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학교 교육제도는 1910년 한일합방 이래 일본 정부가 한국 땅에 도입시킨 학제였다. 이 제도는 국제적 선진국가에서 도입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목적이 문제였다. 일본은 이 교육을 통해 한국인들을 일본의 황국민화(皇國民化)하기 위해 일본 문화와 정신을 심어주고자 했던 것이다.
일제는 면(面) 단위로 공립보통학교를 세웠다. 학생선발 시험에는 머리를 삭발하고 입학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처음에는 유교적 전통 때문에 완강하게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학교교육을 받지 않고는 사회에 진출하지 못하고 출세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게 되었다. 보통학교를 졸업하면 모든 공무원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을 부여했던 때도 있었다. 나중에 보통학교는 소학교(小學校)로 이름이 바뀌었다.
소학교 시기는 감수성이 예민했던 나의 성장과정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시절이었다. 우리 면에 소학교가 세워진 때는 1930년이었다. 내가 소학교에 들어간 해는 1938년(11세)이었다. 당시는 많은 사람들이 출생신고를 보통 생후 3년이 지난 뒤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만큼 각종 돌림병이 많았다. 특히 홍역(紅疫)을 앓다가 죽는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때 아이들은 무슨 병이 그리 잘 걸렸는지, 유행하는 질병은 빼놓지 않고 다 치렀고, 머리에는 대부분 도장병까지 얻어 보기도 역겨운 모습을 하고 다니기가 일쑤였다. 나 역시 3년이나 뒤에 출생신고를 한 관계로, 소학교를 늦게 들어간 편이었다. 그래서 인지 소학교 학생들은 대체로 조숙했다. 5, 6학년에 결혼하는 학생도 있을 정도였다.
시골 면 단위에 살고 있는 아이들이 소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하늘에서 별따기처럼 어려웠다. 입학생 수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대개 1개면에 하나의 소학교가 있을 뿐이었고, 입학정원도 80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래서 각 리(里)마다 입학생수를 배당했다. 양화면에는 모두 12개의 리가 있었는데, 우리 마을 원당리는 7명을 배당받았다. 그 해, 나와 함께 입학한 학생은 양선만(梁善萬), 박종면(朴鐘冕), 이제천(李濟天), 김준배(金俊培), 임필례(林必禮), 이중희(李重嬉)였다. 입학통지를 받는 학생들은 그야말로 행운아들이었다. 어떤 학생들은 면접에서 탈락하기도 했다. 또 졸업을 하면 중학교 진학을 위해 강경이나 군산 또는 공주 등지로 나가야 했다. 그 때는 작은 군(郡)에 중학교 하나 제대로 없던 시절이었다.
내가 들어간 학교는 양화공립소학교(良化公立小學校)로 교장은 일본 사람이었고, 일본인 교사도 몇 명 있었다. 당시 소학교에서는 일본말을 사용해야 했다. 일제가 일본말 사용을 강제로 실시한 것은 1937년이었다. 그 이듬해 조선교육령을 개정 공포하여 교명(校名)을 일인학교(日人學校)와 동일하게 바꾸고, 중등학교에서는 조선어과를 폐지했다. 내가 3학년 때부터 「국어독본」이란 한국 책이 사라지고 일본어가 국어과목으로 바뀌었다. 역사나 지리도 일본교재로 사용했다. 그런 때인지라 우리는 학교에서 한국말을 쓰다가 발각되면 벌칙을 받았다. 나라를 잃은 슬픔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껴야 했던 비애였다. 일제는 철저하게 한국 어린이들의 혼을 바꾸어놓으려 했다.
나는 서당 선생님으로부터 일본의 침략사를 들어 적개심이 있었던 터라 국어시간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따금 어린 시절의 성적통지표를 보고 실소를 지을 때가 있었다. 예능방면의 과목들은 거의 만점을 받았으나 국어과목만 겨우 낙제 점수를 면했기 때문이다.
조회 때마다 모든 학생들은 “가미사마”라는 신사(神社) 앞에 경배를 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였을까? 나는 신사 앞에 절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팔대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참배할 때 나는 절을 하지 않고 나팔을 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그거일 수 있지만, 그래도 어린 마음에 우상 앞에 절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은 나에게 큰 위안이었다.
양화공립보통학교 나팔대원들(뒷줄 맨 우측) 나는 나팔대원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신사 앞에서 절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