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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백씨(伯氏) 정언공(正言公)이 만력(萬曆) 갑신년(1584, 선조17)에 별세하여 괴산(槐山) 선영의 뒤편에 장사 지냈다. 갑신년에서 34년이 지난 정사년(1617, 광해군9)에 아우 근(根)이 비로소 빗돌에 글을 새기니 감히 늦추려고 한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력 을사년(1605, 선조38)에 백씨가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에 추증된 것은 둘째 아들 시행(時行)이 선무 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초 아우 근이 외람되이 호성 공신(扈聖功臣) 2등에 끼어 백씨가 호성 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 2등에 추록되었고 그로 인하여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장남 시회(時會)가 선무 원종공신 1등에 참여하여 이조 판서에 가증(加贈)되었다. 갑인년(1614, 광해군6)에 여러 차례 증직되어 의정부좌찬성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議政府左贊成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가 되었으니, 대개 시회가 위사 공신(衛社功臣) 및 형난 원종공신(亨難原從功臣) 1등에 들었기 때문이다. 아, 성조(聖朝)에서 명을 주심이 이에 미쳤으니 어찌 두 아들과 한 아우가 이룰 수 있는 것이겠는가. 실로 백씨가 선을 행한 보답이 별세한 뒤에 발로된 것이리라.
백씨의 휘(諱)는 격(格), 자는 정부(正夫)이다. 진주(晉州) 유씨(柳氏)는 좌우위 상호군(左右衛上護軍) 정(挺)으로부터 비로소 드러났다. 여러 대를 지나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 판리사(金紫光祿大夫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理司)에 추봉(追封)되고 행 은자광록대부 추밀원부사(行銀紫光祿大夫樞密院副使)인 홍림(洪林)과 광정대부 도첨의찬성사 판민부사 상호군(匡靖大夫都僉議贊成事判民部事上護軍) 양화공(良和公) 욱(栯)이 있다.
그 후에 알려진 분으로 5세 휘 종식(宗植)은 가정대부(嘉靖大夫) 공조 참판(工曹參判)이다. 이분이 휘 영정(永貞)을 낳았으니 바로 우리 고조부로 일찍 별세하셨는데, 백부 형조 참판(刑曹參判) 휘 창문(昌門) 공이 가정(嘉靖) 을축년(1565, 명종20)에 전라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을 때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고 고조비 사천 목씨(泗川睦氏)는 숙인(淑人)에 추증되었다.
증조 휘 팽수(彭壽)는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인데, 백부가 귀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 불초 증손 근이 재주도 없이 진원군(晉原君)으로 훈봉(勳封)되었으므로 이조 참판, 이조 판서로 거듭 추증되었다. 증조비 권씨(權氏)는 좌사간(左司諫) 기(技)의 딸이고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매헌(梅軒) 우(遇)의 손녀인데,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좌사간의 묘가 괴산의 영진촌(永津村)에 있었으므로 증조고와 증조비를 비로소 같은 군(郡) 몽촌(夢村)의 영등산(永登山)에 장사 지냈다.
조고 휘 윤(潤)은 예빈시 별제(禮賓寺別提)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조비 진주 강씨(晉州姜氏)는 정부인에 추증되었는데, 백부 때문에 추은(推恩)한 것이다. 조비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세홍(世弘)의 딸이며 겸 동북면도순문사(兼東北面都巡問使) 통정(通亭) 회백(淮伯)의 후손이다.
선군(先君)의 휘는 영문(榮門), 자는 흥숙(興叔)으로, 성균 진사(成均進士)이다. 증손자 적(頔)이 정정옹주(貞正翁主)에게 장가들어 진안위(晉安尉)가 되었기 때문에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불초자식 근이 출계하여 선군의 종제(從弟)의 후사가 되었으니 유명(遺命)에 따른 것이다. 추증의 법은 본생부모와 본생조부모에게는 미치지 못한다. 어머니 죽산 안씨(竹山安氏)는 숙인(淑人)에 추증되었다. 어머니의 친정아버지 휘 세언(世彦)은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삼중대광 문하찬성사 판호조사 연흥부원군(三重大匡門下贊成事判户曹事延興府院君)이며 시호가 양양공(襄良公)인 한평(漢平)의 후손이다. 어머니의 친정어머니 진주 유씨(晉州柳氏)는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 의신(義臣)의 따님이다.
