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에서 가장 자주 듣는 말 중 하나는 “그냥 피곤해요”입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살펴 보려 해도, 환자분은 한참을 머뭇거리다 결국 같은 말로 돌아옵니다. 잠은 자도 개운치 않고, 입맛은 있는 듯 없는 듯하고, 주말이면 그저 누워만 있다고요. 맥을 짚고 혀를 살피면 분명 짚이는 데가 있지만, 그보다 먼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이분이 요즘, 무엇을 좋아하며 사시는가 하는 점입니다.
오래 한의원을 하다 보니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건강이 나빠지는 분들에게는 거의 예외 없이 비어 있는 자리가 하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시간,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한 취향. 가족을 위해 일하고, 회사를 위해 견디고, 아이들을 위해 버티는 분들이지만, 정작 “선생님은 뭐 좋아하세요?”라고 여쭈면 잠시 멍해지십니다. 그 짧은 침묵이 저는 늘 마음에 걸립니다. 이 분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며칠 전, 신문에서 한 심리상담사의 글을 읽다가 마음이 오래 머문 대목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안에서 정말 좋아하는 것을 찾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취향의 부재’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취향을 앞세워서는 안 된다고 믿어 온 사람들, 해야 할 일들로만 일상을 가득 채워 온 사람들이 어느 날 문득 “내가 무슨 과일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며 당혹스러워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글을 덮고 저는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한의사인 나는, 나 자신에게 어떤 처방을 내려 왔는가 하고요.
조금 부끄럽게, 그러나 다행스럽게 떠오른 장면이 있었습니다.
저는 일요일 오전을 사랑합니다. 평일의 진료실은 늘 어딘가 분주합니다. 환자분의 이야기를 듣고, 침치료를 하고, 차트를 쓰고, 다음 분을 맞이하는 동안 시간은 화살처럼 지나갑니다. 그 모든 일이 싫지 않습니다. 오히려 필요하고 소중합니다. 그러나 일요일 오전만은 다릅니다. 누구의 호명도 없이, 어떤 일정에도 떠밀리지 않고, 오롯이 저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시간.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의 각도와, 식어가는 커피잔의 온도와, 아무 데도 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그 고요 속에서 비로소 제 호흡이 들립니다.
그리고 오후 네 시와 여섯 시, 저는 어김없이 KBS 클래식 FM 앞에 앉습니다. 네 시에는「노래의 날개 위에」가 시작됩니다. 가곡이 흘러나옵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누군가의 시를 실어 오는 그 시간이, 저에게는 하루 중 가장 부드러운 시간입니다. 오후 여섯 시에는 「세상의 모든 음악」의 인트로를 기다립니다. DJ가 건네는 그 짧은 멘트가 좋아서, 저는 종종 운전 중에도 라디오를 끄지 못합니다. 거창한 취미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소박하지만, 바로 그 소박함이 좋은 것입니다.
한의학에서는 양생(養生)을 이야기할 때 ‘靜(정)’을 자주 말합니다. 고요함을 길러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고요는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 곁에 조용히 머무를 수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상태입니다. 일요일 오전의 그 시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그 목소리 ― 저에게는 그것이 곧 양생이고 처방입니다.
요즘 저는 진료실에서 “선생님은 일요일에 뭐 하세요?”라는 질문을 종종 드립니다. 보약보다 먼저 그분의 일요일이 궁금합니다. 좋아하는 시간 한 토막, 좋아하는 소리 한 자락이 있는 분들은 회복도 빠릅니다. 반대로 그 자리가 텅 비어 있는 분들에게는, 자신의 취향을 찾거나 만드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니 환자분들께도, 그리고 이 글을 읽으실 여러분에게도 같은 처방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번 일요일 오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셔도 좋으니 그저 자기 자신 곁에 한번 앉아 보시기를. 좋아하는 라디오 채널이 있다면 틀어 두시고, 없다면 한번 찾아보시기를. 그리고 자신이 어떤 소리를, 어떤 시간을, 어떤 햇빛의 각도를 좋아하는지 가만히 들여다보시기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보시기를.
그렇게 채워진 작은 취향 하나가, 어쩌면 나를 살아가게 하는 가장 조용한 힘이 됩니다.
첫댓글 너무 공감이 되고 마음의 치유가 되는 소중한 글 입니다^^ 감사드려요~~
나의 바쁜 하루일과가 끝나고
저 만의 시간이 찾아 올때
비로소 저는 그 고요함에 취하게 됩니다.
고요한 시간이 오면
' 아! 포근하다'라고 느끼고 있었는데
공감되는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