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암사는 추사고댁의 뒤편에 위치한 사찰이다. 화암사의 창건 연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삼국시대의 고찰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곳은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이 조선 영조의 부마가 되었을 때에 별사전(別賜田)으로 분급된 일대의 전토(田土)에 포함되어 있어 그 일문(一門)에 세습되었다.
1752(영조28)년에 월성위가 중하였으나 그 후 대웅전(大雄殿)은 소실되고 요사체(療舍體)만 남게 되었다.
추사는 이곳 오석산(烏石山) 화암사에서 불교에 정심(精深)하였고, 1846(헌종12)년에는 제주 적소(謫所)에서 문중에 서한을 보내어 화암사 중건을 지시한 사실이 전해진다.
이곳 화암사에 추사의 친필인 [무량수각 無量壽閣], [시경 詩境樓] 편액(扁額)이 있으며, 화암사뒤편 오석산 암벽에 친필각자(親筆刻字) 한 [시경詩境], [소봉래小蓬萊],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 등의 유적이 있다.
화암사 입구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수령이 오래된 느티나무.
화암사 전경
현재의 화암사는 가까이 가 보아도 사찰 입구에 위치한 정갈한 요사채에 의해 사찰이란 느낌이 잘 들지 않는 그런 곳이다. 아주 오래된 고택의 편안함을 주는 요사채를 지나야 비로소 사찰에 들어서게 되는 데 곳곳에 추사와의 인연을 보여주는 여러 유물이 산재해 있다.
문을 들어서면 요사이고 이곳 통로를 지나야 비로소 사찰 분위기가...
화암사 대웅전
화암사 대웅전
화암사 대웅전 삼존불
요사
화암사 약사전
화암사 약사여래불
시경
법당 뒤 깎아지른 듯한 병풍 같은 바위가 나타나고 거기에 희미하지만 단정한 예서체로 詩境이라는 추사의 글씨가 쓰여 있다. 시경이란 바로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뜻으로 추사 자신을 의미하고 있다.
천축고선생댁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이라는 글이 역시 깎아지른 절벽 같은 바위벽에 새겨져있다. 천축고선생댁의 천축이란 부처님이 계시는 나라 천축국(인도)을 말하며, 고 선생이란 부처를 옛 선생이라 이른 말이다. 이는 곧 부처님이 계시는 집 즉 예불의 장소라는 뜻으로서 추사의 불가에 대한 친근감을 나타낸 듯하다.
추사고택과 화암사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799-2에 소재한 김정희선생 유적지는 18,308㎡의 면적를 점유하고 있으며 충청남도지정 제24호(1980. 10. 23.) 기념물로 되어있다.
이는 추사고택(秋史故宅)을 중심으로한 문화유적이 산재한 일대를 말한다. 고택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는 화순옹주(和順翁主)와 부군인 월성위 김한신(月城尉 金漢藎)의 합장묘가 있고 그 옆으로는 정조대왕(正祖大王)이 내린 화순옹주열녀정문(和順翁主烈女旌門)이 있다. 또 그 옆으로는 천연기념물 제106호인 예산의 백송(白松)이 있고 화순옹주 정려 뒤편으로는 추사의 고조 김흥경의 묘가 있다. 좌측으로는 추사의 묘가 있고 뒤편으로는 화암사(華巖寺)라는 사찰이 있다. 추사고택(秋史故宅)은 약 260㎡에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문간채와 사랑채로 이루어져 있는 옛 가옥으로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대갓집”형으로 되어 있는데 사랑채는 바깥 솟을대문을 들어선 마당에 자리잡고 있는 형식의 집이다.
화암사는 추사의 수도장이었는데 추사는 불교에도 심취하였었고 헌종 12년(1846년) 제주도에서 문중에 서한을 보내어 중건을 지시한 사실도 있다. 이곳에는 추사 선생이 쓴 <무량수각(無量壽閣)>, <시경루(時境樓)> 등의 편액이 있으며 추사선생의 묘와 오석산(鳥石山) 암벽에는 친필을 새긴 석각(石刻)등이 있어, 조선왕조 후기의 사상가요, 정치가이며 예술가였던 추사고택 일대에는 김정희 선생의 자취로 가득 차 있다.
미륵불과 오층석탑
화암사 범종
찾아가는 길
서해안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경우와 경부고속도로 천안 인터체인지에서 천안~온양~신례원에서 진입하는 코스가 있다. 서해안고속도로 해미 인터체인지에서 빠져 나와 국도 45번을 타고 예산읍으로 향한다. 예산읍에서 21번 국도(외곽도로)를 타고 구충방 앞 4거리에서 우회전, 32번 국도(합덕방면)~고택주유소 지나서 좌회전하면 추사고택 바로 전에 화암사가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