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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왕산 허위선생 기념관을 찾았다 월요일이라 기념관은 휴관이고 옆에 있는 사당과 묘를 탐방했다
왕산 허위는 1855년 4월 2일(음력) 경북 선산군(善山郡) 구미면(龜尾面) 임은리(林隱里, 현 구미시 임은동)에서 아버지 청추헌(聽秋軒) 허조(許祚)와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진성이씨(眞城李氏) 사이에서 허훈(許薰), 허신(許藎), 허겸(許蒹)에 이어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계형(季馨)이고 호는 왕산(旺山)이다.
1861년 7세에 숙부 해초공(海樵公) 허희(許禧)에게 글을 배웠다. 이어서 성재(性齋) 허전(許傳)과 계당(溪堂) 유주목(柳疇睦)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한편으로는 근기학파(近畿學派)와 영남학파(嶺南學派)를 계승한 맏형 허훈에게 학문을 배웠다.
1881년 아버지를 여윈 뒤 10년 동안 학문에 전념하며 후배들을 가르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부지암정사(不知巖精舍)에서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가 강회(講會)를 개설하자 여기에 참석하여 문명을 크게 떨쳤고 1890년경 고향인 선산 임은을 떠나 진보의 신한(新漢)으로 이주하여 전장(田莊)을 관리하면서 실학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1894년 맏형인 허훈과 함께 동학농민군을 피하여 청송군(靑松郡) 진보면(眞寶面)의 흥구리(興丘里)로 이거하여 피난생활을 했다. 1895년 명성왕후의 시해와 단발령이 공포된 뒤, 1896년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맏형 허훈이 진보에서 창의하였고, 그는 김산에서 창의하였다.
3월 29일 금릉향교(金陵鄕校)에서 향회(鄕會)를 개최하고 김산의진을 결성한 뒤, 이기찬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군례(軍禮)를 행하고, 「김산창의대장(金山倡義大將)」이라 쓴 대장기(大將旗)를 세우고 그 진용을 정비하였다. 이 때 그는 참모로 참여하였는데, 그의 형 허겸을 비롯하여 양제안 등이 함께 참여하였다.
4월 17일 경상감영 관군과의 전투에서 의병은 관군이 쏘는 몇 차례의 포격에 괴멸하고 말았다. 그 뒤 김산의진은 무주(茂朱) ・ 황간(黃澗) 등을 전전하면서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하는 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유인석(柳麟錫) ・ 정인석(鄭寅錫) 등과 합세하였다. 이 과정에서 관군과 무려 32회의 교전을 치렀고, 양제안은 총상을 입기도 하였다. 결국 김산의진의 잔여세력은 충북 진천(鎭川)에서 ‘의병을 급속히 해산하라’는 국왕의 봉서(封書)를 받고 군대를 해산하였다.
해산 후 다시 학문에 정진했는데 이 때 박상진 의사와 첫 일면식을 한다
1898년 초 상경하여 광무정권의 개혁정치와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국권침탈에 반대하는 건의소청(建議疏廳)에 참여하였다. 그는 상소운동을 벌이는 한편, 황국협회(皇國協會)에 참여하여 정치운동을 전개하였다. 1899년 2월 1일 45세의 나이로 관직에 나아갔다.
1904년 9월 대한협동회에 참여하여 재무부장에 임명되었다. 대한협동회는 1904년 7월 조직되어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대해 반대운동을 벌이던 보안회를 동년 9월 개칭한 단체인데, 회장 이상재(李商在), 부회장 이준(李儁), 총무 정운복(鄭雲復), 평의장 이상재(李商在), 서무부장 이동휘(李東輝), 편집부장 이승만(李承晩), 지방부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05년 3월 1일 비서원승에 임명되었다. 3월 9일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3월 6일과 7일 『황성신문』에 게재된 최익현의 상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1월 초 그가 올렸던 「배일격문」의 실체를 파악하였다. 통감부는 배일언론활동을 벌이고 있는 재야유생들의 배후이자 배일운동의 주도적인 인물로 최익현과 그를 함께 지목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을 이기지 못해 은거하던 두대동을 떠났다. 그는 경상 ・ 전라 ・ 강원 ・ 경기도를 돌면서 많은 동지 및 유생들과 접촉하며 대응책을 마련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때 그는 남으로는 곽종석(郭鍾錫), 북으로는 현상건(玄尙健) ・ 이학균(李學均), 서로는 유인석(柳麟錫) 등 각처의 저명한 의병장들과 접촉하여 다시 창의하도록 독려하였다.
