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부모님 생애노정 - 1권 제4절 서울 흑석동 중학시절 (1938.4월~1941.3월) 2. 스스로 감내하신 고행
자취생활
선생님이 7년 동안 자취생활 했어요. 돈이 없어서 한 게 아니예요. 거, 여자들을 알아보려고 그런 거라구요. 절대 더운물 가지고는 안하는 거에요. 찬물, 그저 두레박으로 찬물을 퍼서 하는 거예요. 그러면 손이 짝짝 붙어요. 이래 가지고 쌀도 씻고 하는 이런 놀음을 많이 해봤어요.
그때 서울에 왔을 때는 추웠다구요. 평균 영하 17도에서 21도까지 오르내렸다구요. 우리 젊었을 땐 그랬다구요. 그런데 어디 가서 자취하면서도 잘사는 사람으로 자취 안 했어요. 제일 어려운 사람에서부터 시작했어요. 그 추운 동지섣달이예요. 찬 방에서 살고 밥을 하는데 찬물 가지고 하는 거예요. 전부 다 지금도 내가 잊지 않았지만 말이예요. 산등에 파 놓은 우물이기 때문에 한 열 발 이상 들어간 우물이라구요. 이 우물이 참 물이 좋았다구요. 두레박은 고리를 쇠사슬로 하거든요. 끈이 끊어지니까. 그걸 잡을 때 손이 붙어서 ‘호호’하던 것이 엊그제 일 같아요. 그런 생활에서부터 전부 다 인생살이를 해봤어요. 여자들이 뭘하고 있다는 것도 다 안다구요.
습관이 되어서 많은 반찬이 필요 없습니다. 언제나 간편하고 맛있고 실질적이고 실용적인 것 하나면 됩니다. 언제나 일식 일찬一食一饌이라구요. 맛있는 반찬 한 가지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즈음 상에 반찬을 수두룩하게 올려 놓는 것을 보면 아예 귀찮다는 거예요.
또, 도마질하는 것을 보면 풋나기인지 아닌지 다 안다구요. 내가 도마질도 잘 합니다. 다닥닥 다닥닥. 반찬 만드는 것 보면 솜씨가 있는지 없는지 벌써 아는 거라구요. 부인들이 밥하는 것, 반찬 만드는 것을 쓱 보게 되면 밥물은 얼마나 부었고, 시금치나물에는 어떤 양념이 들어갔고, 콩나물에는 어떤 양념이 들어갔다는 것을 다 알 수 있어요. 쓱 보게 되면 무슨 반찬은 어떻게 무친 것인지 다 아는 거예요.
하루 2식과 생일금식
선생님이 서울에서의 학생시절에, 여러분 같은 연령 때에는 점심을 안 먹고 살았어요. 밥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예요. 배고팠던 부모의 역사가 있으면 배고팠던 부모의 사연을 알아야 돼요. 배고픈 자리에서 그 부모에게 효도 못 한 자신을 탓해 가지고 배고픈 그 시대에 효자 될 수 있는 내 스스로를 준비해야 되는 거예요.
배고프지 않으면 하나님을 모른다구요.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구요. 배고픈 시간이 제일 하나님 앞에 가깝다구요. 그럴 때는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행여나 저 사람이 내 어머니가 아니겠느냐? 저 사람이 누님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되는 거라구요. 나를 도와줄 사람이 아니냐? 그렇게 생각된다구요. 그렇게 되면, 천만인을 위로할 수 있고 천만인을 맞아 줄 수 있는 마음이 생긴다구요.
더구나 나라도 없는 주제에 밥을 세 끼씩이나 다 찾아 먹을 자격이 있느냐면서 말이예요, 밥이 그리운 생활을 참 많이 했습니다. 밥을 그리워함과 동시에 민족을 그리워하는 길을 갔다구요. ‘밥보다 민족을 더 사랑해야지, 나라를 더 사랑해야지’하면서 고향을 떠나 서울에 와 있으면서 말이예요, 점심을 안 먹었습니다. 주머니에 돈이 없어 그런 것이 아니라구요. 돈이 있으면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금식을 밥 먹듯이 했어요. 30세까지 점심을 안 먹었어요. 제일 배고플 때 집 떠나 가지고 줄곧 2식주의였어요, 2식주의. 제일 힘든 것이 뭣이었느냐 하면, 동창생이랑 같은 방에 있는데 이 친구가 점심을 갖다 놓고 자꾸 먹자고 하는 거였어요. 그것을 이기던 것이 지금 생각난다구요. ‘내가 할 일이 있어. 내가 할 일이 있어. 숙제가 많아. 이걸 청산하려면….’ 해 가지고 안 먹고 그랬다구요.
