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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또르르르 또르르르-
전선에서도 밤은 찾아오고 풀벌레는 가을을 찬미하며 노래한다. 무심히 울어대는 산풀벌레 소리가 구곡간장을 에어내는 듯하나. 조각달은 서선마루에 넘어갈 듯 아스라이 걸쳐 있다. 살랑바람에 하얀 억새꽃이 은빛 파도를 만든다.
돌돌거리는 물소리가 풀벌레소리와 어우러져 구슬픈 심포니처럼 귓결에 다가왔다. 그들이 있는 곳이 개울에 가깝다는 것과 그 물소리가 꽤 시끄러운데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걸 그때야 깨달았다.
남자는 벌거벗은 여자를 목에 태우고 물 속으로 풍덩 들어갔다. 물은 차가웠지만 하나로 합쳐진 두 사람의 체온 때문에 그 싸늘한 감촉이 싫지 않고 오히려 즐거웠다.
그들이 물에서 나왔을 때 조각달은 꼬리만 남기고 거의 서산마루를 넘고 있었다. 주위가 어두워졌다.
개울물소리와 풀벌레소리 외에는 별의 총총한 깜박임마저 아프게 느껴지는 적막이었다. 전쟁의 총성도 멎은 저녁. 전쟁만 아니라면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는 가을 저녁이 그들을 싸늘히 덮고 있다.
"정말 힘들어서 못하겠어.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이게 뭐야? 내가 자기들 식모인가? 이젠 자기들 손으로 식사를 해결하라고 해요."
하고 툭 내쏘았다가 어리광하듯 톤을 늘어뜨려
"전쟁이 하도 끈질기게 계속돼서 해 본 소리예요."
여자는 한숨처럼 남자 귀에 대고 뇌까렸다. 요즘 들어 그녀가 버릇처럼 되풀이하는 혼잣말이었다. 남자가 들으라고 하는 말이라기보다 대원들 식사 때문에 계속 혹사당하는 몸이 억울해서 내뱉는 투정 같은 독백이었다. 전쟁에 여자의 아름다움마저 값싸게 매몰당하는 게 분해서.
전쟁은 인간의 소중한 가치, 목표, 성스러움마저 깡그리 앗아가 버렸다. 그녀가 꿈꾸었던 이상과 행복은 처참한 전쟁의 포성에 묻혀졌다. 살아 있는 생명조차 의미를 찾지 못했다. 의미들이 넋을 잃고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게 아니다. 저 풀, 나무, 물, 흙들도.
그는 여자에게 미안해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여자를 전쟁에 끌어들인 것은 김현태 서장이었다. 그가 미향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미향도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맺어질 리도 없었고 이렇게 전장에 따라와서 수고할 필요도 없다.
전쟁은 빨리 끝날 것 같지도 않고 지지부진하게 겨울까지 이어질 기미이다. 숫자로 많은 중공군이 만만히 물러설 리 없고 유엔 연합군은 유엔 연합군이란 체면 때문에 이 살육의 전쟁을 중단할 것 같지 않다. 미국의 체면이 걸린 전쟁이다. 따라서 휴전협정도 쉽게 성사되기 어려워 보인다. 한 조각이라도 내 땅을 더 많이 차지하려 할 테니까.
"당신 믿고 힘들어도 참고 있어요. 당신 없으면 벌써 떠났을 거예요. 당신 한 사람 보고 난 경찰 부대에 봉사하고 있다니까 정말."
"……"
"아이, 무슨 말 좀 해 봐요. 나 혼자만 말하려니까 멋없네."
"조금만 참아 다오. 곧 통일이 될 거다. 유엔군은 전력이나 군사력 면에서 소련, 중공보다 강하다. 숫적으로 김일성을 돕는 공산 진영보다 자유 진영의 국가들이 더 많고 강하다. 중공군이 수에 있어 우세한 것 같아도, 두 개의 나라보다 열 여섯 개의 나라가 더 강한 건 사실이다. 강한 쪽이 최후에 승리하지."
"피! 밤낮 연합국이 강하다면서 왜 일 년이 넘도록 삼팔선을 넘어가지 못해요? 난 맥아더와 트루먼을 믿지 않아요. 그들이 한국을 도와 주는 건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예요. 그들의 무기를 시험하기 위해서죠. 전쟁을 해야 첨단 무기를 써먹을 수 있을 테니까."
