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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여섯 남편에 대한 실망 끝에 이룬 만남>의 줄거리:
여섯 번째 남편과 살게 되기까지 여섯 번의 동거를 거치는 동안 남편이라는 존재의 무가치함을 철저히 깨닫고 실망한 수가성 여인이 이제 죽지 못해 살고 있던 때에 예수님이 찾아오시고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이 본문의 의미는, 땅의 것에 대한 실망이 크고 철저할수록 단 한 번을 만나더라도 독생자와의 만남이 진실되고 강력해진다는 겁니다.
여섯 남편에 대한 실망 끝에 이룬 만남
(요한복음 4:1~19)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17.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여섯 남편에 대한 실망 끝에 이룬 만남>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여섯 남편에 대한 실망 끝에 이룬 만남”
본문은 예수님과 수가성 여인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6절 이하의 대화 내용을 보면 논리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떻게 이런 모순된 대화가 진행될 수 있나 싶을 정도입니다.
본문 이후의 내용을 보면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알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넘치는 기쁨으로 물동이를 놔둔 채 자신을 부정하게 여겨 기피하던 마을 사람들에게 달려갑니다. 수가성 사람들은 이 여인이 여섯 번째 남편과 함께 살고 있음을 이유로 기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여인은 마을 전체를 뒤집는 전도를 이루어내고 맙니다. 이러한 본문을 대할 때에는 일종의 열등감까지 느껴집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산 세월이 수십 년이 되었지만 이러한 일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단 한 번 만났을 뿐인데 마을 전체를 전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을 보면 예수님을 만나서 우물가에 나온 목적까지 잊어버릴 정도로 큰 기쁨을 느끼게 되고, 일상적으로 상종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로 달려갈 용기까지 생기게 됩니다. 중동 땅에서는 햇빛이 강한 정오를 피해서 물을 긷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얼마나 소외되었는지 사람이 없는 시간인 정오에 물을 긷기 위해 나왔습니다. 이렇게 소외되고 부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던 여인이 한 번 만난 예수님을 전했을 뿐인데 마을 전체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제가 제일 많은 회의를 품었던 것이 전도에 관한 교육이었습니다. 수가성 여인의 모습을 보면 우리가 교육을 받고 전도를 하겠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래서 전도에 관한 교육을 이야기할 때마다 인위적인 교육에 대한 의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여인이 이러한 전도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만남을 제대로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한 번을 만나도 진실되게 만나면 이렇게 강력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평생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음에도 아직까지 수가성 여인의 만남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이 강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섯 남편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습니다.
16~17절을 보면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명령에 거짓말로 대답합니다. 이 여인은 여섯 번째 남자와 같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남편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네르(ἀνήρ)는 남자 남편이라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남편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였고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18절에서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하십니다. 분명 남편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없다고 한 것이 참되다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표현만 가지고는 여인과 함께 사는 사람이 법적으로 남편인지 단순히 동거하는 사람인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아네르(ἀνήρ)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습니다. 이것은 여자와 같이 사는 남자가 남편인지 동거인인지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을 오해 없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2000년 전의 중동 땅에서 여자와 남자의 관계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여자의 생애는 절대적이고 치명적으로 남편에게 의존하는 형태였습니다. 본문의 여인이 처한 상황은 우리의 상황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당시 여자가 가질 수 있는 행복의 길은 남편뿐이었습니다. 현대여성들이 여러 가지 방면에서 생의 기쁨과 행복과 재미를 찾아갈 수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지금이야 결혼적령기의 젊은이들이 일과 취미를 중시해서 결혼에 관심이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만 당시 중동 사회에서 이러한 여성관은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여자의 행복이 오직 남편에게 달려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남편을 일찍 보낸 과부의 삶이란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과부는 가장 불쌍하고 나약한 존재로서 사회적 위치가 고아와 동일했습니다. 그렇기에 성경에서도 돌볼 대상으로 고아와 과부가 항상 같이 언급됩니다.
이처럼 당시의 사회상에서 여자에게 남편은 유일한 행복이자 생의 보람이며 기쁨이었습니다. 따라서 수가성 여인의 남편이 없다는 고백은 법적이고 사회적인 남편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여인에게 남편이라는 존재가 주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인에게는 행복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길, 기쁨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원천, 생의 보람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 남편이었습니다. 이런 의미가 남편이라는 단어 속에 정의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내용은 목마름과 생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대화의 시작을 보면 물을 달라 하신 예수님께 여인이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대화를 하는 중에 오히려 여인이 예수님께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요청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요청을 들어주심에 앞서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여인은 여섯 번째 남편과 함께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없다는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남편이 없다는 사회적 법적차원의 거짓말을 옳다고 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알고 계셨고 여인도 알고 있었던 남편의 정의는 한 여인에게 있어서 유일한 행복과 기쁨의 원천을 의미합니다.