배고파 보기를 나같이 배고파 본 사람 없을 거예요. 배고픈 사람들이 구원의 손길을 바라는, 굶주리면서 해방을 바라는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가 들려 와요. 밥을 먹을 수 없는 거예요. 수양하는 자들은 일생을 통해서 평상시에 수양해 놔야 된다 해가지고…. 생일날은 금식하기가 일쑤였다구요. 자기 개인적 승리의 기준도 못 넘고, 가정적 승리의 기준도 못 넘고, 민족·국가·세계의 승리의 기준도 못 넘은 게 생일 놀이를 해요? 생일 놀이를 어떻게 하겠어요? 춤을 추고 뭐, 댄스하고 뭐, 할 수 있어요? 할 수 없다 이거예요. 죄인은 하늘 앞에 천명을 받은 책임을 하고 난 다음에 그런 것을 해야 된다구요. 선생님은 그런 생활을 했다구요. 여러분들은 참 편하다구요, 선생님이 다 닦아놓은 길을 가고 있으니. 여러분들은 선생님이 이렇게 하니까 선생님이 하는 대로 따라 하지만 선생님 하는 대로 하게 돼 있지 않다구요, 사실은.
외로울 때 찾아준 온정의 손길
선생님이 어느 곳에 가든지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그런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 사정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동정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또 여러분이 선생님을 대하듯이 가는 곳곳마다 그렇게 대해 주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가 명절날 같은 때에 밤을 새워 가면서 준비한 그 상을, 혹은 남편을 위해서 준비한 그 상을 선생님 방에 갖다주지 않고서는 안방에 들어 가지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냥 안방에 들어가게 되면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것입니다. 자기들도 왜 그런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낙네들의 정성들인 그 음식까지도 선생님을 먹이기 위해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입니다. 그런 역사가 많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꿈에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지금 서울에 와 있으면서 잊을 수 없는 부인이 한 사람 있어요. 송씨 부인이라고 못사는 부인이예요. 그때 셋방에서 딸 하나 데리고 사는데, 뭐 남편이 있는 것도 아니예요. 딸 하나하고 사는데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해가지고 겨우 밥을 먹고 사는 거예요. 그런 송씨 아줌마라고 있었어요. 이 아줌마가 말이예요, 그렇게 어렵게 살면서도 내가 학생시절에 하숙하고 있으니까, 하숙집에서도 아침 주고 점심 주고 저녁 주면 그만 아니예요? 학생들은 그것 먹고는 배가 고프다구요. 그걸 알고 말이예요, 자기가 뭘 팔다 남으면 갖다 먹여 주려고 그래요.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자기 동생이 있었대요. 나와 비슷한 동생이 있는데 그 동생이 생각난다는 거예요. 저분이 여기 와 있는 것이 남같지 않다는 거예요. 거 아마 영적으로 무엇이 있었는지 모르지요. 이래 가지고 뭐가 생기면 자기 입에 들어가야 할 텐데 이 손이 이리 간다는 거예요.
한번은 두 교회가 한강가에서 합동예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모래 사장이 지금은 없어졌지만, 서빙고 앞이었어요. 점심 때 모두 점심을 먹는데 그 속에서 혼자 앉아 가지고 버틸 수 있나요. 그래서 혼자 쓱 뒤로 빠져 나와 돌무더기 같은 데에 가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점심을 안먹고 자갈 쌓아 둔 돌 무더기 뒤에 있었는데 그때 송씨 부인이 아이스케이크 두 개와 빵 두 개를 가져 왔었어요. 그게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요. 한 개에 일전짜리예요. 그거 모두 합해야 4전인데, 그 빵과 아이스케크를 갖다 준 것이 영영 잊혀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니 그때 그 자리가 얼마나 심각한 자리였더냐 이거예요.
이렇게 신세를 진 것은 영영 잊혀지지 않아요. ‘아무때 어떻고, 아무때 어떻고…’ 하며 나를 위해서 수고하고 나를 위해서 베풀어 준 그 은덕은 영영 잊어버리지 않는다구요. 그 잊어버리지 않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이냐?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세계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세계의 인간을 위해서 그것을 갚으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갚아 줄 수 없는 거라구요.
