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원 - 십자가를 내가 지고 - 6. 수련과 계몽 전도
1 40일 수련회에 참석했다. 제1차 40일 수련생들은 전국에서 모여진 전도사들이 중심이었지만 제2차 40일 수련회는 젊은 남녀 대학생들이 중심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신발에 먼지라도 묻을까 조심하며 걷는 깔끔한 여대생들을 교육하시어 시골로 계몽 전도를 내보내실 계획이 있으셨던 것이다.
2 새벽 5시에 기상하여 수영복 차림으로 갯벌에 나가서 고기잡이를 시작하면 날이 어두워야 돌아왔다. 거기다 맨발로 20~30리되는 고잔 일리까지 걸어가서 물이 빠진 갯벌에 그물을 치면 눈만 반짝거릴 뿐 온몸은 검은 진흙으로 범벅이 되어 말이 아니었다.
3 그리고 그물을 칠 때, 고기를 잡을 때 손과 손을 붙잡았던 것을 놓으면 큰 사고가 나기 때문에 미끄러워도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잡은 고기는 가마니에 넣거나 큰 그릇에 담아 가지고 수영복 차림으로 혹은 남자 잠옷 바지 차림을 해가지고 머리에 이고 걸어오거나 기차를 탔으니, 우리는 좋아서 그랬지만 남들이 그 모양들을 보고 우리를 어떻게 보았겠는가. 그때는 완전히 참아버지에 취하여 산 생활이었다고 생각이 든다.
4 15년간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던 연못이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메기, 가물치, 뱀장어들이 많이 잡혔다. 또 그곳 연못에는 가시가 돋친 개연이 무성하였는데 무섭다고 안 들어가면 선생님께서 무섭게 몰아치시므로 막 뛰어들어가야 했다. 또 그렇게 들어가야 개연이 몸에 감기지 않지 천천히 들어가면 줄기가 몸을 감아 온통 피투성이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많은 생선들을 드럼통에 넣어 소금으로 절이고 한편으로는 서울 본부교회로 실어 날랐다.
5 그 당시 수련회에는 남자 한 반, 여자 두 반으로 편성되었고 원리 강의 담당은 안창성씨, 훈련부장은 한인수씨가 맡아서 하였다. 또 원리 강의 연습, 시험 등으로 진리를 무장케 하시며 도로 작업, 우물 근처 정리 등 다방면으로 훈련을 시키시며 농촌에 나가면 마루의 닭의 똥도 치울 줄 알아야 하고 농촌 사람과 친하려면 코 줄줄 흘리는 아기들의 코도 닦아줄 수 있어야 하고 밥도 얻어먹을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시었다.
6 이상이 높은 여대생들에게 현실을 직시할 줄 아는 눈을 뜨게 하신 수련회가 야목교회(경기도 화성군 야목면)에서 실시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훈련을 시키신 다음 1960년 하기 40일 전도를 기점으로 전국적인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7 1960년 7월 20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하기 40일 계몽 전도를 청평으로 향했다. 엄순태 식구님과 마장동에서 버스를 타고 청평에 도착하여 짐을 막 내리고 있는데 어느 군인 장교가 자기를 모르겠느냐고 하며 앞에 다가서는 것이었다. 쳐다보니 고등학교 동기 동창인 친한 친구의 오빠 되는 분이었다. 알겠다고 말하니까 자기의 짚차에 우리의 짐을 싣는 것이었다. 아마도 내가 수영하러 온 줄로 착각하지나 않았는지 모른다.
8 우리를 자기 숙소에 싣고 가서 정중하게 점심 대접을 하며 어떻게 이곳에 왔느냐고 물었다. 계몽 전도를 나왔다고 하니 그러면 방이 필요하겠다고 말하며 하사관을 시켜 우체국 앞 여관집의 큰 방을 얻어 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바로 짐을 옮기고 밀가루로 풀을 쑤어서 가지고 간 40일 계몽 전도 벽보를 눈에 잘 띄는 곳곳에 붙였다.