미향은 유식해서 나름대로 이 전쟁을 강대국들의 전력 경쟁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을 시험대에 놓고 서로 영양분을 빼앗아 먹으려 하고 있다고.
"미국을 미워해선 안 된다. 목숨 걸고 우리 나라에 와서 피 흘리고 싸우는 이유가 뭐겠는가? 민주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야. 죽음으로 자유와 평화를 지켜려는 위대한 전사들이지."
"자유도 민주도 평화도 그림의 떡같이 자유 진영이 추구하는 염불 같아요. 천수경 염불 같다고요. 그렇게 강하다면서 왜 북한군을 꺾고 자유 평화의 나라를 건설하지 못하나요. 이대로 남북이 흩어져 두 개의 나라가 될 바엔 김일성이 남침했을 때,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서울을 또다시 함락했을 때 하나로 통일된 것만 못해요. 난 뭐죠? 그리운 아버지와 오빠를 언제 만나나요?"
"자네 아버지와 오빠만 북에 있는 게 아니다. 수많은 가족이 전쟁 때문에 뿔뿔이가 됐지. 그건 미국 탓이 아니고 김일성이 소련을 등에 업고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지. 김일성을 원망해라. 전쟁을 욕하지 말고."
몸은 하나로 맺어졌어도 이데올로기는 각각 다른 두 개를 가슴에 지니고 사는 그들이었다. 이데올로기의 얘기가 나오면 타인처럼 낯설게 멀게 느껴져서 정나미가 떨어지고 슬픈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가 다음에 만나면 또 불처럼 뜨거워지는 그들이었다.
미향은 자나깨나 부친과 오빠를 만날 꿈만 꾸고 있었다. 미향을 나무랄 수는 없었다. 미향은 김일성 추앙자도 아니고 그저 가족을 만나고 싶은, 극히 자연스러운 인간적 소망에서 공산 진영이든 자유 진영이든 하나의 통일을 원하고 있다. 통일만 되면 그리운 혈육을 만날 수 있다는 단순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가 옷을 입고 안녕 인사도 없이 어둠 속으로 터벅터벅 걸어갈 때 미향도 인사하지 않았다. 암자에 돌아가 잠깐 눈을 붙이고 새벽에 일어나 대원들의 아침 식사를 준비해야 한다. 바삐 서둘러 고지에 무거운 음식을 나르고 잠깐 동안 서로 얼굴을 볼 수 있다. 그때는 서장과 미향이란 자원봉사자로서 만난다. 타인처럼, 아무 관계도 없는 것같이 인사하겠지. 전쟁이,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런 하루하루가 반복되겠지.
7
서장이 준 돈으로 면소재지 오일장터에 가서 반찬과 생활 용품들을 샀다. 식량과 야채 같은 반찬거리는 군부대에서 보내 오지만 그 양이 많지 않았다. 군내 유지들이 합심해서 주기적으로 돈과 물품들을 보내 주고 철따라 과일, 옥수수, 감자, 고구마를 보내 준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지니까 그 양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싱싱한 고기와 채소는 시장에 가야 맛볼 수 있는데 그 값이 금값이었다. 오일장은 한산하고 장사치와 장꾼들도 뜸뜸히 자릴 지키거나 가뭄에 콩나듯 한두 사람 오갔다. 그래도 장터는 생활의 터전이고 생활이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장터는 또한 그리운 친지들의 생사를 확인하고 헤어진 가족들의 소식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대화의 통로이기도 했다. 숨막힐 듯한 전쟁의 공포 속에서도 사람들의 삶은, 삶에 대한 열망은 지속되고 있었다.
칠복의 신발이 낡아서 고무신 한 켤레를 사 주었다. 여자의 화장품 가게를 지나갈 때 향기가 그녀를 유혹했지만 돈이 부족해서 엄두를 내지 못하고 지나갔다. 옷전에 걸린 예쁜 블라우스가 미향의 눈길을 끌었다. 들여다보고 만져만 보고 사지는 못했다. 칠복은 미향을 졸졸 따라다니며 옆에서 함께 구경했다. 장날마다 되풀이되는 광경이었다.
