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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선사 조관(慥冠)(1700~1762년)
용담(龍潭)은 조관의 호이다. 자는 무회(無懷), 성은 김씨,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편양문파(鞭羊門派)의 고승이다. 전라북도 남원 출신이고 어머니는 서씨(徐氏)이다. 용이 승천하는 태몽을 꾸고 낳았으며, 생일은 사월초파일이다. 16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3년상을 지내면서 인생의 무상을 느껴 출가를 결심하였다. 어머니의 허락을 얻어 1718년(숙종 44) 감로사(甘露寺) 상흡(尙洽)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고, 취간(就侃)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721년(경종 1) 화엄사(華嚴寺) 상월(霜月)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1723년부터 영ㆍ호남의 고승을 찾아다니며 불심을 더하였다. 지리산(智異山) 견성암(見性庵)에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읽고 깨달음을 얻은 뒤, 1732년(영조 8) 지리산에 가은암(佳隱庵)을 짓고 수도생활을 원하였으나 승려들의 간청에 의수업 '선문염송(禪門拈頌)'과 원돈교(圓頓敎)를 요지로 20여 년간 여러 절에서 설법활동을 펼쳤다.
1749년 겨울에 상월의 의발을 받았다. 1751년 겨울에 강석을 파했다가 문인들의 간청에 못 이겨 1758년 봄 지리산 대암(臺庵)에서 강석을 열었지만, 다음해에 다시금 파하였다. 1762년 6월 실상사(實相寺)에서 나이 62세, 법랍 44세로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수습한 사리 5과를 감로사·실상사·파근사(波根寺) 등에 탑을 세우고 나누어 봉안하였다. 50세 이후 의해지견(義解知見: 이치, 이해, 지식, 견해 등 논리적인 것)을 싫어하고 오로지 반조에 몰두했으며, 특히 만년에는 정토문(淨土門)을 즐겨 언제나 사람을 접할 때 ‘유심자성(唯心自性)’이라는 말을 하였다. 제자로는 성암(聖巖)·혜암(惠庵)·죽암(竹庵) 등 수십 명의 고승이 있다.
조관은 유년 시절에 기동(奇童)이라고 칭송되었으며, 15세 이전에 유가의 여러 경전 공부를 마쳤다. 부친 사망 후 출가의 마음을 내자 마을의 유생들이 탄식하면서 “호랑이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으니, 장차 큰 울림이 있겠다.”라고 하여 큰 스님이 될 것을 예견하였다. 영해 낙암(影海 洛庵), 설봉 남악(雪峰 南岳), 회암 호암(晦庵 虎巖) 등의 화상을 만나 그 밑에서 공부하였고, “사향이 봄 산을 지나가니, 그 향기를 막기가 어렵도다. 운수행각을 이미 끝마쳤으니, 반조(返照, 고요히 삼매에 들어 자기를 돌이켜봄)로 자신의 공부를 삼으리라.”라고 하여 붓과 벼루를 바위 위에 던져 버리고 견성암에 들어가 신묘한 마음이 밝게 되었다.
용담대사의 모습은 의연하고 성품과 도량은 넓었고, 일을 처리하는데 부드럽고 대중을 대할 때에는 너그러웠으며, 어떠한 일에도 구애되지 않았다. 그는 선ㆍ교ㆍ율의 삼학(三學)을 두루 갖추었고, 또한 시문을 통해 도의 경지를 펼친 시선일여(詩禪一如)를 몸소 실천한 수행자였다.
1. 『용담집(龍潭集)』
◎ 경남 진주 대암암(臺巖庵), 1768년(영조 44) 간행.
1917년 후쇄. 불분권 1책. 28.4×18.7cm.
『용담집』은 조선 후기 용담 조관(1700~1762)선사의 문집으로 제자인 혜암 윤장이 행장을 짓고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시와 문들을 수집하였고, 최재경이 이를 선사하여 지리산의 대암암에서 판각한 후 감로사로 옮겨 와서 간행하였다. 『용담집』은 목판본으로 1책 49장에 용담의 시와 문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오언절구 46제 48수, 칠언절구 79제 86수, 오언율시 24제 24수, 칠언율시 50제 53수로 칠언율시가 가장 많으며, 문은 중창기 1편, 통문 1편 등 총 2편이 실려 있다.
