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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해설
제6장 복귀섭리에서 본 예정론
제1절 예정의 의의
고래로 예정설을 중심하고 신학적 논쟁은 물론이어니와 신앙생활의 실제에 있어서 그 좌우를 분명치 못하여 많은 물의를 일으켜온 것이다. 인생의 영고성쇠와 행불행을 비롯하여 타락인간의 구원여부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문제는 모두 하나님의 예정으로 되어진다는 학설을 세울 수 있는 성서의 문자적 근거는 충분하다고도 볼 수 있으나 또 한편 이 예정설을 부인할 수 있는 성서적 근거도 충분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복귀섭리에 관한 전체적인 원리적 논거를 세우지 않으면 이 근본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문제의 바른 해결은 신앙생활의 확실한 방향성을 보여줄 것이며 따라서 인류역사로 보여지는 하나님의 섭리도 그 곡절이 알려질 것이다.
우선 결론을 먼저 제시한다면 창조의 목적도 선이었고 따라서 복귀섭리의 목적도 선임으로 하나님은 선을 예정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오 결코 악의 결과를 예정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타락론에서 이미 상술한 바이지만 인간의 타락은 인간에게 극치의 사랑을 부여하시기 위하여 필수의 계명으로 주셨던 한마디의 조건을 준수치 못한 인간자신의 과오에서 초래된 것이었다.
인간의 타락이 예정으로 되어진 결과라면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자신의 창업을 한탄하시며 서러워하시지는 않았을 것이다(창 6/6). 인간역사의 모든 사실이 하나님의 예정으로만 되어진다면 어찌하여 하나님은 예정대로 되어가는 그 결과를 한탄하시며 후회하실 것인가. 하나님은 사울을 세워 왕을 삼은 것을 후회하셨고(삼상 15/11)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손을 펴서 멸하려할 때 여호와는 그 재앙 내리심을 후회하셨다(삼하 24/16).
그러면 예정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은 뜻을 예정하실 뿐 이 뜻을 대하는 사람은 이 뜻을 이룰 수 있는 허락권내에 두어 이 뜻을 이루는가 못이루는가하는 것은 그 자체의 책임분담으로 세워주신다.
그러므로 예정하신 뜻은 변함 없으나 이 뜻을 위해 부름받은 사람은 자기의 책임을 완수치 못하면 아무리 부름을 받았다할지라도 다시 타락의 길을 걷게됨으로 그 사람을 중심하고 예정하셨던 뜻은 이루어지지않고 그 사람의 대신을 세워 그 뜻을 계승하여나아가는 것이니 이것은 성서에 기록된 역사와 우리의 신앙생활의 실제가 입증하는 사실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사람을 부르시는가하면 마치 고장난 기계의 부속품을 만들기 위하여는 각개의 부속품되기에 합당한 재료를 구는 것과 같이 하나님도 복귀섭리의 전체의 뜻을 이루어 맞추기 위한 프로그램에 맞추어질 수 있는 조건은 그 개체가 향유할 수 있는 선조로부터 쌓은 하늘에의 공적과 그 개체가 타고난 인격의 형 성품과 소질 등의 위인으로 결정된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예지하시고 계심으로 그 예지한 사람을 예정하시고 또 예정하신 사람을 부르시고 부르신 이를 의롭다하시고 의롭다함을 받은 이를 또한 영화롭게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롬 8/30).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는 하나님이 하실 일과 인간이 할 일을 분명히 갈라세우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책임분담과 인간의 책임분담이 합하여서만 하나님의 전체의 뜻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의 책임분담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는 인간의 책임분담을 가르쳐주셨으니 이것이 곧 「따먹지 말라」하는 계명이요 이 계명을 인간자신이 지키면서 자라야 하는 기간이 바로 원리결과주관권 내에 있을 때의 기간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시고는 그 창조의 이상을 실현하시려는 뜻을 예정하셨으므로 이 뜻은 영원불변이다. 