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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4일 주일 설교
시리즈 제목: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들 12
설교 제목: 십자가의 비밀 5
– 어린 양의 노래 - 종려주일
(원래 설교 제목: 호산나, 찬송을 받으소서!)
요한복음 12:12~16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요한복음 12:13
설교를 위한 묵상:
종려주일, 예수님을 왕으로 환영하는 인파들 속에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기쁨의 미소였을까, 아니면 결연(決然)한 표정이었을까? 예수님의 왕권 통치는 언제부터 시작되며 어떻게 실현될까? 예수님의 권세는 이 세상의 권세와 어떤 점에서 유사하며 어떤 점에서 다를까?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하늘의 통치자들에게까지 알게 하신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존재인데, 그것을 어떻게 삶으로 나타낼 수 있을까?
나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톰 라이트의 책, ‘How God Became King?’을 다시 읽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에게 오시는 하나님의 표상이시며, 그리고 고난을 통해서 영광으로 들어가는 참 이스라엘의 표상이시다. 예수님이 왕으로 등극하시는 방식은 고난을 통한 영광이다. 그것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교회의 길이기도 하다.
설교 개요:
1. 호산나, 찬송을 받으소서?
2.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3. 하나님의 위임통치
4.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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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산나, 찬송을 받으소서?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신다는 말을 듣고 예루살렘 사람들이 나와서 환영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자기 겉옷을 벗어 땅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들고 와서 흔들면서 환영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외쳤다고 요한복음에서는 소개합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요 12:13).
지금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환영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환영하는 이유는 그 왕이 자기 백성을 구원해 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외치는 소리를 한 마디로 말하면 “호산나!”입니다. 이 말은 시편 118편 25절에서 온 것입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시편 118:25
여기서 ‘이제 구원하소서!’를 히브리어로 ‘호시아 나!’(הוֹשִׁיעָה־נָּא)라고 합니다. 그것을 헬라어로 호산나(ὡσαννά)라고 옮겼습니다. 시편 118편은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로 시작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는지를 노래하는 찬양시입니다. 그런데 그 찬양의 절정에서 기도문으로 바뀝니다. 그 기도가 바로 호산나 기도입니다. 과거에 우리 조상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이제 우리를 구원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 호산나를 외치던 백성들의 마음이 바로 이런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억눌려 살았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정하신 곳 예루살렘은 로마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그 백성들이 구원자를 기다리는 것은 정말 절실한 소원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종려주일에 저는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맞이했다는 점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당신은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라고 외치며 환영했습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환영을 받으셨지만 잠시 후에는 체포되어 죄인으로 십자가형을 받으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팻말이 달렸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노래합니다. 성탄절에 ‘이스라엘 왕이 나셨네’라고 찬양합니다. 제가 오래 전에 부른 성가대 찬양 중에는 ‘왕이 오신다!’라는 곡이 있습니다. 교회에는 예수님을 왕으로 찬양하는 곡이 많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을 왕으로 높이고 찬양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진정한 왕이십니까?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당시에 갈릴리 지역에는 헤롯왕이 있었습니다. 유대 지역의 통치자는 빌라도입니다. 빌라도는 로마 황제가 보낸 총독입니다. 총독도 그 지역에서는 왕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렇게 이 땅에 왕이 있는데 왜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이라고 부르며, 예수님은 어떤 점에서 왕이실까요? 그리고 왕이신 예수님의 통치는 어떻게 실행될까요? 오늘은 이런 주제를 생각해 보기에 적절한 절기입니다.
2.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어떤 사람을 왕이라고 부를 때 그에게는 권세가 있다는 뜻입니다. 한 나라에서 가장 큰 권세를 가진 존재가 왕입니다. 권세가 무엇입니까? 권세는 이 세상의 질서를 위해서 하나님이 부여하신 힘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셨다고 했습니다(로마서 13:1). 가정의 질서를 위해서 부모의 권세가 있습니다. 어떤 단체이든지 그 단체가 유지되고 질서 있게 운영되기 위해서는 권세를 가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을 가리켜 대표라고 부르거나 회장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나라의 권세자를 대통령이나 수상이라고 부르며 옛날에는 왕이나 황제라고 불렀습니다.