문인인 신순민(申舜民)의 발문에는 선사의 글에 대해 정업을 닦는 일이 효행과 같다는 불가의 불이(不二) 사상의 묘체를 잘 드러내었으며 출가한 수행자로서 인간의 근원적인 마음에 가까운 대승적 구도자라고 평가하였다. 김미선은, “<용담집>의 각종 시는 유불불이의 성정을 노래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들은 그의 수행의 결과로 빚어낸 선시이므로 불교사상과 문학 분야에서 연구하여 그 위상을 정립시킬 필요가 있는 귀중한 자료다”라고 하였다.
용담 선사는 자연에 의지하여 자연과 함께하며 무소유와 대자유의 거리낌 없는 무애의 삶을 살고자 했으니, 그러한 선사의 면모를 오언절구 〈술회(述懷)〉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용담은 선수행의 여가에 시를 읊조리니 “불립문자의 수행을 전하기 위해서는 불립문자일 수밖에 없고, 한밤중 하늘의 밝은 달은 자신의 절집을 내리비치며 마치 진리를 통달하지 못한 자신의 무명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하다고” 하였으니, 수행자의 성성한 깨어 있음을 잘 나타내었다. 암자의 지붕 위로 쏟아져 내리는 월광보살을 무명을 일깨워 주는 도반으로 삼아 수행하는 수행자의 의취를 볼 수 있는 작품이다.
2. 용담선사(龍潭禪師)의 시세계(詩世界)
- 저자 : 김미선
- 발행기관 : 한국한문고전학회(구 성신한문학회)
- 발행년도 : 2008
- 간행물 : 한문고전연구, 17권 0호
- 페이지 : pp.155-191 ( 총 37 페이지 )
龍潭 조관(1700-1762) 禪師의 존재는 그동안 한국불교사 또는 불교문학사에서 연구가 되어 지지 않았고 그리하여 뚜렷하게 불교사상과 문학사적 위상이 자리매김 되어진 인물이 아니었다.
용담은 출가승이면서도 이미 유가의 법도를 지키고 유가서를 공부한 유불불이(儒佛不二)의 실천과 공부를 두루 갖추어 탕탕한 수행자로서의 면모를 익혀둔 인물이다. 19세에 출가하여 청허 휴정과 편양 언기의 법맥을 계승하였으며, 영남과 호남 등 여러 지역을 두루 다니면서 영해 낙엄, 설봉 남악, 회암 호암 등의 화상을 만나 공부함으로써 선(禪)의 묘처에 이르게 되어 명성이 빛났음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수행의 과정을 선어(禪語)로 엮은 시가 『용담집』에 200여 수(首) 수록되어 있다. 본고에서 용담의 시세계 고찰에서 먼저 연구방향에서 제시된 문제제기를 통하여 생애와 법맥을 살펴보았고 작품 개관을 통하여 용담시를 선리시·선취시·인사시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이에 용담의 수행과정과 작품 내용을 고찰하며 큰 특징으로 반관(返觀)을 통한 공사상(空思想)의 체득을 발견 할 수 있었기에 그의 반관(返觀)의 문학관이 드러난 작품을 정리하며 그가 선시사적 중요한 위상을 갖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이에 용담의 문집을 통해 그의 불교 사상사적 특성을 조명하며 반관(返觀)의 수행관 및 문학관을 찾을 수 있었다. 용담의 수행 결과 빚어낸 선시가 불교사상과 문학 분야에서 연구하여 그 위상을 정립시킬 필요가 있는 귀중한 자료로 매김 하기에 충분하다고 사료되어진다.
① ‘한가히 살며 본 일 [閑居卽事]’, 마음의 기멸을 돌이키다
山雨處處 (산우몽몽처) 산비 보슬보슬 내리는 곳
鳥鳥語時 (남남조어시) 재잘재잘 새 우는 때
返觀心起滅 (반관심기멸) 마음 나고 사라짐 돌이켜보니
風動老松枝 (풍동노송지) 바람이 노송가지 흔드네.