1907년 7월 19일 고종의 퇴위, 7월 24일 정미7조약, 그리고 7월 31일 군대해산 등 일련의 망국 사태가 이어지자 대규모의 의병부대가 전국 각처에서 결성되었다. 그는 1907년 9월 경기도 연천(漣川) ・ 적성(積城) 일원에서 창의하였다. 이미 1907년 1월 허겸과 함께 기의(起義)하기로 약속하고 있던 그는 맏형 허훈이 토지 삼천여 두락을 매각하여 준 군자금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07년 7월 고종으로부터 비밀리에 ‘기의(起義)’하라는 의대조(衣帶詔)도 받은 상태였다. 그는 연천에서 창의하여 경기도 동북부지역에서 활동하던 의병부대를 규합했다.
의병 300명을 거느리는 총대장(總大將)이 되어 연기우와 김진묵을 부장(副將), 왕회종을 재무관(財務官)으로 하는 의병부대를 편성하였다. 한편 강원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해산 군인 김규식(金圭植)이 거느린 의병부대를 포섭하여 세력을 떨쳤다.
1907년 11월 전국 각처에서 모인 48개 의병부대, 1만 명에 이르는 의병이 양주에 집결하여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를 결성하였다. 관동창의대장 이인영이 총대장이 되고, 그는 군사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관동의병대장 민긍호(閔肯鎬), 교남의병대장 박정빈(朴正斌), 황해진동대장 권중희(權重熙), 관서의병대장 방인관(方仁寬), 관북의병대장 정봉준(鄭鳳俊), 호서의병대장 이강년, 호남의병대장 문태수(文泰洙) 등이 참여하였다.
1908년 1월 초 총대장 이인영과 함께 그는 연합의병부대를 지휘하여 서울을 향해 진군령(進軍令)을 내렸다. 그는 군사장으로서 심복을 서울에 잠입시켜 각국 영사관을 순방하여 일본의 불의를 성토하면서, 의병은 애국혈통(愛國血統)이니 열강도 의병을 국제공법상(國際公法上)의 교전단체(交戰團體)로 인정하여 한국 의병들의 활동을 성원(聲援)해 줄 것을 요청하는 통문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은 약 300명의 선봉대를 인솔하여 서울 동대문 밖 약 30리 지점(현재 망우리공원)까지 진격하였다.
1908년 1월 15일 그가 거느린 선봉대는 본대가 도착하기 전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후퇴하였다. 이 전투에서 의병장 김규식과 연기우가 일본군이 쏜 총탄에 맞고 부상을 당했다. 1908년 1월 28일 총대장 이인영이 거느린 본대의 일부인 약 2,000명이 도착하였다. 총대장 이인영이 지휘하는 13도창의대진소는 서울진공을 위한 준비를 완료하고, 음력 정월을 기해서 통감부를 격파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총대장 이인영은 부친이 별세했다는 흉보를 받고 귀향하고 말았다.
이에 모든 지휘권은 군사장인 그에게 위임되었다. 그러나 서울진공을 일단 중지하라는 이인영의 통문이 각 의병진에 배포되면서 각 의병부대들은 본래의 유진소(留陣所)로 돌아갔다. 각 의병부대들은 각기 본거지를 근거로 유격전(遊擊戰)을 펼치는 전략을 채택하였다.
1908년 4월 21일 이강년 등과 함께 다시 2차 서울진공작전 의병을 일으키자는 통문을 전국의 의병부대에 발송하였다. 그리고 5월에는 수하의 박노천(朴魯天) 등을 서울에 파견, 통감부파원(統監府派員)과 교섭하여 고종의 복위, 통감부 철거, 관청의 일인 관리 퇴송, 외교권 환귀 등 32개 조에 달하는 요구조건을 통감부에 제출하였다.
1908년 6월 11일 영평군 서면(西面) 유동(杻洞) 박정연(朴政淵)의 집에 잠복하고 있던 중 유산헌병분견소와 철원헌병분견소의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6월 17일 서울 헌병대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동양평화(東洋平和)를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는 포부를 피력하였다.
1908년 7월 7일 평리원으로 넘겨졌다. 평리원에서 진행된 1차 심문에서 한국인 판사와 검사가 교대로 의병을 일으킨 연유를 물었다 이에 “나는 일인에게 피착(被捉)되었으니 본국 관인은 묻지 마라.”고 하며 이들을 질책하였다. 다시 경성공소원(京城控訴院)으로 넘어 갔으나 심문받기를 거부하였다. 9월 18일 사형을 선고 받았다.
1908년 10월 21일 오전 10시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그의 나이 54세였다.
그리고 여헌 장현광 선생 묘소를 찾았다
원래 장현광 선생의 후손인 초대 대한민국 미군정수도경찰청장 및 3대 국무총리 장택상 고택(생가)를 찾았으나 없어졌는지 찾지 못하고 화담이라는 카페만 있어 근처 여헌선생의 묘만 찾았다
여헌은 경상북도 인동 출신.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장열(張烈)이며, 어머니는 경산 이씨(京山李氏)로 제릉참봉(齊陵參奉) 이팽석(李彭錫)의 딸이다. 지천 최명길과는 처남 매부 사이가 된다
부친 장열과 지천 최명길과는 처남 매부 사이가 된다 여헌 장현광의 고모부가 지천 최명길.
