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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남녀관계의 기준은 하나님 뜻의 흐름>의 줄거리 :
부부관계에 대해 말씀하시는 중에 아내의 남편에 대한 복종과 남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그 복종이 주께 하듯 하는 것이며, 그 사랑이 주께서 교회를 향해 하는 사랑같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의 상황을 놓고 보았을 때 너무나 거리가 먼 말씀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 말씀 안에 들어있는 근본 취지를 놓치면 안 될 것입니다. 교회가 갖는 통일성의 속성을 부부관계로 연장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남녀관계의 기준은 하나님 뜻의 흐름
(에베소서 5:22~33)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본문은 부부관계에 대한 말씀입니다만 꼭 부부가 아니더라도 남녀관계 전체에 포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다만 부부관계에 대한 계명이나 율법은 아닙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있는 사람은 이해의 영이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이해의 영이 바뀐 사람이 새사람입니다. 새사람은 세상을 대하는 방식에 있어서 붕어빵같이 하나님을 본받는 하나님의 아들들이고 빛의 자녀들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이라는 어둠 속에서 아무도 하나님을 마음에 담지 않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사람들 틈에서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곧 빛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세월을 낭비하지 않고 모든 수평의 시간들을 수직 하강의 시간으로 바꿉니다. 크로노스 시간의 삶을 카이로스 시간의 삶으로 바꾸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수식어를 가질 수 있는 새사람의 부부관계, 남녀관계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본문을 통해 가르쳐줍니다.
본문의 중심이 되는 구절은 22절과 25절입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하였고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하였습니다. 부부관계에 적용시킬 수 있는 좋은 내용의 말씀처럼 보입니다만, 이 말씀의 앞뒤 맥락을 끊어버린 채로 아무 부부에게나 이 말씀을 적용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마음이 머물지 않고 있는 사람, 이해의 영이 바뀌어서 새사람이 되지 못한 사람, 하나님을 본받지 않은 사람, 빛의 자녀도 아니고 카이로스의 삶을 살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한 아내와 남편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어둠 속에서 나오는 오류이며 그릇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제까지 말씀을 통해 배웠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 자신도 그리스도 바깥으로 나갈 때 오류투성이의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에서 특이한 점은 부부관계에 대한 말하지만 주로 아내의 관점에서 해야 될 일이 언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당시 교인 중에 여성이 절대적으로 많았습니다. 지금 십자가 복음방송을 듣는 분들의 비율을 보아도 여성들이 많습니다. 에베소 교회 또한 이와 같은 상황이었기에 사도 바울은 아내에 대한 언급을 주로 하였던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부부생활의 실질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부부생활을 오랫동안 해온 아내라면 남편의 사랑을 크게 기대하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세속적으로 말해서 사랑하는 것도 귀찮아지는 시기가 오게 됩니다. 경제적으로 불편함이 없게 해주면 최고의 남편이라고 생각합니다. 5년 살고 10년을 살면서 볼 장 다 봤고 남편으로부터 대단한 사랑을 기대하지도 않고 편안함만을 바라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 거리낌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것을 염두에 두고 굳이 복종하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이것이 꺼릴 일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말하는 것은 처음이 아닙니다. 이미 고린도전서 11장에서도 유사한 내용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앞으로 골로새서에서도 이러한 내용은 다시 나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을 접하자면 자꾸 웃음이 나옵니다. 천태만상의 부부관계를 떠올려보면 본문이 담고 있는 내용이 삶과 너무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천태만상의 부부관계에서 다양한 성격의 남편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남편과 함께 사는 아내의 입장에서는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는 말은 꺼려지고 불편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복종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사탄의 유혹을 받아 죄의 체질에 종노릇 해왔기 때문에 복종이라는 말에 저항감을 느낍니다만 기꺼이 복종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나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복인 이유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기꺼이 복종할 수 있는 상대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갖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남편에 대한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무조건 복종할 수 있는 남편이라면 그보다 더 잘된 결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이 이와 다르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빛의 아들이 아니고 어둠의 아들이고, 이해의 영이 바뀐 것이 아니라 마귀가 시키는 대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또 수직 하강의 시간을 경험하기는커녕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으로 수평의 시간만을 보내려 합니다. 이러한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은 거부감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단지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21절을 보면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하였습니다. 부부관계에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을 전제할 때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할 수 있고 남편은 아내를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시듯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이란 곧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의식하지 못하게 됨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언제나 의식하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살아계신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이루고 마음의 흐름을 유지함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 흐름을 통해서만 그리스도 안에 모여 있는 하나님의 뜻이 내게로 내려와 카이로스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어떤 불행한 일보다도 그리스도를 잊어버리는 것을 제일 불행한 일로 여기는 것이 그리스도를 경외함입니다. 그리고 부부가 서로에게 피차 복종함은 바로 그리스도를 경외함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전제로 하여 부부관계와 남녀관계에 대해 비로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편이 전혀 그리스도를 경외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혼자서라도 카이로스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본받는 빛의 아들로서 살아가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빛의 아들이란 성별을 떠나 하나님의 자녀임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우리의 영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예수님이 아들로 규정되고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들어간 우리의 영이자 공백의 마음도 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본받는 아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남편도 세상에 속한 한 부분입니다. 따라서 남편을 마주하기 전에 먼저 삼위일체 하나님과 충족한 상태를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함이 넘쳐나는 가운데 남편을 대할 수 있으면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써 하나님을 본받고 빛의 자녀가 되고 카이로스의 삶을 산다는 것은 남편에 대한 복종이라는 부부관계의 조언보다 우위에 있는 영적 원칙입니다.
