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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정욕과 세상을 십자가에 못을 박아야 합니다. / 2023년 3월 26일 주일 오후 예배
본문 / 누가복음 17:20-37
저는 요즘에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지금 우리교회에서 몇 명이나 구원을 받았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이 시대의 목회자와 성도들은 구원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구원에 관하여는 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받는 것으로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닙니다. 제 생각이 아니라 구원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확인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여 주여 한다고 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들은 많아도 택함을 입은 자들은 적다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들어가기를 원해도 못 들어갈 자들이 많다고도 하셨습니다. 내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찾는 이가 적은 좁은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믿는다고 아멘 한다고 되는 구원이 아닙니다. 내가 확신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목사님은 설교에서 교회 안에는 정말 천국에 가기를 원하는 성도들이 없다고 말씀을 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천국을 간절히 소망하며 사모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옥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지옥은 절대로 가지 말아야 한다고 치를 떠는 사람들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천국과 지옥이 결정되는 하나님의 심판을 마음과 영으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심판에 대해 수도 없이 들었기 때문에 지식으로는 알지만 그것이 마음과 영으로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을 준비하는 삶은 살지를 못하는 겁니다.
이 시대의 대부분의 성도들에게 천국은 죽음과 심판을 대비하는 보험 같은 것입니다. 안면도 있을 때 보험설계사의 현란한 언변에 넘어가 생애 첫 보험을 든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보장해주는 것이 많다고 하니 왠지 든든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계약서를 쓰고 가는 첫 날에 와서 앞으로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기분이 이상한 겁니다.
건강하고 사고가 안 나서 보험금을 탈 일이 없으면 좋겠다는 말인데 그러면 나는 괜히 아까운 돈만 지불하고 낭비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앞으로 보험금을 많이 타시라고 해도 이상하고 말입니다. 그건 병나고 사고 나라는 말이 아닙니까?
뭐가 좋은 겁니까? 열심히 보험료만 성실하게 내는 게 좋은 겁니까? 아니면 내가 낸 것을 몇 배로 받는 게 좋은 겁니까? 보험료만 내면 돈이 아깝고 낸 것을 받으려면 안 좋은 일이 있어야 합니다. 보험은 불확실한 미래를 담보로 저당을 잡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의 성도들에게 천국과 지옥이 결정되는 하나님의 심판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아예 안 믿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온전히 믿자니 실속이 없는 겁니다. 죽은 다음에 천국과 지옥과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 것 같지만 그런데 아직 나는 그 심판대 앞에 간 것도 아니고, 심판이 뭐 당장 오는 것도 아니니 지금 당장은 이 세상의 가치를 존중하고 의지하며 현실을 사는 것이 유익한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을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닌 아주 애매한 상황에 빠진 것입니다. 이 시대의 교회 안에는 심판을 믿고 그 심판을 준비하는 흰 옷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도 아니고 아예 하나님과 심판을 전혀 믿지 않고 검은 옷을 입은 불신자도 아닌 그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중간지대에서 회색 옷을 입고 있는 성도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신앙의 중간지대에서 회색 옷을 입은 자들이 하나님과 재물을, 하나님의 세상을,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두 주인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두 주인으로 섬기는 자들에게 진짜 주인은 재물 즉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흰 옷을 입었는지, 회색 옷을 입었는지 어떤 옷을 입었는지는 사람의 육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영안을 열어주시는 그 사람들은 볼 수 있습니다. 북한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탈북을 한 어느 그리스도인이 서울의 강남에 있는 대형교회에 초청을 받고 갔을 때 여기가 천국인가 싶었다고 합니다.