소전에서 어미소와 송아지 가 한가로이 여물을 먹고 있었다. 송아지는 젖이 안 떨어진 젖송아지였다. 어미 젖을 빨다가 젖이 안 나오면 어미를 따라 풀을 씹으려 하지만 이빨이 없어서 먹는 흉내뿐이었다. 그 광경을 멍청히 바라보는 칠복에게,
"저녁밥 늦겠다. 빨리 가자."
미향이 머슴 청년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시장 오기 전에 저녁밥까지 미리 해 놓고 와서 암자에 돌아가서 반찬만 만들면 된다. 그녀 마음은 항상 초급하다. 야채를 실은 단골 야채가게의 소달구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김장용 가을 야채는 가뭄에 말라서 질기고 그리 탐스럽지 않았다. 그래도 사서 싣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야채를 싣고 가는 길에 장터마을 아는 집에 잠깐 들러 지체했다. 북녘땅의 소식에 밝은 인민군 연락책의 집이었다. 그 사람을 통해 북녘에 있는 가족의 소식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그 사람 말은 아버지와 오빠가 살아서 인민군들의 질병을 치료해 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인민군은 적이지만, 북녘에 내 가족이 살아 있다는 건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양민에겐 적과 우리 편의 구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전쟁의 참화에 연합군과 국군에게 학살당한 양민의 수효가 적지 않고 인민군도 내 동포였다. 통일이 되면 남과 북이 하나로 합쳐질 것이고 국군도 인민군도 손잡고 대한민국이란 같은 땅덩이 안에서 자유 평화를 구가할 것이다.
미향의 소원은 어떻게든지 가족들과 하루속히 상봉하는 것이었다. 그 열망 외에 남북의 이데올로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사상은 혈육의 핏줄 안에 감춰지고 덮어졌다.
마른 체격에 키가 작고 음흉하게 생긴 그 인민군 앞잡이는 찾아온 미향을 반기며 감언이설로 스탈린과 김일성의 영웅적 공로를 그녀에게 주입시키려 했다. 공산 인민군에겐 미국과 연합국이 통일을 방해하는 적이요 침략자라고.
그러면서 사내는 입이 마르게 모택동의 인해전술 전과를 치하했다. 김일성을 단군왕검과 같은 존재로 신격화하며 그 조상의 내력과 부모, 김일성이 성장한 과정, 공산군 지도자로서 성공하기까지의 혁혁한 공로를 찬양하느라 시간이 부족했다.
바쁘다고 가려 하는 미향을 붙잡고 북녘의 상황도 알려 주었다. 북녘의 동포가 전쟁 덕분에 그전보다 배불리 먹고 행복해졌다는 것. 곳곳에 김일성의 사진을 걸어 놓고 그를 우상처럼 숭배한다는 말에 비위가 상했지만, 양민의 적인 친일파와 매국노 부르조아를 숙청하여 북녘 동포가 남녘 동포보다 행복해졌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미향도 부르조아 자본가들의 전횡을 미워하고 있었다. 현재 부자들의 도움으로 경찰과 의용군 부대원들이 저렇게 버티고 있는데도 말이다.
인민군에 협조하면 북녘에 있는 가족을 만나게 해 주겠다는 말에 미향의 가슴은 가족 상봉의 희망으로 부풀었다. 그것은 미향을 통해 경찰부대의 근거지를 알아내서 아군에 타격을 가하고 고지 요새를 점령하기 위한 북한군의 술책이었다. 북녘에 가족이 살이 있단 말도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 사내가 지어낸 연극이다.
미향의 애국심에 서서히 구멍이 뚫리고 있단 것도 모르고, 김현태 서장은 그 시간에 간부들과 작전회의에 열중하고 있었다. 경찰부대가 지키고 있는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중공군 대부대가 이동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와서 전투태세를 강화하고 있었다.
초가을에 입수했던 그 첩보는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도 잠잠해서 뜬소문으로 여겨졌다. 적들도 승산이 없는 전투를 꺼리고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지난 여름 전투에서 경찰대원 백 명이 사망한 데 비해서 북한군은 일 개 연대가 섬멸됐던 것이다. 경찰은 기관포와 기관소총 같은 첨예 무기를 다수 보유하고 있는 막강 부대였다. 정규군 전투군단 못지않은 병력이었다.
