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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몸은 하늘 담는 일회용 항아리>의 줄거리 :
기드온은 십삼만 오천 명의 미디안 군대를 나팔과 횃불 담은 항아리 전략으로 파쇄합니다. 그런데 이 전략의 세 가지 소재가 각각 영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즉 이 세 가지 소재는 내가 이 세상을 사는 삶의 방식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횃불을 담은 항아리로써 나팔을 불어 대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놓고는, 그 앞에서 항아리 껍데기를 깨서 횃불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바로 선민이 살아내야 하는 삶의 방식이고, 예수님의 공생애를 재현하는 삶입니다.
몸은 하늘 담는 일회용 항아리
(사사기 7:19~25)
19. 기드온과 그와 함께 한 백 명이 이경 초에 진영 근처에 이른즉 바로 파수꾼들을 교대한 때라 그들이 나팔을 불며 손에 가졌던 항아리를 부수니라
20.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횃불을 들고 오른손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이르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 하고
21. 각기 제자리에 서서 그 진영을 에워싸매 그 온 진영의 군사들이 뛰고 부르짖으며 도망하였는데
22. 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진영에서 친구끼리 칼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스레라의 벧 싯다에 이르고 또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의 경계에 이르렀으며
23. 이스라엘 사람들은 납달리와 아셀과 온 므낫세에서부터 부름을 받고 미디안을 추격하였더라
본문 중심으로 <몸은 하늘 담는 일회용 항아리>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우리의 몸은 하늘을 담는 일회용 항아리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나팔과 항아리 횃불 전략의 영적인 의미를 살펴봅니다.
본문을 보면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연극 같은 퍼포먼스를 보는 것 같습니다. 십삼만 오천 명이 잠든 깜깜한 들판에 갑자기 삼백 개의 나팔 소리가 동시에 들립니다. 보통 전쟁을 할 때는 몇 명의 나팔수가 나팔을 붑니다. 그런데 삼백 개의 나팔이 동시에 울립니다. 깜깜하게 정적이 흐르던 그 옛날에 나팔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는 것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미디안 군사들이 깜짝 놀라 깨어나자 또 삼백 개의 항아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 요란스러운 소리가 끝나자마자 십삼만 오천 명은 횃불에 둘러싸여 포위되었음을 깨닫고 혼비백산하여 서로를 칼로 죽이는 진기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한편 우리가 읽지 않은 23~25절에는 미디안이 도망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납달리 지파, 아셀 지파, 므낫세 지파에서 동원된 군사들이 추격하였고, 마지막에 에브라임 지파가 참여하면서 두 장군까지 죽이는 승리를 거두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삼백 용사는 적들과 싸운 것이 아닙니다. 제자리에서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깨뜨리고 횃불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나팔과 항아리 횃불 전략에는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나팔과 항아리와 횃불이라는 세 가지 소재는 우리의 라이프스타일 즉,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먼저 나팔의 의미를 살펴봅니다. 기드온과 삼백 용사는 미디안 군대의 진영 근처에 이르러서 나팔을 불었습니다. 나팔을 분다는 것은 주의를 집중시키는 의미가 있습니다. 나팔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팔 불기를 진영 가까이에서 행한 것이 특이합니다. 미디안 군사들이 잠든 밤에 기습 작전을 펼치려면 기드온과 삼백 용사는 자기들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게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21절을 보면 “각기 제자리에 서서 그 진영을 에워싸매 그 온 진영의 군사들이 뛰고 부르짖으며 도망하였는데”라고 했습니다. 나팔을 불고 제자리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나팔 소리를 들은 십삼만 오천 명이 달려와서 기드온과 삼백 용사를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나팔을 불고 나서 꼼짝도 하지 않은 상태는 마치 ‘십삼만 오천의 미디안 용사들이여! 잠만 잘 것이 아니라 깨어나서 우리를 보라! 너희의 적이 코밑까지 왔다! 우리를 주목하라!’라고 외치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기드온과 삼백 용사는 나팔을 불어 자기들에게 이목을 쏠리게 했습니다. 이것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기습 작전이 아닙니다. 기드온은 이심전심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받았습니다. 기드온의 마음속에서 미디안의 존재감은 하나님의 존재감에 비해서 너무나 작았기에 ‘내가 하나님을 마주하고 생각하기에 이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칼을 들고 칠 것이 아니라 깜짝 놀라게 해서 당황하게만 해도 바람에 나는 겨같이 흩어질 것이다.’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과 이심전심이 된 상태입니다.