권세가 바르게 세워지지 않으면 그 사회는 무질서하게 됩니다. 무정부상태(anarchy)라는 말은 지도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 말은 권세가 바르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회는 해적이 들끓거나 약자가 가장 크게 피해를 입습니다. 사실 독재도 나쁘지만 무정부상태는 가장 나쁜 결과를 낳습니다. 이 세상의 보존을 위하여 질서가 필요한데 그 질서를 위해서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권세를 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권세나 왕의 권세, 대통령의 권세나 상관의 권세 등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요새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습니다. 국회의원이 되면 많은 권세가 주어집니다. 그런데 그 권세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회가 평안하고 번영하든지 아니면 혼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권세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라면 어떤 권세를 받은 사람이든지 결국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우리의 헌법에는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국민에게 무슨 큰 힘이 있어서 이 모든 권력을 부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권력이나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우리나라 헌법이 말하는 것은 법이 정한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선출하는 방식이 국민의 투표에 의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전에 왕정시대에는 권력이 세습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에 민주주의가 보편화된 것은 인류 전체 역사에서 보면 매우 최근의 일입니다. 인류는 다양한 방식으로 지도자를 선출하고 질서를 유지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러므로 국민투표로 선출된 국민의 대표에게 권력이 주어지는 것은 정당합니다. 그러나 그를 선출한 것은 국민이지만 그런 권력을 정하신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국민의 선거로 한번은 이 사람이 선출되고 한번은 저 사람이 선출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하나님이 선택했다고 하기보다는 국민이 선택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은 국민의 선택을 받아 그 자리에 임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권력이나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거로 뽑힌 국민의 지도자들은 국민을 위해서 봉사하되 하나님이 주신 양심을 따라 그 직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 권세를 정하신 것임을 잊어버린다면 정치권에는 국민을 위한다는 이름으로 국민을 속이는 모략이 성행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를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선거를 통해서 지도자를 선출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나 더 좋아하는 정당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일은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선출된 사람은 우리를 대표하여 그 권세를 행사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당이나 야당이나 그 어떤 사람이 선출되든지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정하신 권세가 주어집니다. 물론 우리는 법률에 따라 각 지도자의 권한을 정합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임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거를 앞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꾼이 선출되기를 위해서 기도할 뿐 아니라 더 중요한 기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선출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권세를 바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축구시합을 할 때 예를 들면, 태국과 우리나라가 국가대표 축구시합을 했습니다. 우리나라가 만약에 태국에게 1:0으로 졌다고 합시다. 결과는 그 반대였지만, 어쨌든 그렇다고 합시다. 그때부터 우리는 태국을 저주하고 태국의 선수들이 잘못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안타깝지만 우리 선수들이 다음에 더 잘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정치의 영역에서는 모든 권세를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때때로 잊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지하지 않는 정당이나 사람이 당선되면 우리는 큰 실의에 빠져 나라가 금방 망할 것처럼 걱정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우리의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권세를 정하신 분임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잘났든 못났든 부모의 권세는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그 사람을 하나님이 뽑으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정당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질서를 위해 하나님이 그런 권세를 정하셨다는 뜻입니다.
3. 하나님의 위임통치
모든 권세를 하나님이 정하셨다는 말의 의미를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 만물을 다스리십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방법은 위임통치입니다. 즉, 자기 형상과 모양을 입은 사람을 통하여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시편 8편을 보면, 인간은 하나님보다 조금 낮게 지음을 받아 영화와 존귀로 관을 쓰고 세상 만물을 다스리는 소명을 맡았습니다.
성경이 들려주는 하나님의 통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을 통한 위임통치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부르시고 자신을 계시하시며 그를 통하여 온 세상에 하나님을 나타내십니다. 신학자 톰 라이트는 하나님의 그런 특징을 표현하는 말을 만들었습니다(The Dianthropic God). 그런 목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가 아브라함이며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온 세상을 치료하시고 충만하게 하시려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들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그것이 성막이며 율법입니다.
아담 부부를 통하여 세상 만물이 이름을 받게 되는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세상 만국이 복을 받게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며 통치 방식입니다. 그런 일에 대하여 성경에서 예언자들이 시온을 향하여 말하기를,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고 했으며, “열방이 네 빛으로 나아올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이사야 60장).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향하여 그들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말하기를,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에게까지 알게 하신다고 했습니다(에베소서 3:10).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실행하실 비밀의 경륜이라고 바울은 힘주어 말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 건짐을 받아 저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라고 부름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대리인들은 이 소명에서 쉽게 벗어나고 말았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에덴동산은 아담에게는 이 세상 만물을 다스리는 역할을 수행할 지휘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을 배반하고 약속의 땅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약속의 땅은 사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세상 만국을 선도하고 다스릴 통치의 지휘부였습니다.