은덕을 갚는 데 있어서 그 사람을 언제 다시 만날 것이냐? 그 사람을 찾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신세를 진 사람을 만날 수 없으니 그 마음을 가지고 ‘아무때에 내가 은덕을 받은 것을 이 사람한테 주겠사오니 대신 갚는 조건으로 하나님이여, 받아 주시고 대신 갚아 줄 수 있는 자리로 메워 주시면 좋겠습니다.’ 해야 합니다. 그런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은인을 만나서 주는 것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주게 되면,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떠하겠어요? 이러한 분위기의 생활체제를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로울 때 방문하는 것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좋아할 수 있는 사람끼리 좋아하는 것은 다 흘러가요. 그러나 어렵고 못견디는 자리에 찾아주고 위로하는 것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 그것을 거기에서 배웠어요. 그 송씨 아주머니는 얼굴도 잘 못생겼어요. 궁둥이가, 허리가 꾸부정하고 이 뽄때기가 고생하게 생겼지요. 그 얼굴 가지고 뭘 나르는 걸 보면 밉지 않더라구요. 그런 모든 정서적인 면에 관계되어 있는 것은 잊혀지지를 않아요.
한겨울 냉방생활
내가 20대 전후한 그때에 있어서 서울만 해도 추웠어요. 보통 영하 17도예요. 한강이 안 언 때가 없었어요. 그런 때 방에 불을 안 때고 사는 거예요. 이래 가지고 그때 모본단 포대기를 깔아 놓고 쭉 자고 일어나면 짝짝 판이 박힌다구요. 그러면 그 판 박힌 것이 보통 때는 안 진다구요. 이게 6개월도 가고 그래요. 그게 인상적이예요. 그게 다 추억에 남아요.
하도 추워가지고 전구를 켜 가지고 화덕같이 끌어안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잠자다가 전기에 데어 까풀이 벗겨진 것, 그런 것이 다 인상적이예요. 그래, ‘서울’하면, 그때 ‘사실 내가 그랬지’ 하는 생각이 납니다. 지금도 목욕탕에 들어가서 쓱 씻게 되면 ‘아, 그 시절…’하는 것이 기억에 나요.
그렇게 죄인과 같이…. 남과 같이 갈래야 갈 수 없는 고생을 한 거예요. 역사적 스승이 살던 고통, 하나님의 역사적 고통을 흘려 보내서는 안되는 거예요. 내 마음 깊은 사랑의 곳에다 담고, 저나라에 가서 만나거들랑 목을 안고 ‘당신이 슬펐던 사정을 다 알고 나도 그 도수를 맞춰 살려고 했지만 미치지 못했소. 이것을 용서하시오’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통곡하는 마음이 앞서게 될 때는, 하나님을 붙들고 통곡하더라도 하나님도 같이 울며 붙들어 줄 수 있는 겁니다. 그런 날이 없어 가지고는 해방이 없다고 생각하며 나오고 있는 사람이예요.
그렇게 찬방에 살면서도 효자는 효자 놀음을 해야 돼요. 찬 방에 모신 부모의 그 서글픈 심정을 품고 하늘땅을 걸어 사랑하지 못하는 불충을 회개할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돼요.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하늘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 가깝다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헌옷 입고 자립 훈련
선생님은 30대까지 여러분들이 입고 있는 그런 옷을 못 입어 봤어요. 왜정 때는 전부 다 그랬지요? 고물상에 가게 되면 때가 새까맣게 끼어 가지고 반질반질한 것을, 냄새가 나는 그런 것을 사다가 입었어요. 쪽 빼고 다니면 아주 시끄러워서 못 견딘다구요. 이건 알록달록한 각시들이 매일 따라다녀요. 골목으로…. 그렇기 때문에 그런 걸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더벅머리 총각으로 구석진 길로 다녔어요. 사나이로 태어나서 어떠한 맹세를 했으면 맹세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야지요.