교회도 으리으리하고 화려하고 수많은 성도들이 모여 마음껏 예배하고 찬송하고 여기가 천국인가 싶었는데 예배를 드리는 데 아무 감동이 없더라는 겁니다. 그저 북한에서는 성경한쪽 찢어진 것을 붙잡고 두세 사람이 숨어서 숨죽이며 예배할 때도 눈물과 은혜가 넘쳤는데 말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는 게 아니라 싸늘하게 식어지는 것입니다. 강단에 올라가 말씀을 전하는데 갑자기 성령님께서 영안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교회 안에서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을 보여주시는데 이건 기절초풍할 지경인 겁니다. 너무 충격적인 것입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많은 사람들 중에 흰 옷을 입은 성도들이 이렇게 없단 말인가? 성도들이 교회에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적다고 하면 믿습니까?
대부분의 성도들은 주여 주여만 하면 다 구원받을 줄 압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회색 옷을 입은 자들은 즉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두 주인으로 섬기는 자들, 하나님도 섬겼던 자들은 결코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섬겼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긴 것이라고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았던 검은 옷을 입은 이 불신자들만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여 주여 했지만 회색 옷을 입은 자들도 검은 옷을 입은 자들과 함께 지옥에 갑니다.
그래서 가장 억울하고 분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회색 옷을 입고 신앙생활 하는 성도들입니다. 그래서 신앙에는 애매한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사울과 나발이 은혜를 못 받아서 심판을 받았습니까? 거저 주시는 큰 은혜를 받았지만 그 은혜를 허사로 만들었기 때문에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를 받은 자답게 살아야 그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인데 말입니다.
하나님이 제 기도에 응답을 해 주실지 저는 모릅니다. 그런데 저는 기도할 겁니다. 저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성도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사명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한 명이라도 더 천국으로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저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고 가면 다 구원 받은 것처럼 거짓 평안을 선포하고 속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주 마다 구원과 심판에 대하여 십자가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심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 중에 또 하나 충격적인 것은 심판을 맞이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이미 심판을 받은 노아와 롯의 때와 같다고 하신 것입니다.
물로 심판을 받은 노아의 시대에 사람들이 어땠습니까? 그 사람들이 노아가 전하는 심판의 메시지를 믿었습니까? 그때에도 왜 노아의 말을 듣고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 없었겠습니까? 불로 심판을 받은 소돔과 고모라는 심판을 받을 때 어떠하였습니까?
롯의 사위들은 장인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얼마나 안 믿겼으면 그랬을까요? 이 시대에도 불신자들은 죽은 다음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면 한숨을 쉬며 어이가 없어 기가 막혀하는 것입니다.
롯의 아내마저도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천사가 손을 잡고 끌고 나왔어도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롯의 아내와 같은 자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믿음의 쟁기는 잡았지만 뒤를 보고 있는 자들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은 자들 말입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결국 타락한 인생들은 자신을 주인으로 섬기다가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 타락한 육체의 정욕과 세상에 탐심을 십자가에 못을 박지 못함으로 말입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지만 자신의 마음과 인생에서는 여전히 자신이 주인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하나님 됨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선언한 것입니다. 정욕과 탐심이 나를 주인과 하나님으로 만들려는 타락한 죄의 본성이 아닙니까? 그 정욕과 탐심을 내 죄를 대속해주신 주님의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못을 박은 것이 회개와 거듭남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을 박아야 즉 회개하고 거듭나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예수님이 내 죄를 대속해주신 그 십자가에 나도 정욕과 탐심을 못을 박고 회개할 때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자로 거듭나 구원을 받았으니 그 십자가 외에 무엇을 의지하고 그 십자가 외에 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오직 내 죄를 대속해주신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지금 몇 명이나 구원을 받았는지 이건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 알 수 없다고 외면하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나는 구원을 받았는지 이것보다 중요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자신을 계속해서 심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자신을 검증할 때 나는 정말 구원을 받은 자인지 시험하고 확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냥 무턱대고 덮어놓고 믿습니다하며 구원을 받았을 것이라고 대충 넘겨버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주 까다로운 사람들이 어쩌면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관심도 없고 무덤덤한지 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까다로움을 피는 것처럼 자신을 말씀으로 그렇게 해보시기 바랍니다.