백부(伯父)와 선군은 일찍이 조성(趙晟) 선생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상공(相公) 청천(聽天) 심수경(沈守慶) 등 여러 공들과 함께 공부하였다. 선군은 지극한 행실과 후한 덕을 지녀 효도와 우애로 돈목(敦睦)하였으며 벗들에게 신의가 있었으므로 종족과 친구들이 벼슬하여 현달할 것이라 날로 기대하여 혜택을 바라기도 하였다.
우리 어머니는 부인중에서 사군자(士君子)의 식견이 있었는데, 그 모부인(母夫人)께서 경사(經史)에 널리 통달하고 사리에 정통하였으므로 우리 어머니께서 그 어머니의 가르침에서 얻은 것이 많았다. 어머니가 9세 때에 정랑공(正郞公 안세언)이 별세하셨다. 두 아들이 모두 현철(賢哲)하였으나 3년 동안 제사 받드는 일을 모부인께서 우리 어머니에게 주관하도록 명하셨는데, 《시경》에 이른바 공경하는 계녀라는 것이니 진실로 세상에서 본래 드문 일이다. 결혼하여 우리 가문에 들어와서는 대부인(大夫人)께서 가장 총애하면서 존중하였는데, 백부공이 항상 선군에게 말씀하기를 “대부인께서 제부(弟婦)를 매우 마땅하게 여기시니 우리 집안의 다행일세.”라고 하셨다. 가정 을사년(1545, 인종1) 2월 9일에 백씨(伯氏)를 낳았는데, 대부인이 매우 기뻐하면서 항상 “이 아이가 마침내 우리 집안을 반드시 세울 것이다.”라고 하셨다.
백부 참판공은 을사사화의 여화(餘禍)를 입고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서 탄핵을 받아 삭출(削黜)되었다. 계축년(1553, 명종8)에 다시 기용되어 우봉 현령(牛峯縣令)으로 나갔다가 온양 군수(温陽郡守)로 옮겼다. 병진년(1556) 5월 1일 대부인이 군(郡)에서 별세하셨다. 선군께서는 백부를 따라 영등(永登)의 선영에서 시묘살이를 하셨다. 선군께서는 상례 집행하기를 제도보다 넘치게 하다가 이듬해 6월 14일에 마침내 상중(喪中)에 별세하셨다. 우리 어머니는 서울에 계셨는데, 부음이 이르자 가슴을 치고 곡하면서 하늘에 호소하다가 기절(氣絶)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백부는 선군을 선영의 서쪽 줄기 계좌정향(癸坐丁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서울 집으로 반혼(返魂)할 당시 백씨의 나이는 겨우 13세였고 나는 9세였으며 참봉 남경철(南景哲)의 아내가 된 막내 여동생은 3세였다. 어머니께서 애써 목숨을 부지한 것은 다만 슬하에 우리 3남매가 있었기 때문이었으니 아픔을 참고 가난을 편히 여기면서 자식을 기르고 가르치셨다. 백씨는 상복을 입고 거친 밥을 먹으면서 조석으로 곡하고 전물(奠物)을 올리기를 한결같이 성인(成人)처럼 하였다. 우리 형제는 어머니의 비호(庇護)를 받으며 성장하였다.
융경(隆慶) 무진년(1568, 선조1) 증광시(增廣試)에서 백씨는 진사시에 합격했고 경오년(1570)에 나는 사마시에 합격했다. 임신년(1572) 봄에 내가 대과에 장원으로 합격했고 만력(萬曆) 경진년(1580) 2월 알성시(謁聖試)에 백씨는 을과로 합격했다. 나는 다리가 마비되는 병을 앓아 정언(正言)으로 있으면서 휴가를 받아 병상에 누워 있었는데, 문득 길한 소식을 듣고 나도 모르게 일어서서 문을 나가 말을 타고 가서 어머니께 알렸다.
어머니는 밤새도록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내게 자상하게 말씀하기를 “너는 이미 다행히 젊은 나이에 조정에 이름을 올렸고 이제 네 형이 또 급제하였다. 미망인(未亡人)인 내가 곧바로 죽지 않고 너희들 형제가 입신양명하는 것을 보게 되었으니 이제 비록 죽더라도 무슨 여한이 있겠느냐.” 하셨다. 나는 다음 날 새벽 병든 몸을 억지로 끌고 나아가 사은하였다. 이날 합격증을 나눠주고 연회가 있었으며 어머니를 위해 축하연을 마련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께서 병들어 4월 2일에 마침내 별세하셨다.
