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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3
출애굽기 33장 19절, 34장 6절 [2장 1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장 1항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고백할 때 지난 시간에 살폈던 것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불변하며 가장 의로우신 뜻의 의논을 따라 모든 것들을 역사하십니다. 속성에 대한 고백이기 때문에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불변하며 가장 의로우신 뜻’에 있는데, 그분의 의지에 따라 모든 것들을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제3장에 가서는 작정의 내용으로 고백이 되고, 또 제5장에 가서는 작정의 실행으로서 섭리의 내용으로 고백이 됩니다. 특히 작정이라는 내용 안에서 보겠지만 하나님은 인격적 피조물과 관련해 두 부류로 나누어 두셨습니다. 선택과 유기가 그것입니다. 선택과 유기를 가장 잘 표현한 것 중 하나가 로마서 9장 13절인데, 에서와 야곱에 대한 표현입니다.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속성을 다루면서 왜 선택과 유기를 말하는가 하면 오늘 우리가 살피려고 하는 나머지 속성이 어떤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일단 오늘 살필 내용을 먼저 나열하자면 이것입니다. “가장 큰 사랑을 베푸시며, [가장] 은혜로우시며, [가장] 자비로우시며, [가장] 오래 참으시며, 선하심과 진실하심에 있어서 풍성하시며, 악행과 범죄와 죄악을 용서하시며, 그를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분이며, 동시에 그의 심판에 있어서 가장 공정하시고, [가장] 두려우며, 모든 죄를 미워하시며, 그는 결코 죄책을 사하지 않으실 분이시다.” 하나하나 살펴보겠지만 가장 큰 사랑을 베푸시고 가장 은혜로우시다가 할 때 그 대상이 모든 사람인가? 엄밀하게 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이라고 할 때 택자만이 아니라 유기자도 일반은총이라는 면에서는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사랑,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로우시다고 할 때 모든 사람이 그 은혜의 대상으로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조금 전에 언급한 로마서 9장 13절은 야곱은 사랑하시지만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내용으로 소개가 됩니다.
이제 하나하나를 살피겠는데, 우선 오늘 본문인 출애굽기 33장 19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18절에서 모세가 요청하기를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한 말에 대한 응답입니다. 이때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에 지나가게 한다는 것은 출애굽기 34장 6절의 내용으로 알리십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이것은 택자를 향한 주의 속성을 나열하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선한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큰 사랑을 베푸시며, 가장 은혜로우시며, 가장 자비로우시며, 가장 오래 참으시며, 선하심과 진실하심에 있어서 풍성하시며, 악행과 범죄와 죄악을 용서하시며, 그를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시라고 할 때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한 것들입니다. 그럼 이후에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선한 것이 아닌가? 즉 동시에 그의 심판에 있어서 가장 공정하시고, 가장 두려우며, 모든 죄를 미워하시며, 그는 결코 죄책을 사하지 않으실 분이라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선한 것이라고 할 수 없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할 때(막10:19, 눅18:19)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이 선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대상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뿐입니다.