시편 2편을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나 세상 모든 나라를 유업으로 물려받아 다스리라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결국 메시아를 통하여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되는 세상에서 만국 백성이 거룩한 제사장들처럼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습을 환상 가운데 바라보았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요한계시록 7:9~10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교회를 통하여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에게까지 하나님의 각종 지혜가 알려지게 된다고 했는데,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것이 그림으로 그려집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그 일이 완성되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찬양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며 교회의 소망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이라고 했습니다.
4.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노래를 가르친 사람들이 누구이겠습니까? 그들은 먼저 어린 양의 노래를 배운 사람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그런 특별한 무리에 대하여 이렇게 소개합니다: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요한계시록 15:2~3
하나님의 승리를 찬양하는 노래가 왜 사자의 노래가 아니고 어린 양의 노래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승리와 통치가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환영을 받으신 예수님의 얼굴은 어떤 표정이었을까요? 마냥 즐거운 얼굴이었을까요? 아니면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표정이었을까요? 주님은 이 환호가 머지않아 십자가에 매달라는 아우성으로 바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주님은 곧 체포되어 수치를 당하시고 고문을 받으시며 재판에서 유죄선고를 받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실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영광을 얻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나무에 달려 높이 들리면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로 나아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던 바로 그 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23~24
이것은 주님이 영광을 얻으시는 방법이며 주님이 왕으로 등극하시는 방법입니다. 그것은 어린 양의 노래를 배우고 부르는 사람들의 길이기도 합니다. 나중에 부활하신 후에 주님은 엠마오 마을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에게 그리스도께서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일깨워 주셨습니다(누가복음 24:26).
자기를 한 알의 밀알로 드려 많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얻는 길이었습니다. 그것이 어린 양의 길이며 그것을 노래하는 것이 어린 양의 노래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통치를 위임받은 대리인의 길입니다. 단지 헛된 영화를 구하고 단지 일신의 영달을 구하던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영하다가 즉시 손가락질을 하면서 저주했습니다. 그런데 어린 양의 노래를 배운 사람들은 짐승과 그 이름의 수를 이겼습니다. 짐승의 이름을 말하는 그 666의 비밀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거짓 가르침이며 많은 사람들을 해롭게 하는 통치술이었습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사람을 찾는 대목이 나옵니다. 누가 나를 위하여 갈꼬? 모든 육체가 헛된 일을 꾸미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히 서리라는 것을 전할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음성을 기도하는 이사야는 들었습니다(이사야 6:8).
예레미야 5장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1절).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한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도 하나님이 우리나라에서 이런 사람을 찾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 승리하셨고 어린 양의 길이 승리의 길이며, 장차 모든 만물과 만국이 일어나 어린 양의 노래를 배우고 그 노래를 부를 것을 확신하는 그런 사람들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짐승에게 절하고 그 이름의 수를 배워서 그 넓은 길로 걸어가는 지금 누가 그들과 싸워 이기고 진정한 호산나 찬양을 부를 수 있습니까? 오늘 하나님이 그 한 사람을 찾고 계시지 않을까 하고 저는 생각해 봅니다.
교회가 장차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나타내 보여줄 뿐 아니라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에게까지 나타낼 것이며, 교회가 배우고 부르는 어린 양의 노래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새로운 K-Pop이 되어 새로운 한류를 이룰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교회가 배우고 간직하고 있는 어린 양의 노래야말로 길을 잃은 한국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통일 등에 새로운 길을 제시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찾고 계시지 않을까요?
저는 상왕십리의 작은 교회에서 이런 설교를 하는 것이 마치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처럼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입에서 나오자마자 흩어져 없어질 것 같은 연약한 소리라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여러분처럼 나이든 분들 앞에서 이런 말씀을 전하는 것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은 옷처럼 어색한 생각마저 듭니다. 그러나 온 세상이 일어나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호산나를 외칠지라도 그들의 외침과 환호가 곧 저주로 바뀌어 버릴 그런 종류의 소리라면 차라리 저는 돌처럼 잠잠하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절망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그 밤에 빌립보 지하감옥에서 찬송을 부르던 바울과 실라처럼 새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그 노랫소리야말로 작지만 기적을 일으킬 노래이며, 장차 온 세상이 따라 부를 노래의 선창이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호산나 찬양을 불러야 하겠습니까? 쉽게 끝나버릴 노래를 부르지 말고 장차 많은 사람이 따라 부를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부릅시다. 지금은 혼자라고 생각되더라도 옳은 길을 걸을 때 부르는 노래, 그 노래가 바로 어린 양의 노래이며, 장차 모든 사람이 따라 부를 그 노래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노래를 부르고 계십니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