나팔을 불고 우두커니 서 있던 것이 그것을 잘 드러냅니다. 기드온과 삼백 용사는 칼도 들지 않고 나팔과 횃불이 든 항아리를 들었을 뿐입니다. 적들이 나팔 소리에 깨어나 달려와서 칼과 창으로 찌른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기드온은 자기에게 이목을 집중하는 작전을 씁니다. 하나님의 이심전심을 전제로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미디안 군사들로 하여금 기드온의 삼백 용사를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이심전심이 된 사람을 세상 사람들이 이목을 집중하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기드온과 삼백 용사가 십삼만 오천 명을 상대한 것 같은 일은 아닐 수 있습니다. 다만 내가 단 한 사람을 상대하더라도 하나님의 생각은 같으십니다. 개인적인 이유든, 직장 일 때문이든, 공무 때문이든, 내가 누군가 한 사람만을 마주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이목이 내게 집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과 만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 앞에 나를 세우시는 것이고, 그 사람의 이목을 내게 집중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만남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진행되기에 우연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그 사람 앞에 보이시려고, 그 사람의 이목을 집중하게 하십니다. 그 사람의 어떠함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마주하는 사람이 고약한 사람이든, 마음씨가 좋은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이기적인 사람이든, 시기와 질투가 많은 사람이든, 나를 라이벌로 생각하는 사람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종류의 사람이든 하나님은 나를 그 사람 앞에 세우기를 원하시고, 그 사람의 이목이 내게 쏠리게 하십니다. 심지어 가족끼리 마주할 때도 내가 하나님과 이심전심의 상태를 유지하는 중이라면 하나님은 나를 가족들 한 사람 한 사람 앞에 세우기를 원하시고 그들의 이목이 집중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내게 세상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하기를 원하시는 것일까요? 사람의 숫자는 한 사람이든 열 사람이든 군중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여기서 항아리와 횃불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항아리를 깨뜨리자 횃불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람들 앞에 세우시려고 하는 이유는 결국 항아리를 깨뜨리고 횃불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사람을 만나도록 주권적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앞에 나를 세우시는 이유는 항아리를 깨뜨리고 그 안에 있는 횃불을 드러내서 밝히시기 위함입니다.
내가 세상을 산다는 것은 항아리로서 사는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항아리인 나는 깨지고 안에 담긴 횃불이 드러나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횃불을 드러내시려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하도록 만남을 갖게 하십니다. 내가 누군가를 만날 때 항아리인 나는 깨지고 안에 든 횃불이 드러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위해서 사람을 만나게 하시는 것이 우리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목표는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 앞에서 항아리가 깨지고 횃불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항아리가 깨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한때 오리 진흙 구이가 유행했습니다. 오리를 잡아서 진흙을 바르고 가마에서 굽습니다. 호두나 수박을 먹기 위해서 단단한 껍질을 깨뜨려야 하듯이, 오리를 먹기 위해서는 딱딱하게 굳은 진흙을 깨뜨려야 합니다. 항아리가 깨지고 횃불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인격의 핵심은 마음입니다. 내가 삶에서 항아리가 되려면 마음이 빠져나가야 합니다. 마음이 빠져나간 뒤에 남는 것이 껍데기입니다. 이 세상의 삶이란 마음이 빠져나간 뒤에 껍데기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항아리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호두 껍데기, 수박 껍데기, 오리 구이의 진흙 껍데기는 모두 무엇인가를 담기 위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몸은 마음을 담는 껍데기입니다. 내 마음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습니다. 세상에 대한 죽음이란 세상에서 기쁨을 찾지 않고, 좋음을 추구하지 않고, 만족 거리를 찾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 대해 죽은 마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마주하면 하나님과 이심전심의 상태가 되어서 하나님만으로 기뻐하고 만족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가 이루어지면 세상에 남아있는 몸은 껍데기가 되어버립니다. 몸에는 오감을 갖고 있고 머릿속에는 지정의 기능이 담겨 있습니다. 이 상태가 마음이 빠져나간 뒤의 껍데기입니다. 이 껍데기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껍데기가 될 때 하나님은 사람과 만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사람의 이목을 집중하게 하십니다.