신앙고백서는 먼저 하나님은 가장 큰 사랑을 베푸신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신데(요일4:8,16), 그 사랑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베푸시는가? 창조의 역사를 통해 살피겠지만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6일 동안 만드시되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시는 상태로 만드셨습니다. 그런 피조물을 만드셨다는 것은 그것을 사랑하실 목적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사람을 으뜸으로 만드셨습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사람을 가장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창조된 사람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미움을 받아 마땅한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그럼 미움을 받아 마땅하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을 완전히 거두시는가? 적어도 이 땅에서 피조물에 대한 사랑을 완전히 거두신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앞서도 말했지만 일반은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5:44-45)
그러나 선인과 악인,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의 구분이 있듯이 선인과 의로운 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더욱 크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때 선인, 의로운 자는 성경 전체를 통해 택자로 이해할 수 있는데,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자에게 내려주신다는 내용은 일반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택자에게 내려주시는 특별한 사랑이 있는데, 그것이 구원입니다. 이러한 구원에 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는데,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을 사랑했다, 그래서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고 할 때 많은 사람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 그러나 믿는 자가 영생을 받는다는 식으로 말하길 좋아하지만, 결코 모든 사람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셔서 그들을 구원하기로 하신다면 그렇게 결과 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그런 뜻을 가지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또한 믿는 자가 영생이라고 할 때 성경은 누가 믿을 수 있는가? 사도행전 13장 48절에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말씀합니다. 즉 해와 비와 같은 것은 모든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다면, 구원과 영생은 오직 택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서는 이렇게 증거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심지어 로마서 8장 32절에서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는 말씀도 하십니다. 하나님 사랑의 가장 큰 증거가 무엇인가? 자신의 아들까지 우리를 위해 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를 내주신 이상 다른 것 아까울 것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큰 사랑을 베푸신다고 할 때 이런 성격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 하나님은 가장 은혜로우시다고 고백하는데, 은혜라는 말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값없이 베푸시는 호의입니다. 그래서 R. C. 스프로울 교수는 은혜를 ‘공로 없는 호의’라고 정의하기도 합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선택과 유기가 영원 전 하나님 안에서의 작정이라면 작정하신 바가 실행되는 과정에서는 아담의 타락이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아담 이후 모든 인류는 태어날 때부터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가 아니라, 죄인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죄인 입장에서 볼 때 값없는 호의를 베푸시는데, 죄인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 6절과 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러니까 은혜란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거저 주시는가? 죄 사함을 거저 주십니다. 후반부에 살피겠지만 죄 사함을 거저 주신다고 할 때 하나님의 공의에 위배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공의를 시행하시면서 하나님은 택자를 향하여 사랑과 은혜를 베푸십니다. 에베소서 2장 7절과 8절에서는 이렇게도 말씀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은혜의 또 다른 표현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물이라는 말은 거저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노력으로 받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사람이 받을만한 공로가 있어서 받는 게 아니라, 받을만하지 못하지만 받는 것,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럼 이런 은혜는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가? 모든 사람인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할 때 분명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랑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사랑을 베푸신다고 할 때 그 사랑의 대상은 결코 모든 자가 아닙니다. 오직 택자만을 향해서 가장 큰 사랑을 베푸십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과 영생이라고 할 때 본래는 구원과 영생의 자격이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과 영생과 관련된 모든 것을 주시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디도서 3장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좀 더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어떤 이들을 선택하셔서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도록 할 목적을 가지셨는데(엡1:5),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때가 되어 효력 있는 부르심으로 부르십니다. 믿음을 주셔서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계속해서 거룩하게 하시며 끝까지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견인의 은총을 베풀어 마침내 영화의 자리에 이르도록 섭리하시는데, 이 모든 것이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가장 자비로우시다고 고백하는데, 번역에 따라서는 긍휼하시다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사랑, 은혜, 자비가 사실은 거의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은혜와 자비를 구분할 때 김병훈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http://repress.kr/19671/). 하나님의 은혜는 죄에 대한 책임으로 인하여 형벌을 받아야 하는 죄인에게 용서를 베푸실 때에 나타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자비(긍휼)는 죄로 인하여 비참한 상태에 빠진 죄인을 향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선하심이다. 정요석 교수도 동일하게 구분합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진 사람들을 값없이 용서하여 주시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자비(긍휼)은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비참함에 빠져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그들의 공적에 대한 고려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즉 은혜는 죄책에 대한 용서와 관련 있다는 것이고, 자비(긍휼)는 비참함에서 건시는 것과 관련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사랑이든 은혜든 자비든 모든 사람에 동등하게 베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난 시간 살핀 것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불변하며 가장 의로우신 뜻의 의논을 따라 모든 것들을 역사하시는데, 거기에 두 대상을 두셨기 때문입니다. 한 부류는 선택이고, 다른 한 부류는 유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속성으로서 가장 큰 사랑을 베푸시고, 가장 은혜로우시며, 가장 자비로우신다고 할 때 그것을 나타내시는 대상은 누군가? 오직 택자입니다.
