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한수(漢水)의 북쪽 연상(漣上 연천(漣川))에는 가끔 효제(孝悌)와 독학(篤學)으로 뛰어난 선비가 있어서 그 행동이 풍속을 도타이 하고 말이 후인들에게 모범이 될 만하다. 이는 미수(眉叟) 허목(許穆) 선생의 유풍과 여교(餘敎)가 아직까지도 남아 있기 때문이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인물들이 모두 인몰(湮沒)되어 버리고 세상에 드러나 현달(顯達)하지 못하였으니, 어쩌면 이 세상의 교화가 쇠퇴하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근고(近古)의 처사인 정공 태묵(鄭公泰默)이 바로 그런 분 중의 한 분이다. 공은 어려서 《소학(小學)》을 배웠다. 그래서 번거롭게 공부를 채근하지 않아도 무엇이든 하기만 하면 그것이 그 법도에 맞았으며, 어른들의 서론(緖論 조리가 있는 언론)을 듣기를 즐겨하여 밤이 깊어도 들어가서 잘 줄을 몰랐는바, 어른들이 그만 물러가서 자라고 하면 말하기를, “저는 이렇게 말씀을 듣는 것이 즐거워서 피곤한 줄을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또 너무 지나친 각고(刻苦)를 염려하여 바둑판을 주면서 “글 읽는 여가에 가끔 머리를 식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으나, 공은 그저 억지로 한두 번 대국을 하다가는 문득 돌을 거두면서 말하기를, “아무 도움 될 것이 없고 괜히 마음만 버릴 뿐입니다.” 하였다.
공이 겨우 약관의 나이가 되었을 때에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서 끼니를 이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에 공은 개연히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늙으신 어버이께서 끼니를 잇지 못하시는데 자식 된 자가 어찌 편안히 앉아서 글이나 읽고 있는단 말인가.” 하였다. 그러고는 매일같이 새벽이면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 빗은 다음 당에 올라 어버이께 문안을 드렸고 물러나와서 뜰과 마당을 쓸었으며, 몸소 나가서 농사일에 전력을 다하며 잠시도 한가하게 쉬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또한 일하던 차림 그대로 어버이 곁에 나아간 적도 없었다. 또 밤에는 자리를 엮어 팔아서 어버이의 감지(甘旨)를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게 마련하였으며, 때때로 이웃의 어른들을 초청해서 음식을 대접하여 어버이의 마음을 즐겁게 해 드렸다.
아버지가 병환이 나자 공은 매일 밤 동생과 함께 북두성(北斗星)에 기도를 올렸으며, 병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받아서 올렸다. 그런데도 결국 세상을 떠나자 너무나 애통해하여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으며, 초종(初終)의 장례(葬禮)를 한결같이 《가례(家禮)》에 따라서 치렀다. 매달 초하루가 되면 산소를 찾아 전배(展拜)를 드리고 영역(塋域)을 둘러보면서 손수 풀을 뽑았으며, 통곡하고 방황하면서 차마 남겨 두고 떠나지 못하였다. 보름날에도 역시 이와 같이 하였는데, 추우나 더우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나 그치는 법이 없었으므로, 길에서 이를 보는 자들이 모두들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분이야말로 진정한 효자로구나.《소학(小學)》의 도리가 어떤 것인지를 지금 이분을 통해서 비로소 직접 보게 되었다.” 하였다. 그 뒤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을 때에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거상(居喪)을 하였다. 그리고 3년상이 모두 끝난 뒤에는 새벽에 일어나서 예묘(禰廟)에 나아가 배알(拜謁)하였으며, 초하루와 보름에는 종가(宗家)에 가서 다시 조묘(祖廟)에 배알하였다. 만년에는 병환이 중하여 제사에 참여할 수가 없게 되자 관대(冠帶)를 하고 방에 엎드려서 날이 밝을 때까지 눈물을 흘렸다.