그러나 이 뜻을 이루어 맞추기 위한 허락권내의 존재로써 아담 해와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아담과 해와는 이 계명을 자신이 지킴으로써 이 원리결과주관권을 자기의 책임분담노정으로 다 걸어야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아담이 책임을 완수치 못하였을 때 첫 아담을 중심한 하나님의 예정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후아담 예수를 보내시어 아담으로 이루지 못한 하나님의 예정의 뜻을 대신 이루게하려하신 것이었다. 또 아담의 불신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창조이상이 이루어지지않은 것같이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인하여 다시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뜻은 다 이루어지지 아니하였으나 예정하신 뜻은 변할 수 없으므로 제3차 아담으로 예수님은 재림하셔서 이 뜻을 완수하시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제 후편에 기록된 복귀원리에 의한 인류역사에서 이런 예를 찾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은 아담의 가정을 중심하고 복귀섭리의 뜻을 이루려하셨으나 가인이 아벨을 살해함으로 인하여 아담가정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되어 이 가정을 중심하고 하나님의 복귀섭리를 이루기 위한 예정은 이루어지지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아벨 대신 셋을 세우시고 그의 후손에서 아담가정의 대신으로 노아의 가정을 택하여 예정의 뜻을 계승 완성하려하셨다.
가인과 아벨로하여금 제물을 바치게함도 아담으로부터 잃어버린 믿음의 조건을 복귀하려는 예정을 이루게하기 위함이며 노아를 택함도 가인이 아벨을 살륙함으로 인하여 잃어버린 믿음의 조건을 다시 찾아세우시려는 예정을 이루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120년간 산정에 방주를 지었던 노아의 믿음은 결코 아브라함의 믿음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노아를 믿음의 조상으로 택하신 것인데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의 타락행위로 말미암아 노아 가정에 사탄이 재침범하여 노아를 불러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려는 예정은 또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노아 대신으로 아브라함을 택하여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 이 예정의 뜻을 다시 이루려하신 것이었다.
하나님은 믿음의 조건을 다시 찾아세우기 위한 믿음의 조상을 찾는다는 뜻을 예정한 것이지 이 뜻을 대하는 사람을 예정한 것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뜻을 이루기 위해 택함받은 노아이었으나 노아가정 자신이 그의 책임분담을 완수치 못할 때 마치 아벨대신 셋을 세우신 것같이 노아 대신 아브라함을 택하여 이 책임을 계승 완수케하심으로 예정의 뜻을 이루려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모세를 택하심도 선민 이스라엘을 가나안복지로 인도할 수 있는 지도자를 세운다는 그 뜻을 예정한 것이지 모세 자신을 예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은 모세에 관한 전체를 예지하셨었기 때문에 그를 부르시사 의로 세워 영광의 자리로 인도하시려는 뜻을 이룰 수 있는 허락권내에 세웠던 것이다.
모세는 반석 2타로 인하여 자기의 책임분담을 완수치 못하였음으로 여리고성을 바라보면서도 가나안 복지로 들어가지 못하고 죽어버렸다(민 20/7~12, 20/24, 27/14). 이와같이 모세는 타락되었으나 지도자를 세운다는 예정의 뜻은 불변임으로 이 뜻을 다시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은 모세 대신 여호수아와 갈렙을 세우신 것이었다.
또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회개시켜 사탄을 물리쳐서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기대를 조성한다는 예정의 뜻을 위하여 택함받은 선지자가 엘리야였다.(후편 제7장 참조) 그러나 엘리야를 통하여 그 예정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엘리야 대신 세례 요한을 세워 그 뜻을 계승하여 이루시려하신 것이었다.
