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산 홍씨(豐山洪氏)는 고려(高麗) 말에 일어났으니, 국학 직학(國學直學) 휘(諱) 지경(之慶)을 시조로 한다. 그가 도첨의 사인(都僉議舍人) 휘 간(侃)을 낳으니, 문장이 뛰어났고 호(號)가 홍애(洪崖)였다. 그 뒤로 두 대(代)가 문임(文任)을 지냈다. 낭장(郞將) 휘 귀(龜)에 이르러 정사(政事)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고양(高陽)으로 돌아갔고, 자손들에게 벼슬하지 말라고 당부하니 몇 대 동안 은거하며 벼슬하지 않았다. 대사헌(大司憲) 휘 이상(履祥)에 이르러 덕행과 경술(經術)로 우리 목릉조(穆陵朝 선조조(宣祖朝))에 크게 현달하여 학자들이 모당(慕堂) 선생이라 일컬었으니, 공에게 고조부가 된다. 증조부인 휘 탁(𩆸)은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추증되었고 조부인 휘 주문(柱文)은 예산 현감(禮山縣監)으로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선고(先考)인 휘 만기(萬紀)는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선비(先妣)인 원주 이씨(原州李氏)는 통덕랑(通德郞) 열(說)의 딸이다. 숙묘(肅廟) 무자년(1708, 숙종34)에 판서공(判書公 홍만기(洪萬紀))이 삼척부(三陟府)의 부사(府使)로 있었는데, 정월 26일에 관사(官舍)에서 공을 낳았다.
공의 휘는 중효(重孝)이고 자(字)는 성원(聖源)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하였다. 어린 나이에 부친을 여의고 힘써 공부하였다. 18세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33세 때 문과(文科)에 장원(壯元)하여 전적(典籍)ㆍ낭관(郞官), 춘방(春坊)과 홍문관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을축년(1745, 영조21)에 모친을 봉양할 것을 청하여 영동 현감(永同縣監)에 제수되었다. 경오년(1750)에 북도 평사(北道評事)로 나갔다. 병자년(1756)에 홍주(洪州)에 조사할 일이 생겨 공을 보내 살피게 하였고, 복명(復命)하자마자 특명으로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발탁되어 간사한 왜인(倭人)들이 은(銀)을 포흠(逋欠)낸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을 물리치고 변방의 정사를 잘 닦으니 오랑캐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조정으로 들어와서 승지ㆍ대사간(大司諫)ㆍ판결사(判決事)ㆍ공조 참의(工曹參議)를 배수하였다. 신사년(1761)에 능주 목사(綾州牧使)에 제수되었다. 임오년(1762)에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배수하여 북릉(北陵)에 가서 공사를 감독하였다. 품계가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올랐고, 도승지(都承旨)ㆍ부총관(副摠管)ㆍ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로 승진하였다. 이해에 왕세손의 책례(冊禮)가 이루어져, 공이 주청부사(奏請副使)로 호조 참판의 직임을 띠고 연경(燕京)에 갔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상가(賞加)로 가의대부(嘉義大夫)가 되었다. 병술년(1766)에 대사헌(大司憲)을 배수하였다. 공은 평소 벼슬살이에 연연하는 마음이 적어서 해직(解職)될 때마다 고향을 찾았으나, 한 달 이상 관직이 없는 상태로 머무르지 못하였다. 중간에 공조 참판ㆍ좌윤(左尹)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해년(1767)에 총관(摠管)으로 호위하는 반열에 들어갔는데, 상께서 나이를 물으시고는 노쇠함을 안타깝게 여겨 특명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급시키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부직(付職)하셨다. 조금 뒤에 공조 판서로 자리를 옮겼고, 또 형조 판서에 제수되어 봐주는 일 없이 일을 결단하니 간사하게 불법을 저지르는 자들이 숨을 죽였다.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번갈아 비난하자 상께서 비난하는 말을 흘린 자를 내치셨는데, 공은 인의(引義)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기축년(1769, 영조45)에 상께서 공이 후반(候班)으로 입성(入城)하였다는 것을 듣자 소견하여 위로하고 경저(京邸)에 머물게 하셨으며, 특별히 예조 판서에 제수하였으나 정고(呈告)하여 해직(解職)을 청하였다. 이로부터 여러 번 대사헌과 형조 판서에 제수되었는데 출사하기도 하고 출사하지 않기도 하였다. 신묘년(1771) 9월에 다시 대사헌을 배수하였다. 공은 병을 이유로 상소하여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상께서 나이가 아직 이르다며 허락하지 않으셨다가, 조금 뒤에 병이 깊어졌다는 것을 듣고 특별히 고향 집에서 선마(宣麻)하는 것을 허락하고 손수 어제(御製)를 써서 총애하는 뜻을 보이셨다. 임진년(1772) 3월 11일에 정침(正寢)에서 생을 마쳤다. 상께서 들으시고 애통해하시며 친히 제문(祭文)을 써서 치제(致祭)하였다. 5월에 원주(原州) 소초면(所草面) 의관촌(衣冠村)의 계좌(癸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정부인(貞夫人)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직장(直長) 덕사(德師)의 딸로, 공보다 3년 일찍 태어나고 공보다 6일 뒤에 몰(歿)하였으며 경사(經史)를 섭렵하여 여사(女士)의 풍도가 있었다. 그러나 끝내 아이를 낳아 기르지 못해서 중씨(仲氏) 동돈녕공(同敦寧公)의 다섯째 아들 수보(秀輔)를 얻어 후사로 삼았으니, 문과(文科) 출신으로 지금은 판서이다. 측실(側室)의 두 아들은 척보(陟輔)와 적보(迪輔)이고 두 딸은 이태만(李泰萬)과 이상은(李尙殷)에게 시집갔다. 판서의 두 아들은 대사간 인호(仁浩)와 승지 의호(義浩)이다. 척보는 외동딸을 두었고 적보는 자녀가 없다. 이태만은 2남 1녀를 두었고 이상은은 외동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아직 어리다.