공은 동생과의 우애가 독실하여, 동생이 병이 들자 자신이 대신 병을 앓게 해 주기를 하늘에 빌었다. 공이 늙으매 동생도 머리가 셌는데, 형제가 화기애애하게 마주 앉아서 《소학(小學)》이나 《효경(孝經)》같은 책들을 펼쳐 놓고 서로 강론하면서 낙으로 삼았다. 혹시 동생이 늦도록 오지 않는 날이라도 있으면 자손들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동생이 죽자 매일같이 빈소(殯所)에 가서 곡하였다.
언젠가 종형(從兄)이 죽어서 복중(服中)에 있을 때의 일이다. 이 때 이웃 사람이 고기잡이를 가자고 청하였는데 공은 공최(功衰)를 입는 중이라 하여 사양하고 가지 않았다.
공은 자녀들에 대한 교육이 엄하여 법도가 있었다. 그래서 자녀들이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면 반드시 그 유력(遊歷)한 곳과 듣고 본 것들을 일일이 기록해서 보고하도록 하였다.
외가가 몹시 가난한 것을 마음아파하여 제전(祭田)을 마련하여 주었으며, 외조부모의 기일(忌日)이 돌아오면 반드시 제수를 마련해 가지고 찾아가서 도와 주었다. 또 이웃에 급한 일이 있을 때도 반드시 있는 힘을 다해서 도와 주었다. 집안의 노복(奴僕)이 죽었을 때에는 관곽(棺槨)과 회격(灰隔)할 석회(石灰)를 갖추어서 제사를 지내 주고 곡하였다.
또한 그 성품이 재물을 모르고 의리를 좋아하여, 해마다 봄과 여름이 되면 곡식을 내어서 가난한 일가들에게 꾸어주었다가 가을이 되면 다시 거두어들여서 저장하였는데, 사람들이 이를 ‘정씨의 의창(義倉)’이라고 불렀다.
어버이 산소를 개장할 때에 족인(族人)들이 대대로 장사 지내 온 곳에 터를 구하게 되었는데, 공이 지성으로 사정을 해서 주인의 허락을 받았다. 이에 공은 전지를 마련해 주어서 그에게 보답하였으며, 그 뒤 그 사람이 몹시 가난해져서 전장(田庄)을 팔게 되자 공이 그를 위해 그 땅을 사 두었다가 그에게 돌려주어서 부쳐 먹게 하였다. 그러나 일찍이 그 수입에 대해서는 한 번도 채근한 적이 없었다. 언젠가 공이 족인(族人)의 집을 산 적이 있었는데, 그 족인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려고 하였다. 그러자 공이 슬퍼하며 말하기를, “나 때문에 이처럼 떠나게 된단 말인가.” 하고는, 즉시 땅을 갈라서 그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상의 사례들은 모두 공의 행실 중에서 풍속을 도타이 할 만한 것들이다.
공은 평소에 늘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벼슬을 하지 못했으니 당연히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을 다스린 업적이 없다. 그러나 가정(家庭)에 대해서마저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겠느냐.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아서 내가 본래 타고난 본성을 온전히 한다면, 우리 부모가 기뻐할 것이고, 친척이 기뻐할 것이며, 이웃이 기뻐할 것이고, 친구가 기뻐할 것이니, 이 또한 나라를 위한 정사(政事)이다. 그런데도 누구를 꺼려서 하지 않는단 말이냐.”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몸을 다스리기란 어려운 것이며 가정을 다스리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그 몸을 다스리고 가정을 다스릴 수가 있다면, 이웃 간의 문제야 무엇이 어렵겠으며 붕우간의 문제야 무엇이 어렵겠느냐.”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가 문학(文學)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것을 듣고 기억만 많이 해서 그것을 가지고 말이나 다듬고 문자나 꾸민다면, 그것이 자신을 다스리는 공부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너희들은 내가 남들과 송사(訟事)하는 것을 보았느냐? 송사를 좋아하는 자는 이기는 데에 힘쓰게 되고, 이기는 데에 힘쓰면 적이 많아지며, 적이 많으면 망하는 법이다. 또 너희들은 내가 남들의 단점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보았느냐? 남들의 단점을 말하게 되면, 이것은 단지 남들의 비판을 불러올 뿐만이 아니다. 자기 자신도 제대로 잘 하지 못하면서 어느 겨를에 남들의 흉이나 본단 말이냐. 그리고 너희들은 내가 재물 때문에 남들과 다투는 것을 본 일이 있느냐? 재물로 인해서 화를 낸다면 단지 남의 원한을 살 뿐만 아니라 비루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하였다.