아내도 남편도 그리스도를 경외함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피차 복종하고 사랑함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아내도 남편도 교회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단순히 예배당 조직이 아닙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흐름을 유지하는 자들 전체가 교회이며, 이러한 교회는 지구상에 하나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부관계도 교회 속에서 이루어지는 관계 중의 하나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내가 할 일이란 지금 내게 내려오는 따끈따끈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남편을 대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남편이 그리스도를 경외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 분명할 때는 어떨까요? 아내가 남편을 무시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남편에 대한 선입견이나 고정관념 혹은 나의 평가나 판단은 카이로스의 삶을 가로막는 문제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지금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는 따끈따끈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따라 말하고 행동할 수는 없습니다. 나에게 그러한 경향이 있다면 반드시 십자가에서 죽이는 과정이 동반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리스도를 경외하지 않는 남편에 대해서 마음이 제로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빛의 자녀로서 카이로스의 삶을 살 수 없고 하나님을 본받는 자로서의 말과 행동을 할 수도 없습니다.
남편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내가 쉽게 범하는 실수 중의 하나입니다. 이 세상에서 내 남편에 대한 전문가는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절대 범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남편은 내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입니다. 그렇기에 남편에게 복종할 수는 없으나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아 말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남편 앞에서 하나님께 복종하는 모습입니다. 십자가에서 남편에 대해 갖고 있었던 모든 판단을 제로로 만들 수 없다면 남편에 대해 아는 척하게 되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마음이 밑바닥에 깔려있게 됩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절대 카이로스의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에 두자면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는 말씀에 담긴 진짜 의미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23절을 보면 이 말씀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남편을 머리로 비유하고 있는데 이러한 내용은 이미 고린도전서에서도 등장한 바 있습니다.
머리는 곧 서열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머리이시며, 그리스도는 남편의 머리이고, 남편은 아내의 머리라는 순서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머리는 생각과 뜻의 발원지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말과 행동은 오직 하나님의 생각과 뜻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남편의 생각과 뜻은 그리스도에게서 나와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뜻이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부부가 살 때 부부에게 관계된 일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생각이 아내에게 전달되는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대해 갖고 계신 생각은 먼저 그리스도에게 임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남편에게 그 생각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들어온 생각 중에 남편이 할 일은 남편이 하고, 아내에게 전달될 일이 있습니다.
부부로서 함께해야 될 일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하나님으로부터 생겨나서 그리스도를 거쳐 남편을 거쳐 아내에게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 때의 질서를 따른 통일된 방식입니다. 창조 때의 과정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먼저 만드셨고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으므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창조의 질서를 진리로 받아들이고 부부관계에도 적용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남자가 먼저 생기고 여자가 생긴 이 순서를 하나님의 뜻이 부부에게 온전히 전달될 수 있는 방식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주께 하듯 복종할 수 있는 전제는 부부가 모두 그리스도를 경외함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발원한 우리 가정에 관계된 뜻과 생각은 그리스도에게 모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남편에게까지 그 뜻과 생각이 와있느냐는 것이 전제입니다. 머리를 언급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럴 때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부부관계의 대전제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부부가 살아가는 가정에 대한 하나님 뜻과 생각은 그리스도에게 받아들여지고 남편에게 흘러들어와 아내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것을 전제로 할 때 남편에게 복종함이 주께 하듯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그리스도를 경외함이 없다면 아내는 그보다 더 위의 원칙인 카이로스의 삶을 살아가며 내가 직접 그리스도와 연결될 수 있으면 됩니다.