나 양호(良浩)는 종당(宗黨)의 후생(後生)으로 어려서 상(牀) 아래에서 공을 뵈었다. 공은 기개와 풍도가 비범하였고 내면이 확고하면서도 외면이 소탈하였다. 집에 있을 때에는 어버이를 잘 섬겼다. 대부인(大夫人)의 춘추(春秋)가 높아지자 벼슬살이를 즐기지 않고 병시중을 들었는데 대변을 맛보아 몸의 안위(安危)를 징험하였고 병이 심해지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마시게 하며 수명을 늘려달라고 기도하니, 향리 사람들이 그 효성에 감동하였다. 조정에 선 뒤에는 일을 맡음에 피하지 않았고 과감히 간언하며 꺾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았으나 오직 성주(聖主)만은 우대하여 매양 그가 홀로 우뚝 서서 남에게 구속되지 않는 것을 칭찬하셨다. 벼슬이 현달하고 지위가 더욱 높아진 뒤에도 공은 삼가고 자기를 단속하였으며, 산림(山林)에 살 것에 뜻을 두어 나이가 다 차기 전에 치사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몸과 명성을 모두 온전하게 지키고 상(上)의 은혜로운 대우가 시들지 않았으니, 무릇 지금 세상의 영화와 복록에 연연하여 아부하며 부침(浮沈)하는 이들을 공과 비교하면 어떠한가. 공은 어려서부터 문장을 좋아하였다. 문장의 근거를 경전에 두어 절로 법도에 맞았고 시에 더욱 뛰어나 중당(中唐)의 시풍을 본받아서 풍신(風神)이 빛났으며, 항상 저술하는 일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산인(山人)의 두건을 하고 명아주 지팡이를 짚으며 계곡과 언덕을 거닐면 사람들이 재상인지를 알지 못했다. 산속의 거처에 꼿꼿하게 우뚝 솟은 오래된 측백나무가 있었으므로 처음에 백서(栢西)라 자호(自號)하여 자신의 뜻을 나타냈다. 그러다가 상과 가까운 반열을 출입하게 되자 상께서 매양 지목하시며 “이 사람은 소박하고 순실(純實)하다.”라고 하시자 공이 물러나 자신의 방에 ‘소와(疎窩)’라고 제(題)하였다. 임금의 말씀을 영예롭게 여기고 지우(知遇)에 감격했기 때문이었다.
옛날 계미년(1763, 영조39)을 기억해보면 나는 용만(龍灣 의주(義州))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공이 이때 연경에서 돌아와 살수(薩水)가에서 만났다. 기쁘게 술을 마시며 손으로 시고(詩稿) 주머니를 열어 요동(遼東)과 계양(薊陽)에서 지은 시 몇 편을 보여주고서는 나에게 살수로 오는 길에 지은 시를 보여달라고 요구하였다. 내가 시를 읊자 칭찬하고 추어주었으니, 적이 나를 알아주신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어느새 30년이나 되어 이미 묵은 자취가 되었으니, 항상 서글픈 마음에 가슴에서 잊히지 않았다. 지금 판서공(判書公 홍수보(洪秀輔))이 묘의 지문(誌文)을 부탁하니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가 없다. 묘지명(墓誌銘)은 다음과 같다.
재주는 많았으나 시대를 만나지 못했고 / 才周而時不遇
지위는 높았으나 널리 베풀지 못했네 / 位高而施未博
뭇 사람 불처럼 달아올라도 / 衆熱如火
나의 절조는 돌처럼 꿋꿋하지 / 我介如石
임금께서는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 君非捨我
신하는 만족할 줄을 아네 / 臣則知足
훌쩍 멀리 떠나 / 翩然長往
우리 숲 골짜기를 즐기니 / 樂我林壑
단계의 물이여 / 丹溪之水
양치질할 수 있고 씻을 수도 있도다 / 可漱可濯
거문고와 서적이 곁에 있어 / 琴書在御
높은 벼슬자리와도 바꾸지 않네 / 軒裳不易
아들은 공의 업적 계승하고 / 有子繩武
손자들은 쌍벽이라네 / 有孫雙璧
번창함을 물려주시니 / 遺以克昌
영원토록 드리워져 싫증냄 없으리 / 永垂無斁
[주-D001] 북릉(北陵) : 함경도 경흥(慶興)에 있는 조선 태조(太祖)의 선조들의 무덤이다.[주-D002] 손자들은 쌍벽(雙璧)이라네 : 홍중효의 두 손자인 홍인호(洪仁浩)와 홍의호(洪義浩)가 대사간과 승지로 벼슬이 높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