세례요한이 끝까지 예수님을 따랐더라면 의례히 그가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수제자를 세우시려는 예정을 이루어 맞추기 위하여 세례요한을 택하신 것이었지만 세례요한이 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음으로 그 대신으로 베드로를 수제자로 세워 이 예정의 뜻을 계승하여 완성하게하셨던 것이다.(전편 제7장 참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사 그로부터 선민 이스라엘을 일으키신 목적은 메시아의 이상을 이루기 위한 믿음의 터를 조성코자하는 예정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이 예정의 뜻을 이루지 못하는 입장에 선 이스라엘을 바라보시면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너희에게서 빼앗아 열매맺는 백성에게 주시리라」(마 21/43)고 하셨다. 사실상 복귀섭리의 민족적 사명은 이스라엘 민족에서 이방민족에게 옮겨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진술한 바와같이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후손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신앙을 받은 영적 이스라엘 즉 모든 기독신자들이 이스라엘이라 하였다(롬 2/28~29, 롬 9/6~8, 갈 3/29).
그러므로 금일의 기독신자들은 예수 당시에 이스라엘민족들이 다하지 못한 하나님의 예정의 뜻을 계승하여 완수하여야만 이스라엘 민족으로 이루시려던 에덴 복귀의 예정의 뜻이 우리 기독신자들로 말미암아 비로소 이루어질 것이다.
제2절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분담
지금까지 많은 신자들이 믿어오듯이 예정론을 그대로 시인한다면 인간으로서 힘쓸 일은 없을 것이요 따라서 하나님의 예정이 이루어지지않는 것은 없어야할 것이다. 위에서도 몇가지 예를 들었지만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의 잘못으로 번번히 이루어지지 않고 연장되어 내려온 것은 바로 성서에 기록된 이스라엘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만일 섭리전체가 하나님의 전담책임으로 되어 있다면 인간에게 따먹지말라는 계명을 주실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기계에 대하여는 어떠한 계명도 필요없는 것은 기계전체의 기동은 오로지 인간자신의 의사에만 달려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인간은 기계로 창조하시지 않았다. 인간에게는 행동의 자유가 부여되어 있음으로 따먹지 말라는 인간이 지켜야할 조건을 세우신 것이다. 그러나 이 행동의 자유는 타락선을 넘게되는 필요한 동기는 되었을망정 결정적인 조건은 아니었다는 것은 이미 타락론에서 상술한 바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인간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여야 그 기대 위에서 하나님의 책임분담이 완수되어 인간과 하나님과 합하는데서 비로소 하나님의 전체적인 목적이 이루어지게 되는가를 알아야할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닮게하여 인격을 가진 피조물로서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으로 하여금 그 자신이 스스로 자라게함으로 하나님의 전체적인 섭리에 참여케하여 그 완성의 전가치를 인간자신의 것으로 돌려줄 수 있는 조건을 세우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책임분담으로서 세워야 할 이 조건은 비록 지극히 작은 것이라할지라도 인간자신이 이 조건을 세우지 못하면 하나님의 책임분담으로서의 지극히 크신 혜택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책임분담은 물론 수학적으로 그 비례를 따질 수는 없는 것이지만 가령 인간이 다해야할 작은 책임분담을 5%로 표시한다면 하나님이 이루어주실 크신 책임분담은 95%라고 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인간이 해야할 5%를 기대로 하여 95%의 은사를 허락하시어 100%의 뜻을 이루면 이 100%의 완성의 가치를 인간자신의 것으로 세워주시려는 크신 은사의 섭리를 하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도 그 전부가 인간 자신이 세워야할 책임분담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소경을 고치실 때도 예수님의 책임분담으로는 침으로 흙을 빚어서 눈에 발라주셨고 인간의 책임으로는 실로암에 가서 그것을 씻어야했으며 그 씻은 기대 위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책임분담인 완치의 능력이 나타난 것이다(요 9/7).
