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장. 하느님의 구원 계획(1)
1. 구원은 너로부터(1)
♣ 1단계 여행: 묵상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 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루가 1,26-39)
오늘 에피소드는 마리아라는 한 나자렛 처녀에게서 일어난 ‘그리스도 강생 사건(잉태 사건)’에 관한 것입니다. 이 에피소드에서 주목할 점은 인간이 갈망하는 그리스도가 ‘수태’라는 방식으로 인간에게 오고, 그리스도를 수태하기 위해서는 처녀성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당시 약혼을 한 처녀의 몸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결혼을 앞둔 처녀에게 “너 아기를 가지게 될 거야” 라고 하는 계시는 그리 이상할 것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언가 무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처녀가 잉태한다는 말은 처녀가 처음으로 임신한다는 말이 아니라 남자와 접촉하지 않고 임신한다는 뜻입니다. 임신할 것이라는 천사의 말에 마리아가 자신은 처녀라고 의문을 제기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 처녀의 몸에 잉태될 것이라는 계시는 이미 구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야 7,14) 라는 계시가 나옵니다. 또 이사야서의 다른 곳에서도 아기를 갖지 못하는 여인의 임신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환성을 올려라, 아기를 낳아 보지 못한 여인들아!
기뻐 목청껏 소리쳐라, 산고를 겪어 본 적이 없는 여자야! 너 소박맞은 여인의 아들이 유부녀의 아들보다 더 많구나."(이사야 54,1)
"이것들을 누가 나에게 낳아 주었을까? 나는 자식을 여의고 다시 낳을 수도 없는 몸이었는데 누가 이것들을 이렇게 키워 주었을까?"(이사야 49,21)
‘처녀’라든지, ‘돌 계집’이라든지, ‘소박맞은 여인’이라는 표현들은 한결같이 무엇인가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자연적인 이치로는 남자 없이 임신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성서는 그리스도가 잉태되기 위해 굳이 처녀를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순수성 때문일까요? 그렇습니다. 처녀성이라는 순수성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 순수성은 남자를 경험해보지 못한 순수한 처녀라는 의미가 아니라 ‘죄에 물들지 않은’이란 의미의 순수성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아담의 계보를 잇지 않은, 즉 원죄와는 무관한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마침내 이 상징성이 가리키는 바가 무엇인지가 드러납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가브리엘 천사의 이 말에 ‘처녀가 잉태하리라’는 상징성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우리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는 믿음 안에서 잉태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과 연관된 몇 가지 주목해서 음미해야 할 점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마리아의 보편성
첫째, 마리아라는 인물의 보편적 상징성입니다. 마리아는 누구입니까? 예수의 어머니가 되도록 하느님께 특별히 뽑힌 여인입니까? 그렇습니다. 성모로서의 마리아는 그야말로 여인 가운데 가장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그분을 공경하고 어머니로서 받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만나고 있는 마리아는 성모로 영광을 받기 이전의 마리아입니다. 갈릴리 지방의 나자렛이라는 산골 동네에 사는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한 처녀 말입니다. 전자를 마리아의 특수성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마리아의 보편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특수성으로서의 마리아는 오직 한 분뿐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그분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보편성으로서의 마리아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누구나 마리아로 초대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특수성으로서의 마리아에 관해서는 많이 얘기했지만 보편성으로서의 마리아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마리아가 성모 마리아로만 우리와 관계된다면 그분은 우리로부터 공경을 받는 특별한 분으로는 남겠지만, 우리와는 다른 신분을 가진 분으로 거리를 두고 계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러러보지만 감히 누구도 그분처럼 되려는 꿈은 꾸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여인이 마리아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성모로서의 마리아는 오직 한 분뿐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보편성을 이야기하자면 모든 여인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은 마리아일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보편성 안에서만 성모영보 에피소드는 나와 다른 특별한 분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나에게서도 일어날 수 있는 바로 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에피소드의 주인공이 바로 나라는 얘기입니다.
2. 동정성이란 무엇인가?
