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시장 3공구 A동 남측 계단 입구 혼수이불점 앞에는 오래된 큰 비석이 하나 서있다. 1953년 7월 국제시장화재복구대책위원회(위원장 염성조)에서 세운 준공기념비다. 1953년 1월 30일 저녁 7시 40분 국제시장의 춘향원이라는 허름한 술집에서 실수로 일어난 불이 불어온 서풍을 타고 판잣집 일색인 국제시장을 불태웠다. 당시의 국제시장은 판자로 얼기설기 가게를 꾸민, 난장을 겨우 면한 조잡하기 짝이 없는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저마다 겨울 난방을 하느라 석유난로를 피우던 시절이어서 불난 집에 기름 붓듯 불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손쓸 나위도 없이 번져나가 국제시장을 깡그리 잿더미로 만들었다. 부산 시내 소방차가 총동원되고 미군용 소방차까지 동원되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불이 난 지 7시간 만인 이튿날 새벽 2시께에야 불길을 잡을 수 있었으나 4천260여 채의 판자가게가 불타 없어지고, 6천803세대 3만여 명의 이재민을 내었다. 불길은 동쪽으로 창선동우체국에서 서쪽 백상빌딩 블록까지 번졌다.
국제시장은 일제강점기 말 연합군의 공세를 피해 집단 소개시킨 지역. 지금의 국제시장 1~6공구 AB동에서 비롯되었다. 귀환동포와 6·25 피란민들이 먹고살기 위해 내다 팔 거리를 가져 나오고 전시통의 물자와 밀수품, 구제물자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이것저것 할 것 없이 싹 쓸어 모아 물건을 도거리로 흥정하는 도거리시장, 이른바 도떼기시장이 생겼다. 그리고 후에 자유시장으로, 오늘날의 국제시장으로 불리게 된다. 시중으로 흘러나온 유엔군 군수물자는 물론이고 한창 성했던 밀수 외국상품까지 판을 쳐서 한·미 합동 헌병과 세관원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다녔다. 그래도 죽기 살기로 생활력이 강한 피란민들의 야멸찬 장삿속들이 국제시장을 지켜 나갔다. 국제시장 상권을 거머쥐고 있는 피란살이 상인들의 상거래는 철두철미 일대일로 이루어진 신용거래여서, 생산업자들은 화재로 알거지가 된 그들 거래처 국제시장 상인들의 뒷배를 보아 주었다. 국제시장 상인들은 스스로 복구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16개의 시공사를 선정하여 1공구에서 6공구까지 AB동을 복구했다. 우선 목재건물로 복구했다. 이 비는 그런 사항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1953년 겨울 국제시장에 대화재
4천 채 잿더미 이재민 3만 명이나
여러 차례 큰불 피해 겪고 끝내 복구
부산사람 특유의 투지와 뚝심 발휘
영화 '국제시장' 인기 재도약 계기로그러나 대화재 3년 후인 1956년 8월 2일 밤 다시 큰불이 나서 점포 136개를 태운다. 국제시장의 현대화 논의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제기되었으나 입주 상인들과의 이견이 좀처럼 좁혀지지 않아 불발로 그쳤다. 1968년 1월에 점포 135개가 전소하는 화재가 5공구 B동에서 일어났고, 한 달 뒤 창선2가 상가에서도 불이 났다. 복구를 더는 미룰 수 없었다. 불이 난 5공구 철물조합에서 먼저 개축을 시작하여 5A-6B-6A동을 개축했다. 이를 빌미로 1~4공구들도 시멘트 콘크리트 구조로 모두 개축했다. 그래도 1A동은 옛 목조건물 그대로를 고집했다. 개축한 국제시장의 1~6공구 AB동의 입주점포들은 공구별로 전문 취급 품목을 엄격히 특정지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국제시장이 활기를 잃으면서 이런 규칙도 점점 무너져 갔다.
영화 '국제시장' 덕택에 국제시장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꽃분이네'의 인기를 국제시장의 활기로 불을 댕겨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각각의 논리에만 머무는 안타까움도 보지만, 6·25의 시련을 극복한 부산사람 특유의 투지와 뚝심이 국제시장을 재도약시키리라 믿는다. 빈 점포를 대학졸업 창업팀에 할애하여 미래의 젊은 CEO로 도약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든지. 어쨌든 영화 '국제시장' 호경기를 활용한 상생의 기적이 일 것으로 믿는다.

주경업부산민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