-26의 말씀에서도 다루어 드렸으니 그 말씀에서 들으시고 헌금에 대해서
좀 알면 좋겠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이 아니면 절대로 헌금 내는 것 하지 마십시오. 내고 불평할 일
이면, 또 자기 돈 내는 것이면 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자기가 누구인지 예수님은
누구시며 자기가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 확신도 없으면서 물질 바친다고 하는 것 하지 마라는
말입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또는 복채 내듯, 아까운데 교회가 헌금하라고 해서, 체면 때문에 어
쩔 수 없어서 내는 것, 하나님의 표적에서 다 빗나간 일입니다. 절대 계시에 따른 믿음에 의한 것
이 아니면 하지 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돈이 아쉬워서, 돈이 없어서 사람들에게 돈 가져오라
고 하시는 것 아닙니다. 그리고 세상의 것으로 복을 받고자 하여 헌금 낸다고 하는 것, 무엇인가
잘 되게 해달라고 헌금하는 것, 다 하지 마십시오. 이런 것은 하나님을 세상 신 정도로 여기는 종
교인의 행위요 샤머니즘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계신 것이 믿어졌고 예수님을 믿기로 하였으면 먼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순종
하여 행하는 것은 요구됩니다. 아직은 성경을 깨닫지 못해 하나님에 대해서도 믿음에 대해서도 헌
금의 뜻에 대해서도 잘은 모르지만 교회가 세운 제도 때문이 아닌, 사람들의 여러 가지 불평불만에
기울이지 않고, 자기의 어떤 요구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순종한다는 뜻에
서 헌금(십의 일)을 한 것이면 그것은 말씀에 순종한 것이니 하나님께서도 받으신 것이 되고, 그로
더욱 믿음의 방향으로 이끌어 믿음과 삶에 복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복 있는 심영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니 말씀을 경외하여 순종하고자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면 그것은 얼마나 복이 되겠습
니까? 이것은 누가 내라 해라가 아니라 다른 어떤 계산적인 것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직 말씀을 깨달아서 알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니 자기 스스로가
자기 마음에 다른 것 개입됨이 없이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 행한 것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도 그의
물질과 상관 두신다는 말입니다. 이 같은 순종과 믿음이 아닌 것은 하나님과 절대로 관계없다는 것
을 다시 또 강조합니다.
제가 이 강단에 설 때부터 사람이 내는 돈 쓰지 않게 해주시라고 누차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사람이 내는 돈 쓰지 않게 해달라고 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받지 않는 물질,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 것이면 저도 사용하는 것 정말 없게 해달라고 누차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아무 돈이나 쓰
는 것 정말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짜 헌금 낸 것을 나중에 자기 것으로 찾는 이들도 있
었습니다. 계산하여 찾아가더라는 말이에요. 그렇게 자기 것으로 찾아가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저는 참 감사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버지 것이 아닌 가이사의 것을 사용하지 않도
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에서 물질에 대한 자세를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 오늘 저는 두 가지로 말씀을 드릴 것입
니다. 여러분이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의 큰 줄기가 되어 흐르는 대주제가 되는 것이 뭐라고 알고
있습니까? '생명'입니다. 생명!!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생의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뜻을
세우신 것, 성경의 대주제가 되는 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분명히 알기를 바라고
자기에게 적용하는 뜻이 되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경에 최초로 하나님께 물질을 드린 사람이 누굽니까? 바로 아벨과 가인입니다. 아벨과
가인이 물질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무엇이 있는 것만 받으셨습니까? 피를
흘린 제물, 피는 생명이기에 생명이 있는 것만 받으셨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생명이나 받으신다는
것 아닙니다. 오늘날 십일조 드린다고 해서 아무것이나 받으시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께
서 생명을 내놓으실 뜻으로 친히 피를 흘려 처음 사람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던 첫 것의 어린
양의 생명이라야 합니다. 아벨이 이 계시에 의해서 양의 첫 새끼의 생명(피)을 드린 것입니다. 이
생명을 하나님께서 받으신 거예요. 여러분이 이것을 확실히 알고 받아야 자기 믿음도 분명해지는
것임을 아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제물에 무엇이 있어야 받으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피 흘린 일 년 된
첫 것의 양의 생명만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아벨이 양으로 제물을 삼은 것은 속죄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지만 또 한편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에는 반드시 이 같은 생
명이 있는 제물이라야 받으신다는 것을 보이신 뜻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가져야 할
물질관, 바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물질은 하나님께서 친히 피 흘리신 생명이 있는 것만 받으시는
것임을 분명히 알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첫째, 헌금은 생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다음은 하나님께서 아벨이 바친 제물의 생명
을 받으셨다는 것은 곧 누구를 받으셨다는 것입니까? 아벨을 받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아벨
과 함께 제물을 받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는 물질도 포함하는 것이니 지금 하나