내몸에는 오감과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기능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몸에 대해 로마서 12장 1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 몸에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맛보고, 피부로 접촉하는 색성향미촉의 오감이 있습니다. 이 오감을 통해 받아들이는 대상들에 의해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입니다. 이것이 몸이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는 마음이 빠져나가 버린 상태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몸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몸을 하나님께 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어지는 로마서 12장 2절을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공백의 마음은 무엇인가로 채워져서 기쁘고 만족하려고 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려면 기쁘고 만족하려는 대상을 바꾸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그 대상이 될 때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기에 땅에 있는 몸은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이것이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은 돈을 많이 벌어야 기뻤습니다. 자녀가 형통해야 기뻤습니다. 이것은 새로워짐이 아닌 옛사람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만으로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마음은 새롭게 됩니다. 이 세상에 있는 좋음을 추구하지 않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예수님 안에서 추구합니다. 좋아하는 것이 바뀜으로써 마음이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2절 하반절을 보면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새롭게 되면 껍데기로 남아있는 몸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껍데기인 몸에는 내 마음이 빠져나가고 하나님의 마음이 내려온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은 다른 사람의 이목이 내게 집중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누군가와 만나게 하십니다. 내가 만남을 제안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누군가와 만남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내 마음이 빠져나간 껍데기이기 때문입니다. 껍데기가 된 내몸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 안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깁니다. 이렇게 담긴 하나님 뜻이 바로 횃불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이유도 이것을 위함입니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 뜻이 드러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나를 세상에 살려두고 계십니다.
마음 채움을 위한 대상이 하나님일 때 몸이라는 껍데기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동안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으면서 살 때는 세상에서 마음 채움을 위해 추구했기에 몸이라는 껍데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십자가 예수님과 연합하여 세상에 대해 죽고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합니다. 그렇게 하나님만을 유일한 마음 채움으로 삼으면 더는 몸이라는 껍데기는 필요 없어집니다. 그런데 이렇게 내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 필요 없어진 몸이라는 껍데기야말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항아리가 됩니다. 내 마음이 몸을 빠져나갈 때 몸은 껍데기가 됩니다. 그리고 내 마음이 하나님만을 마주함이 지속될 때 몸이라는 껍데기에는 이 땅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담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생활화를 하기 이전에는 하나님과 이심전심이 될 수 없었습니다. 마음이 몸을 빠져나가는 상황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하지 않고 여전히 이 땅에 남아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도 마음은 채움을 얻으려고 합니다. 육체의 오감으로 채워져서 만족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좋음으로 채워지고자 하는데, 마음이 하늘로 빠져나가지 않고 육체에 갇혀 있으면 오감을 통해 세상에서 좋음을 추구하게 됩니다. 눈이 보기에 좋은 것으로, 귀로 듣기에 좋은 것으로, 코로 냄새 맡기에 좋은 것으로, 입으로 맛보기에 좋은 것으로, 피부로 접촉하기에 좋은 것으로 마음이 만족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몸은 껍데기로서의 수단이 되지 못한 채 마음의 목적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마음의 목적이란 좋음으로 채워지는 것인데 그것을 몸의 오감에 의존함으로써 몸이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맛보고, 피부로 접촉하면서 몸이 목적이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몸이 목적이 되면 오감의 좋고 싫음을 따라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입니다. 또한 사람의 머릿속에는 해마라는 두 개의 기억장치가 있습니다. 그 기억장치에 담겨 있는 관습, 상식, 지식, 경험 등의 데이터가 오감의 좋고 싫음을 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는 고깃덩어리 AI와 같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실시간 연결을 통해 지시받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오감을 통해 느끼고 생각하는 생체 AI인 것입니다.