8
그 사찰의 주지인 대명스님은 김현태 서장과 잘 아는 사이였다. 죽은 아내의 천도식과 사십구제를 지낸 곳도 그 사찰이었다. 사찰엔 암자가 많았다. 지금은 거의 비어 있고 사찰은 늙은 주지스님과 젊은 수행스님 두 사람이 지킨다. 미향이 살림집으로 쓰고 있는 암자도 전쟁이 터지고 오랫동안 비워 둔 사찰의 일부였다.
서장은 가슴이 답답할 때면 대명스님을 찾아가서 설법을 듣고 마음의 평정을 찾았다. 서장은 불교 신자였다. 사찰의 대부분이 작년에 전화로 소실되어 보기에도 흉칙했다. 국보인 대웅전만 멀쩡하게 남아 있고 부속 건물들은 거의 쓸 수가 없었다. 두 스님은 대웅전을 처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불타 버린 건물들 사이를 지나 대웅전에 들어가면 주지스님의 청아한 독경소리가 들렸다.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는 절절한 염불이었다. 주지스님은 미향의 존재를 탐탁잖게 생각하고 그녀를 부대에서 내보내란 말을 되풀이했다. 전장에 여자가 있으면 재수가 없다는 세간의 속설을 그대로 믿는 스님이었다. 그날도 스님은 이야기 끝에 헤어지란 권고를 했다.
"그 여자가 없으면 우리 대원들이 직접 취사를 해결해야 하고 식사의 질도 떨어질 겁니다. 남자들이 만든 밥과 반찬이 오죽하겠습니까? 우리가 이만큼 질병 없이 건강하게 지탱한 것도 다 미향이 덕분이지요. 스님 충고는 깊이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휴전협정이 이뤄져서 껍데기 평화라도 오면 그때는 미향이를 자기 집으로 보내 주겠습니다."
"취사보다 서장이 그 여자에게 푹 빠져 있다는 게 문제지. 그래서 그 여자를 놓지 못하는 게 아닌가?"
스님의 직언에 서장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스님이 내 아픈 곳을 찌르는구나. 나는 미향이 없으면 못 산다. 내가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힘을 준 장본인이 미향이다. 전쟁은 남자가 하지만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은 여자로부터 얻는다고 생각한다. 그런 내가 어떻게 미향을 보낸단 말인가?
지금 와서 미향을 보낸다는 것은 그녀를 편하게 해 주는 게 아니고 죽음의 사지로 내모는 것과 같다는 걸 나는 안다. 그 여자가 내 힘이 되듯이 나도 그 여자를 지켜 주련다. 미향은 여기에 있는 게 더 안전하다. 지금은 전쟁 중이고 어디 가나 죽음이 도사리고 있으며, 내 곁에서 내 보호를 받는 것이 그 여자를 죽음의 벌판으로 내모는 것보다 현명한 방법이다.
그의 품에 안겨 쾌락을 빨며 "죽어도 당신과 함께 죽겠어요."라고 어리광하듯 속삭이던 그 목소리를 잊을 수 없다. 그래, 죽어도 나는 너와 함께 죽을 테다.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 그러나 너를 지켜 주리라. 내가 먼저 죽어도 너는 살아서 우리 이세를 낳아 두고두고 우리의 전설을 후세에 남겨 다오.
그들의 아기를 갖는 건 필요하면서도 두려운 일이었다. 어제 저녁에 미향의 배가 불룩해서 혹시 임신이 아닌가 걱정했다. 그녀가 임신하면 대원들의 급식에 차질이 생긴다. 아무도 그녀처럼 알뜰하게 정성들여 밥 짓고 반찬을 만들 사람이 없을 뿐더러, 그녀는 아기를 출산할 때까지 열 달이라는 긴 기간을 뱃속의 아기와 함께 고생해야 한다.
미향은 지난 봄에 임신을 해서 의원을 찾아가 낙태했다. 김현태 서장과 만나서 두 번째 낙태였다. 그녀는 지금 피임약을 먹고 있었다. 피임이 실패해서 또 임신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그 걱정이 항상 두 사람의 꽁무니를 따라다녔다.
미향은 다행히 임신이 아니고 소화불량에 헛배가 부른 것이었다. 걸핏하면 소화불량에 걸리고 감기를 곧잘 앓았다. 그래도 그녀는 자리에 눕지 않고 대원들의 뒷바라지를 한다. 용감하고 강한 여성에 틀림없다.