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돼야 하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잘 알아들어야 합니
다. 영적 이해가 따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성경 다 깨닫지 못했어도 말씀에 순종한다는 차원에서 순종(십의 일)을 바치는 것 하나님께서
받으신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초신자 때의 일입니다. 이제 계속 이 같은 뜻을 배우고 알아서 믿음으
로 성장해 가야 하는 거지요. 순종은 믿음의 씨와도 같습니다. 그렇기에 구원의 뜻을 깨달아 가면
서 영의 믿음으로 자라가지 않으면 변질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뜻을 아는 만큼이 영적
능력이 되는 것이고 자기에게 복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복입니다. 그래서 물질을 드린다는 것에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드리는 믿음의 관계가 되어야 하는, 삼위 하나님과 경험의 관계가 되어야 하는
중요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를 열어드리는 이런 뜻을 어디 가서 듣겠습니까?
믿는다 해도 앞도 뒤도 없는 불분명한 것들에 붙들리고, 애매모호한 태도들이 되어서 자기가 구원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도 모르고 헤매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아벨이 양의 첫 새끼의 생명을 취하여 드린 제물은 곧 아벨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바
치는 것과 같은 의미로 드린 것입니다. 자기의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의
미로 드린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아벨도 양의 첫 새끼도 예수님을 상징하여 예수님께서 양처
럼 제물로 드려져 하나님을 만족케 하시고 아벨처럼 기쁘게 받으시는 온전한 제물이 되어 예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께서 받으시게 되었다는 것을 예표한 것입니다만 아벨은 자기 생명은 하나님께 속
한 하나님의 것이니 자신을 드린다는 뜻으로 양의 피를 흘려 제물을 번제로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첫째는 생명이 있는 헌금이어야 한다. 둘째는 나는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께 나를 드린다는 믿음
으로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 여기까지는 알아들으셨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헌금에 생명이 있느냐? 어떻게 헌금 드림이 나를 드리는 것이 되느냐? 믿음으로 드린
다고는 하지만 그 믿음이 어떤 것이냐? 알아야 되겠지요? 이에 대한 답은 말씀 중에서 다 듣게 되실
테니 잘 듣고 깨닫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즉 아벨이 최초로 하나님께 물질을 드릴 때에 자
기 맘대로, 자기 기분대로 드렸습니까? 계시에 의한 것입니까? 계시를 따라 드렸습니다. 그런데 가
인은 자기 기분대로 드렸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인과 아벨에게서 물질 드림에 대한 두 양상을 보는
것입니다. 자기 맘대로 자기 기분대로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와 그 제물은 받지 않으신다, 계시를
따라 드릴 때 그와 그 제물을 받으신다는 것을 분명히 보이셨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이 헌금(십의
일)을 낼까 말까 하는 계시를 받아서 내야 한다, 계시받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성경에 계시된 대
로 계약이 붙은 헌금을 그 믿음으로 드리는 것이 돼야 한다는 말입니다. '계시에 붙은 언약' 즉
하나님께서 받으신 생명이 곧 자기의 생명이 되었고, 그러므로 자기는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의
것으로 내드린다는 믿음으로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이 계시에 의해 바친 생명의 제물을 받으셨다는 것은 곧 '나도 너에게 나의 생명을
주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벨의 제사를 열납하신 것은 내 생명을 너에게 줄 것이라는 그 계시
가 들어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다음에 생명을 주시겠다는 이 계시가 드러난 것이 언제입니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멜기세
덱으로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자기의 피와 살을 먹여주신다는 뜻에서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
브라함에게 주셨는데, 그러면 떡과 포도주는 한마디로 무엇이 됩니까? 죄 사함을 얻게 하는 예수님
의 피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살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한마디로 뭐예요?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너에게 생명을 주신다는 뜻에서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도 '자기 목숨을 대적(사단)의 손에서 건져주셨으니 내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것입
니다'하는 뜻에서 대적에게 도적질 당했던, 다시 찾은 물질 중에서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
게 주었다(히7"4) 했습니다. '좋은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 물건들 중에서 좋은 것으로 골라드렸다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단에게 도적질 당하였던 것을 다시 찾게 하신 그것은 하나님의 것
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좋은)된 것이니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드린 십분의 일은 사단에게 도적질 당하였던 것 중에서, 하나님의 것은 반드시 다시 찾
으신다는 것을 의미한 것으로서 생명의 계약이 붙은 것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이 생명의 언약 안에
들어오면 하나님께 찾아진바 된 것임을 의미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때부터
십의 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생명 얻은 뜻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믿음에는 그 사람
과 십의 일이 뗄 수 없는 것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알아듣는데 어려운 말 아니지요? 알아
듣는 줄 믿습니다.