예수께서 나사로를 무덤에서 일으키실 때에도 무덤을 닫고 있는 돌을 굴리는 것과 살아난 나사로의 얼굴에 가리운 수건을 벗기는 것은 인간의 할 일로 명령하셨고 기도를 올리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하신 후에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이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심으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95%의 은사를 받도록 섭리하셨다. 그러나 누구든지 저를 믿어야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하였다(요 3/16). 즉 믿는다는 5%의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못하면 그리스도의 95%의 구속의 혜택은 나와 하등 상관이 없는 것이다.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다고하셨으니 어느 개체를 멸망으로 혹은 구원으로 예정하시는 불공평하신 하나님은 아니시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예정가운데서만 되어진다면 형제를 위하여 기도하라하신 말씀도 (약 5/14) 망설이 되고 말 것이며 바울이 십자가를 각오하고 로마로 가면서 로마교인들에게 자기의 환난을 위하여 기도해 주기를 원한 것도 허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바울이 이미 예정된 길을 걷고 있다면 남의 기도를 청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병을 고치신 후 예수님은 환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성케하였다」(막 5/34)고 말씀하시어 믿음은 인간이 세워야할 인간자신의 책임분담의 것임을 밝히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새 계명을 너희들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기를 내가 너희들을 사랑하듯하라」(요 13/34)고 하셨으니 계명이란 무엇인가하면 이것은 인간자신으로써 지켜야할 명령의 말씀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도 인간자신의 태도여하에 의하여서 그 좌우가 결정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노아를 세우시기 위하여 그를 불러 방주를 짓고 심판이 끝날 때까지 그렇게도 그의 갈길을 소상히 가르쳐 주시었지만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이 타락행동할 때는 아무 간섭도 하시지 않았다. 심판이 끝날 때까지의 일은 95%의 하나님이 하실 책임분담이요 나머지 5%는 노아가정이 맞추어야할 책임분담임으로 이것은 간섭하실 수 없는 것이다.
함을 중심한 노아가족이 완수하여야할 책임은 못다 하였음으로 노아를 세워 예정하시고 섭리하셨던 하나님의 책임분담도 무위로 돌아가고만 것이다. (노아 가정 중심한 복귀섭리 참고)
이런 일은 아브라함 때에도 똑같이 반복되었다.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서 그를 불러 제물을 드리던 때까지 하신 섭리로써 하나님의 책임분담은 끝났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자신의 책임분담이었던 헌제에 관하여는 간섭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행위는 그로 인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400년간 고역을 당하게 될 중대한 문제임을 아시면서도 하나님은 그대로 방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세 때에도 그러했다. 십재앙의 이적과 기사로 이 민족을 사탄 세계에서 구출하셨고 지팡이로 홍해를 갈라 그들을 안전지대로 옮겨 놓았으며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를 채웠고 반석을 쳐 목을 추겼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광야의 길을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으로서 하실 책임은 끝난 것이다.
이 민족으로 이루시려는 예정의 뜻은 모세와 이 민족의 책임완수여부로써 좌우될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을 그렇게도 자상히 권고해주신 하나님이시지만 시내산에서 기도하고있는 모세를 행방불명되었다고 새로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그를 섬기는 이 민족의 불신의 행동에 대하여는 조금도 간섭치 않으셨다.
믿음으로 넘어야할 이 기간에 불신으로 흘려 이 민족으로 다해야할 책임분담을 완수치 못하였음으로 그들은 전부 광야에서 쓰러져 그들을 통하여 이루시려던 예정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나님이 모세를 인도하심도 그렇게 면밀히 하셨지만 그가 반석 두 번 칠 때만은 조금도 간섭치 않으셨으니 그 이유도 같은 원리로써만 해명될 것이다.
