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기억력 등과 같은 것들을 외적인 관찰을 위해서 잠과 깨어남에 연관시킬 때에만 그것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어제 설명했습니다.
잠과 깨어나면 사실 기억과 망각보다 더욱 애매한 것이고...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해서 잃게 되는 것을 찬찬히 관찰해 보면 망각과 기억 이 제대로 된 관계를 지닐 수 없을 경우에 인간의 전반적인 영혼 생활이 얼마나 어지러울지에 대한 인식을 얻게 됩니다.
자아 의식이 점점 더 허약해지지 않도록 하려면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해서 자아 의식이 외부 세계의 인상과 외부 세계로부터 자아에게 다가오는 모든 가능한 것에 너무 희생되지 않게 하려면 적당한 점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너무 부지런해서 밤에 일을 처리하느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경우는 제외하겠습니다. 그 경우는 상황이 다릅니다.
어떤 신체적인 상태라든지 영적으로 좀 더 외부로부터 여러분이 잠이 방해되었을 때 그런 다음 날 여러분에게 인상을 남기는 것들이 평상시보다 매우 불쾌한 방식으로 접촉된다고 여길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아가 수면 부족으로 민감해진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적인 삶을 부당한 방식으로 다루게 되면 망각과 기억 역시도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언제 우리가 그런 경우에 이르게 됩니까? 우리가 기억과 망각을 자의로 조절할 수 없으면 그렇게 됩니다. 일생 동안 헤매고 다니는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으며 이런 성향은 유아기에 드러난 압니다. 그런 사람은 외적인 것이 만드는 인상을 충분히 추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잠시 몰두했다가 지나쳐 버리고 맙니다. 말하자면 자신의 자아를 통해 그 인상을 제대로 연결하지 않습니다. 외적인 삶에 제대로 몰두하지 않고 제멋대로 올라오는 표정 속에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저러한 것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필요한 표상의 보물을 적 적당한 계기로 자의로 이끌어 올리려 하지 않고 내부에서 솟아오르려 하는 표상이 저절로 드러나도록 내버려 둡니다. 그러니 금세 입표상이 그리고 곧 다른 표상이 생겨나서 거기에 자아가 어떤 영향을 미칠 수가 없습니다.
기억이 어디에서 오는지 물어보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잠을 자고 있는 의지가 하나의 표상을 저변의 무의식 속에서 잡아서 의식으로 이끌어 올리는 것입니다. .
기억의 과정은 잠자는 의지의 힘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지가 항상 잠을 자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은 어린이가 자신의 의지를 적용할 수 있도록 그렇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가 없습니다. 어린이가 자신의 의지를 이용하도록 어린이에게 영향을 미치고자 한다면
수업을 통해 수업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깨워야 합니다. 관심이 점차적으로 깨어나도록 전체 수업을 구성해야 합니다. 생기 넘치는 흥미를 잃게 올수록 그만큼 수업이 의지로 저니 됩니다. 이 의지가 표상이 필요할 때 무의식으로부터 망각으로부터 그 표상을 이끌어 올릴 수 있는 특성을 일반적으로 얻게 됩니다. 인간의 습관적인 것에 버릇에 작용함으로써만 인간의 의지를 그리고 그와 함께 역시 기억력을 정상적으로 발달시킬 수 있습니다..
기억력은 단순히 지적인 기억 연습과 같은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감성과 의지 로부터 발달시켜야 합니다. (감성: 흥미,,의지: 습관과 버릇.)
인간 내부의 모든 것은 부분적으로 인식하는 성질을 부분적으로 느끼는 성질을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의지적인 성질을 지닙니다.
제가 지금 언급한 내용을 정말로 파악하려고 원해야만 합니다. 하잘것 없는 것에 신경을 쓰는 웅전한 태도를 버리지 않으면 어제 말씀드린 또 극단적으로 모순된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모순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모순을 통찰하지 않으면 실제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모든 것을 뒤죽박죽 섞어서 혼동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 표상에 대해서 생각하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영혼 존재에 대해서 생각하고 보통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공감이 형성되는 동안에 여러분은 타인 속으로 잠이 들고 반감이 형성되는 동안에 여러분들은 깨어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을 고찰할 때 항상 새 관점에서 관찰함으로써만 인간을 인식할 수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하십시오. 대부분 사람들은 정신에 대해 말들을 하지만 정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을 취급할 줄을 모릅니다. 의식 상태를 다루어야만 정신을 제대로 취급할 수 있습니다. 정신은 깨어 있음 잠 꿈과 같은 의식 상태를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것은 공감 반감. 다시 말해서 삶의 상태를 통해 파악됩니다.
우리는 사실 영혼을 아스트라제 속에 지니고 있으며 삶은 에테르체 속에 존재합니다. 이 양자 사이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교류가 이루어져서 영적인 것이 저절로 에트리체의 삶의 상태 속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신체는 형태의 상태를 통해 지각됩니다.
정신이 어떻게 의식 상태 속에서 드러나는지를 묘사하지 않고는 우리가 정신에 대해 올바르게 말할 수 없습니다. 영원히 공감과 반감사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보여주지 않으면 영혼에 대해서 제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신체를 그 진정한 형태에서 파악하지 않고는 신체에 대해서 올바르게 말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