조선 용담조관(龍潭?冠;1700-1762)스님이 출가했다는 소식을 듣고 유생들이 ‘불법문중에 범이 들어갔으니 큰 울림이 있겠다.’고 한 것처럼 〈기신론〉을 읽다가 깨달음을 얻었다. 이 시는 이러한 스님의 세상 바라보기이다.
몽몽과 남남의 의태 의성어로 스님이 살고 있는 곳에 비가 내리고 있으며 산새가 울고 있는 계절임을 보여주었다. ‘눈앞에 마주하고 있는 계절을 읊은 것(卽事)’이다. 여기서 첩어의 자리배치에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보슬보슬 산비가 내리고 재잘재잘 새가 우는 때라고 하는 게 일반적이다. 왜 스님은 1구와 2구의 표현을 달리한 것일까? 단순히 평측(平仄)을 맞추기 위해서일까? 반복리듬을 깨고자 해서일까? 이 물음이 곧 답이 될 수 도 있겠지만 4구에서 그 해답을 찾아 볼 수 있겠다.
3구를 제외한 모든 구는 ‘산비’와 ‘새소리’ 그리고 ‘노송가지’인 즉사(卽事)를 읊었다. 기구에서는 산비가 내리는 모양을 형용하였다. 산비가 내리고 있는 사실을 우선시하였다. 승구에서는 재잘거림이 우선이다. 새가 우는 것에 스님의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남남거리는 소리에 있는 것이다. 기구는 경(景)에, 승구는 정(情)에 중점을 둔 것이다. 결구에서는 바람이 늙은 가지를 흔든다고 하였다. 정경교착의 상태를 보인 것이다.
그런데 3구에서 ‘마음의 기멸을 돌이켜 본다’ 하였다. 마음을 노송에 비유한 것이요, 기멸은 흔들리는 노송의 가지이다. 풍동은(風動) 반연이다. 스님은 흔드는 것이 바람인지 흔들리는 것이 노송가지인지를 돌이켜 비추어보고 있다. 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인지 내 마음이 흔드는 것인지를 반관(返觀)하는 것이다. 반관을 통하여 정경교착을 주객미분의 도리로 환원시켰다. 이러하니 스님은 시처(時處)에서 한가롭고 자유로울 수밖에...
② 세수 50이 되어 지난날을 돌아보니...
虛擲人間五十春 헛되이 인간의 오십 년을 보내고 나니
五更殘燭獨傷神 오경의 쇠잔한 등불에 홀로 상심이네
觀心自愧蒸沙客 마음을 관함에 절로 증사객에 부끄럽고
究義深 說食人 의리를 구함이 깊이 설식인에 부끄럽네
承順易生無限喜 순리를 받들면 무한한 기쁨 생기기 쉽고
對違難抑有餘嗔 이치 어기면 넘치는 진심(嗔心) 억제 어려우리
眞源信不師何問 진리를 진실로 스승 아니면 어디 물을까?
返照中情涕滿巾 마을 속 돌이켜 비추니 눈물 수건 적시네
용담 선사가 세수 50이 되어 지난날을 돌아보니 이룬 게 없어 상심이 크다. 마음 을 들여다보니 모래로 밥을 짓는 증사객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쌀로 밥을 짓고 지혜를 얻지 못한 사람은 모래로 밥을 짓는다 했는데, 자신의 생애는 모래로 밥을 지었다. 하지만 자신을 돌아보며 얻은 진리를 이치에 순응하는 것이며 수행의 삼독(三毒)을 없애는 것은 진심(嗔心)이다. 이치를 어기면 진심을 막기 어려우니 늘 자신을 바로 보며 순리에 순응하길 다짐한다. 이는 깨달음을 향한 수행자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3. 용담선사의 발자취
‘이번에 서국익(徐國益)이 서울에서 어버이를 뵈러 남원으로 왔다가 나에게 쌍계사를 함께 유람하자고 청했다. 이 유람은 평소 내가 마음에 두고 있던 터라, 고을 동쪽 원천원(元川院)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중략) 용추(龍湫)를 거쳐 대흥사에서 묵고, 거세게 흘러내리는 폭포를 구경하였다. 감로사를 거쳐 화엄사에 이르러 웅대한 불당을 구경하였다.’