예수 당시에도 하나님은 이미 메시아의 강림을 예고하셨고 메시아 강림후에도 동방박사, 목자, 시몬·안나 특히 세례 요한 등을 세워 증거하심으로 하나님의 책임분담은 끝났던 것이니 이제는 이 95%의 구원의 은사가 이스라엘 민족의 것으로 되는가 아니되는가하는 문제만이 그들 자신 지혜로 찾아 완수해야할 5%의 책임감당 여부로 남아졌던 것이다. 그런데 저들은 불신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살해함으로 이 5%를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완전구원의 혜택을 받지 못한 것이다. (전편 제2장 참조)
이와같이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중심적 사명을 가지고 나타났던 모든 선지들은 자기에게 분담된 책임을 완수하지 못하였으므로 인류사는 서러움의 노정을 거듭하여온 것이다. 원리주관권내에 있을 때의 아담과 해와도 완성이란 은사를 받기 위하여는 따먹지말라는 조건을 자신이 지켜야할 것이었지만 비원리세계에 타락된 인간도 원리세계에로 옮겨질 수 있는 구원의 혜택을 받으려면 역시 인간의 책임분담을 완수치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타락론에서 밝혀진대로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었음으로 사탄도 인간을 대할 수 있는 원리형인 조건이 남아졌음으로 하나님이 아무 조건도 없이 인간을 하나님 편으로 끌어가면 사탄은 반드시 참소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는 위에서도 많이 들었지만 하나님이 욥을 칭찬할 때에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까닭없이 축복하셨기 때문이니 그 재물과 자녀를 쳐야한다고 하나님 앞에 참소하였다(욥 1/9~11). 사탄이 욥을 칠 때에 욥은 그 모든 고통의 시험을 이겨서 하나님이 대할 수 있는 조건을 자신이 세웠기 때문에 그 조건으로 인하여 받은 그 후의 축복은 전의 수배에 이르렀어도 사탄이 참소하지 못한 것이었다.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는 제물로써, 구약시대에는 율법으로써, 신약시대에는 신앙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이 대할 수 있는 조건을 인간자신이 찾아세워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만일 누구든지 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내가 저희에게로 들어가 저로 더불어 먹고 저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하신 말씀대로 주는 나를 맞을 만단의 준비를 다하시고 문을 두드리고 계시지만 문을 여는 것은 내 자신이 해야할 책임임으로 이것을 못하면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주님과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만날 것이요 두드리라 열어주실 것이라」(마 7/7)하셨으니 구하는 것 찾는 것 두드리는 것은 나의 책임분담으로서 이것을 하지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주실 수도 만나게하실 수도 열어주실 수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애급을 떠난 이스라엘 민족에게 분명히 가나안복지를 주실 것을 예정하시고 약속하셨으나(출 3/7~10) 그들은 불신으로 인하여 자기들에게 분담된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음으로 이 예정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민 14/29~30).
하나님은 원리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이미 타락론에서 논한 바이지만 하나님은 스스로 세우신 이 완전 무결한 원리를 무시하는 입장에 설 수 없는 것이다. 고로 타락한 인간에 대한 재창조의 섭리를 하심에도 이 원리를 떠나서는 하시지 않으심으로 비원리적 존재와 그 행위는 원리적인 조건이 없이는 대하시지않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를 떠나 능력으로만 하실 수 있다면 타락한 아담 해와는 즉석에서 소멸해버리고 다시 창조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며 인간을 구하시기에 이렇듯이 유구한 섭리의 역사노정을 요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요 하필 메시아를 보내셔서 그러한 고난의 길을 통하여 구원의 섭리를 하실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사도 바울의 개심도 전적으로 기사를 통하여 된 것으로 알기 쉬우나 이것도 95%의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한 5%의 바울의 지혜로써 맺어진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 애급에서 행하여진 십재앙이며 홍해를 가른 일이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에 의한 인도며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시는 등의 모든 이적과 기사를 목격한 그 민족이 바로 하나님을 반역하였던 역사적 사실과 예수께서 고쳐주신 10명의 나병환자 중에서 단 한명만이 예수님 앞에 나왔으며, 또 나사로가 썩은 중에서 부활하는 광경을 보았고 오병이어로 수천명을 먹이고도 남음이 있었던 이적을 목도한 바로 그 민족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었던 실례를 보아도 기사이적만이 하나님을 믿게하는 주요한 원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복귀섭리의 과정에 처한 인간들에게는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에 대하여 인간으로서의 이루어드려야할 책임분담이 남아있음을 역사적 실증으로써 알게되면 하나님 한분만이 역사로써 모든 뜻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예정설은 타당치 않을 수 있은 것이다. 이러한 상대적인 섭리에서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은 이루어지는 것임으로 인간이 지혜로써 하나님의 뜻을 찾아 인간으로서 할 책임을 다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개 이 모든 일을 간수하고 봉하여 말세까지 이르게함이라 많은 사람이 스스로 정결케하고 희게하며 연단함을 받을 터이나 ······오직 지혜있는 자만이 깨닫는다」(단 12/9~10)고 하셨다.