그리고 내가 뜨개질을 참 잘합니다. 스웨터 같은 것도 혼자 다 만들어 입었어요. 버선같은 것도 잘 만들었습니다. 팬티나 왜잠방이 같은 것도 내가 혼자 잘 만들었어요. 내가 여자 없이도 혼자 살겠다고 모든 것을 연구한 사람이라구요. 일생 동안 독신생활 하더라도 이 뜻을 내 필생의 사업으로 작정하고 나선 사람이기 때문에, 못 하는 것이 없다구요. 내가 모자를 척 떠 쓰면 아주 예쁜 모자를 떠서 쓸 수 있습니다. 장갑을 떠도 참 빨리 떴다구요.
그러면서 내가 여자 옷 입고도 서울 장안 안 다녀 본 데가 없습니다. 근사하지요? 남자 녀석들은 전부 다 골려 먹어야 되겠다, 이놈의 자식들! 이래 가지고, 골목에 들어가 가지고는 후려갈기는 거예요. ‘이 자식아, 여자인 줄 알고 이래? 이 못된 자식들!’ 내가 싹 쓰고 싹 이러면 말이예요, 모양은 나쁘지 않습니다.(웃음) 비가 오면 말이예요, 양산 갖고 싹…. 왜? 세상살이를 알려고. 암행어사가 돼야 돼요. 세상을 조사하려면 샅샅이 해야 돼요. 그런 역사가 많습니다.
첫 방학 때
첫 학기 마쳤을 때, 고향 떠나 가지고 서울에 와서 맞은 학교의 첫째 번 여름방학에는 집에 안 갔어요. 남들은 서로 간다고 시간 다투어 차표 산다고 했지만 나는 엄숙히 혼자 있었어요. 다시 돌아오는 날을 기다리는 어머니 아버지에게는 내가 이런 사정이 있어서 못 간다고 통고하는 거예요. 왜, 왜 그랬을까요? 사탄세계와 다른 길을 가야 되기 때문이예요.
학생들은 전부 다 보따리 싸가지고 집으로 가는데, 나는 ‘그리운 부모를 만나고 싶지만 그보다도 부모를 살려 줄 수 있는 하늘이 그립다’고 눈물짓고 그랬어요. 그 그리움을 머금고 나라를 위해서, 내 갈 길을 위해서 정성을 들이는 것입니다.
친지들이 야단하는 것입니다. 오라고 야단이 벌어진 거라구요. ‘집에 무슨 중대한 일이 있으니 오라’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안 갔어요. 친구들이 돌아와 가지고 이상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들을 붙들고 ‘천년사의 역사를 엮어 온 귀한 시대를 놀고 떠들며 흘러 보내며 살 게 뭐야? 이 자식아!’ 그러고 살았다구요.
극장을 둘러서 다님
내가 청소년 때에는 얼마나 극장에 가보고 싶었는지…. 우리 같은 사람이 영화를 보게 되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모른다구요. 신이 나서 소리를 지를 수 있는 기질을 가졌다구요. 그러나 난 절대 안 가는 거예요. 선생님이 그래서 ‘그거 뭐 본래부터 안 가는 것보다 자꾸 매일 같이 가자’해서 하루에 영화를 다섯 번까지 봤다구요. 그거 뭐 안 가면 될 것이 아니라 제일 많이 가 보면서 제일 상극이 될 수 있는 체험을 하고는 안 가는 거예요. 그거 뭐 체험도 못 하고 안 가면 가치 없다구요. 그래서 하루에 다섯 번씩 다니다가 딱 끊어 버린 거예요. ‘이놈의 자식들아, 안 간다’이거예요.
선생님이 여러분과 같은 연령 때에 부러운 것이 없었겠어요? 여러분들은 영화 구경하러 극장에도 잘 가지요? 선생님은 영화를 보지도 않았고, 극장 앞에도 다니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는 걸 알아야 돼요. 그거 왜냐? 내가 그 이상 넘어가 가지고, 다 지나가 가지고 극장이라든가 이런 곳을 아무리 다니더라도 거기에 걸리지 않고, 가서 잠을 자고 살더라도 거기에서 범죄하지 않을 수 있는 선을 넘어서고 나서야 가야 되기 때문이예요. 요즘에 내가 극장 가라고 다 하는 것도 가 가지고 물들지 않을 수 있는 입장에서 가라는 거예요. 그다음에는, 딱 다 지난 다음에는 완전 개방이라구요.
여러분이 극장에 가서 영화 구경을 할 때라도 심각한 자리에 서서 그것이 남의 일같지 않고 내 일같이 느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길을 가는데 방해가 되는 원수같으니 어떤 악한 무리가 나올 때 그들을 잡아 치우겠다는 마음을 갖고 극장에 가면 죄가 안 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간다면 극장 아니라 그보다 더한 곳을 가도 괜찮습니다.
