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신명기 1:34-46 / 2020년 3월 29일 주일 오후 예배
오늘 오전에는 신명기 1장 19절에서 33절까지 말씀을 나누었는데 이 시간에는 그 뒤에 이어지는 34절부터 46절까지 말씀을 나겠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성도의 구원에 관하여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말씀한 것입니다.
구원은 허물과 죄로 죽은 타락한 인간에게 나올 수 없는 것이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어 있던 죄인을 살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이 역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능력으로 성취된 것이 진리의 복음인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은혜와 사랑을 베풀지 않으면 모두 영원히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이 타락한 죄인들의 운명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신명기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너희들의 공의와 능력과 지혜가 아니라고 누누이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공의는 고사하고 광야생활 내내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자들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두 번이나 진멸하려고 했으니 광야에서 심판을 받았어도 아무 할 말이 없는 것이 이스라엘 성도들인 것입니다.
나의 구원을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나의 공로입니까? ‘엔젤 오브 마인’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영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엄마인 리지는 7년 전 병원의 화재로 어린 딸을 잃었습니다. 병원에서 딸을 낳을 때 화재가 난 것입니다. 딸을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리지는 어느 날 아들 친구의 생일 파티에서 아들 친구의 여동생인 롤라를 본 후 사고로 잃은 자기 아이라고 확신하며 집착하게 됩니다.
롤라의 엄마는 리지가 자기 딸을 스토킹하며 집작하는 것을 보며 떼어놓으려고 애를 씁니다. 리지의 부모와 남편과 가족들은 리지에게 이제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라고 애원을 합니다. 리지가 점점 미쳐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급기야는 자기 딸이 살아 있다는 말에 가족들은 리지가 정신적으로 큰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병원에 입원할 것을 권유합니다.
롤라가 7년 전에 죽은 자기 딸이라고 확신한 리지는 DNA 검사를 하기 위해 롤라가 사는 집에 몰래 들어가 가게 되고 롤라의 엄마에 발각되어 둘은 격렬하게 싸우게 됩니다. 결국 그곳에서 리지는 롤라의 엄마로부터 충격적인 진실을 듣게 됩니다.
병원에 화재가 났을 때 자신의 죽은 아이를 리지의 아이와 바꾼 것입니다. 롤라를 자기 딸로 바꿔치기한 클레어는 딸을 잃고 그 딸을 찾는 생모의 그 모성애에 진실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딸은 잃은 엄마는 나는 내 딸을 잃고 한 순간도 행복할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영화가 실화라는 것이 놀랍습니다. 어떻게 어릴 적 화재로 죽어 화장까지 한 딸을 살아있는 사람 중에서 찾을 생각을 했을까 말입니다.
엄마는 자기 딸을 본 순간 남자와 여자가 한 눈에 반하듯이 억제할 수 없는 확신과 감정이 솟아오른 것입니다. 딸이 자기를 키워준 엄마를 이 사람은 내 엄마가 아닐지도 몰라 한 번이라도 의심하였겠습니까?
예수님은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안다고 하셨습니다. 엄마는 7년 전에 죽어서 장사지냈다는 자기 딸을 7년 후에 산 사람 중에서 알아보는 것처럼 예수님은 허물과 죄로 죽어있는 자들 중에서 하나님이 은혜로 살려낼 택한 자녀들을 아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찾아와서 너는 나를 따르라 하였을 때 목자의 음성을 아는 성도는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택한 백성들을 찾아오신 주님은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쉬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양을 찾으시는 주님의 열심과 사랑과 은혜가 아니라면 성도의 구원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신명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외치는 것입니다. 본문은 민수기 14장 20절과 45절에서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반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할 것이며 오직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 갈렙과 여호수아와 아이들만이 들어갈 것이라 말씀한 것입니다.
본문 34절부터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소리를 들으시고 노하사 맹세하여 이르시되 이 악한 세대 사람들 중에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하시고 39절에서 “또 너희가 사로잡히리라 하던 너희의 아이들과 당시에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던 너희의 자녀들도 그리로 들어갈 것이라 내가 그 땅을 그들에게 주어 산업이 되게 하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믿은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사는 족속들의 높은 성읍과 신장이 크고 철병거를 갖고 있는 대적들의 힘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보잘 것은 자신들의 힘을 볼 때 갈렙과 여호수아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힘과 그 은혜를 믿은 것입니다.
민수기 13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말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믿지 않고 자신들의 능력과 힘을 의지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갈렙과 여호수아는 이렇게 외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선포하는 것입니다.
죄인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타락한 인간은 계속해서 구원의 조건과 자격을 자신에게서 찾으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을 정복하는 가능성과 능력을 자신들에게서 찾은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의 일곱 족속들보다 신장도 크고 강한 무기도 갖고 있고 용맹한 군사들과 월등한 군사력이 있어 자신들의 힘과 지혜로 그 땅을 정복한다면 그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존재일까요?
하나님은 성도의 구원과 행복을 도와주고 지켜보는 들러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과 구원의 역사에 들러리로 만들려는 것이 오늘날에 인본주의와 율법주의와 기복주의신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강력한 무기와 성읍을 갖고 있는 가나안을 정복해야 하는 이스라엘에게 어떤 무기도 손에 들지 못하는 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무기와 힘으로 무너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순종하는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전쟁과 승리는 어이없는 것입니다. 함성을 지르면 성벽이 무너지고 항아리를 깨뜨리고 나팔을 불면 대적들이 도망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못하고 자신의 힘과 행위와 의를 의지하려는 자들은 구원의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자신의 자격과 조건과 행위와 의에서 찾던 바리새인들은 주님으로부터 배척을 받고 죄인으로 배척을 당하던 사마리아 여인과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은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라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와 의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죄인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기에 누구든지 자신을 자랑할 수 없고 누구든지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에 들어가는 갈렙과 여호수아와 당시에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던 아이들은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는 것을 의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에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하시고 19장 14절에서는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그러나 먹고 배부르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날 것이다 예언한 것입니다. 결국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세상의 힘과 영광을 사랑하고 자신의 율법적인 행위를 의지하며 정욕과 탐심으로 자신을 숭배하는 자들로 타락한 것입니다.
얼마 후면 21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습니다. 지금 전직 대통령은 탄핵을 당하고 수감되어있습니다. 전직 대통령의 사면을 외치는 정치세력들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옥중서신으로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의 통합을 주문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정치세력들이 자신들이 모신다고 하는 그 사람의 말을 듣습니까? 다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과 욕망을 위해 이용할 뿐이지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예수를 말하지만 이용할 뿐이지 예수님의 말씀과 뜻을 받들지 않는 이 시대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가나안에 들어가려 하던 자들은 광야에서 멸망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광야에서 자신을 십자가에 부인하고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해야 합니다.
구원은 나에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인한 것임을 믿고 우리는 부끄럽고 절망스럽고 면목 없는 죄인으로 드러날 때에도 내 자신의 불가능함을 인정하며 주님께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광야는 나의 의와 능력을 증명하는 곳이 아니라 철저하게 나의 불가능함이 십자가 앞에 드러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혜만이 우리의 불가능함을 덮어주시는 유일한 구원의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 안에서 구원을 이루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