상반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입씨름했다가도 언제 그랬냔 듯 금방 풀어져서 은밀히 만나면 물고 뜯고 사랑의 쾌락에 도취했다. 미향이 모택동과 김일성을 숭배하는 공산주의 추종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북녘의 가족 이야기가 나올 때만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구별하지 않고 그 외에는 민주 진영의 편이었다. 분명히, 미향은 사고가 똑바른 여자이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아니었다. 김현태는 그녀의 인간성을 믿고 있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불행이 닥쳐오고 말았다. 미향이 인민군 연락책에게 사찰 이름을 가르쳐 준 것이 빌미가 되어 경찰부대의 근거지가 적들에게 알려지고 대대적인 공격이 전개되었다. 참호의 최저지선이 무너지고 적의 포화로 무기고가 폭발했다.
적의 공격은 새벽녘에 이루어졌다. 내부만의 대원들이 잠에 빠져 있을 때였다. 김현태 서장도 팬티바람으로 총을 들고 적의 공세에 대항했다. 중공군 부대가 이동했다는 첩보를 믿지 않고 안이하게 적의 공세에 대비한 것이 불행의 원인이었다.
미향은 자신의 경솔을 후회했지만 소용없었다. 인간을 믿고 적의 첩자에게 사찰 이름을 가르쳐 준 것이 이렇게 큰 비극으로 비화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사찰 이름만 가르쳐 주면 북녘의 가족을 만나도록 주선해 주겠다는 그 연락책의 꾀임에 속아 김현태 서장과 한 약속을 저버린 그녀였다.
여기저기 경찰과 의용군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꿈처럼 믿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 벌어져 있었다. 불바다가 된 경찰부대의 내무반, 본부, 무기고.
9
모든 것이 안개 속처럼 흐릿해 보였다. 그녀는 총성이 자욱한 안개 속을 겁도 없이 헤젓고 다녔다. 눈앞에 닥쳐온 죽음이 실감나지 않았다. 마치 아이들의 장난 같은, 전쟁 연극의 한 배역을 맡고 있는 듯, 상황이 대본에 적힌 대로 전개되었다. 누군가 무대 뒤에서 그 대본을 읽고 있었다.
우리 편은 한 명도 보이지 않고 개미떼처럼 산과 숲을 가득 덮고 북한군과 중공군이 승리의 풍악을 울리며 떼지어 몰려오는 광경-
그녀가 전에 보지 못한 전쟁이 그녀의 혼을 삼켜 버렸다. 김현태 서장을 찾았지만 시체들 속에도 잿더미 속에도 보이지 않았다. 흥건한 피가 참나무 낙엽을 빨갛게 빨갛게 물들였다. 그런데 왜 적들은 그녀를 보고 그대로 지나가는지. 왜 그녀를 사살하지 않는지 이상했다. 여자니까 봐주는 건지 모른다. 말라깽이 연락책 사내의 말대로 미향을 인민군의 협조자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아아 그것은 후자 쪽, 미련한 그녀의 판단대로였다. 그 판단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산과 숲을 누비고 밀려오는 인민군 무리 속에 그 말라깽이 남자가 보였다. 그 남자는 인민군 지휘관들과 함께 승리자인 척 뽐내며 신이 나 있었다.
"여기 있으면 생명이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빨리 떠나시오. 곧 경찰과 의용군들을 색출하기 위한 소탕작전이 벌어질 거요. 나중에 미스 서에게 큰상이 내릴 거요. 북조선 인민군에게 협조한 공로지 히히히."
"김현태 서장님은 어떻게 됐어요?"
그 경황에도 사랑하는 이의 행방을 물었다.
"죽었겠지. 무기고가 폭발할 때 중요 간부들은 다 죽은 것 같소. 그러니까 보이지 않지. 내 눈으로 서장이 탕 하고 맞아 죽는 걸 꼭 보려고 했는데 못 봐서 한이야."
그놈에게 속았단 걸 알고 가슴 치고 울어도 소용엾는 일. 현태 씨를 찾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를 찾아 용서를 빌고 그의 총에 맞아 죽으리라. 어딘가에 그가 살아 있기를.
폭파된 무기고 막사 주위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가 널려 있었다. 서장도 그 시신들 속에 있는지. 시신들 앞에 주저앉아 통곡하다가 인기척에 돌아보니 칠복이었다.
