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생 심언(權生心彦)이 그의 5대조 감찰공을 위하여 이 상사 용휴(李上舍用休)에게 행장을 받아서 나에게 비문을 청하였다. 나는 문장을 잘하지 못하지만 또한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행장에 따라 다음과 같이 차례로 서술한다.
공의 휘는 이중(履中), 자는 자정(子正), 처음의 휘는 유중(有中), 관향은 안동(安東)이다. 태사 휘 행(幸)의 후예이고 문정공 휘 보(溥)의 10대손이다. 증조의 휘는 진(振)인데 전생서 참봉 증 호조 참판이고, 조부의 휘는 상(常)인데 동지중추부사 증 영의정 동흥부원군이고 효성이 지극하기로 이름이 났다. 부친의 휘는 황(愰)이니 지중추부사 증 좌찬성이다. 모친은 증 정경부인 이씨(李氏)로 종실의 복녕군 천린(天麟)의 따님이다.
공은 만력 신사년(1581, 선조 14) 12월 3일에 태어났다. 무오년(1618, 광해군 10)에 문과에 급제했는데, 당시에는 광해군의 정사가 어지러운 때여서 과거를 통해 나가는 길이 혼탁해져서, 이 때에 이르러서는 돈을 받고 방을 발표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이에 공이 명에 응하지 않았고, 이윽고 방도 또한 공정하지 못하다고 하여 발표하지 않게 되었다.
이로부터 공은 세도를 만회할 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호남으로 내려가 금구현(金溝縣)의 황산(黃山)에 집을 마련하고 자호를 남애(南崖)라고 하여 문을 닫고 나가지 않은 채 독서에 전념하며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계해년(1623, 인조 1)에 반정(反政)으로 인조가 즉위해서 장차 지난 무오년과 신유년 과시 때 방을 발표하지 못했던 여러 사람들을 다시 시험하려 했으나, 공은 나가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나가기를 권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과거는 선비가 입신하는 첫걸음인데 구차하게 해서는 안 된다.”하고 끝내 굽히지 않으니, 듣는 사람들이 더욱 훌륭하게 여겼다. 당시의 사람들이 공의 풍모를 고상하게 여겨, 무릇 벼슬아치 가운데 왕명을 띠고 남쪽으로 행차하는 사람이라면 찾아가 인사를 드리지 않는 이가 없었고, 군현에서는 음식과 양식을 갖추어 대접하고 그 마을을 공수촌(公須村)이라고 명명하였다.
후에 발탁이 되어 도원도ㆍ중림도ㆍ경안도 세 곳의 찰방, 종묘서 직장, 장원서 별제에 제수되었으나 혹 한 번 숙배하고는 즉시 사임하기도 하고, 혹 잠시 부임했다가 곧 체직되었다. 사헌부 감찰에 임명되어서는 은미한 일로 벼슬을 버리고 통진으로 돌아와 분암(墳庵)에 지내면서 노년을 보냈는데, 쓸쓸한 초가집에 도서가 있을 뿐이었다.
공은 성품이 엄정하여 항상 고인이 한 것처럼 몸가짐을 단속하여 청렴 검소하게 스스로를 유지하였다. 가정에 있어서는 효성과 우애를 돈독히 하고 제사를 정성스럽게 지내고 종족과 화목하였다. 명리에는 담박하여 구차하게 녹을 구하려고 마음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꺼림을 당하여 자신의 기량을 다 발휘하여 쓰지를 못했으니, 식자들이 이를 애석하게 생각했다.
공은 경자년(1660, 현종 1) 6월 28일에 돌아가셨으니 향년 80세였고, 통진부 북쪽 유규동(柳規洞) 건좌(乾坐) 언덕에 안장하였다.
부인은 남양홍씨(南陽洪氏)로 생원 우경(宇慶)의 따님이다. 공보다 4세가 많고 공보다 1년 뒤에 돌아가셨으며, 공의 무덤 왼쪽에 부장하였다. 공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대영(大榮)이고, 사위는 군수 조송년(趙松年)과 김만형(金萬亨)이다. 대영은 4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현감 덕창(德昌), 생원 덕임(德任), 덕함(德咸), 덕응(德應)이고, 사위는 윤중주(尹重周), 윤우징(尹遇徵), 한진(韓振)이다. 송년은 3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봉사 한수(漢叟), 현감 기수(沂叟)이고, 사위는 부사 홍수량(洪受湸), 이경현(李景賢), 판부사 유명천(柳命天)이다. 만형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일진(一振), 일명(一鳴)으로 일명은 무과에 급제했고, 사위는 신윤(申潤)이다. 다음에 명을 붙인다.
그 의를 따르고 / 從其義
명리를 좇지 않았으며 / 不徇乎名
그 뜻을 지키고 / 守其志
영화를 사모하지 않았네 / 不慕乎榮
지위가 덕에 미치지 못했으나 / 位不滿德
하늘이 오랜 수명을 주셨도다 / 天餉遐齡
공을 알고자 하는 이는 / 欲知公者
이 명에서 살피기 바라네 / 請徵斯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