성전에서 떡 상에 대해서 말씀드릴 때 이 관계를 정확히 다루어 드렸으니 거기서 반드시 참고하십
시오. 반드시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맺은 이 생명의 계약은 이삭과 야곱에게로 그리고 이스라
엘로 그대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간에 맺은 이 생명의 언약은 누가 생명
을 내놓아야 완성이 되는 것일까요? 바로 독생자 예수님이 오셔서 생명을 내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생명(피)을 받으신 하나님께서, 이 같은 구원하시는 뜻을 깨달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들어온
자에게 부활의 생명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부활의 생명을 얻었으면 그 생명은 누구 생명입니까?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게 되었으면 그는 이제 누구의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것입니
다. 그러므로 예수님만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받으시니 누구도 받는 것이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것이 된 그도 받으시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에게 도적질 당한 자 중에서 하나님의
것으로 찾아진바 구별된 자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게 된 예수님의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하나님께 그 믿음과
함께 무엇까지 갑니까? 자기가 그것을 믿는다는 것을 무엇으로 나타내는 것인가 말입니다. 바로
십의 일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보물은 재물이 아니라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믿음으로 보
이는 것, 예수님과 아브라함이 맺은 십의 일을 드림으로써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돈을 말하는
것 절대로 아니니까 새겨듣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돈을 받으시는 것 아니에요. 돈을 드린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것으로써,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돈 받으
시는 것이 아니에요. 자기 돈, 자기 것 받으시겠다고 하는 것 아니에요. 믿음을 보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믿음을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자기의 아까운 돈 가지고 관계를 맺으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사단이 받는 것입니다.
이 계시에 대해 모른다거나 믿음이 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아직 예수님의 생명을 얻은 것이 아닙
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것이 있습니다. 아벨의 제물이 곧 생명에 대한 계시였다는
것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다음 아브라함의 십분의 일은 생명의 계약이 붙은 것이었다는 것을
100% 믿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그의 후손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이었다는 것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이 뜻과 역사를 너희가 진심으로 믿느냐는 말이에요. 예수님이 오셔서 이
모든 언약을 완성하셨다는 것을 또 확고히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예수님이 자기의 생명이 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믿음으로 아벨이 제물을 드린 것
처럼,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자기를 대적의 손에서 건지시고 빼앗겼던 재물을 다시 찾게 하신 하나
님께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드렸던 것처럼, 너희도 예수님께서 너희를 대적(사단)의 손에서 건
져주시고 생명을 얻게 하신 생명의 주인이시오 예수님의 자기의 생명이 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계시에 따른 그 믿음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이 있는 헌금(십의 일)
입니다.
그래서 첫째로 헌금에 생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이제 알아들었지요? 하나님의 것(자신)을 하나님
의 것(십의 일)으로 드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헌금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헌금은 그렇게 계시
(성경)에 따른 것이고 예수님으로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되어 살게 된 자신도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
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올려드린다는 그 믿음에서, 십의 일을 드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
니까 하나님께서 물질 이전에 누구를 받으시는 거예요? 그를 받으시고 십의 일을 받으시는 겁니다.