지구상에 80억 인구가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 본래의 모습을 기준으로 보자면 인간이 아닙니다. 고깃덩어리 AI로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오감을 통해 느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AI보다 나은 점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반드시 우리에게 일어나야 할 일에 대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색성향미촉의 오감을 통해 좋음을 추구하는 것이 죄와 저주에 빠진 인간입니다. 이대로 살 수 없기에 일어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내 마음은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하여 이 세상을 출애굽 해야만 합니다. 내몸을 출애굽하고 이 세상을 출애굽 해서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그럼으로써 내몸은 껍데기로 남아야 합니다.
사람의 몸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 껍데기가 되어야지 마음 채움을 위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이 몸을 빠져나가서 하나님만 추구하는 상태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몸이 껍데기가 될 때 하나님의 뜻이 담기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에 대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뜻이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담기게 됩니다. 그동안은 마음의 만족을 위해 눈으로 보기에 좋은 것을 추구하며 살았는데, 마음이 몸을 빠져나가자 하나님의 뜻이 들어옵니다. 이제 사람을 만나는 것은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삶의 각종 문제나 과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은 눈에 보이는 과제를 해결함으로써 좋음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껍데기만 남았기 때문에 문제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서 드러내게 됩니다. 이렇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이 바로 횃불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위해 나를 사람 앞에 세우시려 합니다. 내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맛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각종 대상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갖고 계신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빠져나간 몸은 껍데기입니다. 오감이 있고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기능이 남아있는 몸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횃불을 담는 항아리가 되는 것입니다.
미디안의 십삼만 오천 명은 깜깜한 중에 잠들어 있었습니다. 깜깜함이란 밝음이 없는 상태입니다. 밝음은 올바름과 정답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깜깜함이란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는데 올바름이 없는 상태입니다. 울어도 정답이 아니고 웃어도 정답이 아닙니다. 화를 내도 거짓이고, 환영해도 거짓입니다. 모든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작용이 옳음이 아닙니다.
삶이 깜깜해지는 이유는 하나님과 연결이 안 되어 밝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밝음이 없는 움직임이 올바를 수 없습니다. 배우자를 마주할 때에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내 몸은 껍데기가 아니기에 하나님의 뜻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내 마음이 여전히 세상에 있어서 배우자에게 기쁨과 만족을 찾고 있는 상태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습에서 만족하려 하고, 귀에 들리는 말에서 만족하려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루어질 수 없기에 부부 관계가 좋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들어오셔야 채워질 수 있는 마음을 배우자가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른 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만족이라는 측면에서 남편과 아내의 효용성은 제로입니다. 자녀의 효용성도 제로입니다. 본래 가족이란 내 마음의 만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효용성이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마음에서 가족을 붙잡고 오감을 통해 만족을 얻으려고 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항아리를 깨뜨린다는 것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최근에 강릉에 오신 교인을 만났습니다. 이러한 만남은 좋음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 있기 때문에 몸은 껍데기입니다. 눈, 귀, 코, 입, 피부라는 오감으로 좋음을 추구할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저의 몸이라는 껍데기는 그 교인에 대해 하나님이 갖고 계신 뜻이라는 횃불을 드러내는 역할만 할 수 있으면 됩니다. 이것을 위하여 저의 몸은 그 시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교인의 이목을 내게 집중하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갖고 계신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몸이라는 껍데기를 이용하셔서 전달하시려는 밝음이 있기 때문에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저는 또 집에 돌아오면 가족을 마주하게 됩니다. 가족을 만날 때 저의 몸은 가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받아내는 껍데기가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때마다 주어지는 일회용입니다. 나라는 껍데기가 교인을 만날 때에 주어지는 뜻, 가족을 만날 때 주어지는 뜻, 업무를 수행할 때 주어지는 하나님의 뜻은 모두 별도입니다. 어떤 사람을 대할 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이 다른 사람을 만날 때도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는 껍데기가 어떤 사람과 만나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용도로 쓰임을 받았다면, 이제 다른 대상을 만나거나 다른 일을 하게 되면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또 다시 받아야만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일회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든 상황이든 문제든 난관이든 만남이 이루어질 때마다 그 대상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받아내기 때문에 일회용으로 쓸 수밖에 없습니다. 매번 새롭게 하나님의 뜻을 받아내는 겁니다.