백씨는 마음에 스스로 믿기를 마침내 녹봉으로 어머니를 봉양하여 소망을 이룰 수 있다고 여겼는데, 갑자기 망극한 아픔을 당하여 부여잡고 통곡하다가 기절하는 등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였다. 처음 상을 당해서부터 물이나 미음도 입에 넣지 않아서 지팡이를 짚고도 일어서지 못했다. 계빈(啓殯 발인하기 전에 관을 꺼내는 일)하여 배로 운구하고 선영에 도착하여 선묘(先墓)의 왼쪽에 합장하였다. 불초 아우인 나를 데리고 묘소 곁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백씨는 전번 상에서 혈기가 아직 이루어지기도 전에 상처를 받음이 너무 깊었는데, 이번 상에서는 더욱 스스로 힘을 다하여 항상 죽을 마시면서 기식(氣息)과 근력이 미치지 못함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처음에는 졸곡 후에 마땅히 거친 밥을 먹겠다고 하였으나 소상(小祥)이 지나서도 여전히 바꾸지 않았다. 친척과 교유(交遊)하는 사람들이 간하는 말로도 돌이키지 못한 채 문득 3년이 지났다. 불초 아우는 경진년(1580, 선조13) 겨울에 양부(養父)의 병이 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가까스로 몸을 부축하여 와서 뵈었으나 12월 7일 불행히도 별세하기에 이르렀다. 신사년(1581) 봄 얼음이 풀리자, 혈혈단신으로 물가를 따라가다가 수로를 경유하여 몽촌(夢村)의 석정(石頂) 선영에 길지를 골라 장사 지냈다. 양모(養母)가 살아계셨기 때문에 만리현(萬里峴)의 선려(先廬 선대로부터 물려온 집)에서 반곡(返哭)하였다. 이 때문에 어머니의 궤연(几筵)은 백씨 혼자서 받들어 모셨다. 불초 아우는 실낱같은 숨을 힘겹게 쉬면서 분주하게 오가느라 초췌함이 날로 심하여 거의 쓰러질 지경이 되었다.
백씨는 밤낮으로 아우가 버틸 수 없음을 걱정하여 지나친 슬픔 때문에 목숨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권면하였으나 자신은 지극함을 다하지 않음이 없어서 원기(元氣)가 참으로 안에서 약해지는 줄을 알지 못했다. 마침내 난치의 병이 되어 임오년(1582, 선조15) 여름 상을 마칠 때부터 갑신년(1584)까지 약물과 침술 치료를 했지만 끝내 효과를 보지 못하고 이해 5월 2일 마침내 이 병으로 일생을 마쳤다. 향년이 겨우 40세였으니 어찌 차마 말하랴, 어찌 차마 말하랴.
백씨는 순후(醇厚)한 성품을 타고 나서 어려서부터 숙성(夙成)하여 집에 들어가서는 자친(慈親)의 가르침을 받들고 나가서는 유익한 벗을 취하였다. 반포(反哺)하는 정성은 진실로 과거에 응시하는 것으로 급선무를 삼았으나 일찍이 이치를 밝히고 몸가짐을 삼가는 학문이 있음을 알아서 말은 어눌하였지만 선을 따름은 민첩하였다. 태학(太學)에서 공부할 때 아름다운 명성이 성하여 사람들이 모두 충신(忠信)한 장자(長者)로 추대하자, 더불어 사귀기를 바라는 자들이 날마다 찾아왔다. 포의(布衣) 시절에 이미 중망(重望)을 받아 학행으로 천거되어 선릉 참봉(宣陵參奉)에 임명되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선발되어 들어갔으며 상기를 마치고 천거되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임명되었다가 대교(待敎)로 자리를 옮겼다. 이해 가을에 천거되어 승정원 주서(注書)가 되었는데, 마침 황홍헌(黃洪憲)과 왕경민(王敬民) 두 조사(詔使)가 올 때를 만나 후설(喉舌)의 지위로 접응(接應)할 때에 사무가 매우 많았다.