이것은 가정이라는 영역에서 남편과 아내의 순서를 정한 것이지, 아내의 삶을 남편에게 복속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아닙니다. 아내로 살면서도 남편과 관계없는 일은 많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탁했고, 나사로의 집에서 마르다가 예수님과 제자들이 먹을 음식을 준비하던 것과 같이 당시에도 남자의 할 일과 여자의 할 일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아내도 남편과는 관계없이 그리스도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받아서 카이로스의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부부관계의 순서보다 앞서는 더 큰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부부가 함께 관계된 일이 있다면 교회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아 모든 지체가 통일을 이루는 것과 같은 일이 부부관계에서도 일어나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모두 그리스도를 경외할 때 부부와 관계된 일에서 통일을 이룸에 있어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담되는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발원한 뜻과 생각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남편에게까지 오는 것이 막힘이 없다면 복종함에 아무 문제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실제로 그런 남편을 갖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끝까지 그리스도를 경외하지 않는 남편과 살아야 한다면 오히려 혼자 사는 편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 38절과 40절에서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결혼하는 자도 잘하거니와 결혼하지 아니하는 자는 더 잘하는 것이니라 /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라…”라고 했던 것입니다.
머리의 비유는 맹목적인 복종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생각의 흐름의 관점을 뜻합니다. 사도 바울은 부부가 공통적으로 관계해야 될 일에 대해 하나님의 창조의 순서를 염두에 두었습니다. 남편이 그리스도를 경외할 경우에 그리스도에게 담겨있던 하나님의 뜻은 남편을 통해 전달되고, 이처럼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남편과 함께 살 경우에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5절을 보면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하였습니다. 부부가 피차 복종함에 있어서 남편이 아내에 대해 보여야 하는 태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어지는 26~27절을 보면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심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언급됩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로 씻었다는 것은 곧 세상에 대해 죽는 세례를 의미합니다. 또 깨끗하게 하였다는 것은 그 마음이 세상으로 흘러가지 않고, 세상에서 스스로 목표나 계획을 세우며 잘못된 방향으로 빗나가는 죄가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또 티나 주름 잡힌 것을 없게 하시고 흠이 없게 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막혀있는 상태를 해결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해서 하신 일은 가장 좋으신 하나님을 갖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아무런 막힘없이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남편이 아내를 사랑함에 있어서도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정이라고 하는 영역에서 부부에게 해당되는 일이 주어졌을 때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방식은 이 관계를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나에게까지 온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받아들일 마지막 지체가 아내라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머리로서 지체인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머리에는 하나님의 생각이 들어오고 계셨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생각을 막힘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지체가 될 수 있도록 십자가에서 죽고 피를 흘리심을 통하여 깨끗하게 하셨고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흠이 없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최고의 사랑이란 최고로 좋으신 하나님이 갖고 계신 뜻과 생각이 막힘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갖고 계신 뜻입니다. 그 뜻이 받아들여지도록 돕는 것이야말로 사랑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시는 방식이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볼 때 아내는 가정이라는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이 마지막으로 받아들여져야 될 귀한 지체입니다. 아내에게서 하나님의 뜻이 받아들여질 수 없으면 결국 하나님의 뜻은 결실을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하나님을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하나님의 뜻의 귀중함을 알면 알수록, 아내는 귀중한 존재로 여겨지게 됩니다. 그 뜻이 남편을 거쳐 아내에게 도달하고 아내에게서 열매 맺힐 수 있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귀하면 귀할수록 아내가 소중해지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가 읽지 않은 32절을 보면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부부관계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 뜻의 흐름을 비밀이라 말합니다. 신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로부터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똑같이 아버지의 뜻이 전달됨이 신비롭고,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여서 만물이 충만하게 되는 것이 신비롭듯이 부부관계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의 흐름은 놀라운 신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로부터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중에 받아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최고로 여길 때,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중에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복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과 생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최고로 좋은 것이기에 그 뜻의 마지막 결실의 지체인 아내가 소중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남녀가 부부가 되었을 때의 모습을 그림을 그리듯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리스도를 경외하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와 같이 살고 있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은 자이고, 영이 새롭게 된 새사람이고, 빛의 자녀들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카이로스의 삶을 살 수 있으면 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10년, 20년 같이 살았다고 다 아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다 안다고 생각하는 동안 카이로스의 삶은 중단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 안다고 생각해서 배우자를 무시하든 반대로 좋아하든 마찬가지입니다. 배우자에 대한 나의 모든 평가와 판단은 십자가에서 죽은 백지상태가 되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순간순간 배우자에 대한 선입견을 지우고 하나님이 주시는 따끈따끈한 뜻을 따라서만 그리스도를 경외하지 않는 배우자를 상대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배우자가 그리스도를 경외한다면 무조건 복종할 수 있고 무조건 사랑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귀한 뜻을 본문을 통해 다시 한번 새기게 됩니다. 그 말씀의 취지대로 하나님의 뜻의 흐름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남자와 여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