위의 글은 담허재 김지백(1623~1671)이 1655년 10월 8일부터 11일 까지 3박4일간 지리산을 유람하고 쓴 「유두류산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여기서 대흥사는 파근사의 옛 이름이고, 감로사는 지금의 천은사를 말하며 당시에는 남원부 관내에 있었다.
담허재가 파근사를 지나간 후 31년 뒤인 1686년 8월, 이 절집의 이름은 중창불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실상사에서 만나게 된다. 우담 정시한(1625~1707)은 ‘법당의 후불탱화를 증명할 파근사의 승려 영휴가 와서 만났다’라는 기록을 마치 지문처럼 그의 『산중일기』에 남기고 있는 것이다. 실상사 극락전 뒤 언덕에 있는 ‘용담대화상탑’은 그러한 두 절집의 밀접한 관계를 증명하는 유물이다. 남원 출신으로 속성이 김씨인 용담조관선사(1700-1762)는 청허휴정-편양언기의 법맥을 잇는 고승으로 상월새봉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제자인 혜암윤장에게 법을 전했다. 선승이자 대강백으로 지리산 영원암, 벽송사, 대암암, 화엄사 등에서 강학을 펼쳤다고 한다.
용담선사의 행장을 지은 혜암윤장은 감로사를 중창하였고, 역시 강백으로 이름 높았는데, 화엄사에서 강석을 펼칠 때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였다고 한다. 용담선사 입적 후 6년 후에 편찬된 『용담집』 행장(行狀)과 후록(後錄)의 내용을 보자.
‘문인(門人)들이 5재를 지내는 밤에 사리 5과를 수습하였으니, 바로 꿈에 감응한 일이었다. 이를 나눠 세 곳에 탑을 세웠으니, 즉 삭발한 곳인 감로사와 오랫동안 노닐던 곳인 파근사와 입적한 곳인 실상사였다.’[행장-용담집/동국역경원]
‘감로사와 파근사와 실상사 세 곳에 모두 위답(位畓)을 설치하여 그 사원(寺員)에게 2년 터울을 두고 제사를 시행하도록 하였다. 1767년에 감로사에서 먼저 행하였고, 1768년 파근사가 다음 차례이고, 1769년에는 실상사가 또 그 다음 차례이다’[후록-용담집/동국역경원]
이렇듯 용담대사에 의하여 세 절집이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용담대사의 승탑은 실상사와 천은사에는 있으나, 파근사 옛 절터에는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혜암윤장의 것으로 보이는 ‘혜암당’이라는 글이 새겨진 승탑이 부러진 채 절터에 남아 있어 그 인연의 끈을 잇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파근사는 어떤 이유로, 어느 때에 폐사가 되었는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1871년 편찬된 호남읍지 남원 편 사찰조에는 보이나, 1889년에 편찬된 전라북도각군읍지에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19세기 말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4. 용담조관대사(龍潭慥冠,1700-1762) 행장
아래의 글은 조선불교통사에 실려 있는 용담선사의 행장의 본문을 번역한 것이다.
“선교를 겸수했던 영조 때의 대 선지식”
화상의 법명은 조관(慥冠)이시고 용담(龍潭)은 법호이시며 자는 무회(無懷)이시다. 조선 정조, 순조 때 활약하던 대선지식이다. 속성은 金씨로 남원인이며 어머님은 徐씨이다. 어머님 꿈에 용 한 마리가 승천하는 것을 보고 스님을 임신하여 낳으니 강희 경진년(숙종26년,1700) 4월 초8일 생이다.