이어 고백하는 오래 참으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십니다. 누구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는가? 택자에 대하여 오래 참으십니다. 물론 유기자에 대해서도 오래 참으십니다. 로마서 9장 22절과 23절에 보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유기자와 관련해서 표현되어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그러나 오래 참으신다는 것은 죄와 관련되어 있는 이상 유기자만이 아니라 택자와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택자라 할지라도, 때가 되어 유효적 소명을 받고 참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라 할지라도,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할지라도 그들 안에는 여전히 부패성과 그것으로 말미암은 죄가 살아 있는 동안 항상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죄에 대하여 오래 참으십니다. 그리고 이때 오래 참는다는 것은 앞에서 고백한 사랑, 은혜, 자비와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그러나 유기자에 대하여 오래 참으신다는 것은 사랑, 은혜, 자비와 연결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랑하신다고 할 수 있는 면이 있지만 방금 언급한 로마서 9장이 잘 말해 주고 있는 것처럼 그들에 대한 오래 참음은 결국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실 목적으로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악인에 대하여 속히 진노하시지 않는 것에 대하여 답답해합니다. 그러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실 목적으로 오래 참으시는 것이지, 진노 자체가 없지 않습니다. 반면 택자를 향한 오래 참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리고자 하는 것인데, 그 영광은 결국 택자를 완성에 이르게 하는 거기에 있습니다. 즉 택자든 유기자든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데, 택자는 모든 죄 문제를 해결 받아 영광에 이르는 것으로 나아가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고, 유기자는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진노를 받는 것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유기자는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신다고 할 때 결국 돌이키지 않는 자입니다. 오래 참으시면서 때로는 돌이키도록 하시는 뜻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그들은 돌이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택자는 돌이키지 않을 때도 있지만 결국 돌이키게 만드십니다. 돌이키지 않을 때는 참고 또 참으시기도 하시지만 때로는 징계하셔서 돌이키게 만들기도 하십니다. 때문에 오래 참으심이라는 이러한 속성 때문에 돌이켜야 할 때 돌이키지 않는다면 적어도 택자에게는 징계라는 벌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오래 참으신다는 것에 이어 선하심과 진실하심에 있어서 풍성하시다고 고백하는데, 서두에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할 때 하나님은 절대적인 선으로 계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무엇을 뜻하시고 행하신다고 할 때 선이 아닌 것이 있는가? 없습니다. 여러분, 창조를 보십시오. 거기에 선이 아닌 것이 있습니까?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시는데, 거기에 선이 아닌 것이 있다고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의 불순종으로 죄가 들어왔다고 할 때 하나님은 그것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으로 계십니다(롬8:28).
물론 선하신 하나님은 피조물이 누리는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이 되십니다. 정요석 교수의 책 내용을 옮기자면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으로서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시며(시36:9),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주시고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며, 모든 넘어지는 자를 붙드시고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십니다(시145:14-16). 굶주린 사자와 우는 까마귀 새끼가 먹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먹이를 마련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욥38:41, 시104:9, 마6:26). 만나를 주시고, 앞서 말한 것처럼 해와 비를 악인과 선인 모두에게 주시고(마5:45), 그 비가 밭에 보내져 곡물을 자라게 하시고,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애곡하는 자를 일으키십니다(욥5:10-11). 하나님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늘의 비와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통해 음식과 기쁨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만족하게 하셨는데(행14:17), 불신자들은 이것들이 자신이나 자연의 힘으로된 줄로 알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리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즉 하나님은 언제나 선을 베푸시지만 그 선에 대하여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리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 그러나 택자는, 참된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고 감사하며 그에게 모든 선을 돌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심에 있어서 풍성할 뿐만 아니라 진실하심에 있어서도 풍성한데, 얼마나 진실하신지 그분은 진리 자체이십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거짓이 없습니다. 진실하신 하나님은 그분의 모든 일하심에 있어서도 진실함으로 가득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시는 내용에 있어 진실하신데, 사람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마지막 때 다음의 사실은 반드시 드러날 것입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20) 뿐만 아니라 다음의 말씀도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3-24) 성경에 기록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하다는 것이 결국 마지막 때는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이시기에 성경은 하나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213:19)