내 기억을 작동시켜서 ‘이전에 만났을 때 이랬으니까 오늘은 이러한 말을 해야겠다.’라는 식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 속에 있는 데이터가 활용이 되더라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임하시면서 내 머릿속에 있는 데이터를 활용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단지 안부를 물어도 세상 관례상 묻는 것과 하나님이 나의 몸이라는 껍데기를 사용하시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만나는 대상이 바뀔 때마다 완전히 다른 하나님의 뜻을 받아내야 되기 때문에 항아리를 깨뜨리는 것처럼 일회용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 항아리를 깨뜨린다는 의미에는 마음이 내 안에 머무는 상태에서 어떤 대상을 만날 때 내 오감의 기쁨을 위해 말하고 행동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십자가 생활화를 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눈이 보기에 좋은 것, 귀가 듣기에 좋은 것, 코로 냄새 맡기에 좋은 것, 입으로 맛보기에 좋은 것, 피부로 접촉하기에 좋은 것을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본래 지으신 인간다움의 존재가 아닌 생체 AI의 상태입니다.
우리의 몸은 껍데기여야 합니다. 껍데기가 되어서 올바름이자 밝음인 하나님 뜻의 횃불을 담는 항아리로 쓰임을 받으려면 마음이 몸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하여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이란 마음 자체를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채움을 위한 대상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 생활을 한다고 해도 여전히 돈이 좋고, 형통이 좋고, 승진이 좋으면 새롭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이전의 좋음에 대한 죽음입니다. 새롭게 됨이란 하나님 아버지만 좋음인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서 땅으로 내려오면 안 됩니다. 그리고 땅으로 내려오지 않으려면 ‘나는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고 여기며 예수님의 십자가가 늘 의식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완전히 껍데기가 될 때 온전히 하나님의 뜻이 임하시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의 항아리가 되면 하나님은 자꾸 나를 사람들 앞에 세우십니다. 사람을 만나게 하십니다. 사람을 만날 때는 그 사람이 잘났는지 못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껍데기이기에 마주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횃불을 드러내기 위하여 깨져야 하는 항아리일 뿐입니다. 이것은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고, 일과를 수행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는 일회용 항아리입니다. 일일용 항아리입니다. 우리 마음은 하루 종일 하늘에 올라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몸은 마음이 빠져나간 껍데기입니다. 오감으로 포착한 대상을 향해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하나님의 뜻을 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이 횃불의 의미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져서 어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은 세상에 있는 채로 생각 감정 의지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올바름이 하나도 없는 어둠에 싸인 상태입니다. 이러한 어둠에 싸여있는 한 사람을 만날 때 하나님은 내가 횃불을 드러내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올바르신 뜻의 횃불을 담고 사람 앞에서 깨지는 항아리가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깨진다는 것은 내 마음이 그 사람과의 만남에서 기쁨을 추구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눈으로 보면서, 악수하면서, 대화하며 귀로 들으면서 그 사람에게서 기쁨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몸을 목적 삼아 좋음을 추구하려는 내가 깨지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하늘을 담는 일회용 항아리로 살 수 있기 위해서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마음이 땅에 있으면 십자가를 붙잡고 하늘로 올라가야 하고, 하늘로 올라가면 땅으로 내려오지 않기 위해서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과 이심전심의 상태를 유지해 나갑니다. 그럼으로써 이 땅에서 하늘을 담는 껍데기 일회용 항아리로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만나는 모든 대상을 향하여 이 대상과의 만남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 대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뜻인 횃불을 받아 말과 행동을 하게 해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하여 오늘도 예수님 십자가를 붙잡는 데 목숨을 바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