백씨는 평소 글씨를 잘 썼는데 붓놀림이 나는 듯하면서도 조금도 빠뜨리는 것이 없었다. 도승지(都承旨) 서애(西厓) 상공 유성룡(柳成龍)이 동석하고 있었는데 탄복해 마지않았다. 조사가 일을 마치고 돌아가자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체직되어 대교에 임명되었다가 봉교로 승진하였다. 계미년(1583, 선조16) 봄에 두 번째 당후(堂后)에 임명되었으나 병 때문에 나가 사은숙배하지 못하였는데, 다시 봉교(奉敎)에 임명되었다. 가을에 성균관 전적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자 인의 겸 한성부참군(引儀兼漢城府參軍)으로 체배(遞拜)되었다. 가을 겨울 이래로 두 번 정언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 사은숙배하지 못했다. 갑신년(1584) 봄에 다시 정언에 임명되었는데, 일을 논함에 구차히 남의 비위를 맞추지 않고 자못 쟁신(爭臣)의 풍도가 있었다. 병으로 사직하여 공조 좌랑으로 교체 임명되었으나 병이 심해졌다. 다섯 번째로 정언에 임명되자 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올렸으나 극무(劇務)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우리 형제는 젊어서부터 서로 의지하며 살았으므로 아우가 곁에 없으면 백씨는 하루도 편안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홍문관의 교리가 되자 사직소를 올리고 병시중을 들었다.
백씨는 항상 홀로 지냈는데, 하루는 부인을 불러 말하기를 “목숨이 길고 짧음은 명에 달렸으니 내가 비록 갑자기 죽더라도 아우가 있어서 걱정이 없소.” 하였다. 여러 자식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숙부가 있으니 내가 있는 것과 같다.” 하였고 내게는 “내가 스스로 헤아리기를 기력(氣力)이 아우처럼 약하지 않아서 비록 죽을 마시더라도 오히려 지낼 수 있다고 여겼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진실로 착각이었네. 자식들 중에 시회는 이미 장가를 들었으나 나머지는 모두 어리고 시행은 가장 오랫동안 병구완하느라 기력이 또한 몹시 허하니 내가 죽은 뒤에 나로써 깊이 경계하여 살 길을 지시해 주게.”라고 하였다. 생사의 즈음을 밤과 낮이 바뀌는 것처럼 보아 조용히 동요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부인 이씨(李氏)는 이조 참의에 추증된 희천(希天)의 딸이며 종실인 정국 공신(靖國功臣) 운수군(雲水君) 효성(孝誠)의 현손녀이다. 처음 시집왔을 때부터 어머니를 받듦에 어긋남이 없었고 백씨 섬기기를 손님처럼 하였다. 친척과 비복들을 대함에 모두 은의(恩意)가 있었다. 과부가 된 다음에는 자식들에게 바른 길로 가도록 가르쳤다. 연이어 여덟아홉 고을에서 전성(專城)의 보살핌을 누렸고 진안위(晉安尉)의 길례(吉禮)를 보았다. 이 때문에 여러 번 봉해져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되었으므로 세상에서 영예로 여겼다. 백씨보다 31년 뒤에 70세로 생을 마쳤으니 갑인년(1614, 광해군6) 9월 29일이었다.
자식은 5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시회는 품계가 통정대부(通政大夫)이며 여러 차례 군(郡)과 부(府)의 수령을 지냈고 지금은 선산 부사(善山府使)이다. 차남 시행은 홍문관 교리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삼남 시형(時亨)은 고령 현감(高靈縣監)이다. 사남 시보(時輔)는 횡성 현감(橫城縣監)이다. 내가 아들을 낳았으나 요절했으므로 시보를 후사로 삼았다. 시민(時敏)은 결혼하기 전에 죽었다. 딸은 정읍 현감(井邑縣監) 김출(金秫)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여섯이다. 석(碩)은 진사로 시회의 소생이다. 적(頔)과 영(潁)은 시행의 소생인데, 적이 바로 진안위(晉安尉)이다. 수(須)는 시형의 소생이다. 구(䪷)와 경(熲)은 시보의 소생이다. 손녀는 열이고 외손녀는 셋이다. 사인(士人) 민성청(閔聖淸)과 진사 오준(吳竣)은 시회의 사위이다. 사인 목성선(睦性善)은 시행의 사위이다. 사인 김정(金鼎)은 시형의 전처소생의 사위이고 사인 경이후(慶貽後)와 이기현(李耆賢)은 시형의 후처소생의 사위이다. 막내딸은 어리다. 시보의 세 딸은 모두 어리다. 사인 홍선(洪銑)과 김종필(金宗泌)은 김출의 사위이다. 석은 1남 1녀를 낳았다. 구는 2남을 낳았다. 내외의 증손자녀가 열여섯인데 모두 어리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예전에 우리 선군께서 / 昔我先君