심판을 맞이하는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이 노아와 롯의 때와 같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심판을 믿고 준비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겁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하나님과 세상을 함께 섬기며 회색 옷을 입고 심판대로 가는 것입니다. 이 땅을 떠날 때는 구원을 받은 줄 알고 자기 평안 속에 떠나는 것입니다.
자기가 구원을 받은 줄 알고 자기가 만든 평안 속에 이 세상을 떠나지만 곧 심판대 앞에 섰을 때 구원받지 못할 잘 못된 길로 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런 성도들이 얼마나 많겠느냐는 겁니다. 이 시대의 교회가 성도들에게 구원의 믿음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 겁니다. 거짓 평안을 주는 겁니다. 성도들이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선포합니다.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목사와 성도들이 다 같이 타락한 것입니다. 목사는 성도들에게서 나오는 세상의 영광과 명예와 힘으로 그 육체의 정욕을 즐기고 성도들은 목사에게서 나오는 거짓 평안과 위로를 받고 세상의 탐심으로 좋아하는 것입니다. 다 함께 멸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이 돌아가는 소식을 보면 AI 인공지능과 출산율 저하가 이슈입니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인간과 같은 인조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왜 인간은 인간과 같은 로봇을 만들려고 할까요? 왜 모든 문명이 비약적으로 진보했는데도 인간들은 자신과 같은 하나님이 주신 방법으로 낳는 것은 원치 않을까요?
앞으로 진짜 인간보다 가짜 인간이 더 많은 시대가 오지는 않을까요? 하나님이 언제까지 지켜보실지 모르지만 정말 영화에서 보던 일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아파트 단톡방에 있는 한 주민이 자신을 딩크족이라고 부르더군요. 맞벌이를 하면서 아이를 낳지 않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아이를 싫어하면 교사를 하겠습니까? 말하는 것을 보니 아이를 싫어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초등학교 6학년짜리를 낳았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한 엄마가 이제 3개월 정도 된 아이가 있나 봅니다. 대천으로 이사를 왔는데 0세 유치원을 찾는데 좋은 곳을 소개시켜 달라고 하면서 제발 1시간만이라도 어디에다 맡겼으면 좋겠다고 하소연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젊은이들에게 양육은 공포인 겁니다. 그것은 전에는 피할 수 없는 고귀한 희생이었지만 이제는 얼마든지 피해갈 수 현실이 된 것입니다. 제가 볼 때에는 아이를 키워주는 보모 로봇이 개발되어 지원이 돼야 그나마 아이를 낳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제 사회에는 희생이라는 단어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자아숭배가 팽배한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에서 십자가가 사라진 영적인 현실의 반영인 것입니다. 이제 교회와 성도들에게 십자가는 이상한 나라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그걸 말씀하신 것은 아닐까요? 내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는 그 말씀이 말입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은 있어도 십자가에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사람들은 희귀한 시대 말입니다.
노아시대의 사람들도 소돔과 고모라도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도 멸망한 것은 결국은 그 타락한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부인하는 십자가가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롯의 처를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쟁기를 잡고도 뒤를 돌아보는 자들에게 경고하는 겁니다. 입으로 주여 주여 하지만 그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는 자들에게 말씀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는 자들에게 경고하는 겁니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나와 복음을 위하여 죽으면 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위해 살면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를 위해 사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림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의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말씀으로 자신을 시험해 본다면 자신의 믿음을 확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내 마음에 있는지,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지 말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사는지, 나를 십자가에 부인하고 말씀에 순종하는지 말입니다.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을 박았는지, 매일 자신과 싸우며 죄와 싸우며 십자가의 길을 가는지 말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하는지 말입니다. 나에게 잘 못한 사람을 용서하고 이웃을 사랑하는지 말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지 말입니다.
나를 십자가에 부인할 때 순종이라는 믿음의 열매는 반드시 열리는 겁니다. 내가 정말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그 열매를 확인하라는 겁니다. 덮어놓고 믿는다고 하고 자신을 속이지 말고 말입니다.
정말 천국에 가기를 원하십니까?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을 박고 날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주님만이 사는 그 십자가의 믿음으로 심판을 이기고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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