둘째는 동정성이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복음에서 계시하고 있는 "처녀"란 믿음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어떻게 처녀의 상징성을 지니는 것일까요? 이것을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 마음의 속성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은 여인과 같은 데가 있습니다. 자아를 품어 낳기 때문입니다. 잘난 남편을 둔 아내나 잘난 아들을 둔 엄마가 남편과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저 사람이 내 남편인가!" 하거나 "이게 내가 낳은 자식인가!" 하며 감개무량해 하듯, 마음도 자신이 낳은 나의 모습을 보고 흐뭇해하길 좋아합니다. 그렇기에 마음은 늘 보다 멋진 나의 모습을 꿈꾸며 또 그런 모습의 나를 낳기를 원합니다. 마음은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때 가장 힘들어 합니다. 나는 언제나 ‘무엇’이어야 하고 남보다 뛰어난 ‘무엇’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은 흡족해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나를 돌이켜봤을 때, 나의 모습이 초라하게 여겨지면 마음은 그 모습에 불만을 품습니다. 그러면 마음은 지금 보다 훨씬 능력 있고 멋진 또 다른 모습의 나를 꿈꾸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마음은 늘 나에게 관심을 갖고 자아를 낳고 또 보다 나은 또 다른 모습의 자아를 품습니다. 그렇기에 마음은 많은 자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명함에 새겨진 당신의 신분들은 바로 당신의 마음이 낳은 자식들인 것입니다. 당신은 되도록 많은 자아를 가지려 하고 자신의 여러 가지 자아를 볼 때마다 흐뭇해합니다. 이처럼 새로운 자아를 품고 보다 더 나은 자아를 낳으려는 마음은 마치 아이를 잉태하고 낳는 여인의 자궁과도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자아를 품고 낳는 이유는 삶의 문제를 자아가 가진 능력으로 해결하려는 데 있습니다. 삶이 불안할 때 우리 마음은 지금보다 더 나은 모습의 나를 꿈꾸며 그 자아의 능력에 힘입어 불안한 삶으로부터 탈출하는 행동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시장이 되면 시장으로서의 능력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 능력 한도 내에서 나는 삶의 여러 문제를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내가 대통령이 되면 그만큼 능력도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만으로 우리가 평생 직면하게 되는 삶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회사에서 쫓겨 날 수도 있고, 어느 날 갑자기 질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자식들이 잘 되길 바라지만 그것도 많은 부분은 나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삶에서 만나는 무수한 사건들을 생각해보면 내가 가진 자아의 능력이란 참으로 가소로울 따름입니다.
삶이란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와 같습니다. 끊임없이 요동을 치므로 우리는 지금보다 더 능력 있는 자아를 꿈꾸게 됩니다. 이것은 거지든 사장이든 똑같이 직면하는 우리들의 운명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더 많은 자아가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끊임없이 더 능력 있는 자아를 꿈꿉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 이 일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란 우리가 문제에 직면할 때 마음이 자아를 낳아 나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그와는 반대로 하느님께 내맡기는데서 발생합니다. 따라서 믿음이 있는 곳에서는 마음의 잉태작용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때 마음은 처녀성을 지닙니다. 처녀성이란 ‘무언가를 잉태하지 않은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믿음’ 곧 ‘자아를 잉태하지 않은 마음’은 구원을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보편성을 지니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잉태는 믿음 안에서만 기쁜 소식이다.
그리스도의 잉태 소식을 담고 있는 오늘 에피소드는 마리아에게는 밝은 면만이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어두운 면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마리아는 이미 약혼한 몸입니다. 같은 마을의 요셉이라는 청년이 그 배필인데 하필 이때 임신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제 3자적 시각에서 바라볼 때, 마리아는 과연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암담하지요. 미래의 분홍빛 꿈이 하루아침에 산산조각이 난 사건이 아닙니까? 그 몸으로 결혼은 어떻게 할 것이며 부모의 얼굴을 어떻게 보며 이웃의 눈총을 어떻게 견뎌낼 것입니까? 결론을 다 아는 우리로서야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모르는 그 당시 주변 사람들은 과연 이것을 기쁜 소식이라고 봐줬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건 큰일이었습니다. 처녀의 인생을 망친 큰 사건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이 일을 계기로 이전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낯선 운명을 살아야 하는 비운의 여인으로 전락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오늘 에피소드가 마리아에게 복음이 된 까닭은 마리아가 가브리엘이 전한 소식을 믿음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사의 메시지를 요약해보면, 지금 마리아에게 일어나는 일은 불행한 사건이 아니라 기쁜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아이를 잉태할 것이고 하느님께서 보호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리아에게 잉태될 아이는 마리아만의 구세주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세주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그렇게 이해되는 것은 오직 믿음 안에서만 그렇다는 것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믿음으로 이 삶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만약 믿음이 없다면 이 일은 마리아를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뜨리는 일생일대의 불행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만 이 사건은 보호되고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책이름 : 성경명상여행
지은이 : 김경수
발행처 : 명상여행출판사
첫댓글 ‘믿음’ - ‘자아를 잉태하지 않은 마음’은 구원을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보편성이다. 아멘!
같은 사건에서
천길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지는 수도 있고
설렘과 기쁨이 그윽히 솟아날 수도 있는게
믿음의 신비라니...!^^
아멘~~
처녀란 믿음을 상징, 즉 마음은 자아를 품어 낳는 여인의 자궁과 같기 때문,...아멘!
불행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에는 복음이 된다는 것을 ....
보편성으로서의 마리아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