만약 이 여인이 첫 번째 남편과 계속해서 같이 살고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남편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통념대로 남편에게 행복과 기쁨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이 행복과 기쁨의 원천이 되어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당시의 사회에서는 다른 길이 없기에 기쁨도 없이 불행하게 평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여인은 그런 과정을 다섯 번이나 겪고 여섯 번째 남편과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여인이 느끼는 것은 부모님이 가르쳐주시고 친구들이 말해주고 사회통념상 행복과 기쁨을 주는 남편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너에게 행복과 기쁨의 원천으로 여겨지는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셨을 때 여인은 통념대로 행복과 기쁨을 주는 남편이라는 존재는 없다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남편이라는 정의대로 남편이 없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대화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읽지 않은 3~4절을 보면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로 들어가신 이유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요한보다 세례를 많이 주게 되자 유대사회 내에서 주목을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자신들의 권세로 허락하지 않은 종교적 활동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바리새인들을 피해서 사마리아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더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로 가셨던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께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생각이 끊임없이 주어지고 있었고,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실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아버지의 생각만을 따르고 계셨습니다. 아버지의 생각 속에 의도가 들어있지 않은 계획은 없기에 수가성 여인을 만나신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생각을 따르시는 예수님께서 모든 계획과 의도 안에서 실천해 나가신 사건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을 피하여 사마리아로 가신 예수님의 의도적인 동선이 뜻하는 바가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께서는 천국으로부터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반면 수가성 여인은 땅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은 위에 속한 독생자와 땅에 속한 사람의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독생자 가지기를 해야 합니다. 독생자를 가지기 위해서는 먼저 만나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아무리 불러도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가질 수가 없습니다. 이 여인은 한 번의 만남이 정확하게 이루어졌고 가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여인처럼 강렬한 역동성으로 예수님과의 만남을 이룰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말로는 가진다고 하지만 만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가진다는 의식만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독생자 가지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정확한 만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질 대상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문제는 하늘로부터 오신 분을 땅에 속한 사람들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 대답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당시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여겼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의 영역 전체라고 볼 때 그 중심부에는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핵심층의 사람들로서 가장 큰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자칭하고 있었지만 유대인들은 그들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보다도 못한 개로 취급하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기에 엄청난 종교적 열등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물며 여인이었다면 그 취급은 더욱 좋지 않았습니다. 당시는 사람을 계수할 때에 여자는 세지도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내와 대화하는 것을 다른 유대인 남자에게 보이는 것조차 굉장히 수치스럽게 여겼습니다. 그 정도로 여자가 경멸을 받던 시절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계층 간의 모습을 동심원이 겹쳐진 모습으로 연상하시면 이해가 쉽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입장에서 볼 때 세상의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동심원은 계속해서 바깥쪽으로 나가면서 유대인 남자가 있고, 유대인 여자가 있고, 사마리아 남자가 있고 사마리아 여자가 있습니다. 이러한 동심원에서 가장 바깥쪽에 있었던 것은 여섯 번째 남편과 살면서 동네에서 배척당하던 수가성 여인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인간 세상은 땅에 속해있습니다. 땅에 속한 사람들의 세상이 이루어져 있는 형태를 보면 중심부로부터 바리새인-유대인 남자-유대인 여자-사마리아 남자-사마리아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땅에 속한 인간 세상의 가장자리에는 수가성 여인이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에게서조차 기피되는 왕따의 인생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은 위에서부터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위에서 오셨다는 것은 천국에서 오셨다는 뜻입니다. 천국은 세상의 밖에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에서 오셔서 이 땅에 머무셨지만 단 한 순도 이 세상에 속하신 적은 없으셨습니다. 세상에 속한다는 것은 인간 세상 전체가 인정하는 가치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중심부에 있다는 것은 이 세상의 가치를 가장 많이 가진 사람입니다. 변두리에 있다는 것은 이 세상의 가치를 비교적 덜 가진 사람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하나님 외에는 좋아해 본 적이 없으신 분이셨고 따라서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던 예수님은 세상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과는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피해 사마리아로 지나셨고 그곳에서 수가성 여인을 만나신 것은 상징적 사건입니다. 동심원을 연상해보시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중심부의 바리새인을 등지고 떠나십니다. 그리고 유대인 남자를 지나치시고, 유대인 여자도 지나치시고, 사마리아 남자도 지나치시고, 사마리아 여자도 지나치시고 인간 세상 가장 변두리에 있는 수가성 여인을 만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분이셨기 때문에 세상 중심부에 가까이 있을수록 예수님을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주신 독생자를 가지기 위해서는 먼저 만나야 합니다. 그 독생자를 만날 수 있는 자리는 세상의 중심부가 아닙니다. 독생자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에 세상 중심부에서 독생자를 만날 수는 없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을 제외하고 그리스도의 사역이 시작되면서 예수님이 개인적으로 만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인 첫 번째 인물이 바로 수가성 여인입니다. 수가성 여인은 인간 세상이라는 동심원에서 가장 바깥쪽에 속해있었습니다. 이 여인에 의해서 전도 받고 처음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사람이 사마리아의 수가성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의도적으로 독생자를 만날 수 있는 위치가 어디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독생자를 마음으로 가지기 위해 만날 수 있는 지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자아의식이 세상 중심부를 향한다면 예수님을 만날 수 없고 독생자를 가질 수도 없습니다.