계속해서 신앙고백서는 악행과 범죄와 죄악을 용서하신다고 고백합니다. 이미 은혜라는 표현에서 살펴보았지만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 가운데 은혜를 베푸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고자 하신 뜻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용서는 모두가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의 특별한 대상,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특별한 대상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악행과 범죄와 죄악을 용서하신다는 고백을 할 때 신앙고백서는 출애굽기 34장 6절과 7절을 인용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인자를 천대까지 베푸시지만, 그래서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시지만, 모든 자에게 이런 은혜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신앙고백서 2장 1항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하게 되는데,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와 자비를 나타내기도 하시지만 공의를 버리시면서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신데, 히브리서 11장 6절의 말씀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누가 상을 받을 수 있는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자, 그리고 그를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는 자입니다. 참된 믿음은 상까지 보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상의 성격은 믿음이 선물인 이상 상도 선물로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되는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상이라는 개념을 공로로 말미암은 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신학적 회심이라고 할 만한 이 한 구절이 성경 전체를 통해 가르치는 바라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7절입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누구도 예외 없이 사람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행할 뿐입니다. 받았기 때문에 주신 분을 자랑해야지 받은 자신을 자랑하는 것은 오늘날 표현대로 선을 넘는 겁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나오는 말씀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17:7-10) 그러므로 개혁자들이 말한 것처럼 이 상은 공로에 대한 상이 아니라, 은혜에 대한 상일뿐입니다.
신앙고백서는 동시에 그의 심판에 있어서 가장 공정하시고, 가장 두려우며, 모든 죄를 미워하시며, 그는 결코 죄책을 사하지 않으실 분이시다고 고백합니다. 일단 이 내용은 지금까지 말한 내용과 상충되는 내용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장 큰 사랑을 베푸십니다. 또한 가장 은혜로우십니다. 가장 자비하시고, 가장 오래 참으시며, 선하심과 진실하심에 있어서 풍성하십니다. 그래서 악행과 범죄와 죄악을 용서하시며, 오히려 그를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의 심판에 있어서 가장 공정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와 자비를 베푸심과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으로서 공정하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심판하십니다. 죄에 대하여 용서하신다고 했는데, 죄에 대하여 심판하신다는 것은 상충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택자를 향한 죄에 대한 용서는 죄에 대한 심판 없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자비와 같은 속성은 우리 편에서 볼 때 값없이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값을 치르십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짊어지시고, 대신하여 죽음으로 갚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대속적 죽음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해 자신의 공의로우심도 이루신다는 겁니다. 다만 이것을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행하시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직 택자에게만 행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의 대상은 공의 없이 나타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 아닌 자는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공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에 있어서는 가장 공정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를 율법으로 나타내셨고, 그 율법을 범할 뿐만 아니라 그 법을 순종함에 있어서 어떤 결핍에 대해서도 죄로 여겨 벌하십니다. 죄인은 바로 이런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도 하나님 앞에서는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여전히 죄의 잔재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은혜 가운데 있다는 것이 다릅니다.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신다는 것입니다.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심판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죄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는 일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결되지 않는 이상 반드시 죄에 대하여 심판하시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신앙고백서는 그는 결코 죄책을 사하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신자의 경우 우리의 죄책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시켜 그가 대신하여 형벌 받으심으로 사함을 받게 되는데,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전가 받아 죽으셨고 우리에게 의를 전가시켜주기 위해 다시금 살아나셨습니다. 이 의를 믿음으로 받게 되는데, 여기에 하나님의 공의와 함께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단지 사랑만 있는 게 아니라, 공의와 함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죄에 대한 심판의 결과인 것이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나타납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속성에는 어떤 부분에 있어서도 왜곡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