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백대영
“범하다”는 동사는 “위반하다”, “어기다”, “짓밟다”를 뜻하며 “어기다”는 동사는 명령 등을 지키지 아니하고 거스르는 것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제1계명, 제2계명을 범한 역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말씀들을 말씀하셔서 말씀하셨습니다(출 20:1).
출애굽기 20장 2절에 “나는 너를 이집트의 땅, 종의 집에서 나오게 한 너의 하나님 야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이집트의 노예 상태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뀐 것입니다.1)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이집트의 노예들이었으며 이집트를 섬겼었습니다.
“이집트의 땅”은 이스라엘이 종살이를 하였던 “종들의 집”이었습니다.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이러한 “종들의 집”으로부터 나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이집트의 땅으로부터 나오게 하셨습니다.2)
1. 제일(第一)계명
출애굽기 20장 3절에 “너를 위하여 다른 신(神)들이 나의 앞에 대하여 절대 있지 말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어 성경들은 “너를 위하여”라는 단어의 번역을 생략하였습니다. 십계명의 제일계명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돈을 버는 사람은 제일계명을 범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이 되고 돈이 하나님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신(神)”이라는 말(엘로힘)은 “하나님”이라는 말과 같은 말인데, “하나님”을 한자로 “신(神)”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다른 신(神)들”이라는 말은 “다른 하나님”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나님만이 진짜 신(神)이시고 다른 신(神)들은 모두 가짜 신(神)입니다. 제일계명은 우리를 위하여 다른 신(神)들이 있지 말 것임을 명령합니다.
70인경에는 “나의 앞(presence)에” 대신 “나 외에”로 되어 있고 이것이 개역 성경 번역에서 채택되었으나 원래는 “나의 앞에”입니다.3)
히브리어와 영어 성경에 의하면, “나 외에”가 아닌 “나의 앞에”입니다. 하나님의 앞에는 다른 것들을 있게 하지 아니하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다른 신(神)들을 하나님의 앞에 있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이 다른 신(神)들을 가지는 것은 “그 자신을 위하여”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앞에 우선순위로 둘 때 그것을 신(神)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돈과 섹스와 권력과 성공을 하나님보다 앞세우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우선순위로 여기는 때에 첫 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미래를 위한 투자로 생각하여 하나님보다 학업을 우선시할 때에, 학업 때문에 첫 계명을 범하는 것이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먼저 성경책을 찾지 아니하고 휴대폰을 찾을 때에, 휴대폰을 하나님의 앞에 있게 만듦으로써 첫 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행동으로써 자신이 무엇을 먼저 순위에 있게 하는지를 보입니다.
10가지 계명이 중요하지만 첫째의 계명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그 어떤 것을 있게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돈이든 휴대폰을 통한 즐거움이든 하나님보다 앞에 놓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위한 일보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일에 시간을 많이 쓴다면 이와 같은 사람은 휴대폰을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면서도 불안하지 않고 평안하다면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그 마음에 성령님께서 계시다면 이렇게 살지 말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즐거움을 위해 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 안에 성령님이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마음에 계시다면 이렇게 살지 말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휴대전화의 즐거움에 푹 빠져서 휴대전화만 보고 살면 멸망할 것입니다.
천국 가기 싫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천국 가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나 가고 싶다고 다 가는 것은 아니며 이렇게 살면 멸망할 것입니다.
2. 제이(第二)계명
출애굽기 20장 4-6절에 “너는 너를 위해 조각상을 만들지 말 것이고 위로부터 그 하늘에 있는 것과 그 아래로부터 땅에 있는 것과 그 땅에 아래로부터 물속에 있는 것을 모든 닮은 것을 만들지 말 것이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 것이니, 왜냐하면 나 야훼 너의 하나님은 질투심이 많은 신(God)임이니 조상들의 죄악을 셋째와 넷째에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방문하는 자고. 나를 사랑하고 계명들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천에 자비를 행하는”이라고 하셨습니다.
제2계명은 “너를 위하여 조각상을 만들지 말 것이고”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너를 위하여”라는 말에 깊은 주의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영어로는 “for yourself”인데, “너 자신을 위해”라는 뜻입니다(출 20:4).