악당들이 사는 소굴이라도 사기꾼 모양을 해 가지고서라도 그들을 끌어 올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간다면, 또한 원수를 한칼에 전부 쳐 버리겠다는 결의를 갖고 나선다면 하나님의 용자로 세워집니다. 그런 사람은 천하 어디를 가든 화제의 인물이 됩니다.
뒷골목 조사
옛날에는 종로 3가 같은 데는 전부 다 거 유곽이었어요, 유곽. 그걸 내가 조사해야 되겠다 이거예요. 왜 예쁜 여자들이 저 놀음을 해야 되느냐 이거예요. 저게 만약에 자기 누이라면 어떡할 거야? 자기 딸이라면 어떡할 거야? 애비가 되어 가지고, 오빠가 되어 가지고 어떡할 거야? 문제가 심각하다구요. 그런 젊은 여자들을 대해 가지고 밤을 새워서 얘기해 주던 생각이 난다구요. 그런 놀음을 전부다 거쳐가야 돼요. 나라를 사랑해야지. 사람을 사랑해야지. 그걸 이용해 먹고 그럴 수 있나 말이예요. 이 세상의 물정을 환히 알아야 돼요.
선생님은 그런 세계를 잘 아는 사람이라구요. 몰라 가지고 어떻게 그 세계를 구하나요? 그 심층 분야에 가리어진, 하소연에 잠긴 그 모든 사연들을 알고 그들을 구해 줘야 돼요.
그렇지만 뿌리는 없이 잎만 되어 가지고 되느냐 이거예요. 그 자리에 나설 때는 내가 아무런 일을 하더라도 걸리지 않을 수 있는 내적인 결정을 받고 나타나는 거라구요. 통일교회에 들어온 사람들도 그래요? 그런 수양 과정을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수양 과정이 있어야 되는 거라구요.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옛날에는 내 허벅다리를 본 사람이 없어요. 친구들 한테도 안 보이고 살았어요. 절개를 지켜 신랑을 맞이해야 할 숫처녀와 같이 자기 일신을 고히 간직했어요. 내가 십자가를 지더라도 상처 안 난 몸으로 지겠다, 순정이 역사시대에 처음 꽃필 때 그런 자리에서 십자가를 지겠다 하고 지냈어요.
전차비로 적선
내가 흑석동에 있을 때 시내에 들어오려면 전차값이 5전이었어요. 5전 주면 전차 타고 시내 가는 거예요. 그렇지만 시내까지 걸어갔어요. 화신까지 45분이면 갔어요. 빠르다구요. 빨리 걷는 사람이지요. 보통 사람은 한 시간 반 걸립니다. 여름날 학생복을 입고 땀을 흘리면서 걸어다닌 거예요. 그 돈 가지고 뭘했느냐? 불쌍한 사람에게 준 거예요. ‘천만금 주고 싶고, 여러분에게 복지를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지금 민족을 대신해서 주노니 이것을 받아 가지고 부디 복의 씨가 되시오’한 거예요.
내가 그때 노량진에 좀 있었는데, 거기에서 학교까지 5전이면 전차를 타는데 전차를 타지 않고 그 5전을 넣어 가지고 걸어오다가 내리는 곳 쯤에서 적선하고, 갈 때는 노량진에서 적선하고 그러고 다녔어요. 그러고 다니면서 ‘내가 이 나라 찾아들어와 가지고 큰소리할 때까지 잘 자라라. 죽지 말고 나와 더불어 크자’하면서 나무를 치고 다니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때 그 플라타나스가 다 없어졌더구만요.
여러분은 선생님이 소년시절에 오뉴월 삼복지경에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걸어다녔던 것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또, 전차나 버스 혹은 택시를 타고 편히 오더라도 지난날 선생님이 걸어다녔던 기준을 생각하고 선생님이 이 나라 이 민족의 한을 풀어주고 이 나라 이 민족이 하나님께 안길 수 있는 그날을 애타게 기다린 것과 같은 마음을 품고 나와야 합니다.
한강다리 밑의 빈민가 선생님도 옛날에 빈민굴에 들어가서 누더기 옷을 입고 생활해 보았어요. 이가 행렬을 지어 가지고 새벽부터 일진이…. 그런 경험도 있습니다.