공의 죽음에 임박하여 여러 손자들이 공에게 유교(遺敎)를 청하였다. 그러자 공이 억지로 일어나서 안석에 몸을 기댄 채 웃으면서 말하기를, “만일 자손들이 어질다면 어른들의 유계(遺戒)가 없다고 해서 선하지 않은 일을 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자손들이 어질지 못하다면 설령 유계가 있더라도 자손들이 이를 잘 지켜서 제대로 실천할 수가 있겠느냐. 그래도 듣고 싶다면 한(漢)나라 소열제(昭烈帝)가 자식을 경계하여 말한 글이 아마도 괜찮을 것이다.” 하고는, 베개를 당겨 베고 누워서 ‘한 마디 말을 할 때도 감히 부모를 잊을 수 없고, 한 번의 움직임에도 감히 부모를 잊을 수 없다’는 말과 ‘남을 사랑하면 남들이 항상 나를 사랑하고, 남을 공경하면 남들이 항상 나를 공경한다’는 말과 ‘가문은 반드시 자신이 스스로 헐뜯은 뒤에야 남들이 헐뜯게 되고,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자신을 능멸한 뒤에야 남들이 능멸하게 된다’는 등의 말들을 구송(口誦)하였다. 그러고는 위연(喟然)히 탄식하여 말하기를, “새가 죽을 때에는 그 울음이 슬프지만, 사람이 죽을 때에는 그 말이 착하다.” 하였다.
이상의 것들은 공이 한 말들 중에서 족히 후세의 모범이 될 수 있는 것들이다.
얼마 전에 시골의 사대부들이 모여서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저 정(鄭) 아무개의 형제분과 같이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고 학문이 독실한데도 만일 이를 인몰(湮沒)시켜서 세상에 드러내지 않는다면, 이는 바로 우리들의 책임이 될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이에 대한 사실들을 수집하고 기록해서 이 고을 태수의 문정(門庭)에 여러 번 고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를 천명(闡明)하여 선양(宣揚)하는 어떠한 조치도 내리지 않고 있다. 아, 그렇다면 이것이 어찌 세상의 교화(敎化)가 쇠미해졌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런 것이 공에게야 무슨 손상이 되랴.
공은 순조 임금 계미년(1823, 순조23)에 태어나서 당저(當宁 금상(今上)) 무자년(1888, 고종25)에 세상을 떠났는데, 연천(漣川)의 국사당(國師堂) 건좌(乾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의 세계(世系)는 동래(東萊)에서 비롯되었는데, 고려 때에 좌복야를 지낸 휘 목(穆)으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여러 명덕(名德)들이 이어서 나왔다. 그 가운데 휘 난종(蘭宗)은 좌참찬을 지냈으며, 그 뒤 여러 대를 전하여 휘 내주(來周)에 이르러서 참판을 지냈는데 공에게는 5대조가 된다. 고조 휘 기서(箕瑞)는 진사를 했으며, 증조 휘 언석(彦錫)도 진사를 했다. 할아버지의 휘는 노(潞)이고 아버지의 휘는 도동(度東)이며, 어머니는 남양 홍씨(南陽洪氏)인데 홍창학(洪昌學)의 딸이다.
공의 배위(配位)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허혼(許焜)의 딸인데, 두 아들을 두었다.
상사(上舍) 허헌(許憲)씨가 공의 도덕과 의리에 대하여 항상 나에게 말하면서 그 훌륭함을 그대로 버려둘 수가 없다고 했는데, 그간에 또 공의 손자 최진(最鎭)이 쓴 공의 사행(事行)에 관한 글 한 통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주면서 공의 행장(行狀)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허 상사는 미옹(眉翁 허목(許穆))의 후예로서 그 가학(家學)을 계승한 자이니, 의당 그가 한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이를 거절하지 못하고 이상과 같이 서술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