“조각상”은 “우상”(idol)이나 “조각상”(graven image)으로 번역되는데 “우상(偶像)”이라는 한자어는 “모양과 본뜬 형상(形象)”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사물의 생긴 모양이나 상태를 본떠서 만든 제품이 “우상”입니다.
“조각”이라는 한자어는 도구를 사용하여 “새기는 것”을 뜻하며, “새기다”는 “물건의 바탕에 글씨나 형상을 파다”를 뜻합니다.
따라서 “조각상”은 도구를 사용하여 나무나 돌을 재료로 새긴 것인데 절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돌부처 같은 것이 대표적 조각상인 것입니다.
“조각”이 “새기는 것”이므로 “조각상”은 “새긴 우상”으로 번역되었는데 “너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조각상을 만드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만드는 것입니다. ‘나는 조각상을 안 만드니까 상관없어’라고 단순히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무엇을 행한다면 조각상을 만드는 행위입니다. 무엇인가를 행하는 목적이 우리 자신을 위하여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우리의 조각상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일하는 것이 조각상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일하며 삽니까? 그 일은 누구를 위해 하는 것입니까? 모든 세상 사람들은 이와 같이 살아갑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삽니다. 크리스천이 되겠다는 결심은 나를 위해 살지 않겠다는 결단인 것입니다.
이러한 결단이 없었다면 그는 단순히 교인일 뿐이며 신자는 아닙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나를 위해 삶았던 과거의 나는 죽었다’는 고백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크리스트께서 사셔야만 합니다. 문제는 삶 속에서 내가 살아서 움직이는 모습을 발견한다는 사실입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이런 실패의 모습을 돌아보고 회개하여야 하겠습니다. 성령님의 이끄심을 따라 크리스트께서 내 안에 사실 때 크리스천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 살며 조각상을 만들며 살았던 삶을 회개하여야겠습니다. 매순간 성령님의 이끄심을 따라 사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여기에서 “닮은 것(likeness)”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트무나)는 “비슷함”, “닮음”, “화상”, “초상”, “아주 닮은 것”을 뜻합니다. 한국어 개역 성경에는 “형상”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닮다”는 사람과 사물의 생김새가 다른 대상과 비슷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 또는 사물을 닮은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늘 안과 땅 안과 물 안에 있는 닮은 형상을 만들지 아니하여야 합니다.
그것들에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 것이니, 그 이유는 야훼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질투심이 많으신 신(God)이심이니 조상들의 죄악을 셋째 넷째 그를 미워하는 자에 방문하십니다(출 20:5).
조각상들에 절하지 말 것과 섬기지 말 것을 명령하셨습니다(출 20:5). 우리는 세상 사람이 굴복하는 우상들에 굴복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조각상을 섬기는 것은 왜일까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된다고 말씀하시나, 우상 종교는 우상이 ‘나의 뜻’을 이루어 줄 것으로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우상 종교가 타락한 사람들의 그 자신의 욕망에 맞아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숭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헛된 것들을 만들지 말고 “너희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어 세우지 말 것이라고 하십니다(레 26:1).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출 20:4).
소위 신자라는 사람들 중에 “자기를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직장에 다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일을 행하는 동기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여야 합니다(고전 10:31).
“나를 위하여” 크리스트교를 믿는 인본주의적인 신앙은 기복주의로 흐르게 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신본주의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섬기며 일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자손들의 주변에서 조각상들을 만들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러할 때에 그러하지 아니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우리에게도 믿지 않는 자들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이 다 걷는 넓은 길이 아닌 좁은 길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는 “나를 위하여” 사는 제2계명의 범법자들이 아니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 사는 방식에 굴복하지 아니하여야 하며 불신자들이 사는 방식에 따라서 삶을 살지 아니하여야 합니다(출 20:5). 다른 신(神)들을 섬기거나 나를 위한 것들을 섬기지 아니하여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산 위에 섬길 것입니다(출 3:12).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황야에서 하나님을 섬길 것입니다(출 4:23, 7:16).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섬길 것입니다(출 8:20, 9:13, 10:11, 12:31).