바다를 건너온 배를 만날 수 있는 장소는 항구입니다. 땅에는 산도 있고 평야도 있고 광야도 있지만 항구는 땅의 끝부분입니다. 배는 바다에 속해있고 나는 땅에 속해있기 때문에 바다에 속한 배를 만나려면 땅이 끝나는 지점으로 가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속할 수 없는 분이시기에 하늘이 시작되는 부분이자 땅이 끝나는 부분에 오셔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세상에 속할 수 없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세상 중심부로부터 멀어져야만 합니다. 세상의 중심부에서 멀면 멀수록 예수님께 가까워지기 쉽습니다.
수가성 여인에게는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에 실망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에 대한 바람을 갖는 사람은 돈이 없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돈에 실망하는 사람은 돈을 가져본 사람입니다. 당시 여성들은 평생을 한 남자와 살아야하는 입장에서 혹시 다른 남자와 살면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여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었기에 남편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에 대해 실망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중심이 되어 있는 세상에 대해 완전히 실망할 수 없다면 예수님과 만날 수도 없습니다. 마음이 아직도 세상의 가치들을 바라고 신뢰하는 동안에는 중심에 있지 못하더라도 중심을 향하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에는 절대로 예수님을 만날 수 없고 예수님이 주시려는 생수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 가치를 얻으면 마음에서 잠깐 해갈이 일어나지만 또 다시 목마르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세상 가치의 중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목마름에 시달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세상의 가치를 마시면서 일시적인 해갈을 얻지만 곧이어 또 다른 목마름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가치들에 대해서 철저히 실망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못 먹는 호박 찔러나 보듯이 세상 것을 가지려 하다가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것에 대해서 실망해야만 합니다. 세상 것에 대한 신뢰는 깨져야만 합니다. 이것으로는 도저히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가치들이 우리의 마음에 주어진 남편일 수 있습니다. 결혼이 남편일 수 있고, 자녀의 형통이 남편일 수 있고, 돈이 남편일 수 있고, 건강과 장수가 남편일 수 있고, 연금이 남편일 수 있고, 명품들이 남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의 가치들을 아직도 신뢰하고 기대하는 한 예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세상 것을 가졌든 못 가졌든 세상 것에 실망해야만 합니다.
수가성 여인은 여섯 번의 실망을 하였습니다. 6일 동안 일하고 7일째에 모든 일을 멈추는 것처럼, 세상에 대해 실망하는 일을 끝내고 세상을 젖혀버리게 됩니다. 실망하고 또 실망하고 여섯 번을 실망만 하다가 일곱 번째에는 완전히 세상에 대한 기대 자체가 없어진 상태에서 예수님과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여인이 세상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남편이었습니다. 여섯 번째 남편과 함께 살면서도 남편이 없다고 대답하는 여인은 세상에서 기쁨을 얻는 것에 대해 기대 자체가 뿌리 뽑힌 상태였습니다. 세상의 가치를 가질수록 중심부로 가는 이 세상의 원리상 이 여인은 변두리로 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변두리로 밀린 상태에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독생자를 만날 수 있었고, 이 단 한 번의 만남은 마을을 뒤집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렬했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는 독생자를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이라고 일컬어지든 보좌에 앉으신 아버지로부터 오는 기쁨이라고 일컬어지든 마음의 목마름이 없어지는 상황은 독생자를 가짐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독생자를 가지려면 만남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문제는 이 독생자가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독생자를 가지려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방법은 마음이 세상 중심부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돈 있는 사람들, 지식 있는 사람들, 권력 있는 사람들은 독생자를 가질 수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노년의 솔로몬은 부귀영화를 다 갖고 있었지만 부귀영화에 실망했습니다. 부귀영화를 통해 기쁨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접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기대가 끝났던 것입니다. 갖고있는 자들은 갖고있는 것들에 대해 기대가 완전히 죽어버리는 상태가 될 때 독생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갖지 못한 자들은 갖고 싶었던 것들에 대해 기대가 죽어버리는 상태가 될 때 독생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중심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변두리로 나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독생자를 만날 수 있는 길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받아들일 때 나는 세상에 대한 실망을 십자가로부터 받게 됩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요한복음은 예수님과 수가성 여인과의 만남을 통하여 우리에게 십자가의 의미를 전해줍니다.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나로 하여금 세상에 속하지 않은 독생자를 만나게 해주는 사건입니다. 수가성 여인은 남편 여섯에 대한 실망 끝에 세상 변두리로 밀려났기에 세상에 속하지 않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를 의식함으로써 세상의 중심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변두리에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예수님을 수가성 여인처럼 강력하게 만나라고 본문이 기록되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를 보며 세상에 대한 실망을 직접 체험하지 않고서도 가질 수 있게 해주심으로 중심부로부터 가장 멀리 밀려난 사람이 되어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만나고 가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