그가 잘나서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받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부활하신 생명으로 살게 된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니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면 하늘에 들어간 것
일까요? 들어가지 못한 것일까요? 들어간 것입니다. 영원히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헌금하는 것을 자기 돈 드리는 것처럼 하지 말란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가
증히 여기십니다. 이런 것은 가증한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모르십니다. 아예 관계가 안 되는 것입니
다.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을 얻어 그 생명으로 살게 된 자신을 드린다는 믿음으로 드리는 것입니
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돈이라는 개념을 깨끗이 버려야 하고, 자기 것 드린다는 개념도 깨끗이 버려
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돈 달라 하시고 돈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자기 것을 받으시는 것 절대로 아닙니다. 네가 예수님의 부활하신 생명을 얻어 그 생명으로 살
게 된 하나님의 것이 되었으면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드리는 것을 말하는 것
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으로 맺어진 생명이 있는 헌금(십의 일)입니다. 이해 됐습니까? 이것이 믿는
자의 물질관입니다. 참으로 믿는다면, 믿기 원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계시를 따른 물질관이 세워져
야 합니다. 반드시 성경대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침대로 하나님의 원칙대
로 믿는 것이 사람에게 주신 큰 복입니다. 믿고 아멘이 됩니까?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사단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사단의 지배하에 있지 않다는 이 자유의 믿
음을 그렇게 기꺼이 하나님의 것을 바치는 것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모든 인간은 자기가 알든 모르든 간에 다 사단의 지배 속에 있습니다. 또한 물질을 지배하고
있는 것도 사단입니다. 사단이 확실하게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물질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네가 예수
님을 믿는다면 물질을 경히 여기는 것이지 물질을 섬길 수 없다고,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재물을 겸
하여 섬길 수 없다고, 재물을 믿고 있으면 재물을 섬기는 것이라고 분명히 갈라주셨습니다. 사람은
반드시 누군가를 섬기게 되어 있는데 그것이 물질을 잡고 있는 사단이냐, 하나님이냐 하는 것이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지난 말씀에 드렸으니 그 말씀에서
살펴보기를 바라고요.
우리 눅21:1-4까지 찾아보겠습니다. 과부의 두 렙돈의 헌금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
자들이 연보 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가라
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
었느니라 하시니라.
우리가 읽은 문자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무슨 말인지 다 아는 것이지요? 아주 가난한 과부가 두 렙
돈 헌금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예수님의 관심을 받은 것은 부자의 헌금
입니까? 가난한 과부의 헌금입니까? 가난한 과부가 넣은 두 렙돈의 헌금입니다. 두 렙돈은 그 당시
에 가장 적은 화폐단위라고 합니다. 우리 돈으로 말하면 백 원짜리 두 개 정도, 천 원짜리 두장 정
도의 액수가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두 렙돈 밖에 되지 않는 그 하잖은 액수
를 보고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고 하셨습니다. 도대체 두 렙돈, 그 일이천 원 정도가 뭐가 많
다고, 돈 가치로 보면 한 끼 식사 값밖에 더 되겠습니까? 누가 많이 넣었느냐 한다면 부자들이 헌
금 넣는 것을 보셨다 했으니 당연히 부자들이지 않겠습니까? 그렇기에 예수님의 말씀은 눈에 보이
는 액수나 돈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과부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삶의 것들을 채워줄 남편이 없다는 뜻입니다. 혈과 육의 것들을 채워줄
남편이 없는 혼자된 여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혼한 여자를 과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별한
여자를 말하는데, 여기서 과부는 바로 남편처럼 붙어서 혈과 육의 것으로만 살 수 있다고 끊임없이
속이며 괴롭히던 자에게서 떠나온 여자를 말합니다. 그러면 혈과 육의 것으로만 살라고 하는, 세상
것으로 살라고 하는 과부의 죽은 자가 누구겠습니까? 바로 사단입니다. 세상의 물질을 잡고 있는,
인간의 주인 행세하고 있는 사망 권세 잡은 죽은 자, 생명 없는 자가 누구입니까? 사단입니다. 그러
니까 이 과부라 한 것은 사단의 지배 받기를 원치 않는, 사단이 잡고 있는 물질을 좇아 살지 않는,
물질을 믿는 것으로 하지 않는, 물질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는, 혈과 육으로 사는 것을 사단에게 넘
겨주고 예수님께로 나와 보물(자신의 삶)을 하늘에 쌓는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입니다.
