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년에 내가 서울의 여사(旅舍)에 있을 때의 일이다. 그 때 족조(族祖) 진사공이 들러서 작별을 고하면서 말씀하기를, “내가 이제 늙어서 저 아비 잃은 어린 손자녀석들이 커서 성립하는 것을 볼 수가 없을 것 같으니, 바라건대 좀 부탁하고 싶네.” 하였다. 그 뒤에 공이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을 들었다. 그 후 14년의 세월이 지났는데 공의 손자 주사군(主事君)이 찾아와서 무릎을 꿇고 청하기를,
“일찍이 우리 할아버지께서 저희를 불러 세우시고 경계하여 말씀하기를, ‘우리 가문의 글이 가정(稼亭)과 목은(牧隱)에서 발원을 이루었으며,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와 석루(石樓 이경전(李慶全))에 이르러 더욱 깊어지고 귀주(龜洲 이복운(李復運))에 와서 드디어 물결을 이루어서 그 남기신 가르침이 실로 찬란하여 쇠하지 않았다 하겠다. 그런데 그만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 대에 와서 기수(氣數)가 비색(否塞)하여 이를 제대로 펼쳐서 시험하지 못하였으며, 나 또한 어린 몸으로 가업을 이어 가문을 지탱해야 했기 때문에 공부를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너의 아비가 어려서부터 재주와 행실이 있어서 차츰 이름이 났으므로 나는 어쩌면 이 아이가 커서 지난날의 영광을 다시 이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또 그만 불행하게도 일찍 죽고 말았으니, 이제 오직 남은 것은 너희들 뿐이다. 밤낮으로 노력하여 우리 가문을 계승하는 일도 오직 너희에게 달린 일이요, 장난질이나 하고 마냥 노닥거리다가 이 가문을 망가뜨리는 것도 전적으로 너희에게 달린 일이다.’ 하셨습니다. 또 말씀하기를, ‘집안 일은 내가 있으니 너희들은 오직 글만 읽을 일이다.’ 하셨답니다. 지금도 그 말씀이 귀에 쟁쟁하게 남아 있는데, 할아버지에 관한 일들은 날로 급속히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혹시라도 할아버지의 뜻을 받들지 못할까 매우 두렵습니다. 더구나 후인들이 본받을 수 있는 할아버지의 여러 언행들을 이제 기록하여 남겨 두지 않는다면 이는 저의 죄를 거듭 저지르는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에 지금 삼가 그 대강을 요약하여 가장(家狀)을 만들어서 가지고 와 이처럼 부탁을 드리는 바이오니, 부디 저를 가련하게 여기시고 좋은 말씀을 한 마디 베풀어 주소서.”
하였다. 이에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 슬프다. 옛날에 우리 할아버지 현감공(縣監公)께서 자녀들에게 하신 말씀이 역시 이와 같았다. 그런데 지금 공의 말씀은 이보다도 더욱 슬퍼할 만하다 하겠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공께서 일찍이 부탁을 하셨던 손자가 이제는 이렇게 커서 공의 일을 가지고 와서 부탁을 하고 있으니, 어찌 차마 내가 이를 사양할 수 있겠는가.”
공은 휘가 건병(建秉)이고 자가 성중(聖中)인데, 본래 한산(韓山) 사람이다. 저 상대(上代)에서는 글로써 우리의 가문을 일으켰으니, 공이 말한 가정, 목은, 아계, 석루가 모두 현조(顯祖)이신 것이다. 그리고 8대조 검열 구(久)가 일찍이 세상을 떠나신 뒤 아들을 두었는데 휘가 상빈(尙賓)으로 진사를 했으나 또 요절하였으며, 그 아들이 휘가 운근(雲根)인데 이 어른이 곧 현감공이다. 현감공은 아들 다섯을 두었는바 맏이는 정랑 덕운(德運)으로 곧 나의 7대조가 되며, 다음은 복운(復運)이고, 다음은 득운(得運)이다. 복운은 진사를 하였는데, 이 어른이 곧 귀주(龜洲)로서 힘써 글을 배워서 학문을 닦아 그 가업을 계승하였으며,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휘 헌(憲)을 낳았다. 그리고 한성부 좌윤을 지냈으며 호가 지환재(知還齋)인 휘 수하(秀夏)를 지나서 휘 기명(箕溟)을 낳았는데, 이 어른은 병집(秉執)함이 있어서 사우(士友)들로부터 추중(推重)을 받았으며, 이 어른이 휘 응익(應翊)을 낳았다. 휘 응익은 일찍이 한가롭게 노닐면서 문사(文詞)로써 스스로를 즐겼는데, 평강 채씨(平康蔡氏) 홍정(弘定)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서 갑신년 윤7월 9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아홉 살이 되자 할아버지의 명에 따라 족부(族父 삼종백숙부) 광서(廣書)의 양자로 나가게 되었는데, 광서는 곧 득운(得運)의 현손(玄孫)이며, 그리고 용(容)과 수욱(秀郁) 및 은명(殷溟)이 득운의 뒤를 이은 3대가 된다. 