선생님은 이 길을 고관들을 중심삼고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거리의 행인과 거지들을 중심삼고 출발한 것입니다. 빈민굴이 선생님의 활동의 첫 무대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눈물이 많습니다. 하지만 높은 권위를 가진 사람들은 눈물이 적습니다. 빈민굴 사람들 중에는 선생님이 한마디만 해도 눈물을 흘리며 대성통곡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높은 권위에 있는 사람들은 열 마디 백 마디를 하여도 대성통곡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복귀노정은 대성통곡을 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때문에 어떤 사람이 더 가까우냐 하면 빈민굴에 있는 사람들이 더 가깝더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거지들이 살고 있는 곳에 많이 가 봤습니다. 그들은 낮에 밥을 얻어 가지고 오는데 거기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서로 먹을 것을 얻어 가지고 와서 ‘무엇을 얻어 왔어?’그러면 ‘나는 잔치집에서 돼지고지 얻어 왔어’하며 춤추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는 그것이 또 자랑이 되거든요. 수십 명이 밥을 얻으러 갔다 왔어도 한 사람이 조금만 기준이 오르게 되면 전부다 그것을 가지고 떠드는 것입니다.
빈민굴에 가 가지고 그 사람들 앞에 트루 페어런츠고 뭐고, 그저 손으로…. 젓가락이 뭐예요? 그저 변소 갔다 와서도 씻긴 뭘 씻어요? 그저 주워 먹고 싶어도 없어서 못 주워 먹지요. 파리가 붙었어도 먹어야 돼요. 그거 그래야 된다구요. 거기 있는 사람들은 여기 쓰윽 긁으면 손가락 자리가 난다구요. 때가 끼어서 말이예요. 그런 손으로 갖다 주면 정성껏 주는데 안 먹겠다고 치워 버려야 되겠어요? 받아서 먹어야 된다구요.
불우한 이웃 돕기
그리고, 집에서 학비를 보내게 되면, 학비를 4월 초순이라 하게 되면 5월이면 다 써 버려요. 다 불쌍한 사람에게 나눠 주는 거예요. 일화가 많아요. 그러고는 뭘하는 거냐? 신문배달도 하고 별의별 짓 다 하는 거예요, 장사도 하고. 그런 역사가 훤해요.
또, 선생님이 고향에서 보내 온 한 달 동안 학비를 가지고 학교로 올라가던 도중에 길가에서 죽음을 앞 둔 환자를 만나 그 환자에게 전부 다 돈을 주고 입원을 시켜서 치료해 가지고 돌려 보낸 그런 놀음도 다 했다구요. 그래 가지고 학자금을 내지 못해 독촉받던 그 생각, 그리고 그때 친구들이 동정해 준 일들은 일생 동안 잊혀지지 않는다구요. 그런 한때의 일이 선생님의 일생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내가 안다구요.
그때가 3월말쯤이었습니다. 새학기로 개학이 되어 학기금(학자금)을 가져왔을 때였는데, 가만 보니까 그 사람은 아들도 없는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천안에 자기 딸네 집이 있다고 해서 학기금을 몽땅 털어 여비와 병난 것을 치료할 것까지 다 해주었습니다. 그것을 보면 그 사람의 선조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구요. 내가 그때 발이 떨어지지 않아요. 돌아서지를 못 하겠더라구요.
그런 사람을 하늘이 만나게 해주었으면 하늘이 동정해 주라는 이상 동정해 준다고 해서 절대 손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열을 도와주라고 하는데 백을 도와주게 된다면 아흔은 내가 하늘 앞에 공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열을 도와 주기를 바라는데 다섯을 도와 주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하늘이 열만큼 도와주기를 바라게 될 때는 열 이상 도와줘야지, 열 이하를 도와줬다가는 여러분의 은혜 길이 막히는 거예요. 그것이 원칙입니다. 공식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내가 지갑에 있는 돈 전부 다 털었다구요. 책 살 돈, 하숙비 전부 다 털어서 안겨 보냈어요. 거기서 한 3킬로미터 정도 업고 가던 일이 엊그제 같이 생각나요.
그런 놀음을 해 나온 것이 선생님의 생활적인 심정의 배경이랄까. 그런 생활을 해 나왔기 때문에, 하늘은 기필코 그런 사람이 필요한 모양이지요? 그런 사람은 망하지 않는다는 거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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