옛 남편 노릇을 한 율법의 속박에서 나와 복음이신 예수님께로 들어온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사단
이 율법을 들이대고 정죄하던 것은 복음이신 예수님 앞에 오니 끝났습니다. 바로 죽은 것입니다.
옛 남편은 죽은 것입니다. 두 렙돈, 자기의 생활비 전부라고 하는 것은 4에서 그 구차한 중에서라
고 말씀했듯이 이제 사단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의 것으로는 가난하기 짝이 없는 자라는 말입니다.
사단이 가져다 준 것은 이제 깨끗이 사단에게 넘겨줘 버렸으므로 땅에 쌓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세상 것으로는 가난한 자라는 말입니다. 오직 그의 마음은 하늘의 하나님께 두었다는 말입니다.
하늘의 것이 그에게는 보물이요 그렇기에 세상 것으로는 가난케 되고 하늘의 것,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부요하기를 원하였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고 했으니 그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 있다는 것입니까? 바로
하늘에 쌓았으니 하늘에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의 삶은 온전히 하나님만을 바라고 하나님의 도우심
으로만 산다는 신앙을 나타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
다.....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며 이 과부의 헌금을 보
셨다는 것은 하늘에서 그 과부의 헌금을 받으셨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 과부를 통해서 믿는 자의
가져야 할 물질관을 드러내 주셨습니다. 세상으로는 가난해야 한다. 마음이 가난해야 한다. 세상
것에 집착하지 않고 세상 것에 끌려다니지 않아야 한다. 오직 예수님께 우리의 마음을 두고 예수님
을 따르는 것이 돼야 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과부가 바로 세상을 초월하여 물질에 매이
지 않은 자유를 보인 것입니다.
지난번 말씀에서 마19장의 부자 청년에 대해 살펴보았듯이 예수님께서는 그 부자 청년과 이 과부를
모델로 하여 하늘에 들어가는 자와 들어가지 못하는 자의 두 모습을 보게 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에
게 네가 영생에 들어가려면 네가 보물로 여겨 땅에 쌓은 재물을 하늘에 쌓으라는 뜻을 말씀하셨습
니다. 너희가 보물로 여기는 재물이 너희의 믿는 것(주인)이 돼 있지 않다는 그 믿음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네가 보물로 여기는 그곳에는 네 마음이 있지 않느냐?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았
던 그것을 하늘에 쌓는 것으로 마음을 하늘의 것에 두라고 하신 것입니다. 보물은 바로 하늘의 것,
예수님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부자 청년은 재물이 많은 고로 근심하며 가니라 했습니다.
재물 때문에 자기 앞에 있는 영생을 버렸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계약이 붙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구별된 물질이 무엇입니까? 십일조
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것이 바로 십일조입니다. 우리 신앙의 물질 면에서
가장 기본이 되고 중심이 되는 것이 이 십분의 일입니다. 만일에 물질 드림에 있어 계시에 따른
십의 일에 대한 이 기본이 서 있지 않으면 다른 헌금은 절대로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이 기본이
서 있지 않으면 다른 물질 아무리 많이 드린다 해도 관계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십의 일은
하나님과 자기와 어떤 관계의 의미인지 이미 충분히 수차례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십분의 일에 대해 믿음이 서지 않고 다른 명목의 헌금만 열심히 드린다고 하는 그것은 종교인의
자리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범하는 죄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물론 선악과를 먹은 불순종의 죄는, 혈과 육으로 하나님께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의 약점을 완전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방법이요 구속의 뜻이 담겨 있는 것으로써, 예수님
께서 오셔서 그 죄를 갚으시는 것이 되었지만 그러나 죄의 값으로 예수님께서 생명을 내놓아 죽으
셔야 한 것처럼, 죄는 그같이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보이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죄는 대가를 치른
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믿는다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것을 범할 시는 하나님과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 내놓는다 해도 그것은 가인이 충성이요 가인의 제물이기 때문에 하나
님의 계시에 따른 뜻대로 맺은 믿음이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것도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
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십의 일은 안 드려도 감사 헌금은 한다 하는 것 하나님과 관계없
습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것이라는 것 분명히 말해두겠습니다.
이 같은 것은 지금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하는 것인지는 전혀 관심 없거나, 또
는 외면하고 그저 하나님께 복 받겠다는, 복 주실 것이라는, 아니면 내게 복 주신 것에 감사하니까
헌금한다는 그런 인간 신심에 의한 일입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곧 하늘의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요 물질에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 일입니다. 믿음이 아니
라는 말입니다.