「여호와 하늘로서 인생을 굽어살피심이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하심이로다」(시 14/2)고 기록되었고 바울도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있는 것을 증거하노니 그러할지라도 이 열심이 지혜를 좇아 있는 것이 아니라」(롬 10/2)고 하셨으며 믿음을 나눠주신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고 말씀하셨으니 이와같이 인간에게 그 지혜를 강조하셨음을 인간으로서 다해야할 책임분담이 있음을 역연하게 말해주는 것이다.
예수님도 세례요한이 옥중에서 제자들을 보내어 「장차 오실 이가 선생님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마 11/2~3)하고 물었을 때에 자기가 메시아라는 것을 밝히 대답하시지않고 「너희가 듣고 보는 것으로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도 이제 예수님을 믿고 아니믿는 것은 현상을 보아서 세례요한 자신이 지혜로써 판단해야할 책임분담이라는 것을 명시하신 말씀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의를 나타내나니라」(마 11/19)고 말씀하신 것이다. 때가 이르리니 지금도 그 때라 하나님은 공평하게 끝날의 경륜을 전개하고 계신다.
이제 각자가 슬기로운 처녀가 되어 하늘을 대한 나의 책임분야가 무엇인가를 알아야할 때는 왔다. 등을 준비하고 고대하던 제사장과 교법사는 신랑이 문밖에서 눈물을 흘리게 되었었고 사마리아 창녀와 세리와 죄인이 신랑의 연석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렸으니 어찌 택한 백성을 버리시고 이방인을 연석에 부르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을 것인가. 주께서 나를 찾아오시리라는 우매한 생각을 버리자. 이러한 태도가 역사를 저렇듯 비참하게 엮어내려왔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는가.
제3절 예정설에 근거되는 성구
역사를 통하여 헤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섭리와 우리의 실생활로써 추찰하건대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그의 예정이 그대로 이루어져오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예정설을 신도들의 신앙사상에서 제거할 수 없는 그 설을 입증할 수 있는 성서적 근거가 뚜렷한 것같이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제 칼빈의 신조와같은 예정설을 부인하는 입장에서 현재까지 그 설을 입증해오고 있는 성구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석하여야될 것인가를 알아보기로하자. 바울이 진술한 바에 의하면 「이는 하나님이 미리 아신 사람을 미리 정하사 그 아들의 모양을 본받게하시고 여러 형제 중에서 그가 맏아들이 되게 하심이니라 미리 정하신 이를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이를 또한 의롭다하심을 받은 이를 또한 영화롭게 하셨나니라」(롬 8/29~30)고 하였다.
위에서도 상술한 대로 틀어진 인간을 다시 뜯어맞추는 것이 복귀섭리임으로 복귀섭리에는 예정하신 뜻을 맞추어야할 하늘의 프로그램이 있다. 하나님은 이 프로그램에 이루어 맞추어질 수 있는 인간을 택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인간을 택하시는가하는 것은 위에서도 잠간 논하였지만 하늘뜻을 중심하고 본 민족적 위치와, 같은 민족이라도 그의 선조가 쌓은 하늘에의 공적과, 같은 후손이라도 그 개체가 타고난 천품과, 같은 천품의 인간이라도 그 개체를 둘러싼 후천적인 조건과 또 하늘이 요구하는 시기 등등의 조건에 부합되는 사람이라야 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예지하심으로 그를 예정하시고 부르시어 의롭다하심으로 영화롭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예정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자기의 책임분담을 하여주실 수 있는 선까지 인간자신이 나아가는 것을 전제의 조건으로 한 예정이다.