미향은 암자로 돌아와서 칠복과 함께 짐들을 챙겼다. 옷과 여자의 필수품이었다. 서장의 시체라도 찾아보려고, 칠복을 먼저 하산시키고 뒤에 남아 시체들 사이를 헤젓고 돌아다녔다. 서장의 시체는 어디에도 없었다. 혹시 살아서 피신했을까? 죽어가는 부하들을 두고 도주할 사람이 아니었다.
미향은 서장이 살아 있어 주기를 기도했다. 그녀가 옷 보따리를 들고 암자에서 나와 비탈진 숲길을 걸어올 때 피투성이된 남자가 숲에서 기어나와 그녀의 앞을 막았다. 그녀가 찾던 김현태 서장이었다. 미향이 달려가서 부축하려 하자 서장은 그녀에게 권총을 겨누었다.
"배신자!"
서장은 권총을 겨누고 차마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그는 미향이 방금 전에 인민군 연락책과 만난 것을 보고 그렇게 판단했다. 믿고 믿었던 미향이 인민군 첩자와 손잡고 경찰부대의 근거지를 밀고해서 철통 요새가 무너지고 고지는 북한군에게 점령되었다. 경찰 부대는 전멸했다.
"대명스님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는구나. 못된 것!"
서장은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힘없이 권총을 내리고 미향의 얼굴을 한번 더 노려보더니 스르르 눈을 감았다. 미향이 달려가 서장을 끌어안았을 때는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미향은 서장의 시체를 안고 한없이 통곡하다가 정신을 수습하고 일어섰다.
주위가 조용했다. 인민군도 중공군도 보이지 않았다. 총성과 포성에 놀랐던 산새들이 움츠렸던 날개를 펴고 짹짹 울며 날았다. 하늘의 흰구름이 숲 사이로 한가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언제 전쟁이 있었냔 듯이 숲은 평화로웠다. 아침 햇살이 따뜻이 풀과 나무를 쓰다듬었다. 억새꽃이 하얗게 바람에 휘날렸다.
암자에 가서 연장을 들고 와 서장의 시체를 묻어 주려고 미향이 암자로 걸어갈 때, 그림자 하나가 그녀 뒤로 다가왔다. 딸깍! 하는 방아쇠 소리에 미향이 돌아보니 종화가 총을 들고 서 있었다. 피에 젖은 공책이 그의 허리춤에서 대롱거렸다.
소년의 얼굴과 옷이 피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살아 있는 아이를 보니 반가웠다. 누나라고 부르며 농담도 하고 정말 친누나처럼 따르던 아이였다. 전쟁 중에도 항상 공책을 들고 다니며 뭔가 기록하던 노력꾼. 소월의 시를 좋아하던 소년.
지금은 그 종화가 아니었다. 우선 눈두덩을 덮고 흘러내리는 피부터 닦아 주고 싶었다. 미향이 반갑게 소년의 이름을 부르며 그에게로 달려갈 때 총성이 울렸다. 미향은 소년의 앞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소년이 쏜 총알은 여자의 가슴 한가운데를 명중했다. 가슴에서 피가 솟아 흘러내리고 입에서도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미향은 숨을 헐떡거리며 원망스럽게 소년을 쳐다보았다. 큰 눈동자가 미움에서 슬픔의 눈물로 변했다. 소년은 임종 앞의 짐승처럼 괴롭게 호흡하는 여자의 마지막 명줄을 끊어 주려고 목에다 소총을 겨누었다. 그 순간 여자가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모두에게 미안해. 난 첩자는 아니야. 믿어 줘."
소년은 총을 내려놓고 엉엉 울면서 여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그 온기가 차게 식어 갔다.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려고 손으로 더듬으니 미향은 눈을 뜬 채 숨져 있었다. 소년의 목쉰 울음소리만 단풍진 숲 속에 산새소리처럼 서럽게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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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는 사람들
김현태(42)……경찰서장, 경찰부대 대장으로 활약
서미향(30)……경찰부대의 취사 봉사원
나종화(18)……경찰부대의 의용군, 소월 시를 좋아함
칠복(23)……미향의 심복 머슴
대명스님(사찰의 주지)
인민군 연락책
부대원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