하나님께서는 이집트를 섬기던 그들을 이집트로부터 나오게 하셨는데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지 조각상을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대상을 신(神)으로 섬기면, 하나님께서 질투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질투심이 많은 신(God)이시기 때문입니다.
“질투하는”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질투를 가리킵니다.4)
하나님께서 이 계명을 범한 자들의 죄악을 삼사 대까지 징벌하시는데, 그 이유는 조상들의 죄악이 그 자손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 자손들이 그 조상들의 죄악을 답습하기에 같은 죄악으로 징벌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자들은 곧 그를 미워하는 자들로 간주됩니다. 나를 위해 만든 것들을 섬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입니다. 나를 위해 살아가는 인생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나를 위해 살지 아니하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출 20:6).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위해 살지 아니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를 위해 어떤 것들을 만들고 그것들을 섬기지 아니하여야 하겠습니다.
3. 이스라엘 자손들은 제1계명, 제2계명을 범하였습니다.
1) 이스라엘 백성이 아론에게 하나님을 만들 것을 요구합니다.
출애굽기 32장 1절에 “우리에게 하나님을 만드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때에 모세가 그 산으로부터 내려오기에 지체한 것을 그 백성이 보고 그 백성이 아론의 곁에 소집함을 받았으며 그들이 아론에게 말하였기를, “당신은 일어나시오 당신은 우리에게 우리의 앞에 갈 하나님을 만드시오 우리를 이집트의 땅으로부터 오르게 한 그 사람 모세에게 무엇이 있는지 우리가 알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출 32:1).
이 순간까지 하나님께서 그들의 앞에 가시며 그들을 이끌어 주셨는데, 그들은 이제 아론에게 그들의 앞에 갈 “하나님을 만들라”고 요구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미래를 성공으로 인도하여 줄 그런 하나님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들 수 있는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입니다.
그들은 그들을 위하여 그들의 앞에 갈 하나님을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욕망에 들어맞는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을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크리스트교는 “계시 종교”며, 하나님의 계시 위에 세워진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자기 생각을 덧붙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변형시켜 자기가 믿는 신념을 하나님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지 못한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타락한 자기 입맛에 꼭 맞는 하나님을 만들기를 원합니다.
2) 사람들이 우상을 만드는 이유는 ‘자기를 위하여’입니다.
출애굽기 32장 1절에 “우리에게 하나님을 만드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론에게 “우리에게” 하나님을 만들라고 요구하는데 새 번역은 “우리를 위하여”라는 문구를 빼고 번역한 잘못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만들 것을 요구한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우리를 위하여”서였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듭니다. 자신이 만든 하나님을 앞에 세우고 가면서 든든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말하나 사실은 그 자신을 위하여 한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나는 누구를 위하여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를 위하여 살며 자아를 신봉하는, 자아 우상숭배자는 아닙니까?
3) 아론은 백성에게 금귀고리를 자신에게 가져오라고 말합니다.
출애굽기 32장 2절에 “금의 귀고리들을 벗기고 그것들을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론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그 금의 귀고리들을 벗기고 나에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출 32:2).
그러므로 모든 백성이 그들의 귀에 있는 그 금의 귀고리들을 벗겼으며 아론에 가져왔습니다(출 32:3).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드는데 있어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연합하였는데, 사람들은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연합하여 무엇인가를 하는 것을 좋아하나 한마음 한 뜻으로 연합하였다고 그것이 언제나 올바른 것만은 아닙니다.
4) 금송아지 숭배는 지도자가 앞장설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2장 4절에 “아론이 부어 만든 상의 송아지를 만들고,”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조각 도구 안에 가두고 부어 만든 상의 송아지로 만들고 그들이 말하였기를 “이집트의 땅으로부터 오르게 한 너의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출 32:4).
“송아지”는 부어 만든 상의 송아지에 사용되었습니다. 출애굽기 32장 4절에 보면 아론이 부어 만든 상의 송아지를 만들었는데, 그들이 그 송아지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말하였습니다(출 32:4).