우리 어머니와 함께 / 與我慈闈
훌륭한 재능 품고 덕을 베풀면서 / 懷寶種德
광휘를 숨기셨는데 / 閟其光輝
기다려 발휘함이 있었으니 / 有俟而發
이분이 바로 백씨였네 / 是在伯氏
이룸은 진실로 더뎠건만 / 成也固遲
빼앗기는 어찌 이리 쉽게 하였나 / 奪之何易
하늘이 어진 덕을 주셨는데 / 天賦以仁
겨우 사십을 사셨네 / 壽纔不惑
인망이 한창 높아 / 人望方隆
잠시 간관으로 있었지 / 暫試諫掖
선은 보답 받지 않음 없으니 / 善無不報
이것이 정상적인 이치인데 / 此理之常
신명이 들어주심 / 神之聽之
어찌 그리 아득한가 / 一何杳茫
그 몸에 누리는 것은 / 享于厥躬
때로 그침이 있었으나 / 有時而輟
후세에게 열어 / 啓之於後
한없이 복을 남겼네 / 垂裕無極
은혜를 미루어 작위를 줌이 / 推恩錫爵
저승까지 미쳤으니 / 及於泉壤
반드시 남은 경사 있다는 것은 / 必有餘慶
이제야 어긋나지 않게 되었네 / 于今不爽
아들 넷이 / 有子四人
모두 벼슬길에 올랐고 / 俱躋仕路
못난 아우 나는 / 不肖弟根
외람되이 대려에 끼었으며 / 猥參帶礪
의젓한 손자 / 嶷嶷有孫
또한 부마가 되었네 / 亦備儀賓
부인은 과부로 지내신 지 / 夫人寡居
삼십일 년인데 / 三十一春
지방관인 아들의 높은 봉양 받으며 / 列鼎專城
백발로 칠십을 사셨지 / 鶴髮稀年
지란옥수가 / 芝蘭玉樹
앞에 줄지어 있으니 / 竝列于前
아마도 대대로 / 庶幾世世
자손들이 보존되리라 / 子孫是保
이 글을 보고 게을리 말지어다 / 視此無怠
비석이 묘도에 있느니라 / 碑在墓道
[주-D001] 백씨(伯氏) : 유격(柳格, 1545~1584)으로,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정부(正夫), 호는 청만(晴巒)이다.[주-D002] 시행(時行) : 유시행(柳時行, 1566~1607)으로, 본관은 진주, 자는 중건(仲健), 호는 기정(惎汀)이다.[주-D003] 위사 공신(衛社功臣) : 1546년(명종1)에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윤임 등 대윤 일파를 몰아낸 자들에게 내린 훈명이다. 처음 칭호는 보익 공신(保翼功臣)이었다가 위사 공신으로 바꾸었고 공신 등급도 재조정되었다. 보익 공신은 권력을 장악한 소윤 일파가 상대 세력을 제거한 후 시행한 논공행상이었다. 친ㆍ인척 등을 모록(冒錄)하기도 하여 사림파의 많은 비난을 받아오다가 1577년(선조10)에 모두 삭훈되었다.[주-D004] 형난 원종공신(亨難原從功臣) : 저본(底本)에 ‘享’으로 되어 있어 수정하여 번역하였다. 형난 공신은 1612년(광해군4)에 김직재(金直哉)의 옥사를 처결한 공로로 1613년에 책록되었으나 무고임이 밝혀져 인조반정 후 폐삭되었다.[주-D005] 정(挺) : 유정(柳挺)은 고려 의종(毅宗)대부터 고종(高宗)대까지의 무신으로, 진주 유씨(晉州柳氏)의 시조이다. 최충헌(崔忠獻)의 외조부로, 중서령(中書令) 좌우위(左右衛) 상장군(上將軍)에 이르렀고 진강부원군(晉康府院君)에 봉해졌다.[주-D006] 창문(昌門) : 유창문(柳昌門, 1514~1570)으로, 본관은 진주, 자는 흥백(興伯)이다.[주-D007] 우(遇) : 권우(權遇, 1363~1419)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려(仲慮), 호는 매헌(梅軒)이다.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서 배웠다. 저술로 《매헌집(梅軒集)》이 있다.[주-D008] 회백(淮伯) : 강회백(姜淮伯, 1357~1402)으로, 본관은 진주, 자는 백보(伯父), 호는 통정(通亭)이다.[주-D009] 불초자식 …… 되었으니 : 유근은 생부 유영문(柳榮門)의 사촌 동생 유광문(柳光門)의 후사로 들어갔다.[주-D010] 조성(趙晟) : 1492~1555. 