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석사는 신라시대인 554년(진흥왕 15)에 연기(緣起) 조사가 창건하였다. 662년(문무왕 2) 의상 스님이 강원(講院)을 설치했다고 전하는데, 그러나 이 해는 의상 스님이 중국 당나라에 유학 중이었으므로 연대에 문제가 있다. 고려시대에서는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스님 등이 머물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사명 유정(四溟 惟政, 1544~1610), 진묵 일옥(震? 一玉, 1562~1663) 스님 등이 머물며 화엄도량으로서의 명성을 떨쳤다. 당시 가람의 규모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관음전, 문수전, 극락전, 비로전, 영산전, 나한전, 팔상전 등과 163개의 방이 있었을 정도로 컸다고 한다. 하지만 1592년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몰려와 관음전에 참배하던 중 관음상 밑에 숨겨 두었던 승병들의 무기가 발각되자 모든 건물을 불태웠다고 한다. 그 뒤 1736년(영조 12)과 1899년(광무 3)에 각각 중수가 있었다. 근대에 와서는 구산 수련(九山 秀蓮, 1909~1983) 스님이 1950년에 응석사에 머물며 수도한 바 있다.
응석사 범종루
응석사 대웅전 입구
응석사 다층석탑
응석사 쾌불지주
응석사 대웅전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41호
팔작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주심포계(柱心包系) 건물이다. 조선시대 후기에 지은 것으로 근래에 몇 년 간에 걸친 보수 공사 끝에 2003년 12월 9일에 새롭게 상량되었다. 하지만 예전부터 있던 기둥과 일부 부재는 그대로 써서 지었다. 보수 때 발견된 상량문에 1736년과 1899년 7월 26일에 각각 중수한 기록이 있다.
이 건물에서 주목되는 것은 고주(高柱)가 팔각형인 점과 공포에 이상이 있는 점이다. 현재의 공포는 외1출목(外一出目)․내2출목(內二出目)으로 되어 있으나 본래는 외3출목(外三出目)·내3출목(內三出目)이었던 듯하다. 병자호란 이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으면서 규모가 축소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 앞에는 조선시대에 세운 괘불대(掛佛臺) 두 쌍이 있다. 2기가 나란히 마주보며 있는 것을 한 쌍으로 볼 때, 한 쌍은 완전하지만 나머지 한 쌍은 1기가 뿌리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근래 대웅전 보수 공사를 하면서 밑바닥에서 부러진 나머지 한 쌍이 나왔다. 괘불대의 형식으로 보아서 18세기 대웅전을 중수할 때 세운 것으로 생각된다.
응석사 대웅전 삼존불
응석사 요사
응석사 요사
응석사 나한전
응석사 나한전내 나한들
응석사 산신각
응석사 산신각내
응석사 산신각내 산신탱
응석사 요사
응석사 독성각
응석사 독성각내 독성탱
응석사 요사
응석사 전경
응석사 대웅전뒷편에 서있는 경상남도기념물 제70호로 지정된 무환자나무
응석사 찾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진주 나들목으로 나와 합천(해인사) 방향으로 향한다. 이 길로 15㎞ 정도 가면 왼쪽에 응석사 표지판이 나온다. 이 표지판 따라서 좌회전하여 4㎞ 정도 들어가면 왼쪽에 커다란 저수지가 보인다. 이 저수지를 끼고 조금 더 들어오면 응석사 앞 주차장에 닿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