9 그 이튿날 난데없는 군인이 한 명 뛰어들어 오면서 “이곳에 통일교회 계몽 전도 대원이 사십니까, 나는 보급 하사관인데 통일교회 식구입니다. 반갑습니다”라고 말하며 쌀, 깨, 소금, 파, 된장, 간장, 고추장, 생선, 심지어는 두부까지 갖다주었다.
10 이 모두가 하나님의 크나큰 은사라고 생각되어 감격하였다. 이러한 일들을 미리 아신 선생님께서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딸에게는 모든 것을 준비하여 놓고 기다리신다, 염려 말고 나가라’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11 나는 지금도 그렇게 먹을 것을 수시로 갖다 준 그 군인 식구를 잊을 수 없으며, 지금도 나는 그 식구를 만나 옛날이야기를 하고 싶다.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척 궁금하다.
12 선생님께서 꽁보리밥을 먹으며 전도 생활을 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꽁보리밥만을 먹어오다가 8월 15일 엄순태 식구님의 장남이 군대에서 잠깐 휴가를 온다고 연락이 와서 상경하신 후 혼자서 꽁보리밥을 짓다 솥뚜껑을 여는 순간 그 냄새가 코를 찌르더니 그만 꽁보리밥에 체해서 위경련이 일어나 사경을 헤맸었다.
13 그때부터 더 이상 꽁보리밥을 먹을 수 없는 사정에 놓이게 되었다. 나는 그 당시 대학을 졸업하고 경희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논문을 쓰던 중이므로 일시 상경하여 그 사정을 선생님께 보고드렸더니 할 수 없으니 보리와 쌀을 넣어서 먹으라고 허락하여 주심으로써 몸을 지탱할 수 있게 되었다.
14 이 기간에 선생님께서는 전국을 순회하고 계셨다. 우리들은 춘천에 가서 선생님을 뵙고 전도 상황을 보고드렸다. 선생님의 인자하신 모습 정말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보다 더 그립고 뵙고 싶은 마음을 그곳에 가서 풀었다.
15 다시 보따리를 싸 가지고 전북 김제군 백사면으로 동계 40일 계몽 전도를 나갔다. 눈이 펄펄 내리는 날 농촌의 아가씨 아주머니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가족계획 운동도 전개하였다. 그리고 경찰서장의 도움으로 백 명 정도 되는 경찰관들에게 원리 강의를 하였다. 그 서장이 새로운 진리 말씀인 원리가 아니면 우리가 살 수 없다는 것을 빨리 깨달았던 것이다.
16 제일 친한 박영숙 친구와 김제읍 식구네 집 방 하나를 얻어 살면서 전도를 하였다. 나로서는 이때 장래에 대하여 가장 고민하던 때였을 것이다. 집안 형편으로는 고등학교 교사로 취직을 하여야 할 텐데 선생님께서는 사회 직장을 허락하시지 않으니 대학원에 진학은 하였지만 논문만 쓰고 있을 수도 없었고 전도를 하기는 하지만 실적이 별로 없으니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17 그때는 여자 청년들이 앞장서서 열심히 전도하였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대단한 열풍이 불었다. 지성인보다는 영적인 사람들에게 더욱 역사하시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게 하였다.
18 이때부터 흙벽돌을 찍어 교회를 짓는 붐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우리 교회에서는 문맹 퇴치운동을 하며 한편으로는 전도를 하여 하나님의 아들딸을 찾아 세우게 되었다.
19 서울에서 50년대에는 대학생, 교수, 국회의원 등 여러 형태의 지성인들이 많이 교회에 들어왔었으나 시련과 핍박의 바람이 불자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도 생겼다. 60년대에 들어와서는 전국적인 전도와 교회 부흥의 길로 하나님의 섭리 역사가 발전되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아주
초창기때 선배가정분들은
그토록 고생하시면서
뜻을위해 삶을살아오셨는데
우리시대는 어려움을
극복하지못하고 후해하며
원망하며 살아온 자신을
용서하시고 위하여 사는
자신이돼서뜻을 위해살아보려 하니 육신에
노하로 활동못할때면
나자신을원망하며 후해도
해봅니다.그래도 하늘은
버리지아니하시고 지그이라도늦지않아열심히
살주기를 바라시는참부모님
감사드립니다.아주.
오타 죄송합니다.
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