1576년(선조 9) 재사로 천거되었고, 1595년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보은현감을 지냈다.
1567년(명종 22)부터 진사 장순(張峋)에게 학문을 배웠고, 1571년(선조 4) 「우주요괄첩(宇宙要括帖)」을 지어 대학자로서의 면모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576년 재능과 행실이 드러나 조정에 천거되었다. 1591년 겨울 전옥서참봉(典獄署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오산(金烏山)으로 피난하였다.
1594년 예빈시참봉 · 제릉참봉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 해에 유명한 「평설(平說)」을 지었다. 1595년 가을 보은현감에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12월 관찰사에게 세 번이나 사직을 청했고, 이듬해 2월 다시 세 번 사직을 청한 뒤 허가를 기다리지 않고 향리에 돌아갔다가 직무유기 혐의로 의금부에 잡혀갔다.
1597년 여러 차례 장현광을 조정에 추천했던 유성룡(柳成龍)을 만났는데, 장현광의 학식에 감복한 유성룡은 아들을 그 문하에 보내어 배우게 하였다. 1601년 경서교정청낭청(經書校正廳郎廳)에 임명되었고 여러 번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1602년 거창현감 · 경서언해교정낭청(經書諺解校正郎廳)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그 해 11월 공조좌랑으로 부임하여 『주역』 교정에 참가했고, 형조좌랑에 옮겨졌으나 이듬해 2월에 돌아왔다.
1603년 용담현령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이어서 의성현령에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몇 달 만에 돌아왔다. 1604년 순천군수, 1605년 합천군수, 1607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08년 「주역도설(周易圖說)」을 지었고, 1621년(광해군 13) 「경위설(經緯說)」을 지어 ‘이체기용(理體氣用)’, 즉 ‘이경기위설(理經氣緯說)’을 제창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김장생(金長生) · 박지계(朴知誡)와 함께 여러 번 왕의 극진한 부름을 받았고, 사헌부지평 · 성균관사업 등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사헌부장령으로 부임하여 왕을 알현했고, 이어서 사헌부집의 · 공조참의로 승진되어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에 참석하도록 부탁받았으나 사양하고 돌아갔다. 이후 이조참의 · 승정원동부승지 · 용양위부호군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26년(인조 4) 형조참판에 특제되어 마지못해 사은(謝恩)했고, 이어서 사헌부대사헌 · 부호군, 1628년 이조참판, 1630년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로도 여러 차례 지중추부사 · 의정부우참찬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군현에 통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군량미를 모아 보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삼전도(三田渡)에서의 항복 소식을 듣고 세상을 버릴 생각으로 동해가의 입암산(立嵒山)에 들어간 지 반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장현광은 일생을 학문과 교육에 종사했고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당대 산림의 한 사람으로 왕과 대신들에게 도덕정치의 구현을 강조했고, 인조반정 직후에는 공신들의 횡포를 비판하고 함정수사를 시정하게 하는 등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장현광은 정구(鄭逑)에게 수학한 적이 있어 퇴계학파로 분류되고 있으나 이기론 · 심성론 등에서는 이황(李滉)의 학설과 상이한 점이 많다. 장현광은 이(理)와 기(氣)를 이원적으로 보지 않고 합일적인 것 혹은 한 물건의 양면적인 현상으로 파악하였다. 「경위설」에서는 이를 경(經)으로, 기를 위(緯)로 비유해 이 · 기가 둘이 아니고 체(體)와 용(用)의 관계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심성론에서는 도심(道心)을 ‘미발지성(未發之性)’으로, 인심을 ‘이발지정(已發之情)’으로 파악했으나, 이미 발한 뒤에도 역시 도심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도심이 인심 가운데 있고 인심이 도심 가운데 있어 별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또한 그는 사단(四端)이 칠정(七情)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칠정 가운데에서 본성을 따라 발현해 거짓되지 않은 것이 사단일 뿐이라 하여 사단의 순수고유한 발현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장현광의 철학은 명나라의 나흠순(羅欽順)과 이이(李珥)의 이기심성론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남인계열의 학자들 중에서는 매우 이색적이고 독창적인 학설이다. 저서로는 『여헌집』 · 『성리설(性理說)』 · 『역학도설(易學圖說)』 · 『용사일기(龍蛇日記)』 등이 있다.
1655년(효종 6) 의정부좌찬성, 1657년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성주의 천곡서원(川谷書院), 서산의 여헌영당(旅軒影堂), 인동의 동락서원(同洛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우리 전주공 오시형(수촌공 오시수, 유수공 오시대 동생)의 아들 오상직 선조가 이 집안의 사위로 들어가 우리 가문과 인척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