본관은 평일(平一), 자는 백양(伯陽), 호는 양심당(養心堂)이다. 동생 조욱(趙昱, 1498~1557)과 함께 삭녕(朔寧)에 집을 짓고 학문을 강론하며 지냈는데, 세상 사람들이 이들을 정호(程顥)ㆍ정이(程頤) 형제에 비겨 칭송하였다. 율려(律呂)에 밝을 뿐 아니라 의약과 산수에도 정통하여 군직(軍職)에 나아가 의술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저서로 《양심당집(養心堂集)》이 있다.[주-D011] 심수경(沈守慶) : 1516~1599.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희안(希安), 호는 청천당(聽天堂)이다. 대사헌과 8도 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1590년(선조23) 우의정에 오르고 기로소에 들어갔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체찰사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였다. 저서로 《청천당시집(聽天堂詩集)》, 《견한잡록(遣閑雜錄)》이 있다.[주-D012] 시경에 …… 것이니 : 《시경》 〈채빈(采蘋)〉에 “이에 올리기를 종실의 창문 아래에 하도다. 누가 이것을 주장하는가. 공경하는 계녀로다.[于以奠之, 宗室牖下. 誰其尸之, 有齊季女.]”라고 한 말을 인용하였다.[주-D013] 백부 …… 삭출(削黜)되었다 : 을사사화(乙巳士禍)는 1545년에 인종(仁宗)이 죽고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명종의 외숙인 윤원형(尹元衡) 등 소윤(小尹)이 인종의 외가 세력인 윤임(尹任)ㆍ유인숙(柳仁淑) 등을 반역 음모로 몰아 죽인 사건이다. 그 후 경술년(1550, 명종5)에 대사헌 송세형(宋世珩), 대사간 원계검(元繼儉) 등이 “유창문(柳昌門)은 유인숙과 동성 지친으로 유인숙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친자식과 같았는데, 유인숙이 복주(伏誅)되자 간인(奸人)에게 붙어 현직(顯職)을 보존했으나 역시 음험하고 반복한 일이 많아 사람들이 모두 통분해 하고 있습니다.”라고 아뢰어 관작이 삭탈되었다. 《明宗實錄 5年 7月 16日》 유창문은 유근의 백부이다.[주-D014] 상중(喪中)에 별세하셨다 : 불승상(不勝喪)은 부모의 상중에 죽는 것을 말한다. 상중에는 술과 고기 등 맛난 음식을 먹지 않고 소찬(素饌)만을 먹는 것이 예(禮)이다. 그러나 몸이 여위어 병이 나면 술과 고기를 먹어 몸을 보해야 하는데, 예만을 고집하고 몸을 돌보지 않아 결국 상을 마치지 못하고 죽는 것을 이른다. 《禮記 曲禮上》[주-D015] 합격증을 …… 있었으며 : 창방(唱榜)은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에게 합격증을 주는 것을 말한다. 대과(大科) 합격자에게는 홍패(紅牌)를 주고 소과(小科) 합격자에게는 백패(白牌)를 준다. 은영연(恩榮宴)은 임금이 문과와 무과에 급제한 사람에게 베풀어 주는 잔치를 말한다.[주-D016] 부여잡고 통곡하다가 : 반호(攀號)는 반백비호(攀栢悲號)의 준말로, 측백나무를 부여잡고 슬피 울부짖는다는 뜻이다. 진(晉)나라 왕부(王裒)는 아버지 왕의(王儀)가 문제(文帝) 때에 사마(司馬)로 재직하면서 직간했다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것을 슬퍼하여 조정이 벼슬을 주려고 불러도 나가지 않았다. 여막에서 지내며 아침저녁으로 묘소 곁의 측백나무를 잡고 우니 흐르는 눈물에 젖어 나무가 말라 죽었으며 조정이 있는 서쪽을 향해서 앉지도 않았다고 한다. 어버이의 상(喪)에 몹시 슬퍼함을 뜻한다. 《晉書 卷88 王裒列傳》[주-D017] 지나친 …… 된다 : 훼불멸성(毁不滅性)은 친상을 당하여 너무 슬퍼하다가 목숨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효경》 〈상친장(喪親章)〉에 “친상을 당하여 삼 일이 지나면 음식을 들게 하여 어버이의 죽음 때문에 자기의 목숨까지 상하게 하지 않도록 백성들을 가르쳐야 한다. 지나친 슬픔 때문에 목숨을 잃게 하지 않는 이것이 바로 성인의 다스림이다.[三日而食, 敎民無以死傷生. 毁不滅性, 此聖人之政也.]”라고 하였다. 