○龍潭禪師傳。和尙의法諱는慥冠이오字는無懷요
龍潭은其號니俗姓은金氏오南原人也라
母曰徐氏니徐夢에一龍이昇天하고因以有娠하야
以康熙庚辰四月初八日로生하니라(下畧)行狀
- 『불교』 佛敎 第四十三號
골상이 영수(靈秀)하고 기상이 준열하여 9세에 서당에 들어가 유서를 배웠는데 한 번 본 것은 다 외웠다 한다. 15세 전에 유학을 다 배워 마치고 과거시험 준비하는 것으로 일과를 삼으니 마을 사람들이 기동(奇童)이라 불렀다. 16세에 갑자기 아버지를 여의게 되어 읍혈(泣血)로 3년 상을 마친 후 세상의 무상함을 깨닫고 출가할 뜻을 품었다. 어머님께 허락을 구하였더니 그 어머니는 말리지 못할 줄 알고 첫마디에 허락하였다. 처음 감로사(천은사) 상흡(尙洽)장노에게 찾아가 머리를 깎았으며 구족계는 대허당 취간(大虛堂就侃) 대덕으로부터 받았다. 고을의 선비들이 탄식하기를, “호랑이가 수풀 속으로 들어갔으니 장차 큰 포효가 들릴 것이다.”하였다.
22세에 화엄사로 가서 처음 상월새봉(霜月璽篈, 1687-1767)스님을 찾아 뵈웠다. 대사께서 한 눈에 기이한 인물임을 알아보시고 그 문하에 두고 수년 동안 선교를 가르쳤다. 배우는 동안 영호남 20곳의 강석을 두루 편답하였다. 그 찾아간 명사들을 나열하면, 영해약탄(影海), 설봉회정(雪峰), 회암정혜(晦菴), 호암체정(虎巖), 남악(南岳)과 같은 기라성 같은 대선지식들이다. 선교를 가리지 않고 법을 물어 가는 곳마다 명성이 자자하였다. 마치 사향노루가 봄 산을 지나가니 향기로운 냄새 감출 길 없는 것과 같은 격이었다.
행각을 마치고 오로지 반조(返照)하는 것으로 공부를 삼았을 뿐 바위를 종이로 삼아 붓글씨 쓰는 옛 공부는 폐지하였다. 견성암에 있던 어느 날 밤 기신론(起信論)을 읽다가 모든 부처님이 설한 뜻이 단지 이것 하나(這個)에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이로부터 신령스러운 마음이 활연해지고 여러 경전의 뜻을 손에 쥐고 있는 듯 모조리 간파하였다. 말을 하되, 밤중에 낮은 곳이 어디인지 훤히 알고 설명하는 것과 같았다. 그로부터 3일 후 꿈에 신동이 나타나, 경함 1함을 주고 갔다. 함속에는 경책 10권이 들어 있고 서면에 ‘진곡(震谷)’이라 쓰여 있었다. 이는 진단(震檀)을 기쁘게 해줄(谷은 기쁠 곡) 대선지식이 될 것이라는 뜻임을 자각하고 더욱 명철해졌다. 그러나 스님은 배우는 학인들이 몰려오는 정도의 이름난 강사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향상하기 위해 앞으로 전진 하였다.
당시 호남에는 도인이라 알려진 명진 수일(冥眞守一)선사가 있었다. 명진스님은 서산(西山)⇒편양(鞭羊)⇒풍담(楓潭)⇒월저(月渚)⇒명진(冥眞)으로 내려오는 조계종 적전이다. 명진스님은 월저스님의 고제로 종안(宗眼)이 명백하고, 견처(見處)가 고준하였으며, 언중(言中)에 울림이 있고, 말 속에 날카로운 예봉을 감춘 뛰어난 선지식이었다. 용담스님은 명진스님의 명성을 듣고 찾아뵙고 싶은 마음 간절하였고 명진스님 또한 거두어 가르칠 뜻이 있었다. 드디어 명진스님 거처하시는 곳을 찾아 뵙고 여쭙기를,
“스님을 찾아뵙고 싶은 것이 숙원이었습니다. 화엄경에 말씀하시기를, 일체시 일체처에 부처님이 편만(遍滿)하시다고 하였는데 지금 눈앞의 어디에 천당과 지옥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수일스님은,
“회주우끽초(懷州牛喫草)하니 익주마복장(益州馬腹腸)이로다.(회주의 소가 풀을 뜯어 먹었는데 익주의 말이 배부르다 하네.)” 라 하였다.
용담스님은 다시 물었다.