뿌리를 땅속 깊이 내린 나무는 튼튼하여 열매를 풍성히 낼 수 있듯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 믿음도
물질에 대한 신앙이 하나님의 계시에 따른 신앙으로 뿌리가 튼튼하게 내렸느냐? 아벨이 계시에 따
른 생명을 드렸음으로써, 하나님께서 받으셨던 것처럼 그같이 생명의 제물이 되시고 생명의 속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게 되었으니, 자신은 이제 예수님의 것이라는 그 믿음에서 십의
일을 바치는 것이냐? 그것이 바로 나를 받으시는 뜻이 되어 영혼도 삶도 풍성한 열매를 얻게 되는
일인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어려움 당하지 않는, 끊임없이 공급하시는 생명력이 있다는 말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23:23에, 믿는다는 것은 성경적인 물질관이 되어야 하늘의 영적인
능력이 확실히 서는 것이기에 의와 인과 신으로 하라고 정확히 말씀해주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때를 말세지말 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강림이 가까운 종말의 때라고 말합
니다. 그래서 종말의 때가 가까워오는 타락의 징조가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 딤후3:1,2에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기를 기쁘게 하려면 돈이 있
어야 되겠지요, 그래서 자기 사랑하는 것이 곧 돈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돈이 있
으면 자기를 위해 세상의 것을 누릴 수가 있으니 돈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돈 사랑은 자기
사랑이요 자기 사랑은 돈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딤전6:10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돈
을 사랑하는 것은 사단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돈이 목적이면 그것은 일만 악의 뿌리
요 죄악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돈으로 자기를 사랑하려고 돈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
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믿는다는 사람이 돈의 미혹
받아 좇아가야 하니 얼마나 근심이 됩니까?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을 자기 양심은 알고 있으니 한
편으론 지옥 가는 것은 너무 두렵고, 또 돈이 세상 살기는 너무 좋고, 마음도 든든하고 그러니 돈
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고, 구십 마지기에서 딱 열 마지기만 채우면 백 마지기로 그것만 채우면
걱정 없이 살 수 있으니, 채워놓고 그때 열심히 믿자고 자신을 위로하며 백 마지기에 미혹되어 끌
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자기를 찔렀도다 했으니 자기가 스스로 미혹을 받아 지옥으로 들어
갔다는 말입니다. 돌이키려야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말세의 타락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데 있고 돈을 목적으로
하는 데 있다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는 모습들로 나타난다. 이것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 이야기가 아니에요. 믿는다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
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
다 더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말세는 믿는 이들에게 돈을 사랑하게 하여 믿음에서 떠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단이 돈
이 권력이 되게 하는 것에 미혹을 받아 그 앞에 굴복하고 돈을 따라간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교회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에요. 교회는 나오되 성경의 계시에 따른 믿음과는 전혀 관계없는, 신심
으로 믿는다고 하는 자들로 넘쳐날 것임을 말합니다. 잘살게 해주시는 하나님, 세상에서 성공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을 찾고 믿는 것으로 다 유혹당한다는 말입니다. 다 각기 자기 뜻대로 믿는다, 그
말입니다.
말세를 사는 세상 사람들이야 오로지 돈이 목적이 돼 있습니다. 자기 사랑을 위해 돈을 좇아가는
것에 온 마음을 두고 있으니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절대로 복음이 받아들여지지 않습니
다. 복음을 듣고 믿는다고 나와도 그것은 자기가 혹 잘되는 복을 받지 않을까, 뭔가 자기가 좀 위
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힘든 삶 사는 것에 마음이 지치고 고달프니 교회 나오면 위로도 되고
힘이 좀 될까 하여 하나님을 그런 쪽으로 의지해보겠다는 마음으로 나오는 것이지 실제로는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믿기 위해서는 참으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하겠느냐 물질을 주인으로 하겠느냐 하는
분명한 태도가 마음에서부터 삶으로까지 확실하게 서야 하는 것이지 물질도 좋고 하나님도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딤전4:1에 성영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
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종말의 때가 다가올수록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
르침을 따라간다는 것을 성영님이 밝히 말씀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번영을 펼치는 신학들을
좇아가고 축복을 외치는 설교들을 좇아가서, 그것이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인 줄은 절대
로 모르고 다 멸망 받는 곳으로 미혹되어 따라가는 것입니다. 물론 스스로도 그것을 원하고 믿는다
하는 것이기에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고, 같이 멸망하는 곳으로 들어가는 것입
니다. 지금 미혹하는 거짓과 가라지를 단으로 묶는 시대라고 말씀드리잖습니까? 속속히 드러나는
때라고 말입니다.