배위는 안동 권씨(安東權氏)인데 권참(權傪)의 딸이다. 공이 양가(養家)로 떠나게 되었을 때에 마음이 아뜩하여 차마 떠나지를 못하므로 할아버지께서 이를 깨우쳐서 말씀하기를, “이미 결정된 일이니 늦출 수가 없다. 어서 떠나거라.” 하였다. 그러자 공은 울음을 그치고 낯빛을 바꾼 다음 두루 부형들을 찾아 작별 인사를 올리고는 말에 올라서 길을 떠났다. 양가에 도착한 뒤에는 정성을 다하여 양부모를 모셨으며,이에 따라 두 분 어른들께서도 마음이 편안하였다.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였을 때에는 정성과 예절을 다하였으며, 나중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을 때에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정묘년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그 뒤 십수 년 사이에 본생 부모의 상을 연이어서 당하였으며, 세 아들이 또한 전후로 연달아 요절(夭折)하였다. 공은 이로부터 세상에 대한 뜻이 없어져 문을 닫은 채 방 안에 들어앉아 지냈으며, 일이 없으면 밖에 나가는 법이 없었다.
그러다가 나이 68세가 되던 신묘년 10월 4일에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 선영을 따라서 예산(禮山)의 장복동(長福洞)에 장사를 지냈는데, 뒤에 지관(地官)의 말에 따라서 구천(舊阡) 아래 간좌(艮坐)의 언덕으로 이장(移葬)하였다.
공은 일찍이 아버지에게 여쭈어서 생가의 어버이를 맞아다가 봉양하여 그 사은(私恩)을 보답하고자 하였다. 아버지께서 공을 가상히 여기고 이를 허락하자, 7리 가량 떨어진 곳에 집을 마련하여 본친(本親)을 모셔두고는 험한 산이 가로놓여 있는 그 곳을 매일같이 왕래하면서 문안을 드렸는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친 적이 없었으며, 정성스레 드릴 음식물 등을 마련하여 이고 메고 날랐으되 늙어 머리가 희도록 매일을 하루와 같이 하였다.
공의 형은 글을 좋아하고 가정 생활에는 관심이 없었다. 때문에 공이 그 살림을 건사하면서 자신의 토지를 나누어 주고 그래도 부족하면 식량을 대주었으며, 제사와 큰일 및 조부(租賦)와 기용(器用) 등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도와 주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하였다. 그리고 서숙(庶叔)에 대해서도 역시 이와 같이 하였다.
여러 사촌의 동생들과 누이들이며 조카와 종손(從孫)의 남녀들이 시집가고 장가를 갈 때면 혼수를 마련하여 싸서 보내기를 마치 친자식이나 다름없이 하였으며, 그 사이에 어떤 차별도 없었다. 그 밖에 일가 집안이나 인척과 친구들에 이르기까지 누구든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집안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매우 엄격하여 안방에 들어가서도 자세를 흐트러뜨리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자손들의 교육에 법도가 있어서 언동(言動)이나 배궤(拜跪) 등의 예절에 조금이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꾸짖어 다그쳤으며 조금도 봐주거나 용서함이 없었다. 아버지를 여읜 여러 어린 손자들이 모두 어여쁘고 귀여웠으나 역시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부드러운 말씨나 웃는 얼굴로 대하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일에 대한 준비나 대책이 매우 치밀하고 주실(周悉)하였다. 겨우 약관의 나이에 벌써 살림을 맡아서 꾸려 나갔으나 일처리가 모두 이치에 합당하였으며, 집안의 노복(奴僕)들이 백을 헤아렸으나 매질을 하는 일이 없이도 아랫사람들이 다들 조심스러워하였다. 평소에 청소를 깨끗이 하여 집안이 정결하였고, 좌우의 궤안(几案)이 질서가 있어 가지런하였으며, 설령 하찮은 대야나 물그릇, 신발 같은 것들까지도 역시 정해진 장소가 있었다.
손님을 맞으면 노소의 구별이 없이 모두에게 정성스러워서 언제나 예절의 뜻이 극진하였으며, 일이 있다 하여 물러가기를 청하는 자가 있어도 매우 급한 일이 아닐 경우에는 이를 붙잡고 보내지 않았다.