“스님, 그것은 늘 듣는 말씀이고 바로 들어가서 마음을 깨달을 수 있는 한 마디를 말씀해 주십시오,“ 했다. 이에 수일스님은 양구(良久) 후에,
“천하인구의(天下人求醫)하니 구저좌박상(灸猪左博上)일세.(온 세상 사람들이 의원을 찾아 헤매다가 겨우 찾고보니 돼지 왼쪽 어깨에 뜸을 뜨고 앉았네.)” 라 한 후 악! 하고 할을 하였다.
그제야 용담스님은 깊은 뜻에 계합하고 수일스님께 3배를 올렸다. 가히 신기(神機)가 서로 통했다고 나 할까...
33세에 곧장 지리산 영원암(靈源庵)으로 들어갔다. 깊은 산골짜기를 찾아들어가며 10년 동안 발걸음을 끊고 산 밖을 나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또 맹세했다. 용담스님은 손수 영원암 서쪽에 작은 토굴을 짓고 가은암(佳隱庵)이라 이름 하였다. 그리고 이곳을 죽을 때까지 안식처로 삼기로 하고 주로 참선, 극기공부 하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다.
그러나 슬프다, 칼이 신령스러우면 빛을 반사하고 과일이 익으면 향기가 나는 법이며, 석덕고사(碩德高士)는 8품이 서로 다투어 알려지는 법이다. 이곳이 참선처가 아니라 가히 해동의 용상들이 모여 들어 선교를 배우는 장소가 되고 만 것이다. 이에 용담스님은 이곳은 좁은 곳이라 더 수용할 수 없다고 항상 말하였다. 그러나 5리 안에 안개가 낀 듯 학인들이 밀려 들어왔다. 마침내 모두들 해산하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지만 학인들은 서로 자기 절로 모셔가려고 다투었다. 이에 스님은 할 수 없이 교화에 나서기로(강을 시작하기로) 마음먹게 되었으니 가히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이루어지는 격이 된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 모셔가려 함으로 본래의 서원을 달성하지 못하고 지리산 여러 깊은 골짜기를 옮겨 다니며 움직이는 수행처로 삼았다(영원암, 화엄사, 천은사, 실상사, 연곡사, 쌍계사).
이에 용상들을 모아 놓고 염송의 뜻을 설하고 원돈지법(圓頓之法)을 논하니 마치 지리산이 총림(叢林)이 된 듯, 이 일을 20년간이나 지속하였다. 스님께서 강단에 서는 기법을 보면, 게송 창하는 것은 웅장한 물결 같이 도도히 하고, 설법하는 것은 가느다란 하천의 물줄기 같이 여리게 하여 言言句句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입지를 스스로 찾도록 지도하시니 가히 골수를 바꾸고 내장을 씻어내는 듯 하였다(換骨洗臟). 경론을 설할 때는 대의를 밝혀 요점을 간추려 주었고, 불경의 교묘한 언구(言句)에 매달리지 않게 하였다. 그 전체가 일목요연하게 드러나게 하여 불법의 묘의를 스스로 체득토록 하였다.
기사년(영조 29년, 1749) 겨울, 상월새붕화상의 의발 전해주심을 받았고 전후 5차례에 걸쳐 상월스님을 가까이 모시고 배워 불법의 깊은 오의(奧意)를 더 하였다.
신미년(영조31년, 1751) 문도들에게 말하기를, 바로 알고 지나가야 할 것이 2가지가 있는 데, 그 첫째는 문자공부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줄 알아야 하느니라, 하면서 게송을 읊으시기를,
强吐深懷報衆知 대중에게 내 심회를 간절히 말하노니
講壇虛弄說玄奇 玄旨를 말로 설하는 건 법을 우롱하는 일
看經縱許年靑日 간경은 젊을 때나 하는 일이고
念佛便宜髮白時 염불은 늙어서나 한다 하지만
生死若非憑聖力 생사는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네
昇沈無計任渠持 아무 계책없이 이랬다 저랬다 하면
況復世間頗擾擾 항차 세간 풍파를 어찌 면할손가
白蓮幽谷有歸思 백련 핀 깊은 산속으로 돌아가고파
揭示大衆仍罷講 대중에게 강을 파했다고 써붙인다네
하였다.