또 《예기》 〈상복사제(喪服四制)〉에 “상을 당한 지 3일 만에 밥을 먹으며 3개월 만에 머리를 감고 1년 만에 연복을 입는데, 몸이 야위어도 생명을 잃는데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은, 이는 죽은 사람 때문에 산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까닭이다.[三日而食, 三月而沐, 期而練. 毁不滅性, 不以死傷生也.]”라고 하였다.[주-D018] 지극함을 …… 없어서 : 《대학장구》 전 2장에 “《시경》에 이르기를 ‘주나라가 비록 오래된 나라이지만 그 명이 새롭다.’ 하였다. 이러므로 군자는 그 지극함을 쓰지 않는 바가 없는 것이다.[詩曰, 周雖舊邦, 其命維新. 是故君子, 無所不用其極.]”라고 한 말을 차용하였다.[주-D019] 유익한 벗 : 익우(益友)는 유익한 벗이라는 말이다. 공자께서 “유익한 것이 세 가지 벗이다. 벗이 곧으며 벗이 성실하며 벗이 견문이 많으면 유익하다.[益者三友, 友直, 友諒, 友多聞, 益矣.]”라고 말씀한 데서 유래하였다. 《論語 季氏》[주-D020] 반포(反哺)하는 정성 : 새끼 까마귀가 커서 어미 까마귀의 은혜를 갚으려고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먹인다는 뜻으로, 자식이 자란 후에 어버이의 은혜를 갚는 효성을 가리킨다. 예로부터 까마귀는 효조(孝鳥)로 알려져 자오(慈烏)라고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拾遺記》[주-D021] 말은 …… 민첩하였다 : 《논어》 〈이인(里仁)〉에 “군자는 말은 어눌하고자 하고 실행은 민첩하고자 한다.[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라고 한 말을 변용하였다.[주-D022] 황홍헌(黃洪憲)과 왕경민(王敬民) : 황왕(黃王)은 1582년(선조15)에 황사(皇嗣) 탄생의 조서(詔書)를 반포하기 위해 조선에 온 명(明)나라 한림원 편수(翰林院編修) 황홍헌과 공과 우급사중(工科右給事中) 왕경민을 가리킨다. 《宣祖實錄 15年 9月 7日》[주-D023] 후설(喉舌)의 지위 : 왕명 출납과 나라의 중대한 언론을 담당한 승지(承知)를 비유하여 일컫던 말이다. 후설이란 목구멍과 혀를 써먹는 직책이라는 의미로 왕명을 전달하고 신하들의 말을 임금에게 전달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였다.[주-D024] 유성룡(柳成龍) : 1542~1607.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604년 호성 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에 봉해졌다. 도학(道學), 문장(文章), 덕행(德行), 글씨로 이름을 떨쳤다. 저서로 《서애집(西厓集)》, 《징비록(懲毖錄)》 등이 있다.[주-D025] 자식들에게 …… 가르쳤다 : 《춘추좌씨전》 은공(隱公) 3년 기사에 위(衛)나라 장공(莊公)의 아들 주우(州吁)가 오만 방자하게 굴자, 현대부(賢大夫) 석작(石碏)이 장공에게 “아들을 사랑한다면 그에게 바른길로 가도록 가르쳐서 잘못된 곳으로 빠져들지 않게 해야 한다.[愛子, 敎之以義方, 弗納於邪.]”라고 충간(忠諫)한 말이 있다.[주-D026] 전성(專城) : 한 고을을 맡아 다스린다는 뜻으로 곧 수령(守令)이 되어 부모를 봉양하는 것을 이른다.[주-D027] 진안위(晉安尉) : 유적(柳頔, 1595~1619)으로, 본관은 진주, 자는 군미(君美)이다. 유시행(柳時行)의 아들로 선조의 여덟째 딸 정정옹주(貞正翁主)에게 장가들었다. 존귀한 신분으로서도 몸가짐을 삼가 거처(居處)나 여마(輿馬), 포대(袍帶), 음식(飮食) 등을 일체 한사(寒士)처럼 소박하게 하였다. 광해군 때 두문불출하다가 25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星湖全集 卷58 晉安尉柳公神道碑銘》[주-D028] 여러 …… 선산 부사(善山府使)이다 : 유시회는 1600년(선조33)에 용천 군수(龍川郡守), 1603년에 회양 부사(淮陽府使), 1604년에 중화 부사(中和府使)에 임명되었고, 1612년(광해군4)에는 평산 부사(平山府使), 1620년에는 선산 부사(善山府使)로 재직했다. 《宣祖實錄》 《光海君日記》[주-D029] 오준(吳竣) : 1587~1666.