축복, 번영 성공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달콤한 미끼를 던져 사람들 마음을 미혹하여 영혼들을 낚
아 망할 길로 함께 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사람들이 큰 교회라고 말하는 그 교회들입
니다. 큰 교회가 되었다는 것은 그와 같이 인간의 본능이 원하는 축복, 번영, 성공, 건강 등을 주
시는 하나님을 전하니, 그것을 원하는 인간의 마음에 맞춰주니 말입니다. 당연히 자기를 맞춰주는
곳으로 모여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지상정이요, 사단은 또한 교회라는 탈을 쓴 그런 거짓 교회가
그렇게 큰 성장을 이루도록 열심히 도와 사람들이 모여들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에는 절대로 그렇게 모여들지 않습니다. 성경의 역사 이래 그렇게 진리를 찾는 자가 그리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진리 앞에 인간이 모여들지 않는다는 것 분명히 알기 바랍니다. 눈을 뜨라는
말입니다. 마24:12에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의 사
랑이 식어진다 하니까 인간과 인간끼리의 사랑이 식어진다는 말이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사
랑이 식어진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사라질 것에다가 믿음 두고 있으면 이와 같은 말씀들에 다 걸려있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따르고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따라 산다면 그것이 믿음
일 수는 없습니다. 이웃이 물질로 누리고 산다고 해서 자신도 그것을 부러워하여 그렇게 살려는 데
다 목표를 두는 것이면 믿음은 없습니다. 이것은 그 마음이 세상에 있습니다. 돈은 사는 것에 필요
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 그 이상은 다 세상입니다.
오늘 본문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듯이 돈이 목적이 되어 있으면 하나님을 사
랑할 수가 없는 것이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알고 섬긴다면 물질이 목적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한 사
람이 두 주인을'하는 것은 사람의 주인은 하나님이신데 물질도 인간의 주인 노릇을 한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물질이 너의 주인이 돼 있느냐? 하나님이 너의 주인이 되어 있느냐? 둘 중의 하나인 것이
지 절대로 두 주인 섬길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잘라 말씀을 하셨으니 여러분이 정신 차려 듣는 말
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늦지 않았기를 바랄 뿐입니다.
19에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하신 이 "쌓는다"는 말씀의 뜻이 땅에다 습관들이
지 말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세에는 사람들이 돈을 믿는 것에 습관을 들인다는 거예요. 돈
을 사랑하는 데 습관을 들인다는 말입니다. 땅에다 쌓는 것에 열심히 습관을 들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면 땅에다 습관들이지 말고 어디에다 습관들이라고요? 하늘에다
습관을 들이라 하신 것입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는 것이 헌금을 하나님께 많이 내라 너희에게 있는 재물을 다 내놓으라
하는 그런 말씀이 아니고 우리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맞히는 습관을 들이라는 우리 신앙의 자세
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주인이시요, 우리가 섬겨야 하는 분으로서 물질이 믿는
것이 될 수 없고 주인이 될 수 없다는, 물질관을 확실히 하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만 습관을 들일 때 그것이 행복이요 기쁨이요 평안이요 능력이요 또한 삶을 책임
져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니, 물질에서 확실히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질은
사람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 사람이 물질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오늘 말씀으로 분명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으니 이것이 아멘이 되어 삶에 깨끗이 적용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혹이나
또 십의 일을 바치면 영생의 생명을 얻게 된다고 하는 말 아니니 오해의 말씀으로 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분명히 그 믿음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서 믿음으로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 강조
하고 강조합니다.
우리를 말씀으로 깨쳐 믿음이 되게 하시는 삼위의 하나님께 큰 감사를 올려드리며 말씀을
맺습니다. 아멘!!
제 13 장 믿음만이 받는 십의 일의 큰 복(성경의 계시를 따라 서야 하는 물질관)P263-P2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