무인년(영조4년, 1758) 여름, 학인들이 다시 강을 듣고 싶다고 조름에 따라 대암(臺庵, 실상사 금대암)에서 다시 강을 열었으나 이듬해 겨울에 철거하였다.
이 때 다시 율시를 짓기를,
閱經何歲月 경 읽어 어느 세월에 부처가 되겠나
空費鬂邊春 거드름 피우며 허송세월 보냈네
托病知人蔭 병이 낫다 지인들에게 둘러대지만
藏縱厭世紛 실은 세상이 싫어 몸을 감추는 것
谷風時至友 삼매에 드는 것으로 벗을 삼으니
松月自來賓 소나무와 달이 손님되어 찾아오네
定中知己在 定中에 知己가 있음을 알았으니
於道喜相親 道로서 서로 친함이 참 기쁨일세
盖前後退衆 지난일 모두 잊고 뒷방에 물러나
均習定慧者 정혜를 한번 짬지게 닦고 싶건만
陂動古人也 작은 노력으로 어찌 古人을 따를지
스님의 생긴 모습은 험준한 절벽(斷涯) 같았고, 성격은 바다같이 넓었으며, 처사는 매사 부드러웠고, 대중을 대할 때는 관대했으며, 절 일은 막힘이 없이 처리 하였다. 책에 그 기연을 서술하였지마는 그 뜻을 누가 헤아리겠는가. 승속 간에 스님을 뵈러오는 자들은 그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엿볼 수가 없었다. 그저 물러나 면전에서 인사하며 있었던 이야기만 들려올 뿐이었다.
건륭 임오(영조38년, 1762) 6월 27일 실상사 내원암에서 입적하시니 세수는 63이요, 법랍은 44이시다. 임종 시 시자에게 일구 게송을 대필하라 하되,
先登九品蓮臺上 구품 연화대 먼저 올라 있을테니
仰對彌陀舊主人 부디 미타 옛 부처와 마주 보게나
이것은 항상 참선하라는 말이다. 부지런히 참선해서 뒷날 적멸궁에서 다시 만나자는 당부말씀이다.
다음에는 손으로 써서 유촉하기를,
“인생이 살고 죽는 것은 마치 장공에 구름이 일어났다 흩어졌다 하는 것 같아 본래 실다움이 없다. 어찌 실다움 없는 것을 실다운 것이라 믿을까 보냐... 원컨대 도우들은 내 숨 떨어지면 즉시 다비에 부쳐주기를 바라노니.......”하고 문인들에게 준수사항을 유훈으로 남겼다.
다비하는 날 밤 신광(神光)이 내원동천(內院洞天) 하늘에 뻗친 것을 멀리 있는 사람들이 먼저 보았다. 문인들이 사리 5립을 거두었더니 5재(齋)를 올리는 날 저녁에 감몽이 있었다. 부도를 3곳에 나누어 모셨는데 처음 삭발한 감로사(甘露寺), 오래 머물던 파근사(波根寺), 입적하신 실상사 내원암(實相寺 內院庵) 등이다. 스님이 지은 가, 영, 송(歌,詠,頌)이 약간 편 있는데 모두 흩어져 없어진 것을 겨우 100여송 수습하여 간행했다. 연이나 문장은 도인이 여가에 한가로히 쓴 글 뿐이고 글씨를 청하면 경에 있는 문구가 아닌 자신의 믿음을 일필휘지로 써주었다.
‘형산(荊山)에 사는 자는 가마귀도 옥으로 만든다.’는 말이 있다. 신이한 일이 많았을 텐데 수습하지 못한 것이 있고, 여기 문장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 한 말이 있으면 어여삐 여기고 너그러이 봐 주시기 바란다. 바라보아도 엿볼 수가 없고 법해에 출렁이는 높은 물길을 측량하기 어려웠다. 실로 못 쓰는 문장으로 스님의 행장을 짓자니 스님의 행적 전해지지 않을까 두려울 뿐이다. 이에 그 자초지종을 적는다.
무자(영조44년,1768) 중추일, 문 사제 혜암윤장(惠庵允藏)이 손 씻고 울며 찬한다.