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여완(汝完), 호는 죽남(竹南)이다.[주-D030] 목성선(睦性善) : 1597~1647.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성지(性之), 호는 병산(甁山)이다.[주-D031] 훌륭한 …… 베풀면서 : 회보(懷寶)는 좋은 재능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양화(陽貨)가 공자에게 벼슬할 것을 권하는 뜻으로 “보배를 품고도 나라가 어지러운 상태를 내버려 두는 것이 어질다고 할 수 있습니까.[懷其寶而迷其邦, 可謂仁乎.]”라고 했던 데서 유래하였다. 《論語 陽貨》 종덕(種德)은 씨앗을 뿌리듯이 덕을 널리 행한다는 뜻이다. 순(舜) 임금이 우(禹)에게 왕위를 선위하려고 하자, 우가 말하기를 “저의 덕은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여 백성들이 귀의하지 않거니와 고요는 힘써 행하여 덕을 펴서 덕이 마침내 아래로 백성들에게 내려져 백성들이 그리워합니다.[朕德罔克, 民不依. 皐陶邁種德, 德乃降, 黎民懷之.]”라고 하였다. 《書經 大禹謨》[주-D032] 간관으로 있었지 : 간액(諫掖)은 사간원을 가리킨다. 유격(柳格)이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였다. 《선조실록》 16년 8월 20일 기사에 유격을 정언으로 임명한 기록이 있다.[주-D033] 선(善)은 …… 아득한가 : 유격이 선하게 살았으니 하늘로부터 보답을 받는 것이 정상일 텐데, 하늘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면서도 모르는 척한다는 말이다. 《시경》 〈소명(小明)〉에 “네 지위를 조용히 하고 공손히 하여 정직한 사람을 도와주면, 신이 네 소원을 들어주어 복록을 너에게 주리라.[靖共爾位, 正直是與, 神之聽之, 式穀以女.]”라고 한 것을 변용하였다.[주-D034] 대려(帶礪)에 끼었으며 : 유근이 공신이 된 것을 말한다. 대려는 띠와 숫돌인데 공신의 가문은 대대로 황실의 은총을 받아 나라와 영원히 고락을 함께한다는 뜻이다. 한 고조(漢高祖)가 공신을 봉할 때 “황하가 띠처럼 가늘어지고 태산이 숫돌처럼 닳는다 하더라도, 나라는 영원히 보존되어 후손에게 대대로 영화가 미치게 하리라.[使黃河如帶, 泰山若礪, 國以永存, 爰及苗裔.]”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漢書 卷16 高惠高后文功臣表》[주-D035] 의젓한 …… 되었네 : 유시행의 아들 유적이 선조의 여덟째 딸 정정옹주(貞正翁主)에게 장가들어 진안위에 봉해진 것을 말한다. 유적(柳頔, 1595~1619)의 본관은 진주, 자는 군미(君美)이다. 존귀한 신분으로서도 몸가짐을 삼가 거처(居處)나 여마(輿馬), 포대(袍帶), 음식(飮食) 등을 일체 한사(寒士)처럼 소박하게 하였다. 광해군 때 두문불출하다가 25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星湖全集 卷58 晉安尉柳公神道碑銘》[주-D036] 높은 봉양 : 열정(列鼎)은 맛있는 음식이 담긴 정기(鼎器)를 늘어놓는다는 뜻으로 진수성찬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여기서는 높은 봉양으로 풀이하였다. 공자(孔子)의 제자 자로(子路)가 높은 벼슬을 하여 솥을 늘어놓고 진수성찬을 맛보는[列鼎而食] 신분이 되었지만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어버이를 위해 쌀을 지고 왔던 옛날의 행복을 다시 느낄 수 없다고 술회한 고사가 있다. 《孔子家語 卷2 致思》[주-D037] 지란옥수(芝蘭玉樹) : 우수한 남의 집 자제를 비유하는 말이다. 진(晉)나라 사안(謝安)이 여러 자질(子姪)들에게 “어찌하여 사람들은 자기 자제가 출중하기를 바라는가?”라고 묻자, 조카 사현(謝玄)이 “비유하건대 지란옥수가 자기 집 뜰에서 자라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譬如芝蘭玉樹, 欲使其生於階庭耳.]”라고 대답했던 데서 유래하였다. 《晉書 卷79 謝玄列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