그러므로 예정된 사람이라할지라도 그 사람에게는 자신의 행동의 자유에 의하여 이 선까지 나아가야할 노정이 남아있으니 타락론에서 논한 대로 하나님이 간섭할 수 없는 이 노정을 스스로 다 걸어야 의롭다함을 얻을 것이요 이와같이 의롭다함을 얻은 자라야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을 누려 그 개체를 중심하고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은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의 예정은 하나님의 예지로써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특권이므로 「누구든지 내가 긍휼히 여기려면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려면 불쌍히 여기리라 그런즉 원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오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5~16)고 말씀하셨다.
하나의 프로그램을 맞추기 위하여 하나의 인간을 택하지않을 수 없는 섭리노정임으로 이런 선택의 권한은 하나님에게만 있는 것으로서 인간이 세울 수 있는 어떠한 조건으로도 좌우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섭리의 뜻을 모르는 인간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할 때 바울은 「토기장이가 진흙덩이로 하나는 귀한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한 그릇을 만드는 권한이 없느냐」(롬 9/21)하고 외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실제로 천한 그릇을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설혹 이렇게 하시더라도 이미 타락되어 버림받아 창조본연의 가치를 완전히 상실해버린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의 선택의 권에 대하여는 아무 항의할 조건이 없다는 뜻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미 쓰레기통에 버려진 쓰레기를 다시 골라 무엇에 쓰든지 간에 그것은 쓰레기 자신이 간섭할 바 아니요 오직 그것을 쓰려하는 인간의 권한이라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인간은 항상 하나님 앞에는 아무 가치없는 타락인간이라는 것을 잊어버릴 때가 많다.
사실 버려진 쓰레기와 같이 가치없는 자신을 가치있는 입장에 세워 놓고 하나님의 전체적인 섭리를 헤아리려하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불만을 갖게되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인간에게 권고하기 위하여 이런 서한을 보낸 것이다.
하나님은 복중에서부터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시어 장자된 에서는 차자 야곱을 섬기리라고 하셨다(롬 9/11~13). 복중에서이기 때문에 각자의 아무 행동의 결과도 없을 때에 장자는 미워하고 차자는 사랑하셨으니 이것도 복귀섭리의 프로그램을 이루어 맞추기 위함이었다.(말 1/2~3)
상세한 것은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에 미루지만 에서와 야곱을 쌍태로 택하심은 각각 가인과 아벨의 입장으로 갈라세워 놓고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이루지 못하였던 장자기업 복귀의 뜻을 야곱으로 하여금 에서를 굴복시킴으로써 탕감복귀하려고 하셨음으로 야곱은 아벨의 입장이 되어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셨고 에서는 가인의 입장임으로 미워하셨다.
이제 형으로하여금 동생을 섬기게하려하심도 가인이 아벨을 죽인 죄를 탕감하여 복귀섭리의 프로그램을 이루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 예정도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책임분담의 범위를 넘어설 수는 없는 것이다.
야곱이 아무리 택함받았다할지로되 자기로서의 책임을 못다하면 야곱을 통하여 이루시려던 예정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요 아무리 미운 입장에 처한 에서라할지라도 스스로 자기의 책임을 다하여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수 있는 선까지 나온다면 하나님은 그를 버릴 수 없을 뿐 아니라 영광의 은사를 허락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에서는 야곱에게 순종굴복하였음으로 야곱과 동일한 축복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에서를 미워했다함도 인간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러한 미움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교훈은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예정설의 근거를 세울 수 있는 성구는 이 밖에도 많이 있지만 예정이라는 뜻을 근본적으로 알면 그 모든 성구의 의의도 자명해질 것이요 따라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인간으로써 취하여야할 태도도 알려질 것이다. 이 예정설에 관하여는 후편을 자세히 연구하면 좀더 확실한 대답을 얻을 것으로 믿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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