공은 얼굴빛이 검고 수염이 적었으며, 키는 보통 사람을 넘지 않았으나 법도가 엄격하여 율연(栗然)히 위엄이 있었다. 당시 그 고을의 수령으로 무척 거만하고 건방지다는 말을 듣는 자가 있었는데 본래 공과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 그런데 언젠가 그 자가 여러 사람들이 모인 좌석에서 공을 만나자 공에게 깍듯이 예를 차렸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오늘에야 진짜 선비를 보았다.” 하였다.
일찍이 여행길에서 여관에 들어 묵게 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 때 곁에 같이 숙박을 들었던 어떤 자가 간질병을 일으켜 갑자기 힘껏 공을 껴안았다. 이에 공의 종자(從者)가 놀라서 급히 달려들어 그 손길을 뜯어내려고 하자, 공이 이를 말리면서 말하기를, “병기운이 진정되면 이자가 스스로 풀 것이다. 이처럼 급히 잡아떼면 그 병에 해롭지 않겠는가.” 하였다. 겨울철에 여행할 때, 풍설(風雪)의 차가운 기운이 혹심하게 몸을 덮쳐 사람들이 모두 그 추위에 몸이 얼어붙어서 걸음을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공은 홀로 여전히 어깨를 쭉 펴고 점잖게 걸었으니 그 걸음걸이가 평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이처럼 공은 남들이 참지 못하는 일을 참아 내는 것이 대개 이와 같았던 것이다. 병이 바야흐로 위독해지자 맏며느리가 뒷일에 대한 말씀을 청하였다. 그러자 공이 대답하기를, “다른 것은 별로 말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다만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정의(情誼)를 중히 여겨서 지금처럼 길이 화목함을 보존하도록 하라.” 하였다.
배위(配位)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유회당(有懷堂) 권이진(權以鎭)의 후손으로 권위전(權韋銓)의 딸이다. 유순하고 인정이 많아서 일가 집안들이 다들 칭찬하였다. 임오년 7월 5일에 태어나서 기축년 9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기촌(耆村) 마을 계좌(癸坐)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자녀들로는 아들 넷을 두었다. 찬직(讚稙)은 문학과 행실이 있었는데 일찍 죽었고, 재겸(在謙) 또한 준수했으나 요절했으며, 그 다음의 양직(讓稙)과 회직(誨稙) 또한 오래 살지 못하였다. 딸이 둘인데 맏이는 유진석(兪鎭碩)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오재도(吳在度)에게 시집갔다.
손자 오규(五珪)는 곧 주사군(主事君)이고 손녀는 진사인 이시우(李時雨)에게 출가했는데 모두 찬직의 소생이고, 손자 삼규(三珪)는 재겸의 소생이며, 손자 윤규(崙珪)와 아직 출가하지 않은 손녀는 양직의 소생이고, 손자 숭규(崇珪)와 이봉순(李鳳淳)에게 출가한 손녀는 회직의 소생이다. 맏딸의 아들 유덕준(兪德濬)은 참봉을 했고 다음은 유득준(兪得濬)이며, 막내딸의 사자(嗣子 양자)는 오인탁(吳仁鐸)이다.
오규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현구(賢求)이고 두 딸은 어리다. 삼규는 2남 1녀를 두었으며, 윤규는 딸 하나를 두었고, 숭규는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모두 어리다.
아, 조상이 남긴 경계의 말씀은 본래 지극히 정성스럽고 측달(惻怛)함에서 나온 것이었기에 비록 그 시기가 멀어서 직접 모시고 듣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다들 그 말씀에 감격하여 발분(發憤)하면서 한결같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더구나 간절한 가르침을 몸소 들은 경우이겠는가. 대저 나는 우리 종문(宗門)이 현감공께서 그 자손들을 위하여 경계하신 말씀을 지금까지도 감히 잊지 못하여 생각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지금 공의 자손들 또한 기필코 능히 분발하고 노력해서 떨쳐일어나 공이 경계한 이 말씀을 결코 저버리게 되는 일이 없으리란 것을 나는 안다. 그래서 지금 이와 같은 일을 묘명(墓銘)으로 새겨서 남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화목하고 도와 줌이 그 행실이요 / 婣恤惟行
꼿꼿하고 강고함이 덕성이더라 / 貞固惟德
가지를 보면 뿌리를 알거니 / 擧末見本
무엇을 한들 못할 일이 있었겠나 / 何修不職
경계하여 말씀을 남겼으니 / 戒有話言
조상을 따라서 본받을 것이요 / 祖先是式
거둘 것을 남기어 끼쳤으니 / 斂有贏遺
자손들이 먹을 식록(食祿)이로다 / 子孫是食
모든 일가와 그리고 집안들이 / 百爾宗黨
공을 보고서 법칙을 삼을지어다 / 視公爲則
공의 분묘가 여기에 우뚝하니 / 有崇斯墳
새겨 세운 빗돌이 영원하리라 / 銘石不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