아론은 금을 가지고 부어 만든 상의 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출 32:4). 이것은 하나님의 성직자도 그릇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5) 금송아지 숭배자들은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32장 4절에 “이스라엘아 이집트의 땅에서 너를 올라오게 한 너의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알 숭배자들은 솔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할 것이며 바알을 섬길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겉과 속이 똑같습니다.
그런데 금송아지를 섬기는 자들은 어떻습니까? 금송아지 숭배자들은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섬기는 것은 참 하나님이 아니라 금송아지 하나님입니다. 우상을 섬기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 록펠러가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6) 우상숭배를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출애굽기 32장 5절에 “내일은 야훼께 축제(feast)라”라고 하였습니다.
아론이 반응을 보고 그것의 앞에 제단을 짓고 아론이 부르고 말하기를 “내일은 야훼께 축제라”고 하였습니다(출 32:5).
그들은 금송아지를 “야훼”로 부르기를 싫어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이 저지른 거역의 교활함은 반쪽 진리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살아 계신 야훼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대체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기념하며 그들에게 그럴 자유가 있다고 느꼈습니다.5)
7) 예배의 대상이 올발라야만 합니다.
출애굽기 32장 6절에 “그들이 이튿날 일찍 일어나고 번제들을 오르고 그들이 화목제들을 접근하게 하고 그 백성이 먹기와 마시기에 거주하고, 그들이 웃기 위해 일어났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배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예배하기 위해 제단을 세웠습니다. 번제들을 오르게 하고 화목제들을 접근하게 하고 함께 교제하였습니다. 그들은 예배의 방법만은 잘 배운 것 같습니다.
어떻게 예배하느냐보다 누구를 예배하느냐가 우선적으로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1계명을 범하면서도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생각하였고, 금송아지를 만듦으로 2계명을 범하였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하였으니 하나님의 이름을 허무에 들어 올리는 것을 통해 3계명을 범하였습니다.
8) 참 하나님은 없고 웃음만 있는 예배는 참 예배가 아닙니다.
출애굽기 32장 6절에 “그들이 이튿날 일찍 일어나고 번제들을 오르고 그들이 화목제들을 접근하게 하고 그 백성이 먹기와 마시기에 거주하고, 그들이 웃기 위해 일어났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든 예식을 금송아지를 향해 행하였으며, 그들은 웃기 위해 일어났습니다(출 32:6).
사람에게 듣기 좋고 유머가 넘치고 즐겁고 교인들을 웃음 짓게 만들고 때론 눈물 나게 하며 감동적인 감정을 선사하는 메시지가 넘쳐난다 해도 사람을 좋게 하는 예배는 참 예배가 아닙니다.
바른 말씀이 빠진 예배는 참 예배가 아닙니다. 참 예배는 복종입니다. 말씀이 선포될 때에 그 말씀에 ‘아멘’으로 복종하는 것이 참 예배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금송아지를 섬기며 하나님을 섬긴다고 합니다. 금송아지를 예배하며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으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계시되지 아니한 모습의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입니다.
“아전인수(我田引水)”라는 한자성어가 있습니다. 번역하면, “내 밭에 물을 끌다”라는 뜻입니다. 즉 자기 논에 물 대기라는 뜻입니다. 자기에게만 이롭게 되도록 생각하거나 행동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성경구절을 아전인수처럼 인용하고 사용하는 목회자들이 허다합니다. ‘목사가 좋은 차 끌고 다녀야 교인들도 좋은 차 끌고 다니지’라고 말하며 최고급 승용차를 끌고 다니는 목사도 보았습니다.
예배 시간이 즐겁고 예배 시간에 웃음이 넘친다고 참된 예배는 아니며 참된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복된 구원영생교회 성도가 됩시다!
1) Durham, 『출애굽기』, WBC 성경주석, 471.
2) Durham, 『출애굽기』, WBC 성경주석, 472.
3) Durham, 『출애굽기』, WBC 성경주석, 463.
4) Durham, 『출애굽기』, WBC 성경주석, 476.
5) Bruckner, 『출애굽기』, 4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