참고로, 이 글은 비문이 아니라 조선불교통사에 나오는 용담스님의 행장을 풀어 쓴 것이다. 행장을 쓴 혜암윤장(惠庵允藏) 스님은 대흥사 마지막 강사인 아암혜장(兒庵慧藏)스님과는 다른 분이다. 상월새붕스님의 제자로 용담스님의 사제이다. 글 잘하는 혜암스님이 문중을 대표하여 이 행장을 지었다.
지금도 천은사에 가보면 용담스님의 커다란 석종형 부도가 모셔져 있다. 그 크기는 사람 키에 육박한다. 그러나 비석은 세우지 못했다. 그것은 스승 상월새붕스님(霜月璽鵬,1747-1827)이 아직 살아 있기에 조선조의 풍속상 제자 용담스님(龍潭慥冠,1762-1820)의 비석을 먼저 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월스님은 용담스님보다 나이 15세가 많아 스승이 되었지만 수는 오히려 용담스님보다 7년을 더 사셨다.
상월스님은 키가 크고 앉아 있으면 마치 소상(塑像)처럼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무용수연(無用秀演)스님은 상월스님에 대하여 평가하기를, "환성 이후 제1인자"라고 하였다. 상월스님은 밤 12시 정각이 되면 반드시 자정수(子正水)를 떠 마시고 북두(北斗)에 절하는 관습이 있었다. 밤 12시에 떠먹는 자정수는 달의 음기가 가장 많이 녹아 있을 때 마시는 물이므로 北斗七星에 절하는 것과 함께 도가에 전해오는 장수 비법의 하나이다. 아마도 이것이 상월스님의 수명장수에 원인이 되었던 것 같다.
일제강점기까지 상월스님이 용담스님에게 물려준 바루가 화엄사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바루에 글이 적혀 있기를, "위로부터 전해오는 바루를 용담에게 전하여 부촉하나니 용담은 조금도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從上傳來道具 傳付於龍潭 龍潭休忽也)"라는 16자 였다고 한다.
지리산 천은사(泉隱寺)는 전남 구례 노고단 길목에 있는 절로 구한말에 강원을 잘 운영하기로 유명한 절이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5대강사의 한 분인 채서응(蔡瑞應)스님은 경남 고성 옥천사 출신으로 천은사 강원에 유학 가서 5-6년을 공부하여 유명한 강사스님이 되었다. 전국 대찰의 명강사로 활약한 채서응스님은 박한영(朴漢永, 石顚, 映浩鼎鎬)스님과 절친한 단짝 도반이었다. 매년 여름방학 때가 되면 중앙불전교장 한영스님은 고성 옥천사에 내려와 여름을 지내고 상경하곤 하였다. 청담스님은 옥천사에 처음 출가하여 은사가 따로 있었는데 은사스님이 퇴속하는 바람에 옥천사에 자주 오시는 한영스님을 은사로 정한 바 있다.
채서응스님이 공부했던 천은사 강원!
천은사가 왜 이렇게 강원으로 이름나게 되었던가? 그 것은, 옛날 정조, 순조 때 남방 제일의 강사요, 도인이었던 용담(龍潭慥冠,1700-1762)스님이 이 절 출신이기 때문이다. 천은사 스님들은 용담스님을 존경한 나머지 강원을 세워 그 전통을 이어 받으려 했던 것이다.
천은사는 입구 다리 곁에 세운 일주문에 <智異山 泉隱寺>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이 글씨는 구불구불 마치 물흐르 듯 쓰여 있는데 호남의 명필 이광사(李匡師)선생이 절에 화재가 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일부러 물 흐르듯 글씨를 썼다고 한다.
용담스님은 경을 공부한 후 선을 닦아 선교를 함께 강의한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스님이다. 근래에 경과 선이 서로를 가볍게 여기는 풍조가 있는데 이는 크게 잘 못 된 처사이다. 경은 부처님의 말씀이요, 선은 부처님의 마음으로 두 가지 모두가 똑 같다. 옛 어른들의 가르침대로 먼저 경을 보고난 뒤에 참선해야(捨敎入禪) 이 마음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비록 용담스님의 비석은 없지만 근세에 이름난 선지식이기에 행장을 비문으로 삼아 여기 번역해둔다.